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사유들'의 여섯번째 손님은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이다(이름은 나오는 책마다 다르게 표기된 바 있다). "'새로운 인간’ 향해 계몽을 계몽하자"란 게 기사의 타이틀이다. 시리즈를 옮겨놓기로 했으니 하던 일은 계속하는 수밖에.

대학신문(07. 10. 15)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김석수교수_경북대 철학과)

07. 10. 14.

P.S. 지난 2005년 방한시에 강연한 내용들이 최근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세계의 밀착>(철학과현실사, 2007). 개인적으로 슬로터다이크의 책들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엔 사정이 다를지 모르겠다. 궁금한 건 번역본 <냉소적 이성 비판>의 제2권이 언제 마저 출간되느냐는 것. 반쪽짜리 책이라 구입도, 독서도 미뤄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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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의 이번주 꼭지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문학평론가이자 가라타니 번역자로 잘 알려진 조영일씨의 소개를 옮겨놓는다.

대학신문(07. 10. 0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⑤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평가로서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또는 사상가)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비평가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물론 얼마 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해 한국문단을 한동안 긴장시킨 바 있지만, 그런 주장은 도리어 그가 문학을 완전히 떠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에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사상서들이 그의 주저로 간주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에서의 문학비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철학이나 사회사상 쪽으로 관심대상을 넓혀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라타니 자신은 비평가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학자이기보다 비평가이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개념을 좇기보다 문제를 좇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상황이 각각 존재했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전자의 시대였기에 후자의 시대가 가능했다는 의미다. 지난 세기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런데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사가 개념창조의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 간에 이뤄지는 힘겨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들의 배치에 의해서다. 즉 ‘이항대립’을 통해 구축되기 마련인 개념들은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이전 개념군이 파괴되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군이 자리잡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르는 철학에는 무의미한 형식적인 전복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철학과 달리 개념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들에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개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관심은 항상 개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를 향한다. 다른 말로 비평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낳는 문제(조건)들과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로지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비평을 ‘대립’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를 통해 ‘개념의 노동’(헤겔)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소개돼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상가 중에 가라타니만큼 널리 읽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책을 그토록 탐독해온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라타니의 책은 여느 철학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슷한 한자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중심개념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개념(핵심용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대신에 기존 개념들의 의미를 조금씩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쳐가기에, 딱히 철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그 흐름을 쫓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이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혹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지적 임팩트가 제거된 요약본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가라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들이 마냥 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화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전환이나, 생산자 투쟁에서 소비자 투쟁으로의 이행,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제비뽑기’, 점진적으로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룩해가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것들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동’시킨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가라타니 철학’이라는 실체와 접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가라타니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라타니를 읽은 후 이제 더 이상 이전 같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평의 철학이란 바로 이처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세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상가는 가라타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비평과 한국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조영일_문학평론가)

07.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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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2008-01-04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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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은 알랭 바디우를 네번째로 다루고 있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05). '해체주의 시대에 보편적 ‘진리’ 가능성 제시해'가 타이틀이다. 국내에는 그의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지만(<조건들>을 포함해 네 권이 번역돼 있다) 아직 <존재와 사건>(1988) 같은 주저는 번역돼 있지 않다(영역본도 2005년에야 나왔다). 하여 아직은 '미-래의 철학자'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지젝은 아감벤과 바디우 등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는다. 

대학신문(07. 09. 22) 21세기의 사유들 ④ 알랭 바디우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e^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e′)’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홍기숙 강사/숭실대 철학과)

07. 10. 01.

P.S. 마지막 문단 같은 건 좀더 간결하게 씌어지는 게 어땠을까 싶다(바디우의 문장들이 그러한가?). 바디우 입문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그 사이에 더 좋은 책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피터 홀워드의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2003)이다. 지젝이 서문을 쓰고 있는데, 460쪽이 넘는 묵직한 책이다. 아래는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젝과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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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10-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거장의 밀담 사진이 자못 진지하네요.^^ 두 사람이 서로 친하다죠. 스피노자와 니체주의자들이 휘저어놓은 세상을 헤겔주의자인 지젝과 플라톤주의자인 바디우가 대응책을 논의하며, 서로 연대를 모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잡담하는 걸까요. ㅎㅎ 지젝이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철학계에서의 바디우의 무게감에 비해, 국내에는 그의 저서나 이차문헌의 번역이 부진한 듯합니다. 칸토르의 집합이론과 연관된 그의 '다수'철학의 난해함 때문도 있겠지만, '대중성' 내지는 '시장성'이 다소 떨어져서가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순수철학에의 고집은 언젠가 국내에서도 빛을 발하리라 기대해봅니다. 그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네요. 내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철학자 대회>에 바디우도 참석할 예정이라는데, 벌써부터 그의 강의가 기다려집니다.^^

로쟈 2007-10-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있다니까 조만간 주저들이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통가능한 것이 될지는 기다려봐야 할 것 같고요...

자꾸때리다 2007-10-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박사학위 딴 분들이 서용순, 박정태, 홍기숙... 이렇게 되지 않나요?

로쟈 2007-10-03 11:23   좋아요 0 | URL
저보다 잘 아시네요.^^ 여하튼 몇 분 된다고 하네요...
 

시간만 된다면 매일같이 한 명의 새로운 저자와 그의 책들에 대해서 메모해놓을 수 있지만 (김갑수의 <나의 레종 데트르>의 표현을 빌면) 그런 일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 아니어서 대개의 아이템들을 나는 참아두거나 무시해둔다. 다행히 추석 연휴를 맞아 잔뜩 '밀린 빨래들'처럼 해야 할 일들을 쌓아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투리 시간도 '풍족'한지라 건수를 몇 개 올릴 수는 있겠다.

 

 

 

 

아무 책이나 펼쳐도 책으로 가는 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이어져 있지만 오늘 고른 건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의 한 대목이다(이 책 또한 제대로 읽자면 부록까지 포함해 12번의 강의는 필요하다). 1장 '동이 서를 만날 때'에서 지젝은 '사랑의 역설'을 말하면서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흥미로운 대비를 제시하고 있는데, 주로 선불교에 초점이 맞춰진 그의 불교론은 이전에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에서도 읽어볼 수 있었다. 그걸 자세하게 '브리핑'하는 일도 의미있어 보이지만 역시나 "원고료로 살 수 없는 세상"이니만큼 당장은 참아두기로 한다. 대신에 읽을 건 말미에 등장하는 '사랑의 폭력' 혹은 '폭력적 사랑'에 관한 한 문단이다. 시작은 이렇다.

"사랑이 폭력이라는 말이 발칸의 저속한 속담 - "나를 때리지 않는 남자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다" -과 관련되는 것(만)은 아니다.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57쪽)

Antonio Banderas and Victoria Abril in Tie Me Up! Tie Me Down!

인용된 발칸의 속담은 영어로 "If he doesn't beat me, he doesn't love me!"이다(요즘 공개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가는 공인의 지위를 유지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얼른 떠오르는 영화는 발칸의 영화가 아니라 스페인 영화이다. 페도로 알모도바르의 도발적인 영화 <욕망의 낮과 밤>(1990)이 그것(원제목은 'Átame!'이고 영어제목은 'Tie Me Up! Tie Me Down!'). 그리고 물론 한국영화로는 장선우의 <거짓말>(1999)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한국영화로서는 '사랑의 폭력'을 다룬 드문 영화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은 이렇다: "Love is violence not (only) in the vulger sense of... violence is already the love choice as such, which tears its object out of its context, elevating it to the Thing"(33쪽) 

내용은 "사랑은 이러이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저러저러한 의미에서 폭력이다"는 것이다. 국역본은 이 대목을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인데, 그것은 폭력이 사랑의 대상을 맥락에서 떼어내어 대상(Thing)의 자리에 올려놓기 때문이다"라고 잘못 옮겼는데, 관계사 which의 선행사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문장을 도치구문으로 본다. 즉 "폭력은 이미 자체로 사랑의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로 보는 것이다. 결국에 '사랑=폭력'이라는 것이니까 대차는 아니지만 두 경우에 초점은 달라진다. 지젝의 말은 '폭력이 곧 사랑'이라는 게 아니라 '사랑이 곧 폭력'이라는 것이니까.

전체를 다시 옮기면 "사랑의 선택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숭고한 대상'으로까지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폭력'이란 말이 뜻하는 바이다. 가령, 추석맞이로 이번주에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에서 주진모(채인호)의 경우를 보자. 신윤동욱 기자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09/021015000200709200678012.html)를 잠시 따라가보면 영화는 이런 구도이다.

태초에 한 남자가 있었다. 소년 채인호(주진모)는 첫눈에 소녀 정미주(박시연)에게 반한다. 그리고 끝까지 이야기는 통속성의 공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소녀는 예쁘고 소녀의 집은 부자다. 산동네 소년은 괜스레 소녀를 괴롭히는 또 다른 소년과 싸운다. 소녀는 소년을 생일에 초대하지만, 하필이면 소녀의 집은 그날 망한다. 그리고 첫 번째 이별. 고등학생 인호는 또 싸운다. 하필이면 싸우다가 인호를 병으로 찌르는 본드쟁이 복학생은 미주의 오빠다. 그렇게 남자는 인호와 미주의 끊어진 인연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우연의 우연, ‘지나친’ 정공법이요 통속성의 기본이다. 미주의 본드쟁이 오빠는 노름쟁이 엄마를 껴안고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사랑의 맹세. “니가 내 지키도. 나도 니 지키주께.” 인호와 미주는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다.

여기서 순수한 사랑, 곧 순수한 폭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맥락(학교와 가족사)에서 박시연(정미주)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래 스틸사진들에서 시연을 바라보는 진모의 시선(위)이 건달을 향하는 진모의 주먹(아래)에 앞서는 보다 근원적인 '폭력'이다. 영화 <사랑>은 그 맹목적인 사랑의 끝을 향해서 단순무식하게 돌진해나가는 '순정'영화이다(예고편과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러하다).

다시 지젝으로 돌아와, 이어지는 내용: "몬테네그로의 민담에서 악의 근원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은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며, 모든 것에 편파성의 색조를 입힌다."(57쪽) 원문은 "In Motenegrin folklore, the origin of Evil is a beautiful woman: she makes the men around her lose their balance, she literally destabilizes the universe, colors all things with a tone of partiality."이다.

여기서도 떠오르는 영화는 몬테네그로 영화가 아니라 이탈리아 영화 <말레나>(2000)이다(http://www.youtube.com/watch?v=IPwX6PPSfPM). '세기의 미녀'라는 모니카 벨루치 주연의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말레나는 마을에서 모든 남성의 시선 끌어모으는, 그럼으로써 "주위의 남자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우주에 그야말로 불안정을 초래하"는 여인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2차 대전이 한창인, 햇빛 찬란한 지중해의 작은 마을. 매혹적인 말레나. 걸어갈 때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그녀를 훑어내린다. 여자들은 시기하여 쑥덕거리기 시작하고 곁에는 그녀를 연모하는 열세살 순수한 소년- 레나토가 있다. 남편의 전사소식과 함께 욕망과 질투, 분노의 대상이 된 말레나. 남자들은 아내를 두려워해 일자리를 주지 않고, 여자들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함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람들은 독일군에게까지 웃음을 팔아야 했던 말레나를 단죄하고 급기야 그녀는 늦은 밤 쫓기듯 어딘가로 떠나게된다. 소년- 레나토만이 진실을 간직한 채 마지막 모습을 애처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1년 후...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때쯤 말레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난다. 그녀의 곁엔 죽은줄 알았던 남편이 불구가 되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도 근원적인 폭력은 말레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폭력 이전에 말레나를 무자비하게 탈맥락화함으로써 '숭고한 대상'의 지위로까지 고양시키는, 소년-레나토의 순수한 연모의 시선에 자리한다. "이러한 테마는 1920년대 이래로 소비에트 교수법의 변치 않는 요소 중 하나였다.""섹슈얼티니는 본래부터 병리적인(patho-logical) 것으로서, 냉정하고 균형 잡힌 논리를 특수한 파토스로 오염시킨다, 성적 자극은 부르주아의 부패와 연결된 귀찮은 방해꾼이다, 라고 소비에트는 인민들을 교육했다."(57쪽) 

다시 말해서 소비에트 사회는 섹슈얼리티에 가장 적대적인, 그래서 가장 금욕적이며 무성적인 사회였다(라이히나 마르쿠제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유토피아가 성애적/향락적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관대한 성관념은 과연 진보적인가?). "실제로 1920년대에 소련에서는 성적 자극이 병리적 상태임을 심리-생리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유물론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사실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생지상주의적 관용에 비하면, 반페미니즘 성향의 소비에트의 연구 성과가 진리에 훨씬 가까운 것이다."

인용문에서 '성적 자극'은 'sexual arousal'의 번역인데, '성적 흥분'이 보다 적합하다고 생각된다. '병리적 상태'에 해당하는 것은 '성적 자극'이라기보다는 '성적 흥분'이어야 하겠기에(이른바 성적 '각성 상태'를 말하는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입증하기 위해 많은 소비에트 연구자들이 유물론적 연구를 시도했다는 것인데, 그 성과와 관련하여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책이 각주32)에 소개되고 있는 에릭 나이만(1958- )의 <공적인 성(Sex in Public: The Incarnation of Early Soviet Ideology)>(1997)이다(전공과도 무관하지 않은 책이어서 책의 소재는 바로 탐지해두었다).  

이상이 '오늘의 책'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었다. 이 주제와 관련한 여타 참고문헌은 '비밀'로 해둔다(성은 비밀스러워야 한다). 다만 러시아에서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가 '이고리 콘'이라는 것 정도만 밝혀둔다...

07. 09. 21.

P.S. 페이퍼를 적으며 드는 생각은 사랑=폭력=악의 기원으로서의 '아름다운 여성' 문제에 대해서 좌파정치학이 너무 무관심한 건 아닌가 하는 점. 가령 "정치적 관습으로 어떤 세력가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때 그를 고발하지 않고도 추방할 수 있게 만든 제도"로서 그리스의 도편추방법을 상기해본다면, 공동체의 질서유지에 위협적인 요소가 되는 '과도한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림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니 잠자는 미녀들을 공연히 깨우지 말지어다. 물론 우파정치학에서라면 남성들의 경쟁 유발요인으로서 아름다움은 적극 장려해야 마땅한 것이겠지만...

P.S.2. 단수 높은 독자라면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이 페이퍼는 추석 연휴를 맞아 서재 방문객들에게 드리는 나대로의 인사이고 선물이다. 개인적으론 다음주 금요일에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 나로서도 일주일간 휴가이다(별로 즐거운 일이 없을 뿐더러 할일도 많다는 건 내일부터 생각하기로 하자). 편안하고 즐거운 휴식과 감사의 시간들이 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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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5-29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작성시점으로부터도 반년을 훌쩍 넘긴 이 시점에. 곧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강의가 있는데 접점을 찾을 여지가 꽤 보이네요. 다운만 받아놓은 말레나를 봐야겠다는 압박도 느끼구요. 좋은 "추석"선물, 감사합니다^^
 

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이 세번째로 다루고 있는 철학자는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아감벤(1942- )이다. 주저인 <호모 사케르>가 근간 예정이라는 건 연초부터 들어온 소식인데(이번 가을에는 나오는 건가?) 이후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지젝이 방한시 가진 한 대담에서 동시대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알랭 바디우와 함께 아감벤을 지목한 바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철학자다(영역된 책 대부분을 챙겨두고 있다). 여하튼 '한국어 아감벤'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대학신문(07. 09. 17)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③ 조르지오 아감벤

정치철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1995)는 칼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푸코 등을 거쳐 주권권력과 삶/생명의 관계, 법과 폭력의 문제, 인권 개념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며, 9ㆍ11 이후 시행된 각종 예외조치들의 정치 패러다임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은 주권권력을 언제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며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다시 말해 그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하면서 포함하는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이라고 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신성한 인간=벌거벗은 생명)란 무엇인가? 로마법에서 정의된 신성한 인간이란, 희생양(제물)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미 신의 소유이므로 희생양(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고, 인간 공동체의 법/권리의 보호 바깥에 위치하기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역에서도 배제된다. 혹은 이렇게 배제되는 조건 하에서만 공동체 안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9ㆍ11 이후 애국자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정부는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비-시민들을 무한정하게 구금하고, 그들을 군사재판을 포함한 특별한 법절차에 종속시켰다. 더구나 이렇게 구금된 이들이 추방되거나 기소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지위 자체를 상실한 채 수용소에 유폐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땅히 ‘신성한 인간’의 예라 하겠다.

아감벤의 주장이 급진적인 까닭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 예외가 오늘날 정상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다. 이제 모든 시민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고, 수용소는 전 시민을 대상으로, 전 영토로 확장된다. 수용소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정치 공간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서, 도처가 정상적으로 되어버린 예외 상태이고, 도처에 신성한 인간들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모두 수용소 안에 살고 있는가?



주권권력은 항상 ‘희생’을 통해 신성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아감벤은 이 희생을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 ‘장치’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주권권력은 항상 ‘장치’를 통해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한다. 장치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유도, 결정, 차단, 생산, 통제,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비단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언어도 장치다. 이 장치들을 통해 한 개체 내에서도 핸드폰 사용자, 인터넷 사용자, 시나리오 작가, 탱고 애호가 등의 무수한 주체화 과정이 공존한다. 질문은 반복된다. 과연 위 장치들로부터 벗어날 수나 있단 말인가?

푸코가 도처에 권력이 있다고 말할 때 반드시 도처에 저항이 있음을 덧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이 보기에 도처에 각종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자신의 잠재성을 포획당하는 주체화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도처에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시민과 테러리스트를 구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권권력은 사실상 어느 곳에서 돌출할지 모르는 이 테러리스트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감벤은 저항 혹은 대항-장치를 ‘세속화(profanare)’라고 부른다. 그것은 희생(sacrare)에 의해 신적인 영역으로 빠져나갔던 제물에 손을 대어 더럽힘으로써 인간들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복원하는 것이다. 희생된 사물이 달리 사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는 희생이라는 장치를 비활성화시키고 헛돌게 만듦으로써 이 박탈당한 잠재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치가 없으면 생명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각종 장치들을 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거나 장치를 좋은 목적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장치를 단순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되, 더 이상 장치에 배정되어 있는 목적-수단 관계를 따르지 않고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열쇠다.



목적 없는 수단으로 아감벤이 드는 예는 법전을 더 이상 준수할 대상이 아니라 가지고 놀고 실험하는 것, 보는 자의 어떤 정서적 변용도 이끌어내지 않는, 관객에게 완전히 무감한 표정을 짓는 포르노 스타 등이다. 그도 인정하듯 이 대항-장치는 항상 일시적이다.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는 순간은 뒤샹의 시도에서일 뿐, 그 뒤 그것의 잠재성은 박물관에 포획된다. 그가 드는 예는 여전히 묵시록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이리저리 굴리며 새로운 사용법을 발명할 수 있는 방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된다.(양창렬_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7. 09. 17.

P.S. 예전에 아감벤을 다룬 페이퍼로는 '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 등이 있다. 지젝은 특히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국내에서는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라고 조야하게 번역된 책)에서 아감벤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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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19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가 조르지오 아감벤이 되었군요. 그 다음은 누구일까요, 그 선정의 기준과 순서가 사뭇 기대되는 바입니다.

로쟈 2007-09-19 19:07   좋아요 0 | URL
열명의 리스트는 이미 대학신문에 공지됐었는데, 바디우나 네그리, 랑시에르, 회슬레, 슬로터다이크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대개 국내에 소개되거나 소개될 철학자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