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754). 강의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완독을 겨울방학으로 미뤄두었는데(하지만 방학땐 '계절학기' 강의가 있다!) 곁들여 읽어야 할 책도 많다는 걸 리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컬처뉴스(07. 12. 05) 마르크스가 불러온 데리다의 유령'들'
“선생님의 저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난해하다’, ‘도통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요? 만약 정말로 제 글이 이해가 안 된다면 당신의 한국어 번역작업이 어떻게 가능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소장학자들과 작가들에게서 때때로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글들을 봅니다.”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제 글이 지극히 난해해서 이해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글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니요?”
국내의 한 일간지(<조선일보>, 1997년 1월 20일자)에 실린 이 대담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참 웃긴 대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 대담은 일종의 ‘징후’였다. 자크 데리다(1930~2004)가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징후.(*참고로, 이 대담은 김성도,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 수록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996년 『그라마톨로지』(1967)와 『입장들』(1972)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이후 데리다의 국역본들은 끊임없는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번역과 쉬운 용어선택으로 번역의 전범을 보여줬다”(<조선일보>, 1996년 2월 9일자)던 『그라마톨로지』마저 오역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퇴출’된 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화젯거리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데리다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유령’ 취급을 받아왔고, 3년 전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국역된 데리다의 1993년작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렇게 우리와 인연이 끊길 뻔한 데리다(의 유령‘들’)를 성공적으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진태원이라는 소장학자의 도움으로. “자네는 학자야, 그것에게 말을 걸어보게.”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재출간(원래 이 책은 지난 1996년에도 국역된 바 있다)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이 책이 ‘읽을 만하게’ 다시 소개됐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의 유령이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함께,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돌아왔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 덕택에 우리는 이제야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반겨야 할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할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였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시기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에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호출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출을 “데리다가” 수행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면/받아야 한다면 그건 명확히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약 72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책들 중 아무 것이나 지금, 이 시기에, 매끄럽게 국역된다고 해서 (예상컨대 1994년작 『우정의 정치학』이라면 예외겠지만) 주목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데려왔다면, 한국에서는 마르크스가 데리다의 유령‘들’을 불러온 셈이라고나 할까.
왜 마르크스인가(혹은 왜 마르크스의 유령‘들’인가)? 무엇보다도 그건 데리다로 하여금 마르크스의 어떤 정신/유산을 불러오게 했던 바로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열 가지 재앙들’이라고 말한 대규모 실업, 무자격 시민들(홈리스, 망명객, 무국적자, 이민자 등)의 집단적 배제, 무자비한 경제전쟁, 자유시장의 무능력, 외채 누적, 군수산업과 군수무역, 핵무기의 확산, 종족/인종간 전쟁, 마피아 같은 환영국가의 권력 증대,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한계들이『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됐을 때보다 훨씬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열 가지 재앙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꼭 마르크스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를 단지 지나쳐버릴 수는 없으며,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기나긴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보는 있다. 복수(複數)로 표기된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 특정한 유령/정신(들)을 선별해야만 한다.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데리다가 이 유령‘들’을 떼어내야 한다고/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는(옮긴이의 생각과는 달리) 좀 불분명하지만, 이 유령‘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데리다가 5장에서 다루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2부의 ‘마르크스-슈티르너 논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1부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선별작업을 만끽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먼저 『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4장에서 주로 다뤄지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은 여러 종의 국역본이 존재하며 번역 상태도 양호하다.
그리고 5장에 도전할 때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1993) 국역본 2장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여담이지만, 발리바르는 현존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그 사유방식이 가장 데리다와 비슷하다. 그러니 데리다의 마르크스 애도 작업, 혹은 데리다 식의 마르크스 읽기의 이론적 효과를 만끽하고 싶은 분들은 발리바르를 같이 읽으시면 된다(이런 점에서 추천할 만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저서는 얼마 전 국역된 『대중들의 공포』이다).
마지막으로, 왜 데리다의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인가? 우리가 맨 처음 알게 된 데리다는 ‘문학비평가’(특히 ‘예일 마피아’의 숨은 대부)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의 데리다는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창기의 저작들, 그도 아니면 적어도 『다른 곶』(1991)부터 데리다는 충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데리다가 정치에 대한 사유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드러낸 것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데리다(혹은 데리다의 또 다른 유령)가 있으니 그건 바로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이다. 특히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공포와 전율』(1843)을 꼼꼼하고 읽고 있는 『죽음을 선사하기』(1999) 전후의 데리다가 그러한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만큼이나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역시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이런 데리다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과 더불어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에게 도착한 책 중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를 엿볼 수 있는 텍스트는 1997년작 『환대에 대하여』인데,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은 읽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유령이 하나가 아니듯이, 데리다의 유령 역시 하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말에 따라 선왕의 유령에게 말을 건 호레이쇼에게 마셀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존엄한 혼령인데, 우리가 너무 난폭하게 대한 것 아닐까?”(『햄릿』, 제1막 1장). 우리에게 그것은 누구/어떤 유령일까?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이에 대한 대답은 충분히 데리다를 읽지 않았던(그런데 그 누구가 데리다를 충분히 읽을 것인가) 우리가 우리 몫의 애도 작업을 충분히 수행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데리다를 따라서, 데리다의 유령‘들’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까지 얘기할 수 있을 때에 말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06.
P.S. '윤리학자' 데리다는 물론 레비나스를 읽는/읽은 데리다이다. 두 사람을 다룬 표준적인 책은 사이먼 크리칠리의 <해체의 윤리학: 데리다와 레비나스>(2판, 2000)이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은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데리다가 <죽음을 선사하기>에서 말을 건네고 있는 철학자는 체코의 얀 파토치카(1907-1977)이다. 지난 겨울 영역된 그의 책 몇 권을 구해놓고 번역을 주선해볼까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윤리학자 데리다의 유령과 함께 파토치카의 유령도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