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754). 강의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완독을 겨울방학으로 미뤄두었는데(하지만 방학땐 '계절학기' 강의가 있다!) 곁들여 읽어야 할 책도 많다는 걸 리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컬처뉴스(07. 12. 05) 마르크스가 불러온 데리다의 유령'들'

“선생님의 저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난해하다’, ‘도통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요? 만약 정말로 제 글이 이해가 안 된다면 당신의 한국어 번역작업이 어떻게 가능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소장학자들과 작가들에게서 때때로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글들을 봅니다.”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제 글이 지극히 난해해서 이해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글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니요?”

국내의 한 일간지(<조선일보>, 1997년 1월 20일자)에 실린 이 대담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참 웃긴 대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 대담은 일종의 ‘징후’였다. 자크 데리다(1930~2004)가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징후.(*참고로, 이 대담은 김성도,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 수록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996년 『그라마톨로지』(1967)와 『입장들』(1972)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이후 데리다의 국역본들은 끊임없는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번역과 쉬운 용어선택으로 번역의 전범을 보여줬다”(<조선일보>, 1996년 2월 9일자)던 『그라마톨로지』마저 오역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퇴출’된 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화젯거리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데리다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유령’ 취급을 받아왔고, 3년 전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국역된 데리다의 1993년작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렇게 우리와 인연이 끊길 뻔한 데리다(의 유령‘들’)를 성공적으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진태원이라는 소장학자의 도움으로. “자네는 학자야, 그것에게 말을 걸어보게.”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재출간(원래 이 책은 지난 1996년에도 국역된 바 있다)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이 책이 ‘읽을 만하게’ 다시 소개됐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의 유령이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함께,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돌아왔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 덕택에 우리는 이제야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반겨야 할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할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였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시기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에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호출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출을 “데리다가” 수행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면/받아야 한다면 그건 명확히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약 72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책들 중 아무 것이나 지금, 이 시기에, 매끄럽게 국역된다고 해서 (예상컨대 1994년작 『우정의 정치학』이라면 예외겠지만) 주목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데려왔다면, 한국에서는 마르크스가 데리다의 유령‘들’을 불러온 셈이라고나 할까.

왜 마르크스인가(혹은 왜 마르크스의 유령‘들’인가)? 무엇보다도 그건 데리다로 하여금 마르크스의 어떤 정신/유산을 불러오게 했던 바로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열 가지 재앙들’이라고 말한 대규모 실업, 무자격 시민들(홈리스, 망명객, 무국적자, 이민자 등)의 집단적 배제, 무자비한 경제전쟁, 자유시장의 무능력, 외채 누적, 군수산업과 군수무역, 핵무기의 확산, 종족/인종간 전쟁, 마피아 같은 환영국가의 권력 증대,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한계들이『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됐을 때보다 훨씬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열 가지 재앙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꼭 마르크스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를 단지 지나쳐버릴 수는 없으며,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기나긴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보는 있다. 복수(複數)로 표기된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 특정한 유령/정신(들)을 선별해야만 한다.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데리다가 이 유령‘들’을 떼어내야 한다고/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는(옮긴이의 생각과는 달리) 좀 불분명하지만, 이 유령‘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데리다가 5장에서 다루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2부의 ‘마르크스-슈티르너 논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1부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선별작업을 만끽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먼저 『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4장에서 주로 다뤄지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은 여러 종의 국역본이 존재하며 번역 상태도 양호하다.

그리고 5장에 도전할 때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1993) 국역본 2장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여담이지만, 발리바르는 현존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그 사유방식이 가장 데리다와 비슷하다. 그러니 데리다의 마르크스 애도 작업, 혹은 데리다 식의 마르크스 읽기의 이론적 효과를 만끽하고 싶은 분들은 발리바르를 같이 읽으시면 된다(이런 점에서 추천할 만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저서는 얼마 전 국역된 『대중들의 공포』이다).

마지막으로, 왜 데리다의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인가? 우리가 맨 처음 알게 된 데리다는 ‘문학비평가’(특히 ‘예일 마피아’의 숨은 대부)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의 데리다는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창기의 저작들, 그도 아니면 적어도 『다른 곶』(1991)부터 데리다는 충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데리다가 정치에 대한 사유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드러낸 것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데리다(혹은 데리다의 또 다른 유령)가 있으니 그건 바로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이다. 특히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공포와 전율』(1843)을 꼼꼼하고 읽고 있는 『죽음을 선사하기』(1999) 전후의 데리다가 그러한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만큼이나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역시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이런 데리다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과 더불어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에게 도착한 책 중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를 엿볼 수 있는 텍스트는 1997년작 『환대에 대하여』인데,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은 읽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유령이 하나가 아니듯이, 데리다의 유령 역시 하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말에 따라 선왕의 유령에게 말을 건 호레이쇼에게 마셀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존엄한 혼령인데, 우리가 너무 난폭하게 대한 것 아닐까?”(『햄릿』, 제1막 1장). 우리에게 그것은 누구/어떤 유령일까?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이에 대한 대답은 충분히 데리다를 읽지 않았던(그런데 그 누구가 데리다를 충분히 읽을 것인가) 우리가 우리 몫의 애도 작업을 충분히 수행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데리다를 따라서, 데리다의 유령‘들’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까지 얘기할 수 있을 때에 말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06.

P.S. '윤리학자' 데리다는 물론 레비나스를 읽는/읽은 데리다이다. 두 사람을 다룬 표준적인 책은 사이먼 크리칠리의 <해체의 윤리학: 데리다와 레비나스>(2판, 2000)이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은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데리다가 <죽음을 선사하기>에서 말을 건네고 있는 철학자는 체코의 얀 파토치카(1907-1977)이다. 지난 겨울 영역된 그의 책 몇 권을 구해놓고 번역을 주선해볼까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윤리학자 데리다의 유령과 함께 파토치카의 유령도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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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12-07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르크스의 유령들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100페이지도 못가서 포기했어요... 역시 내공부족은 어쩔수 없나봐요 ㅡㅜ

로쟈 2007-12-07 08:45   좋아요 0 | URL
제가 관심을 갖는 독자 유형이시네요.^^; (아주 많지는 않으실 거라고 보지만) 인문/이론서를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주는 책들(?)이, 혹은 서포터들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아르바이트'를 저도 가끔씩 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방책은 못되구요.--;

릴케 현상 2007-12-0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유형인데^^ 관심 좀 주세요. 퐁쥬 시가 좋길래 별 생각없이 '시네퐁쥬'를 읽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네요

로쟈 2007-12-07 11:48   좋아요 0 | URL
데리다도 자신의 분류를 따르자면 '신계몽주의자'가 될 텐데, 난해하기만 한 철학자로 치부되는 건 불운한 일입니다.--;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 연재되었던 '21세기의 사유' 정리 인터뷰에 며칠전 응했다. 이메일과 전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시간상 충분하게 답변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아래 기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2)를 보니 내가 제일 많이 떠든 것으로 돼 있다(내가 제일 순진했었나 보다). 흥미로운 건 인터뷰 내용 일부는 내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점. 나의 '배역'에 맞춰 더 추가된 대목도 있다. 그냥 '대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대학신문(07. 12. 03)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21세기의 사유’

그동안 『대학신문』은 ‘21세기의 사유들’이라는 제목으로 현존하는 사상가들이 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봤다. 연재기획의 마지막회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연재에서 다루어진 주요 사상가들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짚어보고 나아가 철학이 사회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했다.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에 대해 평가해 달라

진태원: 독자들에게 현대사상의 진로를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유익한 자리였다. 사상가 선별작업은 무난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나 지그문트 바우만 등에 대한 소개가 빠져 조금 아쉬웠다.

이현우: 연재된 10명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유럽대륙 인물이 8명에 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선정된 인문(*인물)이 지나치게 서구에 편중돼 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9:1이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현준: 내년에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린다.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은 최근 실용주의 및 물질주의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발생한 인문학 위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의 대학생은 공교육의 위기와 값비싼 사교육이라는 이중 부담 속에 대학에 진학한 만큼 자아성취욕구와 현실적 실용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앞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모두 철학의 힘이며 인문학이 지니는 장기적인 가치다. 이번 기획을 통해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인문학적 관심이 깊어졌기를 소망한다.

◆10명 사상가들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본다면

이현우: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몇 가지 부분을 짚어볼 수 있다. 지젝은 주디스 버틀러나 조르지오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고, 또한 서로 협력하는 만큼 충돌했기 때문이다.

조현준: 젠더에 관해 지젝과 버틀러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권력의 심리양태』에서 지젝의 지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반면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거꾸로 버틀러를 비판한다. 버틀러는 사람들이 두 개의 성별만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성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구조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현실의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겪는 억압을 해결하려는 성의 정치학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의 억압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현우: 버틀러는 젠더에 대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일 뿐 젠더의 ‘근원적’ 진리는 없다는 식이지만 지젝은 그 역사성 자체가 진리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버틀러의 퀴어(queer) 이론은 다신교, 지젝의 정신분석학은 유일신교다. 유일신교가 ‘신과 자신’과의 차이를 보여주듯 지젝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조현준: 지젝은 인간의 보편심리를 도출하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하고 버틀러는 보편 문법이 역사적인 ‘권력 역학’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푸코의 계보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결국 그들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입지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현우: 지젝과 네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젝은 네그리의 저서 『제국』의 서평을 썼다. 지젝은 서평에서 네그리의 현실 진단의 충실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 대한 강조 등의 처방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실천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윤수종: 학자에게 처방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그리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가 나아갈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다양한 자율운동이 국가의 지배구도를 깰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현우: 한편 지젝은 바디우와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바디우는 『성(聖) 바울』에서 유물론적 시각으로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했고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를 지지한다. 지젝은 바울을 레닌에 비유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돼있는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기숙: 바디우에게 바울은 마르크스보다는 레닌,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에 가까운 이미지다. 그런 맥락에서는 바디우와 지젝이 확실히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전개되는 반면 지젝은 바디우의 생각을 특히 정치학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각 사상가의 시각에서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본다면

진태원: 랑시에르라면 한국사회를 ‘기득권자들의 노골적인 금권적-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볼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정당한 자기 몫을 배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미등록이주노동자, 혼혈인 등도 해당된다. 이들과 함께한다는 연대의식을 국민 모두가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이현우: 지젝도 비슷한 지적을 할 것 같다. 그는 『이라크』 등의 저서를 통해 국민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다른 계층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국민이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영토와 자본, 문화 등 많은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용은 민주주의에서 특정 계층을  배제함으로써 마련된다. 따라서 지젝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배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종석: 회슬레는 국가단위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전세계 60억 인구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세계공화국’이 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좀 더 넓은 단위의 민주주의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조영일: 한국정치의 다른 문제에 눈을 돌려보자. 우리사회에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정책을 앞세우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기 일쑤다. 정치무대 배후에서는 소위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고 박스 가득 정치자금이 오고간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선거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낭비에 해당한다. 이를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본 가라타니 고진은 고대 그리스처럼 선거에 추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철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홍기숙: 철학은 그 시대를 담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적어도 철학자라면 항상 이 시대의 정치, 문화를 비롯한 사회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과 ‘여기’를 중요시하는 바디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종석: 그런 맥락에서 철학과 환경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유효한 환경철학은 생태계 속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다. 인간의 가치도 단지 한 종(種)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다르면 인간이 멸종하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회슬레는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심층생태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면서도 갈등상황에서만큼은 위계질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조영일: 한편 세계적으로 지식생산구조가 변화하는 조짐이 감지된다. 대학을 벗어난 공간에서 철학적 논의가 이뤄지고 수준 높은 강의가 인터넷 상에 공개되는 현상들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들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학문을 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할지도 모르겠다.

이현우: 대학은 특수한 정치공간, 소수 엘리트계층 배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그간 지녔던 독자적인 지식생산구조조차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대신 기업체 등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구미에 맞는 지식결과물을 생산하는, 이른바 ‘대학이 자본주의의 물결에 잠식당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더 이상 한국에서 유효한 철학적 담론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영일: 이제는 철학이 소수의 전문적 지식인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학평론가면서  철학적 사유들을 내놓는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자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학문의 틀을 벗어나 다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때다.

이현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는 사유를 하는 사람의 범주를 구획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 다니엘 데넷, 스티븐 핀커 등 대중적인 과학자는 물론, 시인과 작가 등 모든 사람이 사유주체가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개별적으로 이뤄진 인터뷰를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인터뷰 및 정리: 문승기 기자, 이진환 기자)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나종석(연세대ㆍ철학과 강사), 윤수종(전남대ㆍ철학과 교수), 이현우(서울대ㆍ노어노문학과 강사), 조영일(문학평론가), 조현준(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진태원(서울대ㆍ철학과 강사) (가나다 순)

07.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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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책읽고 싶어지게 만드네요.^^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제가 주로 하는 일이죠.^^;

마늘빵 2007-12-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분은 이제 한국에 돌아오셔서 강의 나가시나보군요! 알라딘에 계시는 로쟈님 말고 다른 분. 인터뷰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네, 활발하게 활동하시더군요.^^

2007-12-03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3 23:22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철학책을 문학책처럼 읽는 편인데요. 문학적인 철학자들을 좋아하고요(사르트르나 데리다 같은).^^
 

이번 학기에 대학신문에서 옮겨오던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마지막 편은 자크 랑시에르이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45). 알튀세르 사단에 속한 철학자로 국내엔 처음 알려진 듯하지만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에 그가 전개한 독자적인 철학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는 듯하다(여러 권의 저작이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론 짧은 책들을 쓴다는 것, 문학과 영화를 아우른다는 것 등등에 매력을 느껴서 대부분의 영역본을 긁어모은 철학자이기도 하다(주로 지젝의 언급을 통해서 만나보던 참이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아래 기사가 짤막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필자는 알라디너들에게 '발마스'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진태원씨이다).   

대학신문(07.11. 2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⑩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The Ignorant Schoolmaster: Five Lessons in Intellectual Emancipation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진태원_서울대 철학과 강사)

07. 11. 26.

P.S. 랑시에르의 많은 저작 중에 가장 먼저 읽으려고 하는 책은(사실 미뤄둔 지가 꽤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서문을 쓰기도 한 <미학의 정치학>이다. 얇은 책이므로 이번 겨울방학때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전에 번역서가 나온다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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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1-2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는 개인적으로도 지속적으로 읽고 있는 철학자인데, 여러모로 반가운 글이군요. 이 코너의 특성상 일단 전체적인 윤곽만을 보여준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이 코너의 '장점'이 바로 이러한 '단점'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ㅡ혹은 뒤로ㅡ부가될 로쟈님의 코멘트가 기대됩니다.^^

로쟈 2007-11-26 18:41   좋아요 0 | URL
제 코멘트는 기대에 못 미칩니다. 랑시에르는 저에게 아직 미래의 철학자라서요.^^;

자꾸때리다 2007-11-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박사님 한국 컴백하셨더군요 발박사님 강연도 들어봤습니다 물론 약속 땜시 다 못 듣고 나왔지만요

로쟈 2007-11-26 21:54   좋아요 0 | URL
네, 무사귀환하셨나 봅니다. '귀국보고회'는 아직 없지만요...

자꾸때리다 2007-11-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당황스러운 내용이기는 하네요 특히 수재 둔재 차이를 부인한다는 건... 저희 학과만 봐도 저는 쩔쩔매는 유기화학을 어떤 사람은 술술술 외우던데

로쟈 2007-11-29 01:06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차등적 대우는 무관하다는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학신문에서 '21세기의 사유들' 연재를 옮겨왔었는데, 알라딘에서 다른 분들도 옮겨놓는 터라 지난 두어 주를 생략했다. 이번주까지 하면 안토니오 네그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861) 비토리오 회슬레(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21) 장-뤽 낭시(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990) 등이 더 다루어졌다(기억에는 랑시에르 정도가 남아있다). 이 연재 대신에 옮겨놓는 것은 이번 가을에 출간된 두 권의 책,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이다.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라는 관점에서 이 책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대학신문(07. 11. 19) 해체와 마르크스주의의 때맞지 않은 조우

세인들의 오해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자크 데리다의 관계는 꽤 막역하다. 가령 루이 알튀세르는 데리다의 ‘악어(cai­ man)’였고, 데리다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악어’였다(‘악어’란 이들의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에서 교수자격시험 준비생들을 지도하는 과외교사의 별칭이었다). 그러나 세인들의 오해가 틀린 것도 아닌 것이,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관계는 겉보기에 그리 밀접하지 않았다.

물론 데리다가 1979년의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렀고, 1982년에는 마이클 라이언이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라는 책을 발표해 데리다의 사유가 마르크스주의의 쇄신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저서 전면에 처음 드러낸 것은 1993년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하면서였다.



프랑스의 역사적 맥락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데리다의 사상이 조우할 수 있는 계기는 1972~1978년과 1983~1984년에 마련됐다. 1972년 공산당은 사회당과 공동강령을 발표했고(그 결과 1978년 총선에서 공산당은 프랑스 야당의 제1좌파 자리를 사회당에게 내줘야 했다), 1976년에는 제22차 당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포기했으며, 1983년부터는 공산당 지지자들이 대거 사회당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요컨대 이 기간 동안 공산당은 전후 이래로 프랑스 지성계에서 확고하게 누렸던 ‘어떤’ 권위를 잃었고, 그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옭아맸던 교조주의가 무너졌던 것이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서로에게 ‘말조심’하게 만들었던 ‘봉쇄장치’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알튀세르가 데리다를 우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두 편의 수고(手稿),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1982)과 「독특한 유물론적 전통」(1986)을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데리다의 이력에서 보면 더욱 더 직접적인 계기는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인 1990년에 찾아왔다. 이 해는 1985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발표했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이 동구권에서부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으며 서서히 종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는 점에서 진정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이었다. 이 가을의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그 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외에도) 『다른 곶』(1991), 『법의 힘』(1994), 『우정의 정치학』(1994) 등 정치적 저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이제 우리 앞에서도 데리다의 사상과 마르크스주의의 조우가 ‘때맞지 않게’ 되풀이되고 있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발리바르의 『대중들의 공포』가 각각 15년과 11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란히 도착한 것이다(사실 『대중들의 공포』의 모태는 1994년 영어로 먼저 발표된 『대중들, 계급들, 관념들』이니 이 책 역시 약 15년의 세월을 건너왔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예전에 발표됐던 책들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는 이유만으로 이 조우가 ‘때맞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등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준거의 토대, 즉 현실사회주의가 와해된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때맞지 않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가 그때보다 훨씬 강고해진 바로 지금 이곳에서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더욱 더 때맞지 않은 것이리라. 게다가 발리바르라니, 누가 지금도 알튀세리앙들을 읽는단 말인가? 이 ‘때맞지 않음’은 단순한 ‘시대착오’가 아닐까?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이제부터 이 고유명사는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의 환유이다)의 조우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발리바르 이전에 알튀세르가 주목했던 데리다의 개념들은 ‘여백(marges)’과 ‘산포(disse′mination)’였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들을 통해 일체의 목적론을 부정한 새로운 유물론, 즉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을 사유하는 유물론을 구축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에서 라이언이 시도하고자 했던 바도 (비록 좀더 포괄적인 설명을 제시한다 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데리다와 마르크스는 무엇보다도 일체의 ‘형이상학’(여기에는 실증주의, 자연주의, 객관주의 등을 비롯해 당/국가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주의/중심주의, 자본주의의 신용체계 등이 모두 포함된다)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교 가능하다는 것이 라이언의 전제였다.

발리바르도 형이상학의 해체라는 데리다의 테마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알튀세르나 라이언과 비슷하지만, 오히려 데리다의 방법론 자체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르다. 데리다와 발리바르가 공유하는 이 방법론, 흔히 우리가 ‘해체(deconstruction)’라고 부르는 이 방법론을 내 식으로 풀자면 ‘아포리아(aporia)의 드러냄’이다.

데리다는 ‘정치적 전환’을 감행하기 전에도 늘 아포리아에 주목해왔다. 데리다가 형이상학을 해체할 때 즐겨 쓴 방식이 바로 이것, 즉 일체의 형이상학적 담론에 내재된 논리적 궁지(또는 결정불가능성/계산불가능성)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발리바르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개념들, 요컨대 이데올로기, 계급, 당/국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가 이해해왔던 방식대로의 정치 개념 그 자체가 다다를 수밖에 없는 아포리아를 드러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내부에서부터 ‘해체’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대중들의 공포』에는 데리다와 발리바르의 이런 유사점이 책 제목에서부터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령’이 아닌 유령‘들’, ‘대중’이 아닌 대중‘들’로 표기된 제목에서부터. 복수(複數)로 표기된 이 두 단어는 그 자체의 양면성/양가성을 드러낸다(이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데리다의 개념은 오히려 ‘파르마콘’[pharmakon]이다). 가령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라는 유령을 무력화하려는 자들에 맞서 그 유령의 유산을 상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우리는 유령을 지켜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를 괴롭혔던/괴롭히고 있는 유령을 넘어서야 함을 동시에 주장하고 있다(“우리는 유령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극복해야 한다”). 발리바르 역시 『대중들의 공포』에서 지배계급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혁명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 주목함과 동시에(“우리는 대중들의 급진성을 믿어야 한다”) 지배계급의 권력에 공포를 느껴 수동적이 되는 ‘반동 세력으로서의’ 대중들에게도 눈길을 돌린다(“우리는 대중들의 수동성을 주시해야 한다”).

어쨌거나 데리다나 발리바르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이 불러오는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포리아를 끌어안음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데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우리에게 ‘때맞지 않게’ 도착한 이 두 책의 조우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데리다는 당대의 정치지형 내에서 ‘타자’로 존재하고 있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끌어안음으로써 종교적인 것과 정치의 관계라는 새로운 질문으로 나아갔고, 발리바르는 대중들의 야누스적 얼굴을 끌어안음으로써 반폭력/시민인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때맞지 않음’을 단순한 ‘시대착오’의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낼지, ‘새로운 가능성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는 이제 이 두 책을 읽을 우리의 몫이다.(이재원_전문번역가)

07. 11. 18.

Жак Деррида в МосквеThe Althusserian Legacy

P.S. 두 가지 사항, 혹은 두 가지 책에 대해 덧붙이고 싶다. 먼저, 페레스트로이카의 ‘가을’ 끝자락이 겨울을 예고할 즈음인 "1990년 초, 데리다는 전세계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혁명의 고향인 모스크바를 방문했고"란 대목과 연관된 책은 <모스크바의 데리다>(러시아어, 1993)이다(이 책은 어쩌면 내년에 국역본이 나올 수 있다). 이 데리다 텍스트의 영역본은 'Back from Moscow, in the USSR'이란 제목으로 마크 포스터의 책 <정치학, 이론, 그리고 현대문화>(1993)에 수록돼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는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그리고 비틀즈의 노래 'Back in the USSR'(http://www.youtube.com/watch?v=4-2LQGigK-0)을 밑텍스트로 한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한 권은 데리다와 마르크스주의, 보다 구체적으론 데리다와 (자신이 '악어'였던) 알튀세르와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수록된 카플란과 스프린커 편집의 <알튀세르의 유산>(1992/1993). 데리다의 이 텍스트는 언젠가 잡지 <이론>에 윤소영 교수의 번역으로 절반만 소개되었다(내가 읽은 건 그 절반이다. 마저 번역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또한 완역으로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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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담비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에 대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6610). 주로 근작인 <장치란 무엇인가>를 '아감벤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때 기준점이 되는 건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호모 사케르>이다(국역본이 올해 안에 나오는가?). 이래저래 국내에 번역/소개가 늦어지고 있어서 '전설'로만 회자되고 있는데 조만간 한국어로도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대한다(가장 최근에 아감벤을 다룬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7009 참조).

동국대학원신문(144호) 아감벤의 진화 혹은 새 출발 

"올해 최고의 책을 뽑으라면 단연 『호모사케르』죠.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지난 1997년 11월 27일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건축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비릴리오의 말이 단순한 허사가 아닌 것은 내노라하는 현대 사상가들, 가령 안토니오 네그리나 슬라보예 지젝 등도 이와 유사한 평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모사케르』가 출간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탈리아어 초판은 1995년, 프랑스어본은 1997년에 출간), 이 책의 지은이 아감벤도 꾸준히 진화 중이다.



작년에 출간된 『장치란 무엇인가?』는 약 40쪽 분량밖에 안 되는 팸플릿이지만,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주는 최근의 저서이다(『호모사케르』의 4부에 해당되는 『지배와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에 관하여』도 올해 초 출간됐다).



일부 사람들(가령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 등)은 아감벤의 사유가 염세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감벤은 짐짓 우리 시대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어떤 사회적 권리도 갖지 못한 채 삶과 죽음이 유예되는 ‘예외상태’의 최고 단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삶(la nuda vita)을 살아가는 존재(다른 말로 호모사케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치란 무엇인가?』에서의 아감벤은 이와 다른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래서 이 저서는 아감벤의 진화를 보여준다.

아감벤은 『호모사케르』에서 ‘생명정치’라는 개념에 대해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셸 푸코의 논의에 기대서, 그러나 좀더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장치’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푸코는 ‘장치’라는 표현을 쓰기 이전에 ‘실증성’(positivit)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는데, 이는 그의 스승인 장 이폴리트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폴리트에게서 ‘실증성’이란 “청년 헤겔이 규칙, 의례, 제도의 무게와 더불어 외부의 권력에 의해 개인들에게 부과되었으며 …… 신앙과 감정체계 속에 내부화된 역사적 요소에 붙인 이름”이었는데, 푸코는 이를 “권력관계가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제도들, 주체화 과정들, 규칙들의 집합”으로 재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푸코는 이 용어 아래 권력관계가 작용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포착하려고 했다는 것이 아감벤의 해석이다.

그 뒤 아감벤은 그 자신이 ‘장치’라는 개념의 “신학적 기원”이라고 부르고 있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용어를 분석한다(또한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대략 2~6세기 사이인 교회사 초기에 기독교의 교부들은 삼위일체(왜 신은, 혹은 신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고 셋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신의 경제’를 말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고, 이 때문에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를 도입했다는 것이다(아버지 신은 아들 예수에게 인간들에 대한 ‘경제’, 즉 관리와 통치를 부여한 것이다).

기독교 교부들이 ‘오이코노미아’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하기 위해 도입한 용어가 바로 ‘장치’(dispositif)라는 용어의 어원인 라틴어 Dispositio이다. 이 “신학적 기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장치란 용어는 존재 안에 최소한의 토대 없이도 순수 통치 활동이 그것으로, 그것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명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치들은 항상 주체화 과정을 함축해야 한다. 장치들은 그것들의 주체를 생산해야만 한다.”는 점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에 근거해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 개념에 더 큰 일반성을 부여한다. “나는 생명체들의 몸짓들, 행동들, 의견들, 담론들을 포획하고, 유도하고, 결정하고, 차단하고, 만들고, 통제하고,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장치라고 부른다. 따라서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만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그리고 언어 자체도 장치이다.” 그리고 이에 근거해 아감벤은 “생명체(혹은 실체)-장치들-주체들”이라는 3항 도식을 도출한다.

『장치란 무엇인가?』의 이런 내용이 아감벤의 ‘진화’일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추론을 통해서 아감벤은 비로소 주체생산의 이중성(주체화/예속화)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산재한 장치들은 권력의 요구에 순응하는 주체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예속화), 이 과정은 장치들(그리고 장치들의 네트워크 자체)과 주체의 맞대응 관계가 무한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주체화). 아감벤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그것은 소멸이나 지양이라기보다는 모든 개인적 정체성에 끊임없이 수반되었던 가면극의 차원을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산종(散種)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다른 현대 사상가들이 했던 말 아니냐고? 맞다. 그러나 답이 같더라도 그에 도달하는 과정이 다르다면 답 자체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아감벤은 자신의 새로운 풀이과정을 통해 ‘저항’이 아니라 ‘세속화’(profanare)를 주체화의 또 다른 방법으로 언급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또 다른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좌우간 아감벤은 계속 진화중이니, 그에게 관심이 있다면 그의 진화를 계속 주시할 수밖에.(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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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24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케르는 정말 나온다 나온다 하는 얘기만 한참 들은 것 같네요 허허.
관련해서 드는 생각인데, 들뢰즈가 죽기 전에 썼다고들 하는 "맑스의 위대성(Grandeur de Marx)"은 왜 아직 소식이 없는걸까요? 혹시 아시나 해서...^^a

로쟈 2007-10-24 23:28   좋아요 0 | URL
나온다던 책 나오지 않고, 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거 같습니다. 들리즈의 책 소식은 '빠리'에서 더 잘 아실 듯한데요. 저로선 그가 썼다는 것인지 쓰려고 했다는 것인지 헷갈리는군요...

비로그인 2007-10-25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저는 '빠리'에 없고 서울에 있는데요. 혹시 닉네임 때문에 착각하신거라면 전 빠'라'바람 입니다^^;;

로쟈 2007-10-25 14:36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잘못 봤습니다...

비로그인 2007-10-2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시간 답글이네요^^;; 아무튼 제가 그 얘기를 들었던 건 "노마디즘"에서 였는데 이진경은 "네그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원고는 죽기 직전에 씌어졌다고 하는데, 아마도 퇴고하지 않은 채 죽어서 아직 출간이 되지 않은 듯 합니다"라고 적고 있네요. 니콜라스 쏘번의 "들뢰즈 맑스주의"에도 언급이 나와있는데 (http://libcom.org/library/deleuze-marx-politics-nicholas-thoburn-introduction) 썼다는 건지 안썼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다시 관심 접으렵니다ㅋ

로쟈 2007-10-25 16:37   좋아요 0 | URL
미완의 책이라고 하니까 분량이 어느 정도 되면 출간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단행본 형태가 아니더라도). 구상 정도였다면 물론 어렵겠고, 그가 따로 불가하다는 유언을 남겼다면 역시 어렵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