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대학신문에 연재되었던 '21세기의 사유' 정리 인터뷰에 며칠전 응했다. 이메일과 전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시간상 충분하게 답변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아래 기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2)를 보니 내가 제일 많이 떠든 것으로 돼 있다(내가 제일 순진했었나 보다). 흥미로운 건 인터뷰 내용 일부는 내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점. 나의 '배역'에 맞춰 더 추가된 대목도 있다. 그냥 '대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대학신문(07. 12. 03)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21세기의 사유’
그동안 『대학신문』은 ‘21세기의 사유들’이라는 제목으로 현존하는 사상가들이 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봤다. 연재기획의 마지막회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연재에서 다루어진 주요 사상가들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짚어보고 나아가 철학이 사회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했다.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에 대해 평가해 달라
진태원: 독자들에게 현대사상의 진로를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유익한 자리였다. 사상가 선별작업은 무난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나 지그문트 바우만 등에 대한 소개가 빠져 조금 아쉬웠다.
이현우: 연재된 10명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유럽대륙 인물이 8명에 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선정된 인문(*인물)이 지나치게 서구에 편중돼 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9:1이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현준: 내년에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린다.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은 최근 실용주의 및 물질주의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발생한 인문학 위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의 대학생은 공교육의 위기와 값비싼 사교육이라는 이중 부담 속에 대학에 진학한 만큼 자아성취욕구와 현실적 실용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앞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모두 철학의 힘이며 인문학이 지니는 장기적인 가치다. 이번 기획을 통해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인문학적 관심이 깊어졌기를 소망한다.
◆10명 사상가들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본다면
이현우: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몇 가지 부분을 짚어볼 수 있다. 지젝은 주디스 버틀러나 조르지오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고, 또한 서로 협력하는 만큼 충돌했기 때문이다.

조현준: 젠더에 관해 지젝과 버틀러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권력의 심리양태』에서 지젝의 지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반면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거꾸로 버틀러를 비판한다. 버틀러는 사람들이 두 개의 성별만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성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구조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현실의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겪는 억압을 해결하려는 성의 정치학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의 억압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현우: 버틀러는 젠더에 대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일 뿐 젠더의 ‘근원적’ 진리는 없다는 식이지만 지젝은 그 역사성 자체가 진리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버틀러의 퀴어(queer) 이론은 다신교, 지젝의 정신분석학은 유일신교다. 유일신교가 ‘신과 자신’과의 차이를 보여주듯 지젝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조현준: 지젝은 인간의 보편심리를 도출하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하고 버틀러는 보편 문법이 역사적인 ‘권력 역학’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푸코의 계보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결국 그들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입지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현우: 지젝과 네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젝은 네그리의 저서 『제국』의 서평을 썼다. 지젝은 서평에서 네그리의 현실 진단의 충실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 대한 강조 등의 처방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실천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윤수종: 학자에게 처방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그리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가 나아갈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다양한 자율운동이 국가의 지배구도를 깰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현우: 한편 지젝은 바디우와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바디우는 『성(聖) 바울』에서 유물론적 시각으로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했고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를 지지한다. 지젝은 바울을 레닌에 비유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돼있는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기숙: 바디우에게 바울은 마르크스보다는 레닌,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에 가까운 이미지다. 그런 맥락에서는 바디우와 지젝이 확실히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전개되는 반면 지젝은 바디우의 생각을 특히 정치학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각 사상가의 시각에서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본다면
진태원: 랑시에르라면 한국사회를 ‘기득권자들의 노골적인 금권적-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볼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정당한 자기 몫을 배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미등록이주노동자, 혼혈인 등도 해당된다. 이들과 함께한다는 연대의식을 국민 모두가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이현우: 지젝도 비슷한 지적을 할 것 같다. 그는 『이라크』 등의 저서를 통해 국민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다른 계층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국민이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영토와 자본, 문화 등 많은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용은 민주주의에서 특정 계층을 배제함으로써 마련된다. 따라서 지젝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배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종석: 회슬레는 국가단위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전세계 60억 인구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세계공화국’이 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좀 더 넓은 단위의 민주주의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조영일: 한국정치의 다른 문제에 눈을 돌려보자. 우리사회에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정책을 앞세우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기 일쑤다. 정치무대 배후에서는 소위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고 박스 가득 정치자금이 오고간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선거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낭비에 해당한다. 이를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본 가라타니 고진은 고대 그리스처럼 선거에 추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철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홍기숙: 철학은 그 시대를 담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적어도 철학자라면 항상 이 시대의 정치, 문화를 비롯한 사회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과 ‘여기’를 중요시하는 바디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종석: 그런 맥락에서 철학과 환경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유효한 환경철학은 생태계 속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다. 인간의 가치도 단지 한 종(種)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다르면 인간이 멸종하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회슬레는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심층생태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면서도 갈등상황에서만큼은 위계질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조영일: 한편 세계적으로 지식생산구조가 변화하는 조짐이 감지된다. 대학을 벗어난 공간에서 철학적 논의가 이뤄지고 수준 높은 강의가 인터넷 상에 공개되는 현상들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들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학문을 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할지도 모르겠다.
이현우: 대학은 특수한 정치공간, 소수 엘리트계층 배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그간 지녔던 독자적인 지식생산구조조차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대신 기업체 등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구미에 맞는 지식결과물을 생산하는, 이른바 ‘대학이 자본주의의 물결에 잠식당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더 이상 한국에서 유효한 철학적 담론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영일: 이제는 철학이 소수의 전문적 지식인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학평론가면서 철학적 사유들을 내놓는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자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학문의 틀을 벗어나 다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때다.

이현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는 사유를 하는 사람의 범주를 구획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 다니엘 데넷, 스티븐 핀커 등 대중적인 과학자는 물론, 시인과 작가 등 모든 사람이 사유주체가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개별적으로 이뤄진 인터뷰를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인터뷰 및 정리: 문승기 기자, 이진환 기자)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나종석(연세대ㆍ철학과 강사), 윤수종(전남대ㆍ철학과 교수), 이현우(서울대ㆍ노어노문학과 강사), 조영일(문학평론가), 조현준(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진태원(서울대ㆍ철학과 강사) (가나다 순)
07. 12.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