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읽을 때마다 많이 배우게 되는 칼럼이 있다. 한겨레에 연재되는 '시대를 읽는 문학'이 그런 종류다. 내일자 칼럼을 읽고 생각난 김에 지난달 칼럼까지 옮겨놓는다. 연재의 타이틀 자체가 쉽게 '감당'할 수 성질의 것이 아닌데, 박혜영 교수의 칼럼은 유려함과 침착함, 그리고 날카로움을 겸비하고 있다. 본받을 만하다.    

 

한겨레(09. 05. 23) 작가여, 누구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경제사상가인 슈마허의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세 명의 친구들이 모여 누구의 직업이 가장 오래된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벌였는데, 먼저 외과의사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떼어내 이브를 만드시는데, 이게 바로 외과에서 하는 수술이지.” 그러자 건축가인 친구가 말했습니다. “글쎄,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혼돈으로부터 이 우주를 만드셨지.” 두 사람의 논쟁을 듣던 경제학자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혼돈을 누가 만들었지?”

가장 오래된 직업이 경제학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우리 사회도 태초의 혼돈만큼이나 여러 가지 경제문제로 어지럽습니다. 환율과 주식 가치는 급변하고, 외환위기설은 끊이지 않으며, 공기업의 구조조정과 공공재의 민영화 논란이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돌이킬 수 없는 가장 큰 혼돈은 바로 정부가 ‘경제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국민을 향해, 우리의 계곡과 강을 향해 선전포고도 없는 개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가 시작한 이 소리 없는 전쟁으로 무고한 철거민들은 반체제 테러리스트로 체포되었고, 지금까지 평화롭게 흐르던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은 그동안 방치되었다며 느닷없이 대토목공사용 정비소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일견 평화롭게 보이는 일상의 한가운데 앞으로 대혼란을 초래할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주목하는 작가들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무너진 자기 시대를 돌아보며 “선인은 모든 신념을 잃어버리고, 악인은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라고 슬퍼했지만 우리 시대의 개발 전쟁으로 인한 이런 파괴는 누가 지켜보며 슬퍼해줄까요? 매스컴의 관심을 끌 만큼 웅장한 서사도, 대규모의 학살도, 대폭발의 섬광도 없는 시시한 이 전쟁을 예민한 작가들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주목해줄까요?  

이 총성 없는 전쟁은 ‘이름 바꾸기’로 시작됐습니다. 강제철거 사업이 ‘뉴타운 개발사업’으로 바뀐 것처럼 경인운하 사업도 ‘아라뱃길 잇기’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대운하 사업도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친근하게 개명됐습니다. 물론 이름이 달라진다고 정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아라뱃길 잇기도 김포에서 인천까지 수심 6미터의 깊이로 한강을 파내는 사업이고, 4대강 살리기도 4대강을 모두 수심 6미터의 깊이로 파내는 사업입니다.  

거기다 4대강에는 물을 가둬둘 총 16개의 콘크리트 보와 96개의 중소 규모의 댐을 잇달아 만들 계획입니다. 2011년 완공까지 예산 규모가 14조원이 넘는 대규모 사업입니다. 참고로 세계 최대의 간척사업이었다는 새만금 사업이 10년 동안 1조2000억원 규모였습니다. 실제로 민간에서는 4대강 정비사업 예산이 앞으로 더 불어나 20조원이 넘을 거라며 흥분하고 있습니다. 새만금의 20배에 가까운 돈을 불과 3~4년 만에 그야말로 폭포수처럼 4대강에 쏟아붓는다면 우리의 강은 어떻게 될까요? 강물도 저들 관료와 건설업자와 학자들처럼 흥분될까요? 이 사업이 첫 삽을 뜨는 순간 정부 발표로도 여의도 면적의 22배에 해당되는 농지가 사라진다고 합니다. 오래된 마을이 수몰되고, 나무가 잘려나가고, 농지는 매립되고,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이것은 수백억원짜리 댐을 하나 건설할 때도 반복되던 일입니다. 하물며 14조원이 넘는 사업이면 얼마나 많은 파괴가 일어나겠습니까? 

일찍이 인도 작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국가가 추진하는 ‘개발’이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작은 것들의 신>으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로이는 1999년 인도 대법원이 나르마다 강의 댐 공사 재개를 결정하자 명성과 부를 뒤로하고 바로 반정부 운동에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인도의 아름다운 계곡과 강은 그녀의 작가적 상상력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 속에서 가난한 농부와 어부들과 함께 저항하면서 로이는 3200개의 댐을 건설하는 나르마다 강 재개발 사업이란 결국 이 강에 생존을 의지했던 무수한 약자들의 삶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임을 알아챘습니다. 로이는 나르마다 강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한 사람의 작가를 간절히 찾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누가 밀려나고 누가 이득을 챙겼는지, 약자들의 삶은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이어질 수 있는지, 전문용어와 회계 수치 뒤에 가려진 이런 보이지 않는 진실들을 들려줄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곧 낙동강과 금강의 아름다운 금모래, 은모래들이 사업비를 벌기 위해 골재로 팔려 나가게 됩니다. 구불거리던 물길은 쫙 펴지게 되고, 갈대밭이 있던 강둑은 시멘트벽으로 미끈하게 포장되고, 곳곳에 생길 담수용 댐으로 주변 산들의 허리는 벌겋게 깎이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분명히 어떤 선을 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저 아름다운 계곡과 강이 우리 세대만의 것일까요? 겨우 유람선이나 바지선 몇 대 띄우려고 농지를 파괴하고 농부들을 내는 것이 과연 발전일까요? 이 거대한 대토목공사의 이해관계는 또 서로 어떻게 얽혀 있을까요? 개발로 누가 쫓겨나고 누가 이득을 보게 될까요? ‘알타이문화연합’이나 ‘중도실용정부’만 작가를 부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계곡과 강도 나르마다 강처럼 작가를 찾고 있습니다. 하천 준설이니, 수상 레저니, 다기능 복합발전 인프라 구축이니 이런 추상적인 말이 아닌, 강에 의지해 살아온 사람들과 작은 생물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줄 작가를 말입니다. 국가나 대통령이 아닌 우리의 계곡과 강으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작가를 말입니다.(박혜영 인하대 교수·영문학)   

 

한겨레(09. 04. 18) '필요’만 허용되는 헐벗은 삶이여 

최근 정부는 208명이던 국가인권위의 규모를 164명으로 대폭 축소시켰다. 인권위의 인원이 ‘불필요하게’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는 인권위가 처음 생겼던 2002년에 비해 인권 관련 민원이 10배 이상 증가했지만 정부는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구조조정을 했다. 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정부는 국립오페라 합창단도 해단시켰다. 42명의 단원들이 그동안 4대 보험도 안 되는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알고 보니 규정에 없는 임의단체라는 이유에서였다. 인권위와 마찬가지로 2002년 처음 창단된 이래 오페라합창단의 공연 횟수는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정부는 ‘필요없다’며 전원을 해고시켰다.  

사람을 필요한 사람과 불필요한 사람으로 가르는 것은 비단 정부만 하는 짓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효율성이나 필요성이란 말은 정부, 기업, 학교, 병원 할 것 없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털어낼 때 사용하는 구조조정용 잣대가 되었다. 아마도 ‘자른다’는 말을 사람에게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우리 시대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며, 사람이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할 때 우리 삶이 어떤 비극으로 떨어질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한때 왕이었던 리어의 처참한 몰락을 통해 사람살이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희곡이다. 흔히 리어는 욕심 사나운 두 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모욕과 분노를 겪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람다운 삶을 오직 ‘필요성’의 잣대로만 재단하는 그런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묻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늙은 리어는 세 딸 가운데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허풍을 떤 두 딸에게만 영토를 물려준 뒤 자신은 100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두 딸의 왕국을 오가며 편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어의 낭만적인 생각은 이내 본색을 드러낸 두 딸들의 현실논리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먼저 불필요한 수행원 수를 줄이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한다. 큰딸은 100명은 많으니 50명으로 줄이라고 하고, 둘째딸은 50명도 많다며 25명으로 줄이라고 한다. 그러자 다시 큰딸은 우리가 돌봐드리니 실은 한 명도 필요 없다고 되받아친다. 두 딸의 배은망덕에 격분한 리어는 사람의 삶을 필요성으로 논하지 말라며 이렇게 고함친다. “오, 필요를 논하지 말라! 가장 미천한 거지도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여분을 갖는다. 자연이 인간본성에 필요한 것 이상을 허락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짐승만큼 비천할 것이다.” 늙은 왕은 마침내 사랑하던 막내딸도, 드넓은 영토도, 왕의 지위도 모두 잃어버린 채 껍데기만 남아 거지와 광대와 광인들과 함께 황야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끝끝내 리어는 두 딸들이 말한 필요성의 현실논리에 순응하지 않는다. “싫다! 늑대나 올빼미와 한 무리가 되어 필요성의 날카로움에 쥐어뜯기느니 맹세코 모든 거처를 버리고, 모든 증오에 맞서 싸우는 편을 택하겠다.”  

리어의 말대로 사람이 단지 생을 연명하기 위한 것, 그 이상을 삶에서 누릴 수 없다면 우리는 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딸들에게 ‘불필요한’ 것을 모두 빼앗기고 광야를 헤맸던 미친 리어처럼 그런 삶에서는 인간 정신이 깊이 병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위 불필요한 것은 모두 빼앗기고, 오직 필요한 것만 허용되는 삶이란 짐승처럼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사는 삶이며, 이런 ‘헐벗은 삶’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당연하지만 예술이나 인권은 결코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필요성의 논리로 보면 마치 물이 빠진 갯벌이나 물이 고인 늪지가 모두 불필요하게 보이듯이 예술이나 인권도 불필요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찍이 리어가 두 딸에게 절규했듯이 만물은 눈에 보이는 ‘필요성’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봄날 새싹도 보이지 않는 땅의 힘으로 움터 나오는 것이며, 가을날 알곡도 밤하늘의 달빛과 별빛으로 익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제대로 여물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마치 나무에게 물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새에게 먹이만 필요한 것이 아니듯이. 만약 가끔 잎사귀를 흔들어주는 바람이 없다면, 그리고 마음껏 날갯짓할 텅 빈 하늘이 없다면 나무도 새도 모두 살지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오직 경제논리로만 삶을 저울질하게 되면 그동안 필요성의 영역 밖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점차 필요성의 영역 안으로 넘어오게 된다. 곧 나무는 목재가 되고, 강은 운하가 되며, 갯벌은 용지가 된다. 이렇게 자연이 그저 쓰고 버리는 자원이 되면 다음엔 사람도 그저 쓰고 버리는 인력이 된다. 그래서 필요성의 논리가 횡행하는 사회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불필요할 때는 희소하지 않던 것들이 일단 필요성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갑자기 희소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물은 희소하지 않지만 수자원으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되고, 땅은 희소하지 않지만 택지로 바뀌면 늘 부족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부족하지 않지만 인력으로 바뀌면 경쟁력 있는 인적 자원을 늘 부족하게 된다. 이런 사회는 오직 경쟁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사람들은 더 많은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되고, 일평생 이런 악다구니에 시달리다보면 인간의 존엄성도, 아름다운 예술도 마침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짐승처럼 살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의 필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극작가 이오네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쓸모없는 것의 유용성과 쓸모 있는 것의 무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는 바로 노예와 로봇의 나라가 될 것이다.” 예술이나 인권은 노예나 로봇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요성’이나 ‘효율성’의 논리에 갇혀 있는 한, 우리가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도 닫히게 될 수밖에 없다.(박혜영/인하대 교수·영문학)  

09. 05. 23. 

P.S. '날카로움'으로 치자면 요즘 내가 애청하고 있는 CBS 시사자키의 '서화숙의 송곳' 코너를 빼놓을 수 없다(http://www.cbs.co.kr/radio/pgm/?pgm=1383). 한국일보 서화숙 편집위원의 매섭고도 재치있는 시사만평이 그나마 답답한 현실에 청량제가 돼준다. 지면 칼럼으로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한국일보(09. 05. 07) [서화숙 칼럼] 고리를 끊었습니까

모란은 향기가 있다. 한 그루만 꽃이 펴도 삽상한 내음이 온 마당을 채운다.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속설은 <삼국유사>에서 비롯된다. 선덕여왕이 공주 시절, 중국에서 모란 그림을 보내왔는데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꽃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맞췄으니 공주는 영특하다는 내용이다. 식물에 무지한 일연의 시각이다. 그런데 아직도 한국문화에서 과거의 왕후(王候)를 영웅시하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박지원이 당대로서는 진보적이었다지만 한자로만 글을 쓴 사람인데, 박지원의 개혁성조차 참아내지 못한 정조가 개혁 성군이고 시아버지와 권력투쟁을 하느라 나라를 말아먹은 명성황후는 구국의 여신이 된다. 그보다 더 한심한 대원군도 연속극으로 들어가면 꽤나 현명한 인물로 나온다. 천추태후나 광개토대왕이나 당대의 권력가였을 뿐 양식이라고는 21세기의 범인 축에도 못 낄 인물을 불세출의 덕성을 가진 영웅으로 불러내는 문화에는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이 시대의 가치관이 들어있다. 



돈 많고 권력 있어야 영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가장 높고 출산율은 가장 낮으며 노동시간이 가장 많고 일에 대한 만족도는 가장 낮으면서 잠조차 가장 적게 자는 한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영웅이 아니다. 양익준 감독의 영화 '똥파리'에는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영웅이 등장한다.

주인공 상훈은 용역깡패니 공적으로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지만, 사적으로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때문에 누이와 엄마를 잃고도 배다른 큰누이와 조카에게는 살갑다. 강한 자로부터 받은 폭력을 약한 자에게는 되물림하지 않는 영웅으로는 남편으로부터 학대 받으면서 자식은 지키던 여주인공 연희의 엄마와 상훈의 큰누이도 있다. 연희의 엄마는 폭력가정을 떠나지 못하다가 죽어서 딸에게 물려주지만 보다 젊은 상훈의 큰누이는 이혼하고 자식을 데려옴으로써 폭력의 고리를 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글쓰기 공부를 할 때 30대 중반의 남성이 발표를 했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형만 데리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재혼을 했다. 그는 계모와 친부의 학대에 시달리다 못해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을 했다. 공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요리솜씨는 익혔지만 조리사 시험을 볼 때마다 필기 시험에서 떨어졌다. 좌절감에 술에 빠지기도 했다. 나중에 엄마를 만나보니 형은 고등학교는 마쳤다. 배다른 동생도 고등학교는 나왔다. "공부는 내가 제일 못했지만 그래도 나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을 할 때 그도 입술을 깨물었고 같이 듣던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그에게 밀어닥친 불행의 주먹질을 그는 온몸으로 맞으며 그걸 남에게 풀지 않았다.

폭력 불행의 고리를 끊는 게 영웅

그러나 이 영웅들은 대접받지 못한다. 상훈은 그가 공적인 영역에서 배출하던 폭력성의 대가로 맞아 죽고, 현실의 30대는 알코올 중독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불행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져서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많다. 가정이 불행하면 학교가, 사회가 잡아줘야 하는데, 학교에는 불행한 청소년을 117대나 때리는 정신 나간 교사가 있다.

폭력과 불행의 대물림은 꼭 가난한 가정의 일만은 아니다. 부모의 냉대가 가슴 아팠다며 늙고 약해진 부모를 냉대하거나 자식들에게 화풀이하는 어른들은 도처에 있다. 그러니 내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혹은 내가 겪은 교사처럼 내 자식에게 화풀이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이들은 이 폭력의 고리를 끊는 위대한 싸움을 하는 영웅들이다. 그 힘겨운 투쟁에서 져서 죽지 말라고, 당신은 위대한 싸움을 하는 중이라고 격려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성공이라고, 한 자리 차지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지 말자. 다만 제게 닥친 불행을 더 약한 이에게 대물림하려는 욕망을 끊는 이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영웅이 되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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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5-23 00:13   좋아요 0 | URL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게 영웅-매우 좋은 내용입니다.평소 제 소신을 시원하게 말해주네요.

로쟈 2009-05-24 11:47   좋아요 0 | URL
네, 학교 교육도 그런 사례를 다루면 좋겠어요...

2009-05-24 07: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24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요시비 2009-05-24 12:10   좋아요 0 | URL
효우리(소년법6호처분시설아동들)들의 이야기를 판박이 해놓은
내용입니다. 불행과의 싸움에서 이길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면 합니다. 저의 까페에 퍼갑니다. 감사

로쟈 2009-05-24 20:36   좋아요 0 | URL
'효우리'라고 부르나 보네요?..
 

교수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지식대중화 현장을 찾아서'에서 '블로그' 편을 옮겨놓는다. 캡쳐화면에 '로쟈의 저공비행'도 포함돼 있어서, 마치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하다. 블로그를 매개로 한 지식대중화 시대의 명암을 짚어주고 있다. 나도 최근에 비슷한 주제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미리 참조했다면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09. 05. 07) 미래 지식의 노마드 … 학문적 진실 혹은 ‘조회수’의 함정  

인류 문명은 지식 전달 방식의 변화로 함께 진보를 했다. 문자의 발명으로 구술 기억력을 넘어선 지식의 확장이 가능해졌고, 종이는 문자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줬다. 특히 인쇄술의 발명은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를 했고, 그것이 결국 정치, 경제 등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문서, 신문, 책의 형태로 저장된 지식은 쉽사리 손에 넣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자화된 지식은 일방향적 성격이 강해서, 대중은 어렵사리 접한 책들이 주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십 수 년 사이에 지식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짐작하겠지만 바로 인터넷 덕분이다.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발명품인 인터넷으로 인해 지식 사회는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됐으며, 대중의 지적 수준은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특히 지식의 소통이 쌍방향, 다방향적이 됐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새로운 지식 교류와 생산의 장
<교수신문>은 지금까지 인문, 사회, 과학 분야에서 지식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단체가 있는 현장을 스케치했다. 좋은 취지와 커리큘럼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몸소 관련 단체를 방문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크다. 또 ‘대중화’를 표방은 하지만, 막상 강사들 앞에서 청중이 왕성한 실시간 논쟁과 토론을 제기하기란 쉽지가 않은 이유도 있다.  

그렇다면 지식에 대한 욕망이 어느 때보다 커진 대중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인터넷 블로그와 카페 등이다. 인터넷 초창기의 홈페이지들은 사실 지식의 대중화와 거리가 멀었다. 종이에 있던 지식을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의 카페나 클럽이 인기를 얻고, 블로그가 선풍적인 관심을 끌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이른바 웹 2.0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대중과 연구자들이 직접 인터넷을 통해 소통을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에 있다. 학문 성격상 인문 사회 분야의 연구자들이 대중과 접하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면 웹을 통한 연구자들과 대중의 소통 양상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은 서평과 북리뷰를 들 수 있다. ‘로쟈’는 대표적인 알라딘 블로거인데, 러시아문학을 전공, 강의하고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연구와 강의로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심도 있는 서평과 리뷰를 블로그에 올리고, 각종 일간지, 주간지의 서평을 ‘평’하기도 한다. 로쟈의 서평에 대중은 댓글이나 추천 등으로 화답하는데, 개중에는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이들의 코멘트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질문과 답변의 수준을 넘어 댓글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간혹 새로운 소식이나 지식이 로쟈의 블로그를 방문한 네티즌에 의해 공급되기도 한다. 로쟈의 블로그는 일일 방문객이 천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중 인지도가 높다.  

이렇게 어디서 청탁을 받은 것도 아닌 서평을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하고, 그것을 주제로 대중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는 덕분에, 책에 대한 접근성, 배경 지식, 최신 정보가 대중과 공유된다. 이는 다소 점잖은 면이 있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학자들은 단순 리뷰나 서평에 만족하지 않는다. 서양철학을 전공한 연구교수인, 알라딘 블로거 ‘FTA반대Balmas’는 대단히 날카롭게 불어 번역서들의 오역을 잡아낸 경력으로 유명하다. 일례로 데리다 등 주요 프랑스 철학책이 번역돼 나올 때마다, 꼼꼼하게 원문 대조 검토를 하고, 오역을 지적하곤 한다. 간혹 오역 논란이 커져, 대개 또 다른 연구자이기도 한 역자가 항의메일을 보내고, 그 항의메일이 공개되는 웃지 못 할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로쟈 역시 꼼꼼한 원문 대조 번역 검토로 명성이 높다.

물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지식 소통이 책을 매개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들도 활발하게 블로그나 클럽, 홈페이지, 카페 등을 통해 지식의 소통과 생산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일차적으로는 각종 일간지, 주간지 혹은 학술지의 기사를 스크랩하고 거기에 코멘트를 다는 작업에 집중된다. 다소 폐쇄적이고 위화감이 있는 해당 언론사의 사이트와 달리, 지식의 정류장 역할을 하는 이들의 블로그를 통해, 대중은 보다 손쉽고 가벼우며 친숙하게 각종 학술 소식을 접한다.

속류화의 위험성 경계
또 인터넷을 통해 대중이 연구자에게 직접 날카로운 질문이나 논쟁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앞서 언급한 알라딘 블로거 외에 들뢰즈 연구자로 유명한 김재인 서울여대 강사의 홈페이지인 ‘철학과 문화론’에는 항상 많은 네티즌이 들끓는다. 네그리의 다중 개념에 의거해, 지식 생산에서 위계적 관계의 폐지를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 ‘다중네트워크센터’는 아예 방문객이 직접 지식을 생산하고, 집적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그 외에 문학 평론가 조영일 강사가 운영하는 카페인 ‘비평고원’, 랑시에르 번역으로 유명한 양창렬의 ‘철학사랑’ 등에도 발걸음이 이어진다. 



최근에는 출판사들 역시 대중에게 문호를 전면 개방하고, 표현의 욕구를 배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해나무는 최근 『지식의 이중주』를 출판하면서 우리 시대의 키워드에 대한 댓글을 설문조사했는데, 이는 향후 책에 대한 아이템만이 아니라, 대중의 지적 동향을 읽을 수는 점도 노린 것이다. 그린비는 소박하지만 깔끔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직원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고민과 출판관을 털어놓고 있으며, 독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을 하고 있다. 도서출판 난장의 대표 역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데, 책 홍보 보다는 국내외 인문 사회 학술 쟁점을 알리고, 논평하는 일에 더 열중한다. 이쯤 되면 돈 받고 책 파는 출판사라기보단, 연구 집단과 독자 대중의 지식이 왕래하는 소통의 장으로서 기능을 하는 공간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여러 장점과 대세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한계나 위험성도 간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방적인 외양과 달리, 인터넷 공간에서도 지식인과 대중, 연구자와 일반인 사이의 격차는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이고, 나름대로 공력을 쌓은 일부 네티즌을 제외하면, 사실상 유명 블로거를 운영하는 연구자의 말을 ‘경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이를 방증한다. 게다가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 오고가는 지식이 얼마나 학문적인 검증을 받았는가하는 점도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연구자들의 경우, 인터넷을 통한 소통에 신경을 쓰느라, 본분인 연구에는 소홀할 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정성스럽게 가꾼 사이트를 운영 중인 김현돈 제주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블로그나 사이트를 연구자들이 애용하는 추세에 대해서 “지식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분명 의의는 있다”면서도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고 실토했다.(오주훈 기자) 

09. 05. 10. 

P.S. 흠, "대중의 기호와 조회수에 대한 집착이 학문적 진실을 도외시 할 수 있다"는 점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사실 댓글, 콘텐츠 등등을 관리하자면 시간 및 노력이 많이 요구된다. 연구에 소홀해질 수도 있는 점이 문제다"라는 지적은 남의 얘기 같지 않다. 여기저기서 밀려드는 '독촉'들을 떠올려보니 그렇다. 이러다 사회적으로는 '매장'당하고 블로그만 둥둥 떠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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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5-10 19:46 
    교수신문 : 지식대중화 시대와 블로그 — 로쟈

김지하 시인이 최근 신작 신집 <못난 시들>(이룸, 2009)과 함께 네 권의 산문집을 동시에 펴냈다. 산문집에 실린 많은 글이 작년 촛불집회에 촉발되어 씌어진 듯하다. 마침 시인과의 육성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노컷뉴스(09. 05. 08) 김지하 시인 “이명박 대통령, 촛불 의미 못 읽으면 혁명 온다” 경고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김지하 시인


시인이자 생명운동가, 민족과 민중의 문학을 일궜고 유신독재에도 맞섰던 김지하 시인이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아주 쉬운 시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시집과 함께 4권의 산문집도 동시에 펴냈고요. 김지하 시인이 이 시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뭔지 들어보겠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시집과 산문집을 동시에 들고 오셔서 반갑습니다. '못난 시들'이라는 제목을 지으신 계기는 무엇입니까?

▷ 김지하 시인> 계기가 작년 시청 앞 촛불 때부터인데요. 촛불의 주역들이 20대 미만의 미성년, 어린이들, 이름 없는 많은 여성들, 노인들, 비정규직, 노숙자들 아니에요. 그러니까 못난 사람들이죠. 이들이 주체가 되고, 시청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걸 저는 제가 공부한 동학, 그러니까 후천개벽이라고 하죠. 거긴 기독교 방송이니까 예수 복음으로 하면 밑바닥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과 같죠. 그런 것들을 못 난 이들의 시라는 뜻으로 썼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아마 옛말에 대교는 약졸이라고 하더니 정말 지혜로운 것은 그렇게 어수룩하고 못나 보인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 김지하 시인> 그건 너무 과찬이시고요.(웃음)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집회에 나가서 살펴보셨던 모양이군요. 젊은 사람들과 얘기는 나눠보셨습니까?

▷ 김지하 시인> 제가 얼굴이 팔리면 정부에서 안 좋게 생각할까봐 슬금슬금 밤에 가장자리에 가서 오래 있지도 못하고 4,5번 갔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이 1주년을 맞았습니다. 제2의 촛불, 제3의 촛불이 있었다고도 얘기하지만 촛불은 다시 켜질 거라고 보십니까?

▷ 김지하 시인> 이미 커졌죠. 이건 단순한 정치사건이 아니고 문명사 변동의 중요한 계기라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 보십시오. 금융위기니 뭐니 하면서 문명의 중심이 유럽과 미국 중심의 방향에서부터 동아시아 태평양 쪽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있어요. 경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그런 전체적 대세로 봐서 한반도에서 어린이들, 여성들, 노인들, 비정규직 같은 사람들이 정치주체로서 소리를 낸다는 것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계기죠. 이런 일은 자꾸만 반복될 것이라고 봤죠. 물론 이걸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죠. 저는 그것을 횃불, 숯불이라고 부르는데요. 그런 것에도 불구하고 촛불이라는 처음 순수한 못난 사람들의 희망이 계속해서 촛불을 켤 것이라고 봤습니다. 가만 보니까 5월 2일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촛불을 문명사의 변동이라고 본다면 거기서 이명박 대통령과 이명박 정권이 차지하는 위치나 역할은 뭡니까?

▷ 김지하 시인> 이명박 대통령이 촛불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지한 거죠. 그걸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처음에 본인이 북악산 올라가서 머리를 숙이고 어쩌고 했듯이 이 예쁜 촛불을 오히려 들어 올리고 존중하는 태도로 가면 우리나라 국운이 지금 상당히 좋거든요. 그렇다면 문명의 대세가 우리나라로 오고 있는 것일 텐데. 맞이하고 마중하는 자세가 되고요. 만약 그것을 탄압하게 되면 문화혁명 같은 시끄러운 사태가 나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87년 당시를 기억하시겠습니다만 민주화 운동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이어질 때 '죽음의 굿판을 거두라'고 일갈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정치 세력들이, 사람들이 너무 어둡게 몰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걱정하셨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볼 때 지금 철거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저항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 김지하 시인> 그것도 좋지 않아요. 하여튼 목숨 끊는 건 안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자살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거든요. 대학생 자살자 수만 한 달에 30여명입니다. 또 고등학생 자살자도 1년에 140명입니다. 전체 자살자 수가 12000여명 되는데 이것은 OECD 국가 중 첫째예요. 전 세계 수준으로는 네 번째이고요. 젊은 여성 자살자 수가 남자보다 더 많습니다. 이건 내가 보기에 안 좋은 현상인데요. 이 안 좋은 어두움도 이 나라에서 큰 문명 변동이 오리라는 신호입니다. 해뜨기 전에 시커먼 것처럼.

▶ 진행/변상욱 대기자> 전조 같은 걸까요?

▷ 김지하 시인> 그런 거죠. 그러니까 시커멀 땐 흰 빛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거죠. 그렇게 봅니다만 자살은 안 해야죠. 용산 참사도 그렇고 이런 경우에 조금 지나쳤고.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렇게 몰고 가는 사회적 구조에 대해 분명한 조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들도 있는데요?

▷ 김지하 시인> 그래야겠죠. 그러니까 그것까지 포함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그 촛불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갈망, 희망, 아젠다를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존중해서 받들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데 자꾸 억누르려고 하고, 옛날 박정희 시대에 하는 식으로 흉내 내고 싸우면 혁명 터집니다. 제가 보기엔 틀림없어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래서 쇄신이라는 얘기가 요새 화두로 등장했습니다. 정치권의 쇄신이라고 구호는 내걸고 있는데, 어떻게 쇄신했으면 좋겠습니까?

▷ 김지하 시인> 말로만 자꾸 떠들죠. 말만 쇄신이에요. 예를 들어 홍준표 같은 사람은 4월엔 경제개혁법을 통과시켰고, 5월엔 사회개혁법, 6월엔 무슨 개혁법을 하고. 순 형식주의적이고 표피적인, 국회 통과시키면 모든 게 다 해결되는 양 그래요. 그러니까 보선결과 보세요. 완전참패 아니에요. 그건 이명박 정권 전부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너희들 그렇게 진짜 쇄신을 안 하고 말로만 떠들면 우리는 너희들을 안 찍겠다는 말이에요. 그 분위기를 빨리 읽어야죠. 그런데도 못 읽는 것 같아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문제지만 이명박 대통령도 내가 보기엔 형편없습니다. 지금 4대강 깨작깨작 해서 국민들 불만만 많고 거기서 무슨 경제적 이득이 오겠어요? 그러니까 좀 성큼성큼 시원시원 나갔으면 좋겠어요. 



▶ 진행/변상욱 대기자> 동아시아 시대에 국운의 융성이 호기를 맞았는데요. 이 상황에서 김지하 시인께선 앞으로 어떤 일을 주로 하실 겁니까?

▷ 김지하 시인> 저는 정치운동 그런 것과는 완전히 담 쌓았습니다. 동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에서 석좌교수로 특강만 합니다. 거기서 불교와 동학, 기독교, 유교 등 전통사상과 서양사상, 나는 예수를 참 좋아하니까 이렇게 결합시켜서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태평양에 오고 있는 새로운 문명의 대세, 여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대안 제시라든가 예감이라든가 이런 것과 연관해서 르네상스, 아시아 르네상스가 와야 한다고 보거든요. 워낭소리라든가 똥파리라든가 이런 게 예감이 와요. 그렇다면 불교와 기독교의 결합이라든가 이런 걸 가지고 사상사적인 변화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강의나 하고 글이나 쓰고 이러다 가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래서 그것이 이번에 제목으로 다루신 못남의 길일 수도 있고요.

▷ 김지하 시인> 맞습니다. 이번 책도 전부 그 얘기예요.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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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포식자들의 사회

요즘은 TV 뉴스를 거의 보지 않기 때문에 종종 라디오에서 시사뉴스를 듣곤 한다. 오늘 방송된 CBS 시사자키에서 경찰의 장자연 리스트 수사 중간발표에 대한 의견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CBS 시사자키(09. 04. 24) “故 장자연 수사결과,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 진행 : 변상욱 대기자(CBS 라디오 '시사자키 변상욱입니다')
▷ 출연 : 민주당 김상희 의원


경찰이 오늘 장자연 리스트 수사와 관련해서 9명을 형사입건했습니다. 그러나 장 씨의 유족들이 성매매 혐의로 고소했고 세간의 화제를 모았던 조선일보의 임원은 여기서 빠졌습니다. KBS 기자를 포함해서 장자연 리스트를 보도한 언론인들은 모두 불기소 또는 내사중지 처분으로 수사대상에서 제외됐습니다. 언론사에도 성매매 예방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겠다고 발언했던 민주당 김상희 의원으로부터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경찰의 수사결과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예상됐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40일 동안 41명을 투입해서 조사한다고 했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수사 브리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찰이 수사를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경찰 수사는 오히려 국민들의 의혹이 증폭되고 경찰에 대한 불신만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장자연 씨 죽음을 경제적 죽음에 우울증까지 겹쳐서 복합적으로 자살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했거든요. 이것은 장자연 씨를 두 번 죽이는 처사입니다. 이런 수사결과를 내놓는 경찰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이런 커다란 권력형 비리, 뿌리가 깊었던 관행들을 수술해내야 할 작업이라면 처음부터 분당 경찰서에 맡기기엔 역부족이었네요.

▷ 김상희 의원> 네. 그렇습니다. 최근에 불거진 두 개의 성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와대 행정관 성상납 비리이고요. 장자연 리스트라고 하는 소위 연예인 성 착취, 성 상납 비리가 있습니다. 이 두 사안이 처리되는 걸 보면서 지금 경찰이 이런 걸 수사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검찰로 넘어가면 검찰에서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 국민들은 다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박연차 리스트에서 보면 죽어 있는 권력에 대해선 아주 철저한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안 해도 될 것까지 흘려가면서 하고 있는데, 소위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공권력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리고 언론 권력이라는 게 얼마나 막강한지 이번에 여실히 국민들이 깨닫게 됐습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언론인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니까 물론 언론인들이 제대로 알리바이를 증명했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언론도 확실히 권력에 서 있다는 걸 느끼긴 느끼겠습니다. 김 의원님이 보시기엔 언론인 봐주기 같습니까?

▷ 김상희 의원> 언론인들의 수사 하나하나에 대해선 어떻게 수사가 됐는지는 저도 자세하게 모르기 때문에 모든 언론인을 다 봐줬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하기엔 지금으로선 무리가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그렇지만 지금 가장 국민들의 의혹이 컸던 부분은 성상납 받은 사람, 누가 성상납을 받았는가에 대한 부분 아닙니까. 성상납을 받았다고 하는 유력 언론사 사주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제대로 수사를 했어야 했는데, 제가 경찰 일문일답을 보니까 그동안 수사를 했는진 모르지만, 어제 경찰이 만나서 조사한 걸로 대답을 했는데요. 대답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경찰에 물어보니까 '구체적인 사안을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기자들이 알고서 '어제 하지 않았냐, 그런데 어제 하고 나서 하루 만에 불기소 방침을 세우는 건 면죄부 주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그것에 대해! 서는 만나기 전에 이미 수사를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언제 어디서 했냐'고 물어보니까 '본인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런 대답을 하는 경찰에 대해서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느낍니다. 경찰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 국민들이 그렇게 의혹을 갖고 있는데 수사 못한 것 아닙니까.

▶ 진행/변상욱 대기자> 그 사람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 했다는 건?

▷ 김상희 의원> 밝히질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선 밝힐 수가 없다는 겁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결국 그 말은 원하는 만큼만 했다는 거니까 그 사람이 5분만 하자고 하면 5분만 하고 나왔다는 뜻도 되는 겁니까?

▷ 김상희 의원> 그렇죠.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선 확인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정 중에 보니까 임원의 아들이 술자리에 있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도 수사가 제대로 안 됐습니다. 그런데 왜 중간수사를 하고 이 부분을 불기소 내사중지를 하는 건지 국민들이 이해하겠습니까. 장자연 씨가 오죽하면, 연예인의 꿈을 키웠던 이 젊은 여성 연예인이 오죽하면 죽었겠습니까. 이렇게 우리 경찰이 이런 식으로 수사를 종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진행/변상욱 대기자> 장자연 씨가 그 많은 것들을 기억해 쓰면서 언론인에 관한 건 다 잘못 썼다고 받아들이기도 그렇고, 아무튼 경찰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하고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앞이 안 보이니까 일단 일본에 있는 사람이 안 잡혀서 모르겠다고 하고 중단시켜놓고 차후 눈치를 더 봐야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군요. 장자연 씨에 대한 사건이 이번 발표로 어떻게든 큰 틀에서 마무리된다면 우리 사회에 어떤 파장이 남을 거라고 보십니까?

▷ 김상희 의원> 저는 굉장히 우리 사회가 위험한 사회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위험한 사회라는 건 신뢰가 없는 사회입니다.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신뢰, 기대가 다 무너진 사회야말로 위험한 사회 아닙니까. 그것이 가장 우려할 사안이고, 누구도 자기가 억울한 걸 경찰이나 검찰에 호소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09. 04. 24.   

 

P.S. 알다시피 "<조선일보>는 지난 4월10일 이종걸 민주당 의원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그리고 인터넷 매체인 <데일리 서프라이즈>의 신상철 대표이사를 고소했다. 이종걸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정희 의원은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조선일보>의 특정 임원이 이른바 ‘고 장자연씨 사건’과 관련된 것처럼 공표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였다." 이종걸, 이정희, 두 의원의 인터뷰 기사도 챙겨둔다(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4802.html). 더불어, '미디어오늘'에 실린 박경신 교수의 기고문도 옮겨놓는다.    

미디어오늘(09. 04. 24) 장자연리스트 실명보도는 언론사의 의무

미디어오늘 한상혁 논설위원은 지난 22일자 <바심마당-장자연리스트와 실명보도>를 통해 장자연 리스트의 실명보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공인의 사생활과 관련한 내용이고 그 사실관계의 확인이 매우 어려운 반면 보도 결과 그들이 입을 명예의 손상이 심각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었다며 “언론의 윤리의식”을 칭찬하였다.

언론사들은 충분히 장자연 리스트 실명공개를 할 수 있었다. 현행법상 ‘오로지 공익을 위한’ 진실 공개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면책된다. 헌법재판소는 면책조건으로서의 ‘공익’은 폭넓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하였고 대법원은 심지어 언론보도는 공익성이 추정된다고까지 판시한 바 있다. ‘국내 유력 언론사 대표가 자살한 연예인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았는가’는 어떤 법적 해석으로도 공적 사안이며 이에 대한 진실의 공개는 당연히 면책된다. ‘실제 성상납을 받았는가’는 ‘사실관계의 확인’이 어렵겠지만 ‘그러한 문건이 있다’는 보도는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며 이 진실을 보도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합법적이다.

혹자는 ‘A가 그러는데 XYZ라고 하더라’ 식의 소위 전재보도도 XYZ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는 근거가 없다면 허위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며 신중론을 편다. 검찰의 현재까지 기소관행상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XYZ라는 명제 자체가 공적 사안이고 ‘A에 의한 제보’ 자체도 공적 사안이며 제보내용이 틀렸을 가능성과 함께 균형있게 전달된다면 위와 같은 보도는 면책이 된다. 

성상납이 해당 공인의 ‘공적 사안’이 아니라 ’사생활’이라서 신중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단순논리로 따지자면 모든 범죄는 본질적으로 모두 ‘사생활’이다. 도둑은 들키지 않으려고 어둠을 타고 다니고 뇌물은 들키지 않으려고 밀실에서 수뢰된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 대한 고발이 사생활침해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범죄행위나 범죄의심행위에 대해서는 ‘사생활’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원리가 확립되어 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범죄발생의 개연성이 있는 공간이나 물건에 대해서는 국가는 영장을 받아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익성의 면책을 받아내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실명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사들에 대해서는 나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 호소하고 싶다. 암흑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권력비리에 대한 고발은 확신을 주지 않는 충분하지 못한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노회찬 의원이 안기부의 불법도청파일 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떡값검사’ 실명을 공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실체적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실규명을 해달라는 사회에 대한 요청이었다.

노회찬, 장자연, 이종걸 모두 죽음 또는 형사처벌을 무릅쓰고 공적 비리에 대한 단서를 공개했다. 사람들이 공적 사안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언론의 최소한의 의무이다. 이들 내부고발자들의 단말마 비명과도 같은 아니 유언과도 같은 제보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못한다면 언론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이미 누구인지 다 아므로 실명의 활자화는 실효성이 없고 관음증만을 충족시킬 뿐이다’라는 반문은 무책임하다. 몇몇 네티즌들이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여기저기 실명을 올렸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알게되어 ‘○○일보 ○사장’라고 그나마 쓰게 된 것이다. 타인들의 용기있는 고발이나 받아먹겠다는 것이 언론의 자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실효성’이 아니라 원칙과 상징의 문제이다.

명백히 공익적인 진실을 타인에게 불리하다고 밝히지 못하는 국가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과연 ‘명예’와 ‘위선’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언론은 익명보도에 대해 독자들에게 미안해할 일이지 ‘윤리의식’을 운운할 일이 아니다.(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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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4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5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4-24 23:51   좋아요 0 | URL
결론 나기 전에 이미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죠. 신기하죠? 웃어야 하나...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쓴웃음이죠..

비연 2009-04-25 13:25   좋아요 0 | URL
우리를 바보로 아나 싶습니다...;;;

로쟈 2009-04-25 16:22   좋아요 0 | URL
'졸'로 보는 거죠...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신 다음에, 곧 써야 할 원고는 잠시 미뤄두고(생각만 해도 기운이 빠지는군), 주초에 읽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의 편집장 칼럼인데, 안 그래도 오늘 장자연 수사 중간결과가 발표된 걸 보고 한국 권력집단에 대한 염증을 한번 더 느끼면서 필자의 '조롱'을 거들고 싶어서다. 법대생은 아니었지만 나도 예전엔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류의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대학원 동료와 후배들 가운데는 변호사가 된 이들도 몇 된다). 그땐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든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지금은 칼럼을 참조하여 훨씬 더 많은 이유를 댈 수 있을 듯하다.  

한겨레21(09. 04. 24) P의 항변  

기자 P는 ‘펜 생활’ 15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종종 질문을 받는다.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그러면 P는 대답한다. P가 법대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법과 현실의 법이 너무나 달랐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은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아니었다. 헌법 제1조부터 거짓말이었으니, 법에 실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P의 첫 번째 대답이다. 그러나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이다. 왠지 도식적이다. 그렇게 물으면, P는 또 대답한다.

졸업 뒤에도 기회는 있었다. 90년대, 사법시험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고시촌으로 스며드는 이들이 급증했다. 그러나 당시 법조담당 기자였던 P는 법에 대한 실망을 넘어 법조인에 대한 실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반말을 지껄여대는 판사들, 시국사건 재판에선 온순한 양이 되어 검찰의 논리를 답습하는 판사들, 늘상 재판 기록에만 파묻혀 ‘저러고도 창조적인 사고가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판사들…. 피의자를 쥐어패는 검사들, 그러면서 상관에게는 그렇게 깍듯할 수 없는 검사들, 비리의 몸통엔 약하고 깃털엔 강한 검사들, 사법 정의보다 주제넘은 ‘나라 걱정’에 여념 없는 검사들….  

영화에서 본 멋진 변론 대신 주눅 든 자세로 재판장에게 선처만 호소하는 변호사들, 사건을 더 수임하느라 브로커를 동원하는 변호사들, 전관예우로 돈을 긁어모으면서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변호사들…. 나름대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고 자부하던 P로서는 법조계의 어떤 직업에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대답이다. 이해는 간다. 그러나 의구심이 말끔히 가시지는 않는다. 지금이야 설마 그런 판사·검사·변호사들이 있으려고…. 정말 후회한 적 없니? 그러면 P는 대답한다.  

가끔은 후회한다고. 촛불집회와 관련해 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에 대한 위헌제청을 하는 판사들을 보며(기자로서 야간 집회 금지를 비판하는 기사를 아무리 써도 이 정도의 반향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국방부의 불온도서 지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내는 군법무관들을 보며(이 사실을 처음 보도한 기자는 특종의 영예를 안았다), 우리 사회의 온갖 궂은일에 손길을 뻗치는 공익 변호사들을 보며(언론 보도는 상당 부분 이들에게 기댄다), 후회를 한 게 사실이다. 대개 ‘행위자’가 아니라 ‘전달자’여야 하는 운명이 성에 안 찼다는 얘기다.

그러나 P는 곧 항변한다. 법조계 대부분은 여전하지 않으냐고. 최근의 박연차 사건 수사만 보더라도 검찰은 죽은 권력에 강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 비실대지 않냐고.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 재판 개입 사건만 보더라도 법원은 여전히 정치적이지 않으냐고. 권력에 굴종하고 그러면서 권력을 지향하는 게 법조인의 DNA같다고. 권력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켜주는 게 본래 법률가의 몫이건만, 이 정부 들어 검찰·법원에 부쩍 과거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바람에 그런 기대는 지레 접었다고 P는 정색하며 말한다.  

무엇보다 신영철 대법관 사례가 P의 후회를 가로막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대법관이란 사람이 저 모양이라면, 누가 뭐래도 법조계의 최정점이자 법률가적 자존심의 화신이 돼야 할 대법관이 저 모양이라면, 이 땅의 모든 법조인이 법조인임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게 P의 생각이다. 그렇게 부끄러워해야 할 위치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진 게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아 참, 지난해 촛불집회 때 그렇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외쳤건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민주공화국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인다. 첫 답변으로의 회귀. 아무튼 지금이 행복한 P는 이 순간에도 법조계의 권력 지향자 또는 권력 굴종자들을 한껏 조롱하는 칼럼을 쓰는 중이다. 그러니 더 이상 그에게 “사법고시는 왜 안 봤어?” 같은 질문은 하지 마시라.(박용현 <한겨레21> 편집장) 

09. 04. 24. 

P.S. 신영철 대법관의 '이메일 재판 관여'에 관한 시사IN의 몇주 전 특집기사는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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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4-24 19:29   좋아요 0 | URL
"법전의 한국어 문장들이 맘에 안 들어서" 사법고시를 안 봤다는 대답은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ㅎㅎㅎ 멋진 대답이군요. ^^

로쟈 2009-04-24 19:39   좋아요 0 | URL
"양친, 친양자, 친생의 부 또는 모나 검사는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의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가정법원에 친양자의 피양을 청구할 수 있다."는 식의 문장이 혐오스러운 것이죠. 일본 법전을 그대로 베껴오다 보니 아직도 난해한 한자어에 어색한 구문 투성이입니다...

비로그인 2009-04-25 07:02   좋아요 0 | URL
법전이 인용해주신 이 한 문장과 모두 대동소이하다면 이것을 가지고 공부하는 법학도들이 안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답답할 것 같아요. 그런 대답을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4-24 23:24   좋아요 0 | URL
85년 신동아를 보면 신영철 사건과 비슷한 일이 그때에도 있었어요.그때 지적된 문제점은 독립적인 판단을 해야 할 판사들조차 위계질서에 바탕한 인사권 때문에 윗사람 눈치를 본다고 했는데....우리나라는 뭐든지 위아래 따지는 버릇이 있어서 정말 문제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게 몸에 완전히 배어 있어가지구요.인간관계에서 위계질서 외에는 없다고 여기니 문제지요.법조계도 마찬가지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