"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용산 묵시록이다.   

경향신문(09. 12. 10) [이대근칼럼]버려야 할 것 - 국격·곡격·국역·구격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격은 소수만이 쓰던 예외적이고 특수한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들어 사용 빈도가 부쩍 늘더니 요즘은 이 걸 빼고는 말을 못할 정도로 대유행이다. G20 정상회의 주최, 외교 강화, 기부, 관광산업, 공적개발지원(ODA) 확대 모두 국격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국격은 국회 의장대 도입, 아프가니스탄 파병, 법질서 확립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정부에게는 바람직한 국정의 표상이 다. 정부는 이미 ‘국격 업그레이드’를 위한 국가브랜드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운영 중이고 대통령은 내년 부처별 업무보고 때 국격 향상안을 내라는 지시를 했다. 정부의 용산 참사 방치, 인권침해도 국격을 손상한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국격은 이렇게 방어와 공격은 물론 여야가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도 요긴한 만능의 도구로 쓰인다. 그리고 어느 새 이 단어가 풍기는 낯섦과 어색함은 사라지고 ‘국민’이 지켜야 할 새로운 규범이자, 누구나 존중해야 할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 그 덕에 자기 주장과 정책을 정당화하고, 자기 제안의 설득력을 높이고자 할 때 쓰는 권위 있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남용으로 상투어처럼 되기도 했다.

세련된 포장의 국가주의, 국격
국격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도 하나의 인격체나 다름없다는 믿음이 만들어낸 말이다. 따라서 국격은 국가를 다른 어떤 것의 반영물·대리자가 아니라 스스로 유지하고 강화해야 하는 자기 고유의 목적을 지닌 독자적인 실체로 여긴다. 이 유기체적 국가관은 시민을 전체를 위한 일부로 간주하고 자아실현 역시 오직 국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권위주의적, 전체주의적 국가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국가관이다. 한국인에게 국가는 모태신앙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듯이 한국에는 이미 국가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태어나서도 잊을까 가족·학교·군대·언론이 끊임없이 환기시켜 줘야 하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이것이 바로 국격이 빠르게 한국인의 언어습관을 지배하게 된 배경이다. 나라를 잃었던 역사적 기억의 반영이라고 이해해도, 박정희 군사집단의 국가폭력 경험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특별한 정서가 아닐 수 없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강한 국가에 대한 이 낭만주의적 열정은 아직 뜨겁다.

물론 국격이 획일주의의 낡은 가치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위원회가 배려·다문화·기여를 국격 향상의 과제에 포함한 점이 그렇듯 성숙한 사회를 위한 성찰도 담고 있다. 문제는 성숙한 사회를 바라는 시민의 욕망조차 국가의 명예·국가 브랜드·국격 향상의 수단으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뿌리 박힌 국가주의적 사고이다. 그런 사고는 점차 업그레이드되어 조국 근대화니 국익이니 했던 단순 투박함을 벗고 국격이란 세련된 옷을 입은 채 국가주의를 날것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 담론을 효과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그리고 ‘나는 국가(국격)를 위해 무엇을 했나’라고, ‘국민’을 죄인으로 만듦으로써 국가주의를 공고하게 재생산한다. 사실 국격을 국가의 품격이라고 우아하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국가는 한국인의 가슴을 적시는 주제가 될 수 있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내년 이명박 정부의 목표대로 G20 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국격이 높아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까. 그렇지 않아도 시장 만능으로 힘들어진 시민은 부자와 기득권을 위한 국가 개입으로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시장과 국가 모두 한 편만 드는 불공정 게임조차 한국인들은 국가를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믿고, 오랫동안 잘도 참아 왔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는 없다. 국가는 시민 의사의 총체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국가의 목적을 이행하는 ‘국민’이라는 제복을 벗어야 한다. 이 칼럼을 쓰던 중 ‘한글문서’에서 국격에 대해 맞춤법 검사를 해봤더니 ‘철자가 잘못 되었습니다’라는 알림이 나왔다. 국어사전에 없는 신조어였기 때문이다. 대체해야 할 단어가 제시되었는데 곡격·국역·구격 세 가지였다.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다 버리자. 국가도 버리고, 국격도 버리자. 자유로운 ‘시민’만 남겨 놓자. 나의 삶과 행복을 고민하는 나만을 남겨 놓고 다 버리자.(이대근 논설위원)  



한겨레(09. 12. 12) [삶의창] 그 세상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제 1년이 다 되어가니 혹시라도 잊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2009년 1월20일, 용산4구역 철거현장에서,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망루에 올라 몸을 떨며 시위를 하던 다섯 사람과 경찰 한 사람이 불에 타서 숨졌다. 사람들은 이를 참사라고 부르지만, 추운 겨울에 그 무리한 철거를 주도했던 사람들이나,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을 지닌 사람들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은 것 같다. 정부는 정부가 간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고, 고위 관료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무마할 계책을 적어 산하기관에 이메일로 보냈으며, 경찰은 거의 동일한 상황을 연출하여 진압훈련을 했다. 그런데 사법부는? 검찰은 시위자들 가운데 불에 타 숨지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내어 기소했으며, 판사들은 그들에게 이 참사의 책임을 물어 중형을 선고했다. 물론 행정부가 이들 철거민을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국무총리는 한 번 빈손으로 참사현장을 찾아가 인사를 했다.

이 참상 앞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시인, 소설가, 비평가 192인이 각기 한 줄 선언을 써서 ‘작가선언’을 발표한 것은 지난 6월9일이다. 이 선언은 그달 말에 <이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되었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 작가들은 7월부터 용산참사 현장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시작하고, 각종 매체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하여, 이 릴레이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이달 초에 발간된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도 이 진행중인 릴레이 시위와 기고활동의 보고서이다. 시를 쓸 사람은 시를 쓰고 산문을 쓸 사람은 산문을 썼다. 그리고 전국시사만화협회 회원들이 그림을 그렸다. 80년의 광주 이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글과 그림이 모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높고도 활달한 감수성의 인간들이 용산에서 그 열정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진한 슬픔과 가장 깊은 상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 슬픔과 상처가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자신의 슬픔이고 상처이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슬픔이고 상처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고,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이 참사가 잊히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주검이 땅에 묻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비극은 그다음에 올 것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죽음도 시신도 슬픔도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청소되어, 다른 비슷한 사연을 지닌 동네와 거리들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련된 빌딩과 고층아파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 번들거리고 말쑥한 표정으로 치장”(진은영 시인)될 때 올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 세상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09. 12. 12.  

P.S.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의 칼럼을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에 재수록돼 있다. 같이 수록된 칼럼은 '용산,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60.html)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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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9-12-12 19:27   좋아요 0 | URL
왠만하면 저기 위에 아저씨 얼굴 좀 가려 주세요. ㅡㅡ' 저 아저씨 얼굴 보면 갑자기 배가 막 아프다는. 예전에 아침밥을 먹다가 신문을 펼쳤는데 저 아저씨 얼굴이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보니 사진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고 제가 씩씩거리며 포크를 쳐들고 있더라구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 자신의 돌발적인 폭력성에 당황했던 기억이 나요. 아마 노 대통령 죽고 얼마 안 있다 일어난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저 아저씨 얼굴 되도록 안 보려고 피해 다녀요. ㅡㅡ

로쟈 2009-12-12 20:00   좋아요 0 | URL
블라인드 처리가 안돼 그냥 내렸습니다...

Joule 2009-12-12 22:42   좋아요 0 | URL
친절하신 로쟈 님.

로쟈 2009-12-12 22:47   좋아요 0 | URL
저도 보기 싫은 얼굴이긴 해요.--;

Mephistopheles 2009-12-13 15:28   좋아요 0 | URL
사진을 이미 내리셨는데도 누군지 확실히 아는 1人

로쟈 2009-12-13 20:46   좋아요 0 | URL
뭐 다들 아는 얼굴이긴 해요...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09-12-13 21:42   좋아요 0 | URL
조금은 주제가 다르지만..해결되지 않는 용산참사 문제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시위라는 것, 평화 집회라는 것을 할 때 집회자들 내부에도 소위 말해 -튀는- 돌발 행동이나 시위의 본질과 맞지 않는 폭력행위, 혹은 계획하지 않은 사고 등이 일어날 수 있죠 그걸 통제해 주고 질서 있는, 그래서 하려고 했던 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모임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집회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리고 나타나야만 하는 그들의 역할이지요
시위자들이 오히려 그들이 필요하고 우리를 지켜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혹시 경찰이 오지 않으면 왜 안오지 하고 두리번거릴 수 있게 말입니다. 그래야 거기에 있는 군인, 경찰들 역시 시위자들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는 무관심한 국민들보다 한발 더,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뿌듯함도 느낄 수 있을 테지요. 이런 생각이 실천되는 사회는 진정 꿈일 뿐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펠릭스 2009-12-14 10:43   좋아요 0 | URL
'나는 지금 영안실 냉동고에 시체로 누워있다. 마지막 숨을 쉰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이미 얼어 있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내 이름은 빨강/오르한 파묵/민음사>의 "나는 죽은 몸"을 페러디합니다.
 

이번주 창비주간논평을 옮겨놓는다. '사회통합과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전략'이란 부제가 칼럼의 주제를 말해준다. 지난봄에 <성장친화현 진보>(미들하우스, 2009)란 책이 소개됐지만 눈여겨보지 않았고, 찾아보니 알라딘에서도 거의 '잊혀진' 책이다. 칼럼 덕분에 다시금 주목하게 됐다. 미국이라면 집권 민주당이지만, 우리의 경우는 제도권 야당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해서 의제화할 필요도 있을 듯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3의 길'과 마찬가지로 절충주의적인 게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성장친화적인 한국민들에게 현재로선 '진보'가 다가갈 수 있는 '현실적인' 통로일 듯싶으니까...

창비주간논평(09. 12. 09) 두바이의 몰락과 '성장친화형 진보'  

두바이가 몰락했다. 세계 경제위기의 유탄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위험성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선진국에서 두바이식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자는 주장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그들은 사회통합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의 방법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이른바 유럽의 리스본 전략이나 미국의 해밀턴 프로젝트 등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국내에서도 '사람에 투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대규모 개발사업에 가려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국내에는 성장을 위해 두바이식 개발과 규제완화가 필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두바이식 개발은 경제이론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내의 성장담론은 세계적 추세와 괴리된 지 오래다. 필자는 답답한 심정에 오래전부터 '두바이 대 리스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해왔다. 토목 기반의 개발이 단기간의 외형적 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장점이 있지만 환경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이에 견주어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인적 자원의 투자를 강조하는 것이 요지였다.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을 넘어
마침 미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장친화형 진보》(The Pro-Growth Progressive)라는 책을 최근 번역하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한 전략의 특징을 소개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성장친화형 진보'는 바로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에 새로운 대답을 제시한다.

성장친화형 진보의 특색은 진보가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성장 대 분배·복지'라는 기존의 이분법적 틀로는 효율적인 분배와 복지를 통해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는 성장친화형 진보의 주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착된 이분법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시대에 대처하는 새로운 사고를 만날 수 있다.

기존의 진보적 정책도 성장을 촉진해왔다. 미국에서도 진보정부 집권기의 성장률이 보수정부의 그것을 앞선다고 일반적으로 관측된다.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은 사회통합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모험적 사업에 뛰어드는 동기를 유발한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노동자의 경우 정리해고를 수용할 여유가 더 많고, 복지제도가 발전하면 모험적 사업의 위험부담을 줄여 기업가정신과 혁신을 북돋운다. 그러나 성장과 분배의 이분법에 갇힌 우리 사회의 다수에게 이러한 성장촉진형 분배는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이기에 성장친화형 진보가 널리 이해되기는 쉽지 않다.

세계화시대, 새로운 진보적 전략
성장친화형 진보는 세계화와 지식정보혁명이라는 환경에서 진보적 성장대안을 제시한다. 세계화는 폭발적인 기술발전을 일으키고 있다. 한 국가 내에서 승자산업과 패자산업이 확연하게 갈리는 한편, 기술발전에 따라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임금격차도 커지고 있다. 두바이식 개발에 몰두하는 한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를 이대로 방치한다면 사회통합은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는 전략이다. 경제이론에 따르면 세계화시대 각국의 경쟁력은 인적자본의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경제전략가들은 새로운 자원배분을 통해 인적자본의 수준을 높일 수 있는 효율적 정책을 추구해왔고, 그 일련의 작업이 성장친화형 진보로 귀속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실업보험 등 다양한 지원책이 입안·시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수동적 지원에서 벗어나 노동자 숙련도를 높일 새로운 방식이 세계 각국에서 시도되고 있다. 특히 숙련도를 높이는 최고의 방법이 직장내 훈련임을 감안하면 기업을 지원하여 고용을 늘리는 정책이 곧 훌륭한 기술훈련임을 알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이 세계화를 대처하는 방법이라는 정·재계의 주장은 중국이라는 대규모 개발도상국이 등장하면서 근거를 상실했다. 이제는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숙련도 향상이 각국의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하는 중이다.

맞춤형 선제적 지원정책으로 나아갈 때
성장친화형 진보는 선제적 지원정책이라는 특성이 두드러진다. 다양한 복지정책도 효율성 측면에서 우열을 가릴 수 있다. 과거에는 무조건적인 정부지원에 대한 거부감으로 주로 지원정책의 입안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부문과 계층을 위한 선제적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으로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 지원하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 정부가 사용가능한 통계와 정보를 사용하여 사전적으로 특정 부문이나 계층을 지원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일 때가 많다.

복지의 수혜계층에 대해서도 정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빈곤층 자녀가 교육을 받지 못해 빈곤을 대물림하는 상황에서 정부지원이 필요하다면, 선제적으로 보육과 교육에 대한 지원비를 늘리는 것이 복지지출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취약계층의 일생주기에서 어떤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지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성장친화형 진보는 진보적 정책의 효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요구한다.

효율적 복지로 성장-통합의 양날개를
한정된 복지재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타당하지만, '복지병(病)'에 대한 우려를 털어버리고 보수진영의 저항을 줄이면서 정책을 입안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전략이기도 하다. 가령 근로빈곤층을 지원하려고 최저임금을 무조건 높인다면 기업에 부담을 주어 실업이 늘어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세계화시대에 이같은 정책은 기업의 해외이전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테면 근로장려세제는 기업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노동자를 지원하는 정책이다. 적절한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를 합리적으로 결합하면 기업과 노동자 양측에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처럼 정부가 적극적인 지원정책을 펴되 복지수혜자에게도 책임을 부과하고 특히 근로빈곤층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근로의욕을 장려하는 것은 사회통합을 촉진하고 복지정책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성장친화형 진보와 맥을 같이하는 제3의 길 논자들이 ‘기회와 책임’을 강조하는 이유다.(홍종학/ 경원대 교수, 경제학) 

09. 1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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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9 20:34   좋아요 0 | URL
내년도 대통령 여름 휴가 독서목록으로 추천합니다.

로쟈 2009-12-09 20:47   좋아요 0 | URL
'녹색'과 '서민'에 이어서 '진보'까지 넘보게 되나요?..
 

오랜만에 창비주간논평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458.aspx). 지난주에 있었던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한 논평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TV를 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껴갈 수 있는 '현실'도 아니어서 '대화' 내용에 대한 복기를 따라가본다.   

창비주간논평(09. 12. 02) 대한민국은 비상사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상사가 최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상사가 독선적인데다가 자신감까지 겸비한다면? 최악의 제곱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 킹왕짱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 11월 27일 밤 35개 채널을 통해 방영된 <대통령과의 대화>를 본 나의 종합적인 소감이다. 청와대 직원들에게 대통령이 내복 입은 것을 슬쩍슬쩍 보여준다는 얘기 등에서는 중간중간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지만, 웃음이 허탈로, 또 위기의식으로 바뀌는 데는 몇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진짜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방송을 보니 이대통령이 이전에 비해 확실히 말을 재미있게, 특히 보통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게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도 느껴졌다. 시쳇말로 드디어 자기 페이스(pace)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 때문에 내 위기의식이 더 커졌다. 물론 위기의식의 뿌리는,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흡수해야 할 대통령직에 어울리지 않는 그의 지적 능력과 파당적(서울·공무원·청와대 중심적) 사고이다.     

부실한 '팩트'로 진솔한 대화 가능할까
이번 방송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한 것은, 이대통령의 지적 능력이 실제 나이나 얼굴보다 훨씬 퇴락한 노인의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고정관념과 아집이 강하여 새로운 정보나 지식이 잘 흡수되지 않는 것 같고, 주변의 '현명한' 참모들의 보좌도 거의 먹히지 않는 것 같아서다. 이는 2008년 9월 멜라민 파동이 일어났을 때 식약청을 전격 방문하여 '(한참 대화를 나누고도) 분유에 왜 멜라민 함량 표시가 안되어 있느냐'고 묻던 YTN <돌발영상>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느낌이다. 이번 방송은 이대통령의 발언시간이 길었던 만큼 이런 느낌을 주는 장면이 수두룩했다.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fact) 파악에서 문제가 많았다는 얘기다.

단적으로 4대강사업 설명이 그랬다. 홍수 예방을 위해서라는데,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홍수는 22조원을 투입하겠다는 4대강 본류가 아니라 지천에서 일어났다. 한강의 수질이 개선된 것도 잠실, 신곡 수중보 때문이 아니라 하수처리율이 100%에 이르고 경안천, 왕숙천 등 지천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높이가 10m가 넘어 댐이나 마찬가지인 4대강사업의 보(洑)와 잠실, 신곡 수중보는 비교대상이 될 수 없다. 이대통령이 TV 화면을 통해 보여준 문건 '신국가방재시스템 구축방안'은 2007년 당시 건교부, 농림부, 소방방재청 등 9개 부처가 국가방재의 틀을 예방 위주로 짜기 위해 마련한 로드맵으로, 하천 재해예방 사업비는 14조여원이다. 이 역시 본류보다는 상류나 지천 정비에 주안점을 둔 예산이다.

세종시 건설로 인한 행정 비효율이란?
내려야 한다고 말한 법인세율도 2009년 현재 24.2%로서, OECD 30개국 중 22위로 낮은 편이다.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은 하나같이 우리보다 법인세율이 높다. 일찍이 대전으로 이전한 11개 행정기관 공무원도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것이 아니라 89% 이상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그밖에도 사실 시비를 할 이대통령의 발언은 많다. 내가 특별히 심각하게 느끼는 문제는 대통령의 취약한 통치자 마인드와 디지털 마인드다. 이대통령은 행정부처의 상당수가 청와대에서 멀리 떨어진 세종시로 이전해 생기는 비효율과 불편에 특별히 예민한 것 같다. 이는 디지털 기술·문화와 권한 위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대리, 과장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시로 각료(부하)들을 불러 세세한 것을 캐묻고, 깨고, 지시하고, 결재판에 붙어온 종이문서에 결재를 하는 이대통령의 스타일을 생각한다면 그가 느낄 불편이 얼마나 크겠는가! 게다가 대한민국 국회 역시 행정부 고위 공무원들을 하릴없이 국회에 장시간 대기시키는 것이 다반사 아닌가! 그렇기에 애국적 일념으로 행정부처를 청와대와 서울 인근에 집중시키려 하는지도 모른다. 행정부처의 지리적 분산으로 인한 대통령과 공무원들의 불편은 보통 사람들에게 확실히 호소력이 있어 보였다.

블랙홀 같은 중앙집중 해소하려면
그런데 세종시는 극심한 서울·수도권 집중을 해소하려는 고육책으로 나온 것이다. 대통령과 세종시로 내려갈 공무원의 불편을 몰라서 만든 정책이 아니다. 한마디로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온 특단의 조치인 것이다. 굽은 것을 펴기 위해 역으로 구부린 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요 선진국에서 그 유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그 나라의 수도권과 중앙권력이 한국만큼 강력한 블랙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종시로 내려간 공무원 대다수가 저녁에는 서울로 올라와버릴 것이라는 이대통령의 우려는 9개 행정부처를 내려보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리해서라도 내려보내야 하는 이유다. 그만큼 서울의 흡인력이 강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나라 행정써비스의 핵심 문제는 지리적 근접성이 보장하는 풍부한 면대면(面對面) 소통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단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관련 논란도, 대운하-4대강-세종시로 이어지는 오락가락 행보에서도 행정부처간 소통의 문제는 한참 후순위다. 분명한 것은 9개 행정부처 공무원은 서울에 살아야 할 인간이고, 내려보내려는 기업, 교육, 과학 부문의 종사자는 지방에 살아도 좋을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도 서울에 본사 본원 본교가 있고, 나름대로의 불편과 비효율이 있고, 강력한 서울·수도권 선호도가 있다.  만약 힘있는 행정부처 대신 떠밀리다시피 세종시로 내려간다면 그들의 가슴에는 2등국민이라는 자괴감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이대통령의 뒤집기 한판으로 인해 망국병인 '묻지 마'식 서울·수도권·공무원 선호도는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서울·수도권 주민의 이기주의와 공무원의 편의주의는 잦아들지 않는다. 아파트값 하락을 우려하는 강남과 과천 민심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에 전 국민을 보고, 전 국토를 보고, 미래를 보는 대통령의 안목과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공무원의 솔선수범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대통령은 자신이 서울, 수도권, 강남 주민들의 대통령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다.

"믿음을 잃으면 정치는 설 수 없다"
한국은 오랜 중앙집권의 전통과 냉전, 그리고 국가주도의 경제·사회 발전전략으로 인해 중앙권력, 특히 행정권력(규제·촉진권, 재정조달·할당권, 처벌권 등)이 강하다. 따라서 이들의 상당부분이 세종시에 있다는 것 자체가 기업, 연구소, 대학을 끌어당기는 강력한 힘이 아닐 수 없다. 이것만으로는 국가균형발전이 되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없이, 즉 공무원의 솔선수범 없이 국가균형발전을 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여야가 오래전에 합의했고, 이대통령 스스로 누차에 걸쳐 확약한 국가대사를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다면, 도대체 누가 대통령과 정부의 말을 믿겠는가?

2천년 동안 동양 정치사상의 정수로 여겨져온 <논어>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제자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정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공자는 "무기와 식량을 풍족하게 하고 백성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자공이 또 물었다.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무기를 버려라." 자공이 다시 물었다. "남은 둘 중 하나를 또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는 말했다. "식량을 버려라. 믿음을 잃으면 정치는 설 수가 없다."

이대통령은 정말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혼동하고 있다. 지리적 분산으로 인한 불편과 비효율은 대통령과 국회가 마인드를 약간만 바꾸면 상당부분 해결할 수가 있다. 보수와 진보를 초월하여,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깨어 있는 시민이라면 대한민국 최고권력자의 지적 유고상태와 통치자 마인드의 유고상태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며 손을 맞잡고 머리를 맞대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비상사태다.(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09. 12. 02. 

 

P.S. 개인적으로 김대호 소장의 시론과 칼럼에 자주 공감하게 되는데, 그가 쓴 책으론 <진보와 보수를 넘어>(백산서당, 2007), <희망한국 프로젝트>(백산서당, 2007), 그리고 <노무현 이후>(한걸음더,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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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2 21:00   좋아요 0 | URL
1973년에 조직된 삼각위원회가 진단한 '과도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절제된 민주주의'의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대중이 온순하게 믿고 따를 때야 '진정한 민주주의'가 회복된다며 '민주주의의 위기론'을 외칩니다."대의를 위해 믿고 따르시라 외치는데, 왜들 의심하나이까, 이 연사 목이 터저라 또 외칩니다. 여러분 제발 믿으시와요...", 대중왈 '무슨 소리야?'

로쟈 2009-12-02 23:26   좋아요 0 | URL
소위 '권력' 주변에서도 한숨이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비로그인 2010-02-18 23:25   좋아요 0 | URL
'이는 디지털 기술·문화와 권한 위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참참참..
예전에 어떤 백수놈이 "그새끼 컴퓨터 못해..."이렇게 욕했었는데 선배답게 위의 문장처럼 정리해 줄수도 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시 읽어주는 남자'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의 용산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에 대한 절망을 오든의 시와 함께 적고 있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는 결미의 말은 오래 음미되어야 할 듯싶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겨레21(09. 11. 20) 숨이 끊기기 전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10월28일, 그러니까 용산 재판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구형된 날에, 나는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문학동네 펴냄)를 읽고 있었다. 당대를 다루는 소설이었지만 김훈은 여전했다. 지상에서의 삶은 문명이나 이념 따위와 무관하게 약육강식의 원리로 이루어지고, 인간의 시간은 역사나 진보 따위와는 무관하게 자연사(自然史)로 흐른다는 특유의 생각이 페이지마다 단호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그 단호함은 ‘팩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10월28일,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법부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관철한 그날에, 김훈의 말들은 내게 거의 진리로 보였다.  

10월28일의 선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올해 봄에 출간된 <오든 시선집>(봉준수 편역, 나남 펴냄)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소위 세상의 주인이라는 민중,/ 모두가 똑같이 존중받는다지만/ 그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손안에 있었다. 도움을 바라지도/ 받지도 못했던 약자들,/ 적들은 바라던 것을 이미 해버렸으니/ 못된 인간들이 원했던 것은 민중들의 수모, 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아킬레스의 방패’에서) 오든의 문장 중에서는 다소 투박한 편에 속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대목 때문에 옮겨 적었다.

10월28일에 일어난 일이 그와 같다. 피고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무죄 선고까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최소한, 어째서 그런 참혹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약자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는 판결이기를,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인간’으로 복권해주는 판결이기를 기대했다. 부당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게 하고 다시 그 법으로 처벌하는 이 해괴한 악순환 속에서 재판부가 고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뇌는커녕,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재판을 방해했다’며 도리어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화가 나기 이전에 뭔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현행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으로서는 달리 어찌할 여지가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법은 무정하나 법관은 무정하지 않을 테니, 최소한 고뇌는 했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저토록 무정한가. 그들은 그저 재판기계인가. “소녀들은 겁탈당하고, 두 소년이 다른 한 소년을 찌르는 것은/ 누더기 소년에겐 자명한 세상의 이치, 그는 약속이/ 지켜지거나 딴 사람이 운다고 따라 우는 세상은/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라.”(같은 시) 오든의 말대로 이것이 ‘자명한 세상의 이치’인가. ‘소년’의 울음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한다면 도대체 법은 왜 있어야 하나.

정의로운 법과 선량한 법관들을 모독할 생각은 없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을 쓰레기 분리수거나 해충 박멸 정도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도 분명 대한민국의 법이라면, 그 법에는 영혼이 없을 것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영혼은 없을 것이다. 오든의 유명한 시 ‘법은 사랑처럼’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처럼 어디에 왜 있는지 모르고/ 사랑처럼 강요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사랑처럼 가끔 울게 되고/ 사랑처럼 대개는 못 지키는 것.”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법은 사랑의 논리화가 아니라 폭력의 합리화에 가깝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0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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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의 국격과 용산 묵시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2 18:28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
 
 
2009-11-20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2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a35 2009-11-20 17:06   좋아요 0 | URL
본문과 상관없는 댓글이라 죄송한데요. 이상수 기자님(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의 블로그 주소를 아시면 좀 달아주십사 합니다. 한겨레21에 글 쓰실때부터 팬이었는데 블로그가 있는지 미처 몰랐네요.(예전 글쓰신거 읽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가지 더. 저는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판)를 읽다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완전히 손을 떼고 도킨스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했었는데요. 로쟈님 글에 여러차례 소개는 되는데 번역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더라구요. 읽는데 문제 없으셨나요?

로쟈 2009-11-22 10:53   좋아요 0 | URL
지금은 기자를 안 하시죠. 블로그는 따로 알지 못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제가 90년대에 읽었는데, 두산동아에서 나온 걸로 읽고, 개정된 부분만 을유문화사본으로 읽어서 전체적인 번역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30주년 기념판을 이후에 사두긴 했지만요. 저보단 다른 전공자분들의 서평이 나오면 좋을 텐데, 다들 이런 일엔 관심이 없으신 듯해요...

nana35 2009-11-22 15:57   좋아요 0 | URL
네 기자 그만두신건 알고 있었습니다. 로쟈님이 올려주신 어유야담 번역관련 글에 이상수님이 직접 블로그 언급을 하셨길래 혹시 아시나 싶어서요. 찾아보긴 하는데 아직 발견을 못했거든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9-11-22 16:22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한겨레 기자시절의 블로그이므로 지금은 폐쇄됐을 거예요...

sophie 2009-11-21 04:06   좋아요 0 | URL
누군가 꼭 해야할 얘기를 하고 있네요. 오든의 시가 궁금해서 전문을 찾아봤어요. 사랑에 비유한 마지막 부분도 좋지만 나머지 부분도 좋더군요. Law like Love가 원제인 것 같아요.아킬레스의 방패.. 기억해 둬야겠네요. 비단 용산문제만이 아니겠지요. 충분히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9-11-22 10:55   좋아요 0 | URL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의 <법은 사랑처럼>이란 에세이집도 있습니다. 법조인들은 오든을 잘 읽질 않거나 읽어도 무덤덤한 듯해요...
 

귀가길에 읽은 칼럼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의 '육상효의 유씨씨' 란이다. '유씨씨'는 'You See Culture'를 뜻하는 걸로 돼 있다. 이 칼럼란을 읽은 건 오늘이 처음인데, 한류에 대해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 이모저모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소제목을 따서 말하자면, '한류 열풍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시아적 삶이란 무엇일까?' 등이 그 생각해볼 거리이다. 답도 누가 적어주면 좋겠지만...  

한국일보(09. 11. 12) 한류에 관한 질문

혹시 일본에서의 한류(韓流) 열풍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내재된 식민지에 대한 향수로부터 기인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일본 한류 팬의 대부분이 중년 이상의 어른들이고, 한류의 시작이 된 드라마들이 <겨울연가> 같은 노스탤지어를 기본 정서로 하는 드라마들이었던 것은 아닌가?

한류 열풍의 실체는?
아니면 혹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한류 열풍의 정체가 우리가 재빨리 복사하고 습득한 서구식, 아니 더 정확히는 미국식 생활방식과 문화의 대리 전달이라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한류는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나 도시적 감수성이 과도하게 치장된 드라마들에 대한 열광인 것은 아닌가?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서 미국이나 서구로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그쪽 나라들에서는 자신들의 복제품을 굳이 다시 볼 이유가 없어서인 것은 아닌가?

한류라는 단어와 현상이 생겨난 지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한류는 무엇인가? 문화인가, 산업인가? 혹은 그 둘을 다 포괄하는 문화 산업인가? 문화 산업이라는 말은 결국은 산업이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그 동안에 그렇게 한류의 경제적 효과를 증명하는 각종 통계 수치들이 난무했던 것인가? 그런데 그 수치들을 동반한 주장들이 그려왔던 장밋빛 전망대로라면 한류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엄청난 현상이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에서조차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 받던 드라마들이 한류의 위세로 수출돼 나가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성인들이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위로 받는 방법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찾아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서구화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그들 스스로 서구의 경험을 문화적으로 복제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한류는 지금 아시아 각국에서 생겨난 하드웨어적 인프라와 그 하드웨어를 채울 소프트웨어적인 인프라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일시적인 문화현상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방송국 설비와 송출의 시스템은 있으나 그 안을 채울 자국의 콘텐츠가 없을 때 일시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은 아닌가? 과거 우리 TV의 황금시간 대를 채우던 <타잔> <6백만 불의 사나이> 등의 미국 드라마와 우리의 극장들을 채우던 홍콩 영화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의 콘텐츠로 대체된 것처럼 한류도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지금은 한류의 대중문화 작품들 속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될 때는 아닌가? 일방적 산업 논리에서 벗어나서 한류 드라마와 노래와 영화 들 속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될 때는 아닌가? 과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까? 아니면 가장 서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일까? <선덕여왕>과 <아이리스>를 오가는 이 질문들 속에 도사린 함정은 무엇일까? 



아시아적 삶과 정체성
한류가 아시아적 현상이라면 아시아적 삶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부쩍 활발한 동아시아 논의들이 겨냥하는 곳이 '서구의 학습이 곧 근대화'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해왔던 20 세기를 극복하고 아시아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지점이라면, 한류라는 아시아적 현상이 담아야 할 것은 아시아적인 그 어떤 것은 아닐까?

한국도 아니고, 보편이라는 이름 속에 음험하게 도사린 서구도 아닌, 아시아적 감수성으로 아시아적인 휴머너티을 담아내는 것이 한류의 몫이 아닐까? 그것만이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빠르게 해체되고 다시 생성되는 21 세기의 아시아에서 한류라는 피상적인 문화적 현상이 진정하게 내면화하는 길이 아닐까?(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09. 11. 12.  

P.S. 파주 어딘가 세워진다는 '한류우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0년대 이후의 한류 열풍 탓에 한류에  대한 책들도 많이 출간돼 있다(돈이 모이는 곳에 책도 넘치기 마련이다). 배용준 사진집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한류에 대한 책 몇 권 정도는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용의도 있다. 그 후보 몇 권을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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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11-12 23:32   좋아요 0 | URL
요즘 가는 데마다 선덕여왕과 아이리스 얘기더라구요. 저는 덕만이가 남주인줄 알았는데... 로쟈님도 보세요? ^^ 미실어록도 나올 듯...

로쟈 2009-11-12 23:56   좋아요 0 | URL
저는 보지 않는데, 아이가 즐겨봅니다.^^

딸기 2009-11-13 02:48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참 이상한 글이로군요.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내재된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뭘까요?
그들은 무의식 속에도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내재돼 있다는 거, 확실한가요?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라...
그럼 저 사람은 한류 컨텐츠의 '수준'을 말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기본적으로 한류 컨텐츠는, 일본인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내용들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요?

"한국에서조차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 받던 드라마들이 한류의 위세로 수출돼 나가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성인들이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위로 받는 방법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찾아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서구화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그들 스스로 서구의 경험을 문화적으로 복제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궤변으로 들리는데요?

1. 일본인들에겐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내재돼 있다.
2. 그래서 그들은 노스탤지아를 위로받아야/위로받고자 한다.
3. 그런데 일본 문화에는 그런 컨텐츠가 아직 없다.
4. 그래서 한국 것을 보면서 좋아한다.
5. 한류 문화상품은 일본인들의 식민지 노스탤지아를 충족시켜주는 종류의 것들이다.

좀 어이가 없는데요.

현대적인 것, 도시적인 것=서구화 지향
이 도식으로 아시아 한류 전체를 설명하는 것도 웃기고요.

"보편이라는 이름 속에 음험하게 도사린 서구"라...
뭐, 그런 것도 많지요.
그런데 사례와 근거는 없이 추측과 단정과 자극적이고 오만한 표현 뿐이네요.

로쟈 2009-11-13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한류의 실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었는데요.^^ 일본내 한류의 실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전에 TV에서 다뤄진 걸 보니 노스텔지어보다는 배용준 같은 배우들의 이미지가 어필하는 것 같더군요. 동남아 한류에 대해서 한시적인 콘텐츠 채우기일 수 있다는 시각은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9-11-16 15:5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로, 한류의 실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동남아 한류는 한시적인 컨텐츠 채우기일 수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은,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 편협하게 해석하고 국수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저 글에도 그대로 드러나있는 듯 싶어서예요. 우리가 반드시 '아시아적인 것'을 담아야 한다는 발상도 그렇고... '한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도 문화적인 편협함이 드러난다는 거죠.
이집트와 브라질에서도 겨울연가가 유행한다는데... 그럼 앞으론 한류에 중동적인 것과 중남미적인 것까지 담아야 하나요(농담임다) 차라리 '보편적인 인류의 고민을 담자'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ㅎㅎ

로쟈 2009-11-16 20:55   좋아요 0 | URL
필자가 질문들만 나열해놓았는데, 딸기님이 답변을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카스피 2009-11-13 13:32   좋아요 0 | URL
뭐 일본내 한류에 대해서 식민지 시대의 향수때문이라는 것은 무척 오버스럽습니다.사실 배용준에 의해서 촉발된 이른바 한류 열풍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주로 30~50대의 주부층이지요.이들이 식민지 시대의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지요.좀 간단히 생각하자면 일본 아줌마들 구미에 맞는 드라마가 그간 없다가 겨울연가가 그녀들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뭐 동남아 한류는 로쟈님 말씀이 맞는것 같네요.우리가 한때 홍콩영화,일본가요에 심취했다가 이를 벗어났듯,동남아도 자국 문화가 발전하면 더이상 한류를 찾지 않겠지요

로쟈 2009-11-14 10:38   좋아요 0 | URL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펠릭스 2009-11-14 22:05   좋아요 0 | URL
우리안으로 동남아 사람이 들어오는(국제결혼,코리아드림)것과 관련하여 한류열풍이 한 몫을 한다면 그것은 문화적 피드백 속성을 지니고 있겠지요.

로쟈 2009-11-15 12:27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부분도 있는데, 양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 도달한 것인지 조사가 좀 필요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