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룬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서 마지막 꼭지를 옮겨놓는다. '지젝 전문' 번역자이기도 한 이성민씨의 글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1981.html).

우리시대 지식논쟁/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③ 지젝을 제대로 읽는 법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3주 전, 논쟁의 운을 뗀 이현우씨는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며 지젝의 급진성에 주목했다. 박정수씨는 이러 주장을 반박하며 지젝의 사유에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적 돌파구가 결여돼 있다고 했다. 이 논쟁의 마지막 글을 맡은 이성민씨는 박정수씨를 다시 반박한다. 지젝이 말하려는 것은 혁명 그 자체가 아니라 ‘혁명의 조건’이라고 지적한다. 그 조건의 핵심은 욕망하고 향유하는 각 개인, 곧 주체다. (제도로서의) 대안을 말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욕망을 향유하는 개인의 변화다. 그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젝이 던지는 급진적 사유의 중핵이라는 게 이성민씨의 생각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6. 07) 혁명의 주체가 혁명의 대상이다

오늘날,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지구상에서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물론 오늘날 미국적 문명 자체의 궁극적인 위태로움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정도로 사람들은 또한 저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 끊임없이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그런데 그의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혁명이 오늘날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유럽문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젝의 정치적 저술들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혁명에 대한 직접적인 요청으로 읽을 때 반드시 그를 잘못 읽게 된다. 박정수씨는 지젝의 정치적 기획이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이현우씨의 글을 오독했을 뿐 아니라, 지젝 자신을 오독했다. 지젝은 그런 말을 한 적이 단적으로 없다. 게다가 이러한 오독을 염려하여, 지젝은 레닌의 반복이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님을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오히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롯한 레닌의 방식들을 따져보면서, 오늘날 혁명의 조건 그 자체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지젝은 혁명 가능성의 조건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늘날 혁명이 가능하다고 말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묻지 않으면 안 될 물음을 묻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생략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에서 혁명적 주체를 생략할 수 없는 만큼 생략할 수 없는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지젝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대해 가장 회의적이었던 사상을 끌어들인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해 개시된 정신분석이다. 프로이트는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다. 라캉이 서유럽의 68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회의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지젝의 혁명에 대한 단적인 규정은 이렇다. “근본적 혁명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래된 해방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꿈꾸는 양태 그 자체를 재발명해야만 한다.” 정신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는 이 말은 무의식을 건드리지 않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혁명은 단지 국가를 전복하는 행위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일이라면 사실, 서유럽인들은 몰라도 한국인들은 이미 여러 번 해본 경험이 있다. 정신분석이 혁명에 대해 회의적인 이유는 주체 편에서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술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저 유명한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지젝이 이와 같은 정신분석적 통찰을 자신의 정치적 사유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혁명을 하지 말자고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규정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규정은 생각해보면 결코 새로운 규정이 아니다. 그것은 예컨대 새로운 학문적 발견이 아니다. 그것은 실상 우리가 심중에서 잘 알고 있는 진리이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나 활동가들은 지금도 새로운 변혁의 전략을 짜느라고 분주할지 모른다. 혹시 그들이 진보를 믿고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의 상황이 좌파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명박씨의 눈물 나는 참회가 잘 알려주듯이, 우파에게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의 자부심인 민주주의는 바로 이만큼 정치가들에게 공평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보자. 한때 지젝은 민주주의를 최선책은 아니지만 차선이라고 하면서 옹호했다. 서유럽 학자들이 근본적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을 때, 그도 이러한 희망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얼마 후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취소했으며, 민주주의는 궁극적 대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궁극적 대안이 무엇인지 자기 나름의 의견은 전혀 밝히지 않으면서 말이다. 언뜻 위선적으로 보이는 그의 제스처에서 진리를, 이 시대의 증상을 읽어보자.

이 시대는, 이렇게 말해본다면, 문명사적 문제를 우리에게 서서히 내밀고 있다. 이는 단지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문제라거나 어떤 전지구적 문제가 있다는 모호하거나 동원력이 없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의 소비와 향유방식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오늘날 인류가 처한 환경적 재앙의 문제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본연의 환경 운동은 오늘날, 정치적 장을 벗어나 광범위한 소비 운동과 병행되고 있다.

이러한 문명사적인 문제는 단지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제도 내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인간의 문명적 활동 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지젝은 향유를 정치적 요소로서 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향유와 향유의 방식 그 자체가 문제라는 핵심적 요점을 담고 있기에 올바른 방향에 서있는 말이다.

아마도 미국인들이 북한에서 발견하고 싶은 첫 번째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향유 방식이 이슬람권이든 북한이든 가리지 않고 전세계에 유통되기를 원할 것이다. 아시아인들이나 유럽인들은 그 방식이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를 알 정도의 문명적 존엄감을 아직은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라캉의 가르침에 따라서, 향유를 정치의 핵심적 요인으로 제출하는 지젝의 제스처를 우리가 함께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동시에 우리는 민주주의나 여타의 대안적 정치 체계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차대한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인 구체적 정치 체계에 대한 지젝의 집요한 침묵에서 내가 읽고 싶은 진리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문명을 구성하는 일체의 것을 재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다면, 오늘날 각자가 스스로 선택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은 실로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젝의 통찰을 빌려, 욕망을 상실한 오늘날의 우울한 주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이성민/도서출판 b 기획위원)

08.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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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2008-06-0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접하게 된 것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였는데, 당시 지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했던 상태에서 무엇인가 '발견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습니다. 물론 '이해한다는 것'은-그것이 창조적인 오독이라 할지라도- 무척 어려웠지만.....때로는 이해에 앞서서 무엇인가 전율과 진실을 느끼게 하는 글들이 있는데 지젝의 경우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의 번역 덕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이 서재에 매번 들르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 앞으로도 멋진 번역 부탁드립니다.....

참, 우문 한 가지~ 지젝이 꼽은 네번째 주저 "The Parallax View"는 현재 번역 중에 있는건가요?^^+

로쟈 2008-06-08 22:13   좋아요 0 | URL
제가 번역한 게 아닌데요.^^; <시차적 관점>은 짐작에 하반기나 내년에 나올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을 맡을 뻔하긴 했지요. 저는 좀 짧은 논문 한편을 번역하게 될 거 같습니다...

김상호 2008-06-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근데요. The Parallax View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건가요? 똑같은 이름의 영화는 '암살단'으로 번역되거든요. 궁금궁금

p.s. 그 책 뒷 날개 사진이 참 재미있던데요.

로쟈 2008-06-10 13:12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 정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시간차가 아니라 시선(시각)의 차란 뜻의 '시차'로...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은 지난주부터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을 다루고 있다. 두번째 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의 철학을 한마디로 '실천 없는 철학'이라 요약하고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90673.html). 이전의 비판(http://blog.aladin.co.kr/mramor/989000)보다 새로워 보이는 것은 지젝을 포이어바흐와 동치시키는 대목이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으니까. 더불어 그를 홉스주의자, 자유를 두려워하는 히스테리 환자,  헤겔 우파적인 국가주의 철학자로 새롭게 규정한다(하긴 지젝은 헤겔을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 불렀다). 그러면서 그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기대보다는 부드러운 비판이다('관념론자 지젝'을 창안하고 있는 정도이다). 보다 신랄한 비판이 필요한 독자라면 이안 파커의 <지젝>(도서출판b, 2008)을 참조하셔야겠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실천 없는 철학

이현우씨는 지난주 이 지면에서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슬라보예 지젝이 여러 면에서 ‘괴물’ 같은 철학자라 해도 그의 사유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자로 나선 박정수씨는 그 기여의 실체에 의문을 표시한다.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지젝의 ‘결여’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게 박정수씨의 생각이다. 다음주에는 이성민씨가 지젝에 대한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5. 31) 현실 비판할 뿐 대안찾기엔 침묵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 한 문장 속에 지젝의 비판 철학이 지닌 가치와 한계가 담겨 있다.

지젝은 헤겔주의자이며, 정치적으로 좌파이다. 헤겔 좌파로서 지젝은 물신주의적 믿음 위에 세워진 현실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지만 정작 어떻게 그 이데올로기적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다. 모든 철학이 일상의 현실은 생각만큼 확고하게 실존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불교의 연기론은 만물이 서로 의존하여 발생하기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가르치고, 플라톤은 현실이 이데아의 물질적 복사본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젝은 신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고 믿는 주체(인간)의 상상적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포이어바흐의 방법을 따른다. 객관적 실재처럼 보이는 것을 주체의 창안물로 되돌려놓는 것, 이것이 지젝의 사유방법이다.

신경증 환자의 실재인 ‘외상’도 마찬가지다. 외상이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그것을 객관적 실재로 믿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 속에서 객체화된 외상을 주체 자신의 창조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객관성의 형식으로 환자를 괴롭히던 외상이 주체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환자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고백처럼 외상의 환상성을 깨달아도 신경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리비도의 체질을 바꾸거나 대안적인 인간관계를 찾지 못하는 한, 증상은 괴롭지만 살아갈 의미이기도 하다. 신이 인간의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면 신앙생활은 지속되고,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도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 의사와 능력이 없으면 민족주의는 지속된다. 화폐의 물신적 힘은 그것에 대한 믿음에서 생긴다는 걸 알아도 대안적인 교환 방법을 찾지 못하면 화폐 물신주의는 계속되며, 자본의 잉여가치가 노동력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도 자본 권력을 대체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를 구성할 욕망과 능력이 없으면 자본가에게 좀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현실의 비실재성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세계를 바꿀 수 없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를 비판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를 바꾸는 것은 해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 실천은 자유로운 연합체를 구성하는 욕망들과 그 욕망들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가능하다. 신ㆍ민족ㆍ자본이라는 초월적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의 욕망이 구성하는 공통적(commune) 삶의 형식, 그것이 마르크스가 기획한 코뮨주의다. 그런 코뮨적 욕망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위해 노예가 되는 사회를 당연하다거나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환상 숭배자들에게만 안 보일 뿐 우리의 삶 속에 실재적으로 잠재해 있다.

지젝은 ‘인간’의 조건 속에서 이런 코뮨적 삶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에게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는 인간을 자연(사물, 신체)과 분리시키고,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키고, 낱낱이 떨어진 개별 인간들로 분리시킨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미지의 타자로 존재하는 상징적 질서 속에서 “인간의 욕망, 그것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야말로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의 형식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유롭다고 한다. 아무도 타자의 욕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타자의 욕망은 배려의 대상일 뿐 아니라 유일한 가치척도이다. 시장에서는 아무도 ‘참아라’거나 ‘즐겨라’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할 뿐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가치척도를 갖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시장 민주주의적인 가치척도를 위해 딱 하나 금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을 배려하지도 않고, 타자의 욕망을 척도로 삼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는 마땅히 ‘다수’의 이름으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것,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적 시장 경제가 대중을 일반적 노예로 만드는 방법이다.

물론 지젝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 시장경제를 반대하고 그것을 넘어선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인간의 조건에서는 불가능한 이 기획은 인간 속에 있는 ‘괴물’을 승인하면서 시작된다. 홉스가 말한 ‘국가’라는 괴물. 지젝은 프로이트의 문명론에 내재한 홉스주의를 충실히 반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문명은 ‘법’과 ‘초자아’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 욕망을 억압하는 법과 억압을 욕망하는 초자아가 없으면 인간 무리는 욕망의 충족을 향한 만인의 전쟁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지젝 역시 상징적 질서 속에서 만인은 만인에 대해 미지의 타자이며, 평화로운 이웃들의 이면에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이 욕망의 시장 체제를 초극하는 유일한 방법은 보편적 주체 형식으로서의 국가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모든 작은 타자들을 하나의 총체적 집합으로 통합하는 예외적 큰타자, 곧 헤겔의 입헌군주와 모든 작은 괴물들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보편적 욕망의 괴물, 곧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결합한 글로벌한 국가체제(제국)를 수립하자는 것이다.(솔직히, 지젝의 기획이 정말 이걸까 의심했는데, 이현우씨의 독해에 따르면 그렇다.)

헤겔의 입헌군주가 정말 ‘텅 빈’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 있을까?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의 관료집단들이 정말 ‘비계급’으로서의 보편계급을 대변할까? ‘지젝의’ 레닌주의에 따라붙을 이런 의문들은 사실 본질적인 게 아니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젝의 말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실천은 가짜 행위다. 실천의 근거는 과거의 경험이나 미래의 예견에서 찾을 수 없다. 혁명의 실천은 전대미답의 세계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의 유일한 근거는 그로 인해 창조되는 세계가 좋은 세계라는 자기 확신뿐이다. 지젝은 정말 그걸 확신하고 있을까?

지젝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 같다. 히스테리 환자처럼 타자의 규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지만(그래서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라고 물어보게 만들지만) 그런 만큼 자유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자유는 불가능한 몸짓이다!) 그래서 텅 빈 상징으로 존재하는 주인에 의존할 때만 자유롭다는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 주인의 욕망을 저주하는 시장의 노예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단 하나의 상징적 주인 밑에서 보편적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때 지젝은 더는 지배적 현실의 환상성을 비판하는 헤겔 좌파가 아니라, 유일한 지배자의 환상으로 수립된 현실을 추구하는 헤겔 우파의 자리에 선다. 그것도 좋다. 좌파든 우파든 중요한 건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삶을 창안하고 싶은가, 어떤 삶의 형식을 욕망하는가? 지젝의 흥미진진한 비판의 뒷맛으로 그가 욕망하는 삶을 느끼고 싶다. 무리인가?(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

08. 05. 30.

P.S. 이번에 나온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은 지젝에 관한 최적의 입문서이다. 무엇보다도 가독성이 좋은 번역 덕분에 지젝의 '레닌주의'와 '레닌주의적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런 우회 없이 이해할 수 있다. '실천'의 의미에 대해서도 지젝은 제2부의 서두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11번째 테제를 뒤집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고 말한다: "오늘날 첫번째 과제는 행동하고 싶은 유혹, 직접 개입하여 사태를 변화시키고 싶은 유혹(이렇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 즉 '전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뭔가?'하는 맥 빠지는 불가능성에 이를 수밖에 없다)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를 쥔 이데올로기 좌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268쪽) 지젝이 곧바로 인용하는바,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말만이 진실한 답변일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있는 것을 엄격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더 낫게 만들지 말해줄 의무도 있는 것 아니냐. 내 생각에 이것은 논란의 여지 없는 부르주아적 편견이다. 역사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목표만을 추구한 작업이 의식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현실까지 바꾼 사례가 아주 많다."

마르크스도 바로 그러한 사례가 아닌가? 지젝이 하고자 하는 일은 그러한 '분석'이고 '의문의 제기'이다. 그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까지 말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도르노에 따르면) 부르주아적 편견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젝은 '전부'가 아니고 '메시아'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지젝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다만 그와 함께 현실의 좌표를 다시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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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5-3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로쟈님때문에 이 책을 또 사야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2008-05-30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2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한겨레에 실린 지젝 관련기사에서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라는 언급을 했는데, 온라인 잡지인 International Journal of Žižek Studies(http://zizekstudies.org/index.php/ijzs/index)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실 알게 된 건 별로 오래 되지 않았다. 문득 생각이 나서 사이트를 찾아가 '발간사'를 읽어봤다. 두 번 놀랐는데, 일단 한국어 번역까지 제공되고 있다는 점(영국의 리즈대학이 이 잡지의 아지트인 듯하고, 그곳 박사과정생들이 세계 각국어 번역의 품앗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번역 또한 오역이 많다는 점('슬라보 지젝'이라고 옮기는 것부터가 징후적이다. 게다가 왜 한국어 문장이 안되는 것인지?). 여하튼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둘러보시길. 아래가 그 발간사이며 한국어 번역에서 두드러진 오역에는 표시를 해둔다(지젝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실 아래의 영문보다도 읽기 편하다).   

Launched in January 2007, IJŽS is a peer-reviewed, open access academic journal. As its title unambiguously proclaims, it is devoted to the work of Slavoj Žižek, a Slovenian philosopher/cultural theorist. Despite such predictably caricatured media portrayals as "the Elvis of cultural theory" and "the Marx brother", Žižek has attracted enormous international interest through his application of otherwise esoteric scholarship to contemporary mass culture and politics.

IJZS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07년 1월 출범하는 IJZS는 Online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상호 검토 보완 할 수 있는 학문적 저널입니다. 저널 타이틀에서 볼 수 있듯이 본 저널을 슬로베니아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슬라보 지젝(Slavoj Zizek)의 업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문화 이론의 엘비스”(“The Elvis of cultural theory”), “막스 형제”(“the Marx brother”)에서 예상할 수 있는 그런 풍자적인 모습에도 불구 하고 동시대의 대중 문화와 정치에 대한 난해하지 않은 접근 방법으로 지젝은 막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끌어 왔습니다.

With a desire to avoid "how many Žižeks can dance on the head of a pin?" types of debate, and mere hagiography, IJŽS aims to provide a valuable resource for those interested in his inimitable brand of critical thought. Just one small indication of Žižek's wide appeal is apparent from the diverse nature of IJŽS’s Editorial Board and the Journal will be devoted to engaging with the substantive and provocative implications Žižek’s work has for a range of academic disciplines.

IJZS는 단순히 위인전과 같은 접근이나 “얼마나 많은 지젝이 핀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출 수 있을까”와 같은 논쟁을 피하고 그의 독특하고 비평적인 사상에 대한 관심이 있는 가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지젝의 폭 넓은 주장에 대한 작은 암시는 IJZS의 편집 위원회의 다양한 구성으로 볼 수 있듯 다양성을 지향하는 것이 명백 하며 본 저널은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중요하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지젝의 업적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For some, the notion of a journal devoted to the work of a theorist very much alive and intellectually kicking is discombobulating. That death should be a prerequisite for sustained scholarly interrogation of a patently substantial body of work, however, is perhaps stranger still. In an interview with one of the many journalists interested in packaging Žižek for mass consumption, Tony Brown of the Editorial Board has pointed out that:

일부 저널의 견해는 이론가 작품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기도 하지만 일부 지적으로 중요한 작품은 혼란스럽기도 할 것 입니다. 이는 한 이론가의 중요한 업적에 대한 학문적 의문을 지탱하기에 필수 적인 이론가의 죽음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 입니다. 대중 소비에 대한 관점에서 지젝을 평가하는데 관심 있는 많은 저널리스트들 중의 한 사람의 인터뷰에서 편집 위원회의 토니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습니다.

Žižek is alive, which allows him to answer back. Derrida once claimed that people treated him as though he were dead before he actually died, since they were too ready to sum up the import of his work. Žižek always resists such encapsulations of his work and forces us to carry on thinking. He readily challenges people trying to sum him up. Hence his presence on the Board of the journal is unsettling rather than anything else - unsettling in a positive way. Anyone who tried to pin him down would be beating him up, intellectually speaking. Since Žižek is very alive he is able to kick back, interrupt encapsulations, celebrations, as well as criticisms.

“지젝은 살아 있고 그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다. 데리다는 사람들이 그를 마치 그가 실제 죽기 전에 죽은 것처럼 다뤄지면 그 준비가 지나쳐 제대로 평가 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젝은 항상 그런 그의 일에 대한 평가 받는 것에 저항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계속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그를 평가하려는 시도를 쉽게 용납한다. 그래서 그의 존재가 다른 어떤 것과 달리 긍정적인 방향으로 심한 논쟁거리가 되도록 하고 있다. 그를 평가하려는 사람은 아마도 그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살아 있고 심하게 반박할 수도 평가 중간에 반박할 수도 찬사를 할 수도 그리고 비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Žižek thus defies easy categorisation but the importance of his contribution to contemporary cultural theory is clear. The fact that his success is largely built upon a consistent examination of ideology forcefully belies claims that we now live in post-ideological times. Moreover, his seemingly irrepressible urge and inexhaustible ability to articulate theory at length, in depth, and with manifold entertaining examples, offers significant hope for those seeking respite from the cultural tinnitus of pervasive soundbites.

그래서 지젝은 그런 범주화에 강한 반박이 가능지만 동시대의 문화 이론에 대한 그의 중요한 기여는 명백합니다. 그의 성공이 일치화된 이데올로기의 시험 위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현재 포스트 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주장에 모순이 되며 또한 깊이 있고 폭 넓은 각지각색의 오락적인 예로 분명히 표현하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능력과 견딜 수 없는 그의 충동은 널리 퍼지는 연설문의 문화적 귀 울림으로부터의 단절에 대한 중요한 희망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08.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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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우리시대 지식논쟁'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9298.html).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이란 주제로 세 차례 정도 지면이 할애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거기서 내가 맡은 역할을 지젝에 대한 '지지' 논변이다. 주제의 선정 취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시대 지식논쟁 / 지젝 신드롬의 허와 실 ① 이유있는 열풍

철학에도 유행이 있다면,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최신 유행은 슬라보예 지젝이다. 모든 첨단 유행이 그러하듯이 지젝 또한 시대의 상식을 파괴한다. 마르크스, 헤겔, 라캉을 접붙인 그는 독일 고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뒤, 이를 디딤돌 삼아 다시 현대 철학의 새로운 사유를 개척하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정치 실천적 철학자’의 전형이기도 한데, 고국 슬로베니아에서 1990년 대통령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국내에서도 지젝 열풍은 심상찮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됐는데, 2000년대 들어 그가 직접 쓴 책만 10권 이상 번역·출판됐다. 대단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겨레>는 이번주부터 이 ‘지젝 신드롬’의 속살을 파고들려 한다. 그의 사유에는 과연 새로운 영감으로 삼을 만한 자양분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난해함 빼고는 건질 게 없는 서구적 언어 유희에 불과한 것일까? 지젝의 저작을 국내에 번역·소개하고 관련 논의를 이끌었던 학자들이 그 물음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놓는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이현우 박사가 첫 번째 글을 썼다. 그는 지젝의 사유로부터 우리 시대의 이념 지형을 이해하고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레닌의 혁명 전략마저 넘어서는 전복의 기운이 지젝에게 있다는 것이다.(안수찬 기자)

한겨레(08. 05. 24)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 ‘철학계 괴물’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괴물입니다”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다. 자신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을 경탄과 함께 읽어본 독자라면 ‘당신도 인간인가?’란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 철학계의 이단아’라고도 하는 슬로베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 슬라보예 지젝이다. 아예 그의 이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술잡지가 나올 정도로 지난 20년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엠티브이(MTV) 철학자’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많은 책을 써낸 철학자, 그가 지젝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독자들까지도 그의 책을 다 따라 읽는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매년 두어 권씩 번역돼 나오는 ‘한국어 지젝’에만 한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런 이유만으로도, 한 비판자의 표현을 빌리면, ‘지젝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젝은 흔히 ‘슬로베니아 라캉주의 헤겔주의자’라고 불리지만 거기에 마르크스와 대중문화가 이론적 틀로 더해진다. 어떤 저자를 읽기 위해서 독일 관념론과 라캉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주의와 현대 대중문화에 ‘정통’해야 한다면 보통은 다른 저자를 알아보는 게 낫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지젝은 매혹적이다. 그는 가장 난해한 두 사상가, 헤겔과 라캉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헤겔을 어떻게 라캉으로 읽을 수 있으며, 반대로 라캉은 어떻게 헤겔로 읽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독해가 우리 시대의 이념적 지형과 대중문화를 이해하고 돌파하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매혹은 동시에 그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그의 담론이 세련된 라캉적 분석과 덜 해체된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정신분열적으로 분열돼 있다는 비판은 그의 이런 작업방식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 옆에는 그의 철학 ‘퍼포먼스’가 고상한 철학을 대중문화로 더럽힌다는 비난도 빠지지 않는다. 독창성도 진정성도 없는 ‘철학적 재담꾼’ 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세기적인 ‘재담꾼’을 갖는다는 게 과연 불행한 일인지? 가령, 급진적 철학자로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가 제시하는 ‘유토피아’에 관한 재담은 어떠한가?

지구의 종말을 상상하기는 너무도 쉽지만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점점 더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패러독스라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그럼에도 우리가 유토피아를 발명해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요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곧 ‘불가능한 이상적 사회’와는 무관하다. 유토피아는 어원 그대로 ‘자리가 없는’ 공간의 건설이다. 왜 자리가 없는가? 기존의 사회적 좌표계 내에서는 자리가 할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제스처의 사례로 지젝이 자주 드는 것은 1917년의 레닌이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자유주의적 ‘선택의 자유’ 대신에 선택 자체를 선택하는 데 있다. 곧 정치적 ‘활동’이 아닌 ‘행위’란 현 상황이 제시하는 강요된 선택 대신에 그러한 ‘정치적 계산’을 돌파하는 어떤 광기이다. 러시아 혁명을 가능하게 한 것은 불가능을 돌파한 레닌의 바로 그러한 ‘광기’였다. 하지만 레닌도 혁명 이후에는 대중의 창조적 역량에 대해 불신하면서 전문가 집단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곧 스탈린주의로의 길을 예비하지 않았던가? 거대 은행이 없다면 사회주의는 불가능하다, 자본주의적 기구인 중앙은행을 더 크게, 더 민주적으로 국가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 지점에서 국가의 관리에 대한 레닌의 ‘전체주의적’ 프로그램을 우리 시대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읽기를 제안한다. 중앙은행의 자리에 오늘날 ‘일반 지성’의 상징인 월드와이드웹을 갖다놓아 보자는 것이다. 자본주의 신경제의 첨병처럼 보이는 월드와이드웹에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폭발적인 잠재력이 있지 않은가? 따라서 이 경우 레닌적 제스처는 국가기구를 통해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과 싸우는 대신에 그것을 사회화(국유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사회주의=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레닌의 공식은 ‘사회주의=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으로 변형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중앙은행 사회주의’에 대한 레닌의 전망을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월드와이드웹에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재담’이다.

물론 그의 재담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젝은 또한 ‘소유의 종말’이 예견되는 디지털시대의 ‘탈소유 사회’에 대한 첫 번째 모형을 바로 스탈린시대 소련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서열관계도 없는 평등한 사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스탈린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무계급 사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권력서열’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와 기술관료, 군대 등의 순으로 정확하게 서열화된 사회였다. 거기서 지배계급은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통제수단, 물질적·사회적 특권에 직접 접근이 가능한가라는 ‘접속 가능성’으로 결정되었다. 바로 오늘날 현 단계 자본주의에서도 특권이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라 뒤에서 조정하고 교육과 경영·정보 등에서 각종 특혜를 누리는 것에서 확인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면하게 된 선택지는 사적 소유(사유재산)와 사적 소유의 사회화(국유화) 사이의 낡은 마르크스주의적 선택이 아니라 ‘위계적인 탈소유 사회’와 ‘평등한 탈소유 사회’ 사이의 선택이다. 여기서 선택은 물론 자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이다. 지젝은 다시 레닌적 제스처를 끌어온다. 그가 보기에 레닌주의의 핵심적 교훈은, 당이라는 조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 말로만 하는 정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비판은 ‘혁명 없는 혁명’을 원하는 것과 다름없는 ‘신사회운동’에도 가해진다. 과연 폴리페서(정치교수)들처럼 체제에 편승하거나 페미니즘에서부터 생태주의와 반인종주의에 이르는 신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사회적 개입’의 방법이 따로 없는 것일까?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운동의 한계는 보편성이 결여된 ‘단일 이슈 운동’이라는 데 있다. 곧 사회적 총체성과 연관돼 있지 않다는 것이며, 중도좌파와 좌파 자유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다. 백포도주냐 적포도주냐 하는 선택은 ‘근본적인’ 선택이 아니다.

지젝이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반복이 뜻하는 것은 레닌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레닌을 반복하는 것은 레닌이 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패한 것,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들이 한갓 ‘혁명을 연기하는 배우’의 제스처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레닌을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괴물’의 광기와 열정을 지지한다.

08. 05. 24.

 

 

 

 

P.S. '가장 어렵고 가장 대중적인'이란 수식어구가 타이틀에 붙었는데, 지젝을 수식하는 거라면 절반만 옳다. 그는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이지만, '가장 어려운' 철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어려운 것은 헤겔과 라캉 같은 가장 난해한 철학자/정신분석가를 다루기 때문이지 그의 탓은 아니다(그들과 비교하자면 지젝은 너무나도 쉬운 철학자다! 나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게다가 지젝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자이다. 일부러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 좀더 깔끔한 번역본들이 나온다면 지젝 독해의 어려움은 상당 부분 해소될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문에서 레닌과 관련하여 다룬 부분은 주로 <혁명이 다가온다>의 10장 '탈정치에 반대하여'를 정리한 것이다. 지젝의 혁명론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다는 애초의 주문도 있었고, 국역본의 이 대목이 부정확하게 번역돼 있어서 교정 차원에서 언급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지젝이 만난 레닌>이 곧 나올 줄 알았다면 생각을 달리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12장 '사이버 스페이스 레닌?'이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쉽게 번역돼 있기 때문에 이해에 어려움을 주지 않는다. 만약 번역본이 좀더 빨리 나왔더라면 나는 다른 대목에 초점을 맞추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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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지젝인가?
    from Dia's time capsule 2008-07-18 22:58 
    도착증자는 정신분석의 주체(환자)가 아니다. 그들의 도착적 향락은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인권이거나 자본에 의해 개발되어야 할 상품이지 결코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6 우리의 모든 개별적인 특징과 특정한 욕구, 관심, 믿음을 제거했을 때 남겨지는 것이 바로 주체이다. 37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토니마이어스 도서관에 다녀오니, 집이 잠겼다. 열쇠도 없고해서 극장엘 왔다. 5시에 인디아니존스를 본다. 지금 여긴 극장. 인디아나 존스에대한 기억?..
 
 
김상호 2008-05-23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앙은행에 대한 논제는 흥미롭군요. 제가 중앙은행에 다녀서 그런거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중앙은행의 지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당히 기괴하다고 생각하고 있읍니다. 국가/시장의 이분법에서 양자 모두 혹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게 바로 중앙은행이죠.
예전에 제가 술먹고 혼자 망상을 한적이 있어요. 주인 담론은 고전적인 경제학 담론(빗금친 주체의 자리엔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 주인기표는 보이지 않는 손, 균형이라는 이데올로기) 등등이죠. 문제는 삑사리가 났다는 ㅠ.ㅠ

로쟈 2008-05-24 00:06   좋아요 0 | URL
라캉-지젝을 좋아하시는군요.^^

김상호 2008-05-2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지 않는다면 책을 어찌 번역하겠읍니까 ^^

로쟈 2008-05-24 00:37   좋아요 0 | URL
아, '히치콕을 포기하고 라캉을 구할 사람'이시군요.^^

송연 2008-05-2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과 생각>에서 이 주제로 다음주부터 진행한다고 했을때 로쟈님이 나오시겠구나 하고 예상했었지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로쟈 2008-05-24 14:30   좋아요 0 | URL
제가 적격자라고 하긴 어렵지만, '전문가주의'라는 게 또한 反지젝적이란 생각에 나서게 됐습니다...

yoonta 2008-05-2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공개적인 논쟁의 중심에 서시는 군요^^

지젝의 혁명론은 저에게도 충분히 흥미롭습니다. 지젝이 소환하고있는 레닌은 그러니까 월드와이드웹을 국유화된 중앙은행처럼 사용하는 그러한 레닌이라는 말씀이시군요. 인터넷과 같은 소통수단을 사용하면 기존사회주의국가가 가졌던 국유화의 문제점을 극복할수있다는 주장인데 그런데 결국 문제는 혁명이후 권력을 누가 가지게 되는가가 아닐까요? "물론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두 번째 요소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인터넷은 해방적 잠재력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본문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신사회운동과같이 지엽적이지 않은 "보편적 사회운동"이 되려면 '당'을 통한 정치활동이 필수적이라는 논리가 도입되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결국 권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당에 의해서 독점되게 된다는 건데 이건 결국 구사회주의의 "당"들이 했던 행태를 반복할수있게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월드와이드웹"을 통한 권력/당이기 때문에 그러한 집중화된 권력은 제어가능하다라고 이야기할수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지점에서 의문은 여전히 남네요. 권력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집중화되고 견제받지 않으면 부패하기 때문이지요. 지젝이 이야기하는 당이 정확히 어떤 당인가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레닌주의적 전위당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주장을 수용할 수 있는 민주적인 의사소통 구조를 확보한 당인가요?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맑스주의나 레닌주의의 이러한 비민주적 성격을 비판했던 아나키즘적 조류로부터의 비판을 면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물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중앙집중적 당이 없이 어떻게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이룰수있는가? 하는 반론이 있을수 있죠. 저도 이런 반론에는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지엽적이고 이슈화된 조직화되지 못한 힘으로 이런 운동을 성공시키기는 거의 불가능죠.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조직화되고 집중화된 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 이를 견제할 수단은 또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혁명의 아포리아가 있는 것 아닐까요?

로쟈 2008-05-24 20:13   좋아요 0 | URL
'논쟁'이란 표현은 과하구요, '지젝 신드롬'이란 표현 자체에 문제는 다 제기돼 있는 것이죠(이 또한 '한국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마디즘' 논쟁과 마찬가지로). 지젝이 이야기하는 당이 정확히 어떤 당인가는 지젝에게 물어보셔야 하는데요.^^ 제가 생각해보는 것은 1000만의 대의원을 가진 소비에트가 인터넷시대에는 가능하지 않느냐는 것이고요, 그것이 현행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건 많이들 지적하는 것이죠. 더불어 '혁명의 아포리아'에 대해서는 그러한 '실패' 혹은 '부패의 가능성'을 의식한다는 게 일단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걸 의식하고 있다면 집중화된 권력도 조금 다른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요? 레닌이 실패한 지점에서, 그가 잃어버린 기회를 반복한다는 것을 저는 그런 쪽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늘빵 2008-05-24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에서 로쟈님 글 봤습니다. :) 사진이 알라딘에 올라왔던 것보단 못하게 나왔어요. 알라딘엔 살짝 귀엽게(?) 나오셨는데. 전에 딸기님이 찍으셨던.

로쟈 2008-05-24 20:15   좋아요 0 | URL
워낙 사진을 잘 안 찍는데가 증명서 사진을 피해달라고 해서 강의하는 모습을 찍은 스냅사진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드팀전 2008-05-26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젝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전적으로 로쟈님 덕분이었습니다.물론 여전히 어렵고 스스로 이해의 폭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생깁니다만 다 이해하지 않고 가면 또 어떡겠나 싶습니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언제였나 싶게 먼지가 덮이는 것처럼 낙천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갑니다.
제가 지젝을 만난 시점은 개인적으로도 시의적절했습니다. 왠지 예상치 않았던 뒤에서 날아오는 크로스카운터처럼 짜릿하더군요.^^ 로쟈님이 대중적인 지젝 책을 좀 써보심은 어떨지 모르겠어요.더 많은 팬클럽 가입을 위해 쉽게 쉽게....

로쟈 2008-05-26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기여한 바가 있군요.^^ 일단 발을 들여놓게 되면 일년에 두세 권씩은 읽어줘야 합니다!^^; 책을 쓰고 싶은 욕심은 저도 있지만 지젝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아직 감이 안 와서요.--;
 

우리에게 5월은 무엇보다도 '80년 광주'의 5월이지만, 유럽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에게 5월은 '68년의 5월'이다. 올해 40주년을 맞이하여 그곳에서도 '기억의 전쟁'이 뜨거운 듯하다. 이에 대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모처럼 지젝에 관한 언급도 있기에 '로쟈의 지젝'으로 분류해놓고. 사실 그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장을 며칠전 읽기도 했다. 적어도 내가 읽은 대목(10장)에서 국역본은 차라리 '오역서'에 가깝다. 예전에 대충 넘겼던 것일까? 혁명은 다가오되, 저만치 비켜가는 듯하다...  

경향신문(08. 05. 13) [문화수첩]누가 ‘68혁명’을 끝났다 하는가

13일은 프랑스의 ‘1968년 5월혁명’에서 꼭 거론되는 날이다. 낭테르대 학생들이 대학당국의 권위주의에 대항해 3월22일 대학본부를 점거하며 시작된 학생운동에 노동자들이 총파업으로 가세한 날이기 때문이다. 80만명의 인파가 파리 시내에서 드골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경찰의 가혹한 진압에 맞서 싸웠다. 이후 68혁명은 미국, 독일, 일본 등으로 확산되며 전 세계를 변혁의 열기로 가득 채웠다.



그 날로부터 꼭 40년. 역사가 되기에는 너무나 가깝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도 ‘기억’의 전쟁터가 되고 있다. 시발점은 지난해 프랑스 대통령이 된 니콜라 사르코지다. 그는 당선 직후 “68년 5월 이래 좌파들은 ‘성과’와 ‘노력’을 거부하고 ‘노동’의 가치를 내던졌다”며 68 청산을 주장했다. 올 들어 프랑스에서는 68과 관련한 책이 수십 종 출간됐다.



68 당시 주역인 다니엘 콩방디 현 유럽의회 의원처럼 “두 번 이혼한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된 것도 68의 유산 덕”이라고 68을 옹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68 때 공산당원으로 참여했으나 대선 때 사르코지 지지선언을 한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처럼 “68은 파묻어야 할 유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국내에서도 판박이 기억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언론들이 68혁명 40주년 특집에서 68세대와 한국의 386세대를 연결지으며 이들의 시대는 끝났음을 공언하고 있는 반면, 또 다른 쪽에서는 ‘68혁명을 매장하려는 시대’ 등의 칼럼으로 이를 반박한다.

68년 5월 ‘거리의 정치’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드골이 곧 권력을 회복했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갔으며,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감으로써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간 듯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성과인 프랑스 대학 국유화는 지금 신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게다가 긴 관점에서 68혁명은 신자유주의의 출현을 촉발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영국 BBC 월드 라디오가 지난 7일 방송한 ‘거리의 철학(Philosophy in the Streets)’을 들어보자. 23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는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질 들뢰즈, 기 드보르 등 68이 낳은 당시로선 ‘차세대’ 철학자들의 육성 강연·인터뷰와 지금 활동 중인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의 목소리를 담아 “68이 기획했던 거리의 정치는 실패했지만, 거리의 철학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 세계의 철학과 미학, 정치, 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새로운 혁신과 변화를 이끈 68세대의 뒤에는 철학이 있었던 것.



바디우는 “68년 5월의 의의는 새 가능성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가능성의 창조에 있다”며 “사르코지가 68이 끝났다고 했지만, 철학은 68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줄 정치적인 의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지젝은 “68년 5월의 메시지는 절대적으로 생생히 살아 있다”면서 “우리는 여전히 급진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했다. 방송은 지젝이 인용하는 68혁명의 슬로건과 당시 거리의 함성을 오버랩하며 맺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다시듣기 http://www.bbc.co.uk/worldservice/aboutus/2008/05/080501_philospophy_streets.shtml )(손제민기자)

08. 0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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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5-13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법처리한다는 협박이 드디어 공식적으로 터졌습니다.

로쟈 2008-05-14 00:1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70-80년대로 회귀하는 모양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1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글뤽스만은 70년대 말부터 우익으로 전향했는데 이제 아예 사르코지를 지지했군요.
우리나라 대학생들은(하기야 유치원 때부터이지만)선후배 따지며 위계질서 세우는 악습 좀 고쳐야 합니다.그리고 대학 안나온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 처음 본 사람에게 학번 좀 묻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분위기 진짜 개판됩니다.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엔 68혁명과 같은 문화혁명이 없으니까 진보니 뭐니 떠드는 인간 중에서도 나이 따지고 여성차별하고...아이고...말하기도 싫어...우리나라 학교가 최소한 중국이나 일본 정도의 선후배관계만 되어도 좋겠습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이 선배한테 예의지키듯 부모를 대하면 모두 효자효녀가 될걸요.

로쟈 2008-05-14 00:17   좋아요 0 | URL
신입생 얼차려도 여전한 걸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군사문화의 잔재라고들 하는데, 꽤나 오래가는/오래갈 듯싶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5-14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봉 씨가 서경식 씨에게 형님이라고 하겠다고 말하니 서경석 씨가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죠.서경식 씨 말이 맞습니다.그런데 저는 김상봉 씨같은 분도 형님 병에 걸렸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방정환 선생이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써야 한다고 했죠.이 예절만 지켜도 우리나라 특유의 폭력적 위계문화는 완화될 겁니다.
그리고 386이니 475니 하는 용어 안쓰기 운동이라도 해야지 원...특히 70년대에 대학물 먹은 이들이 전인구의 몇%나 되었다고...그리고 운동선수가 신인이면 신인이지 고졸신인... 꼭 학력을 표기해야 하는지...

로쟈 2008-05-14 23:21   좋아요 0 | URL
저도 <만남>에서 그 대목은 읽었습니다.^^;

섬나무 2008-05-14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에서 김호기 교수가 이번 사태로 등장한 세대를 2.0세대라고 했는데요 어쩌면 서경식씨는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다시 희망을 보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프랑스가 68세대 이후 '68세대를 매장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 말입니다.
'2.0세대는 불편한 것은 참지 않는다 그들의 촛불집회는 쇠고기에 앞서 4.15 학교 자율화 조치가 있다는 걸 간과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말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는 68혁명의 슬로건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하여간 일반인인 저에게도 이번 현상은 매우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로쟈님 전 요즘 애들이 독서랑은 거리가 먼 애들이란 점에 특히 필이 꽃혀 있습니다.ㅎㅎ

로쟈 2008-05-14 23:01   좋아요 0 | URL
요즘 20대는 절망적이라는 설이 많은데, 자라나는 10대들은 좀 다른가 보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5-1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하튼 중년 이상 세대보다는 10대 20대들이 순수한 것은 사실입니다.문제는 이미 청소년 연령대 쯤이 되면 학교체벌을 통해 부당한 폭력에 순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는 거죠.
우리나라에 68혁명 같은 것이 일어나면 학생들은 먼저 학교체벌을 상징하는 존재(각 학교에 한두명 씩 있다는 미친 개...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는...)들을 조리돌림해야 합니다.물론 선배가 후배를 체벌하는 관행 없애기도 빼놓을 수 없죠.

로쟈 2008-05-14 23:22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조리돌림'^^

노이에자이트 2008-05-14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리돌림한 뒤에 학교 나무에 묶어놓고 자아비판시킨 뒤에...음...그 다음엔 뭐할까요?

로쟈 2008-05-15 00:08   좋아요 0 | URL
내빼야 하지 않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5-1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에 묶어놨으니 못 내뺍니다.아...칠성판에 묶어놓고 그동안 학생들을 때린 도구-밀걸레 자루,각목,골프채,야구 방망이_등으로 되갚아 주면서 이렇게 외치도록 해야 합니다.이건 사랑의 매야!!! 퍽!!! 이건 사랑의 매야!!!퍽!!!

심술 2008-05-1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두 분 다 너무 웃기십니다. 코미디언 하셔도 되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5-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심각한 이야기만 하는 것도 재미없어서 웃겨봤어요.하지만 아직도 구타,체벌이 있다는 현실은 슬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