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정치철학자라면 단연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다. 그의 주저 <불화>도 소개될 예정이기에 (일부 불만에도 불구하고) '랑시에르 붐'은 한동안 더 이어질 듯하다. 랑시에르의 민주주의론을 소개/해명하는 글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와 <무지한 스승>(궁리, 2008)을 우리말로 옮긴 양창렬씨다.  

 

고대신문(09. 05. 10) 민주주의는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원상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단어는 아무데나 쓰이고, 그만큼 의미 없는 단어가 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 앞에 붙는 수식어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수식어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닳아빠진 개념이 된 듯하다. 이처럼 모호한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랑시에르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관념들의 고유함은 그것이 다의적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차이가 불화를 가능하게 한다. 정치적 투쟁은 바로 그 단어를 전유하기 위한 투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되찾기 위해 랑시에르는 그 단어의 희랍적 어원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분절을 되짚어 본다. 특히 플라톤이 범례적으로 보여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주목하면서 말이다.  

『국가』, VIII권에서 플라톤은 여러 정체들을 검토하면서 민주정을 과두정에 대한 빈자들의 전복으로 간주한다. 이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는 민주주의적 인간형을 서술하는 데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정체란 정부 형태만이 아니라 그 체제 하에서 공통으로 살아가는 존재 방식과 습속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주의적 인간은 노예와 구별되는 신분상의 자유, 의회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유 뿐 아니라,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 플라톤은 561c-e에서 이소노미아를 누리는 사람의 삶을 묘사하는 데, 이 민주주의적 인간형은 오늘날 공화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소비사회의 탈근대적 개인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 제멋대로 하는 자유는 민주정 자체가 정체들의 잡화점과 비슷한, 무정부 상태의 다채로운 정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플라톤은 이소노미아에 가장 분개하는데, 그것은 법 앞의 평등만이 아니라, 오히려 법을 비롯한 공적 사안을 결정하는 데 참여할 수 있는 평등을 가리킨다.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바로 추첨이었다. 추첨은 통치를 ‘아무나’에게 ‘우연’하게 맡길 뿐, 통치자의 어떤 자질이나 지식도 따지지 않는 제도다. 지식과 정치적 탁월함을 가진 자에게 기하학적 평등에 따라 통치의 특권이 돌아가야 한다고 보았던 플라톤에게 추첨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정치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가 있는가라는 랑시에르의 주요한 화두와 연결된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320d-324d)에 등장하는 흥미로운 신화에 주목하자. 에피메테우스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는 기술을 나눠주면서 정작 인간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성질들을 부여하는 것을 잊는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과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흩어져 살 뿐, 도시국가에 모여 살지 못한다. 결국 제우스는 멸종할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정치적 덕(염치와 정의)을 주기로 작정한다. 헤르메스가 그 덕을 기술을 나눠주듯 분배해야 하느냐고 묻자, 제우스는 모두가 그 몫을 가질 수 있도록 분배하라고 답한다. 소수만이 그 몫을 갖는다면 도시국가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말이다.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말해주고 있다. 정치와 관련해서 전문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가 평등한 능력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이 평등이 모든 정치 질서, 모든 정치 공동체를 정초하는 전제가 된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평등 전제’라고 부른다. 앞서 언급한 추첨 그리고 프로타고라스가 들려준 신화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누가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배해야할 자연적 원리(archē)는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부 형태는 이 원리의 부재, 정당성의 부재에 토대를 둔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러 정체들 중 하나의 정체가 아니라, 모든 정체의 아나키적 원리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 평등전제를 입증하고 활성화시키는 정치를 뜻하기도 하며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 주체화를 거친다. 이 점에서 데모스라는 단어가 내포한 이중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인민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빈자들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민은 본디 정치적 주체인 동시에 배제된 자라는 이중적 신체를 가진 분열된 주체인 것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항상 말과 사물 사이의 틈에서 생겨난다. 가령 헌법에 기록되어 있는 인민의 권력을 몫 없는 자들이 실제로 행사하려할 때 그것은 정치 질서 자체에 분리와 불일치를 가져오는 사건이 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빈자들, 노동자들, 여성들도 인민인가?’, ‘우리는 이 나라를 통치할 주인의 범주에 셈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들은 언제나 말과 사물, 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질문들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내는 역량과 행위야말로 정치요 민주주의다.  



랑시에르에게 가장 많이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그가 정치를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것, 다시 말해 드문 사건으로 묘사하며, 선거나 투표와 같은 제도를 치안의 장치로 보는 등 제도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고로 정치를 어떻게 이어갈지, 민주주의 또는 평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지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몇 가지 답변들로 결론을 대신하자.

첫째, 우리는 앞에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란 하나의 정체나 통치 형태가 아니라 정치 자체의 전제이자 원리임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다. 둘째, 랑시에르는 바디우처럼 모든 투표에 기권하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는 지난 2005년에 있었던 유럽헌법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지배자들의 합의에 맞서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투표 속에서 인민주권을 연출하는 한 방식이라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작년에 쇠고기 재협상과 대통령 재신임을 국민투표에 부치자던 주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사실 그것은 인민으로 바꿔 읽을 수 있으며, ‘아무나’에게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으로부터 나온다’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정치 무대에 올리는 한 실험이 될 수도 있었다.  

셋째,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짧은 임기로 연임할 수 없게 의회의 대표를 뽑고, 국가의 공무원이 인민의 대표를 중임할 수 없게 만드는 등 고대 그리스의 ‘추첨’을 연상시키는 주장들을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의제를 ‘민주적’으로 이끄는 최소치이지 그러한 제도 변화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넷째, 랑시에르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무너지며, 촛불에 불이 붙고 사그라지는 짧은 봉기의 순간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사건과 돌발’의 사상가가 아니라 ‘해방’의 사상가다. 역사는 국가 형태에서 벗어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발명하려는 다양한 노력과 실천들의 망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그가 간헐적인 사건들의 불연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공존하는 여러 시간성들의 집합을 통해 역사를 사유하기 때문이다.(양창렬_파리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9.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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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적 관점이 요구하는 것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현실 정치에 대한 그의 이론적 개입이자 그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이후 이제까지 제시해온 담론의 중간결산이기도 하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롭게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다룬 문제들을 재정의하고, 자신의 작업을 재구성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지젝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며 그의 공언대로 ‘주저’라는 말에 값한다. 

시차적 관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
‘시차’란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는 원래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 (2001)에서 얻어온 것이지만,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는 달리 헤겔-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은 칸트주의를 헤겔적 사유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접목시킨다.  



그는 이미 <이라크>(2004)에서도 ‘시차’란 개념을 사용하여 이라크전쟁의 ‘진리’를 설명한 바 있다. 곧 “민주주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는 부시의 말이 집약해주고 있는 바 서구민주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이 전쟁의 첫 번째 이유요(상상계),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주장하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라면(상징계),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세 번째 이유(실재계)라는 것이다.

요점은 여기서 어느 하나가 나머지의 ‘진리’라는 게 아니라, ‘진리’란 관점의 이동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것이 말하자면 시차적 관점에서의 진리다. 이 경우 한 가지 관점에서의 진리 주장은 그것이 타당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오류를 면치 못한다. 사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면서 정치적이고, 또 동시에 경제적이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춘 방책은 일면적인 해결책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차적 관점의 도입을 통해서 지젝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가 보기에 시차란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철학의 교착상태뿐만 아니라 ‘저항’의 교착상태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지젝은 알랭 바디우를 따라서 시스템이 더욱 부드럽게 작동하게끔 만들어주는 국지적 행동에 참여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진정한 위협은 수동성이 아니라 유사-행동이며, ‘능동적’이고 ‘참여적’이 되려는 이 충동은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 학자들은 무의미한 ‘논쟁’에 참여한다. 가령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도 혁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혁명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해나갈 따름이다.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이 전혀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급진적인 담론을 쏟아내는 데 열중하는 ‘강단좌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발언을 뒷받침하고 있는 발언 위치, 곧 물적토대와 시스템 자체는 건드리지 않으며 결코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사실 한때 ‘급진적’이었던 과거 전력만큼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공동체에 합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상당수가 젊은 시절 트로츠키주의자였다는 사실이 그 일례다. 가까이에서 예를 찾자면, 주사파의 대부였다가 전향하여 극우 이데올로그로 활동한다거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열혈분자였다가 수구정당의 ‘강성파’로 활약하는 정치인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다. 사후적인 주장이 되겠지만, 이들의 ‘저항’이야말로 체계의 재생산에 기여한 흔한 사례가 아닐까. 

혁명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
지역적 층위의 국지적 저항으로 자본주의 세계화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국가로부터 언제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이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국가기계를 운용하는 책무를 떠맡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즉 국가라는 마당을 너무 쉽게 ‘적’에게 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정치적인 것보다는 윤리적인 것을 더 강조하게 되며, 혁명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서 간주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은 다르게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다. 즉 그것은 ‘당위’가 아니라 ‘필연’이다. 때문에 지젝은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영속적이지 않을까라거나 혁명은 결국 안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좌파의 우려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 오류는 혁명을 도덕적 의무로 사고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사-행동에 맞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후퇴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참여와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쥔 자들과 ‘대화’에 나서기보다는 ‘불길한 수동성’으로 퇴각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지젝의 시각이다. 그러한 수동성이 새로운 혁명적 주체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이 암시가 될 수 있을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서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하는 것은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이면서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위가 아닐까.  

09.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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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9-05-08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길한 수동성'이라니까 어릴 때 읽은 중국5000년의 지혜(?)라는 책이 생각나네요.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가 권력을 잡았을 때의 기인들 얘기였는데, 한 기인은 사마의 잔치하는 곳에 와서 맨날 깽판 놓고 했는데 사마의는 항상 호방하게 대했다 그런데 한 기인은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는데 사마의가 죽여 버렸대요^^ 권력자들이'불길한 수동성'을 싫어한다는 예로 맞을라나요?

로쟈 2009-05-08 22:56   좋아요 0 | URL
재밌는 예인데요.^^

[해이] 2009-05-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능 사서 읽고 싶은데 책값이 만만찮군요... 원서보다 더 비싸요 ㅠ

로쟈 2009-05-10 17:07   좋아요 0 | URL
인문 이론서의 경우 독자층이 많지 않으니 책값이 더 비싸게 매겨지는 듯해요...

도톰 2009-05-09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이님 말씀을 받아보자면 어쩌면 번역서가 원서보다 더 비싸도 이상할게 없다는 생각도 해보네요. 저자의 품 + 번역자의 품이 합쳐지니까 말이죠. 물론 그러한 품이 양적으로 고스란히 환원될 수는 없는 출판계 특유의 '환대'가 존재하긴 합니다만..

[해이] 2009-05-10 00:01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말한건 한국으로 건너온 원서 말한건데요ㅎㅎ한국으로 건너오면 원래 엄청 비싸지잖아요ㅋ근데 그거보다 더 비싸니까 놀랍다 뭐 이런ㅎㅎ

moonsavvy 2009-07-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란 제이 파큘라 감독의 영화에서 따온 게 아니라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 나온 건가요? 국내에 <암살단>이라고 알려진 영환데 제임슨이 분석한 바 있는 영화입니다. 아직 책을 안 읽어 봤는데 이 영화와는 상관이 없는 건가요?

로쟈 2009-07-04 14:03   좋아요 0 | URL
네, 영화와는 무관합니다...
 

'지식인들이 읽는 지식인'이란 의미에서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는다. 며칠 전인가 전화 인터뷰에 응한 적이 있는데, 그게 기사에 인용돼 있다. 좀 뻘쭘하다. 인터뷰이가 몇 사람은 될 줄 알았다. 기억에 내가 답한 질문은 '최근 한국에 어떤 사상가/이론가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가?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유행이 있는가?" 등이었다.

1-슬라보예 지젝(사진제공 : 마티 출판사)
2-가라타니 고진
3-안토니오 네그리(사진제공 : 세종서적)
4-조르조 아감벤(사진제공 : 새물결 출판사)
5-자크 랑시에르(사진제공 : 궁리)

주간한국(09. 04. 30)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구일까 

들뢰즈, 벤야민, 라깡. 한때 한국의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던 지식인이다. 해외 유명 저널에서 발표, 인용되는 지식인은 국내 지식인 사회에도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일반 독자들이 신문과 전문잡지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혜안을 얻듯, 지식인 역시 국내외 석학의 분석을 바탕으로 사회 현안을 분석하게 된다. 국내 지식인들의 저서, 비평, 칼럼, 강연, 토론 등을 통해 소개, 인용되는 이른바 ‘지식인의 지식인‘은 우리 지식사회와 현실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정보를 얻는 매체가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되는 해외 석학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소개된 사상이 인용되는 기간은 더 짧아 졌다. 국내 지식인 사회를 움직이는 ‘지식인의 지식인’은 누굴까? 2000년대 들어 최근까지 한국 지식인 사회 이슈가 된 지식인을 소개한다.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을 빼놓고 200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를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수 년 전 젊은 평론가들을 중심으로 라깡을 더듬어 올라가 정신분석학을 비평에 도입했던 시도 역시 지젝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1949년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해 1972년 철학 박사학위를, 파리 8대학에서 자크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전공해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깡의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헤겔의 독일 관념론 같은 철학적 주제를 SF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예술을 통해 분석한다. 



1989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출간하며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내민 그는 이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1993)’, ‘까다로운 주체(1999)’ 등 논쟁적인 저서를 발표해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이후 세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학자로 손꼽힌다. 또한 이라크 전쟁, 9.11테러, 전체주의 같은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발언하면서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인이 됐다. 



최근 국내에 그의 대표 저서 ‘시차적 관점(마티 출판사)’이 번역 출간됐다. 지젝은 ‘어떤 천체를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의 위치가 달라 보이는 것’을 뜻하는 천문용어 ‘시차(Parallax)’에서 개념을 빌려와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관점이 발생하는 ‘시차적 간극’에 대해 설명한다.

국내 지젝에 관한 지식인들의 발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도올 김용옥은 최근 한 일간지의 대담에서 ‘효경’을 주해ㆍ번역하는 데 라깡의 정신분석에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하면 동ㆍ서 문명을 비교하면서 ‘철학의 록스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시각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해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논객 김정한은 ‘그대 왜 촛불을 끄셨나요?’에서 지젝의 말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최근 문학평론가 김홍중 씨는 비평 ‘행복의 예술, 그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서 지젝의 이론을 빌려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상을 분석한 바 있다. 문화연대 부설 연구기관의 무크지 ‘문화사회’ 3월 호에서는 발터벤야민의 역사철학과 슬라보예 지젝 이론을 다루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있게 한 지식인이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善男) 이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썼다. “가라타니 고진은 저서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지젝의 책이 2006년에 출간된 점에 미루어 볼 때 2001년 작인 가라타니 고진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난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역사, 건축, 철학 등 전방위 문화예술 평론가로 변신했다. 비서구인의 주변부적 문제의식과 서양의 근현대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부시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사유방식으로 서구에서도 각광 받고 있다. ‘인문학계의 무라카미 하루키’라 할 만큼 국내 젊은 인문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6년 국내 번역 출간된 ‘근대문학의 종언’은 국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고진은 2003년 “미국은 1950년대에, 일본은 1980년대에, 한국은 1990년대 말부터 문학이 급속히 쇠퇴했다”고 지적한 바 있고, 그의 언급을 시발점으로 한국문학의 위기가 문학계 화두가 되어 왔다.

문학평론가 서영채 씨는 ‘역설의 생산: 문학성에 대한 성찰’(문학동네 2009년 봄호)에서 “문학 위기에 대한 담론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유행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2004년에 발표한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씨 역시 ‘추억과 집착- ‘근대문학의 종언’과 그 논의에 대하여’(‘안과 밖’ 2007년 상반기호)에서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문학은, 비평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되묻고 있다”라는 말로 고진이 국내 문학계에 던진 파장을 설명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을 직접 번역한 평론가 조영일 씨는 고진의 서적을 바탕으로 한국문학계를 비판한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을 지난해 출간한 바 있다. 



안토리오 네그리
이탈리아 좌파정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는 1933년 이탈리아 파노바에서 출생했다. 21세기 가장 급진적인 정치사상가이자 ‘아우토노미아(자율성, 자주성)’운동의 창시자다. 1957년 23세 때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을 발표, 박사학위를 받고 1960년대 후반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발전시켜 이탈리아 비의회좌파운동에 참여했다. 현재 마르크스에서 들뢰즈,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 받는다. 대표적인 저서는 ‘지배와 사보타지(1977)’,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1978)’, ‘제국(2000)’ 등이 있다. 



지난 해 마이클 하트와 공저한 ‘다중(Multitude, 세종서적)’이 국내 출간됐다. 2000년 출간된 ‘제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형태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에서 지배 권력의 대항자였던 인민, 대중, 노동계급의 개념을 세계화시대를 맞아 ‘다중’으로 지칭한다. 네그리는 세계화의 네트워크 권력이 더 치밀하게 강화될수록 다중의 저항적 잠재력도 커진다고 말한다.

국내 젊은 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의 연구가 활발하다. 특히 그의 최근 저서 ‘다중’은 자율평론(http://waam.net)에 기고된 원고의 일부가 국내 유통되면서 원서 출간과 동시에 국내에 이론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인문·사회과학학 교육원 ‘다중지성의 정원’은 네그리의 ‘다중’개념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이다. 이곳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해 마르크스, 들뢰즈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핫(Hot)한 인물은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과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다. 최근 문예지와 학술지를 중심으로 이들의 저작과 이론을 비평에 도입한 평론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난해를 기준으로 이들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는 수가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1942년 로마에서 출생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로, 현재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미학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간을 ‘말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미셸 푸코의 생철학과 칼 슈미트의 비상사태를 토대로 로마시대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현대 정치를 비추어 쓴 책 ‘호모 사케르’로 주목받았다. 대표 저서로 ‘아우슈비츠의 남겨진 것’(1998), ‘예외상태’(2003) 등이 있으며 지난 해 ‘호모 사케르’가 국내 번역 출간됐다.

철학자 이진경은 저서 ‘모더니티의 지층들’에서 아감벤의 이론을 빌어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현대사회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한 이 책에서 이진경은 현대자본주의와 인권의 개념을 설명하며 아감벤을 도입한다. 문학평론가 복도훈 씨 역시 ‘목소리가 사라지는 곳으로 문학이 가야한다’(문예중앙 2007년 가을호)에서 아감벤과 지젝의 이론을 소개하며 한국문학사에서 ‘소리’와 관련된 고찰을 시도하고 있다.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수제자였던 자크 랑시에르는 1960년대 ‘자본론 읽기’의 공저자로 이름을 알렸다. ‘자본론 읽기’가 1990년대에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랑시에르는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도 크게 각광받기 시작했다.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랑시에르는 스승인 알튀세르를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는다. 영화광인 그는 미학과 정치의 관계를 분석한 저술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

인문학, 특히 문학 비평분야에서 랑시에르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최근 문학 비평이 ‘언어의 새로움’에 치중된 상태에서 ‘말 없는 말’(문학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쓰는 소통의 언어와 달라지며 문학성을 쟁취한다는 랑시에르의 문학 개념) 등 랑시에르의 이론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기 좋은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비평 ‘소설과 정치’에서 작가 황정은의 소설을 분석하며 랑시에르의 저서 ‘감성의 분할’을 인용하고 있다. 평론가들의 반응을 반영하듯, 계간지 ‘문학과 사회’ 올해 봄호에서는 자크 랑시에르의 인터뷰를 특별기고 형식으로 소개했다.

이들 ‘지식인의 지식인’은 흔히 해외 유명 인문 사회과학 저널을 통해 국내 지식인 사회에 소개된다. 국내에서 발견되는 특징 중 하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지식인의 지식인’의 저서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틈새 출판시장’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이미 하나의 브랜드가 된 지젝의 저서들과 최근 1,2년 사이 각광받기 시작한 조르조 아감벤과 자크 랑시에르가 이에 해당된다.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이미 ‘읽을 사람은 다 읽은’ 유명 저서가 됐다. 모두 포털사이트 서평 카페에서 인터넷 서평꾼을 통해 소개된 후 유명세를 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중 한 명인 로쟈는 전공인 러시아와 비교할 때도 한국에 유독 많은 지식인이 소개되고, 이들 서적이 소비된다고 말한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지극히 한정된 지식인 사회에서 사상가들의 이론이 소개된다.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푸코와 들뢰즈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대학과 대학가 주변 등 이들 사상가들의 이론이나 고급 담론을 소비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새로운 사상가와 이론이 소개되고 맛보기 식으로 회자된 다음 (*다음) 지식인, 이론가로 넘어간다”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는 지식인의 이론과 저서를 소비하는 데도 영향을 미치게 된 셈이다.(이윤주 기자) 

09. 05. 01.  

P.S. 기사에서 랑시에르가 "지난 해 ‘무지한 스승’, ‘불화’ 등 6권의 책이 잇따라 국내 번역 출간되면서 다시 주목 받게 됐다."고 했지만, <불화>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근간예정인 책이다. 대신에 놀랍게도 <문학의 정치>(인간사랑, 2009)가 최근 번역돼 나왔다. <미학 안의 불편함>과 마찬가지로 아직 영역본도 나오지 않은 책이다. 놀라운 속도라 아니할 수 없다. 비록 전례를 보아 읽을 수 있는 책인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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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5-01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사조들이 빠르게 국내에서 유통된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식인 그룹의 고담 준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저는 '고담준론' 자체에 비판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고담준론을 어느정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뛰어난 '정치가'의 부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울러 미국 철학자 로티의 (미국에서) 좌파들의 몰락은 그들이 실현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주장만을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조들의 소화와 아울러 기존의 지배적인 담론들에 대한 재해석도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분량이 적당하다'는 점이 강점인 것 같군요^^ 랑시에르의 '치안'과 '정치'의 구별은 참신하지만, 이미 우리나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정치'라는 단어의 용례와는 그 개념이 다르고 너무 한정적인 의미로 축소되어 과연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아무튼 랑시에르의 '치안'의 개념은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 지는 모르지)만)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학자 옥쇼트의 '정치'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보수적인 옥쇼트가 생각하는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에 '진정한 정치'가 있다는 게 랑시에르의 주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로쟈 2009-05-01 23:54   좋아요 0 | URL
분량마저 '배신'한다면, 전혀 읽을 수가 없을 듯한데요.^^ 그래도 제가 읽고 싶은 책은 좀 두툼한 <프롤레타리아의 밤>입니다...

2009-05-01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1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5-02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서평이 눈에 띄기에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필자인 이택광 교수의 기본적인 독후감은 저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는 것인 듯하다. 내가 알기에 이교수나 역자는 같은 대학에서 같은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지젝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뚜렷한 '시차'를 보여주는 듯하다.  

교수신문(09. 04. 20) 자칭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정신 사나운 자화자찬 

애드리안 존스턴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책을 출간한 그 해 미국의 캘빈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에서 지젝은 자신의 꿈은 “헤겔의 루터가 되는 것”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발언은 진심이면서 동시에 은유적이다. 여기서 루터는 “왜 무신론자만이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예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에 바로 믿음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인데, 따라서 『시차적 관점』은 헤겔에 대한 지젝의 입장을 빼놓고 접근할 수가 없는 책이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에서 헤겔적 혁신을 시도한다. 그 대상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어떻게 되살려내겠다는 것일까. 바로 여기서 지젝이 내뱉었다는 저 고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부정하는 자만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을 수 있다. 지젝의 입장에서 보기에,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운동의 패배뿐만 아니라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헤겔의 루터’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신학에서 구원하는 역할을 떠맡고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티크』에서 빌려 온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고진이 다분히 칸트에 의거해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것과 반대로 지젝은 헤겔에 근거해서 이 개념을 확장시키려고 한다. 물론 지젝의 헤겔은 그 옛날의 헤겔이라기보다 라캉의 혁신을 거친 헤겔이다. 이쯤 읽으면,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원’하려는 그 방식에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본뜻’을 망친 스탈린주의로부터 이 ‘위대한 이론’을 분리시키는 것이 지당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젝은 엉뚱한 말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스탈린주의의 결합 그 자체가 바로 요점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경천동지할 일이지만, 지젝은 실천에 무기력한 부정변증법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젝의 말을 요약하면, 그의 라캉-헤겔주의적 철학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동일한 것이고, 이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뼈”라는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가는 헤겔적 무한판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젝이 말하는 헤겔적 무한판단은 둘이 아니라 하나(또는 전체) 자체에 내재한 수많은 간극을 모두 살피는 사유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적 기능 상실은 양극단의 투쟁이라는 ‘기본 법칙’이 “대극의 양극성”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극성’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의 지점으로서,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이율배반’과 유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임슨 역시 『시간의 씨앗』에서 지젝과 비슷하게 이율배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성으로 인한 변증법의 무력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지젝은 제임슨과 달리, 이런 이율배반이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하는 기반”도 존재하지 않아서 결코 고차원적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할 수 없는 대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변증법의 장애라기보다 “그 전복적 핵심을 간파할 수 있게 만드는 열쇠”를 제시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간극은 외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인 대립구조라기보다, 하나의 내부에 상존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젝은 이런 양극성, 또는 이율배반적 대립을 “하나 자체에 내재적인 긴장, 간극, 불일치로 대체”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런 이율배반은 서로 다른 두 극단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그 자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시차’에 불과한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이런 시차는 다양한 현대이론들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자 입자라는 것, 신경생물학에서 신경의 반응을 뇌의 회백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 존재론에서 존재론적 지평을 그 기원으로 환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지평으로부터 존재적 영역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것, 라캉의 실재계에서 나타나는 실증적이지 않고 실체적인 일관성을 결여한 다양한 관점의 결락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하는 욕망과 충동 사이에 있는 간극에서 시차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이 스스로 밝히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시차의 개념은 데리다의 ‘차이’(diff´erance)를 상기시킨다. 시차는 하나와 그 자체의 불일치를 보여주는 미시 차이이기도 한 것이다. 지젝은 시차와 데리다의 차이 사이에 드리워져 있는 연관성에 대한 적절한 이론화를 통해 데리다의 메시아적 정치학을 세속화한 레비나스적 ‘도래할 민주주의론자들’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 지젝은 데리다의 초기 철학에 내재한 유물론적 속성으로 후기 철학의 정치학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지젝의 의도가 얼마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지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실 지젝이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책을 자신의 주저로 손색없는 책이라고 밝히면서 그의 철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과연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역시나 그렇듯이, 이 책은 너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을 분석하다가, 갑자기 정신분석학을 논하고, 여기에 신경과학, 문학, 영화, 정치에 관한 언설들이 마구 뒤섞인다. 지젝을 읽어온 독자라면 정신 사나운 지젝 특유의 스타일이 그렇게 낯설지 않겠지만, 여하튼 멋모르고 책을 집어든 독자에게 좌절감부터 덥석 안기기에 충분하다. 이런 다채로운 스타일을 두고 지젝은 훌륭한 헤겔주의자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를 통해 개념이 조종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내부로부터 개념의 형식이 솟아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지론이 곁들여진다. 이를 보면, 서문에 그가 왜 ‘개념들의 확장’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반헤겔주의자 들뢰즈와 정통 헤겔주의자 지젝은 말 그대로 ‘시차’인 것이다. 기발한 자화자찬에 절로 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이택광 경희대·영문학) 

09. 0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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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2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4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릴케 현상 2009-04-2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의 논리를 모르겠네요. 그냥 비아냥인가요?

로쟈 2009-04-24 09:13   좋아요 0 | URL
'그래 너 잘났다' 정도이겠죠. 그래도 나은 편인 게, 읽지도 않고 욕하거나 폄하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요...
 

아스트라 테일러의 영화 <지젝!>에 나오는 한 강연에서 대표적인 데리다주의자로 지젝이 거명하는 이름이 '아비탈 로넬'이었다. 그때 잠시 이 여성 철학자에게 흥미를 가진 적이 있는데, 마침 '해체론의 후계자'로 로넬의 철학을 소개하는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기사 덕분에 야코프 타우베스에게서 수학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됐다.   

교수신문(09. 04. 13) 해외 학자_해체론의 후계자 아비탈 로넬 뉴욕대 교수 

아비탈 로넬(Ronell, Avital: 1952- )은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유대학자이자 저명한 종교철학자였던 야코프 타우베스에게 수학했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괴테, 휠덜린, 카프카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파리에서 "해체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쟈크 데리다, 그리고 뤼스 이리가레이, 쥴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현대 프랑스 페미니즘의 큰 축을 이루는 엘렌 씨수등과 공부하였다. 현재는 뉴욕대학에서 독문학과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고, 스위스의European Graduate School의 철학과 교수로도 재직중이다. 2004년 데리다가 타계하기 직전까지 뉴욕대에서 우정, 환대, 용서, 괴물등의 주제로 매해 가을 대학원 세미나를 함께 강의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받아쓰기(Dictations)』(1986), 『전화수첩(The Telephone Book)』(1989), 『마약전쟁(Crack Wars)』 (1992), 『어리석음(Stupidity)』(2003), 『테스트욕동(The Test Drive)』(2005) 등이 있다. 



글쓰기의 기원으로서 타자
칸트에서, 프로이드, 니체, 하이데거, 레비나스, 블랑쇼, 데리다, 라쿠-라바르트와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워즈워드, 도스토예프스키, 클라이스트, 뮤질, 괴테, 플로베르, 카프카까지, 또한 텔레비젼, 전화, 가상현실, 정신분열증, 걸프전, 오페라, 후천성면역결핍증, 마약중독, 트라우마, 소문, 무지함, 공권력 등 아비탈 로넬은 특유의 거침없고 신랄한 문체로 서양철학과 문학, 문화이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종횡무진한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영역과 요소들을 천착하며, 인위적인 경계를 넘고 닫힌 뚜껑을 열고 상식을 의심하고 정돈된 명제들을 휘저어 놓는다. 걸러지지 않은 듯한 거리의 언어, 그 거칠음, 무모함, 대범함이 문헌 (혹은 쟁점)에 대한 숨막힐 정도의 미시적 엄밀성과 이성의 변두리에 대한 무르익은 윤리적 성찰, 그리고 섬세한 여성적 감성과 함께 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러나 펜을 든 그의 손을 움직이는 것, 이 아름답고 힘있고 거침없는 글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로넬 자신이 아니다. 무엇인가가 뒤에서 그를 원격조정한다. "유령에 홀린 글쓰기," "몽환적 글쓰기," 혹은 "수동적 글쓰기" (받아쓰기, 립씽크, 윤리적 채무관계, 부름에의 부응, 볼모 등으로 표현되는) 라고 스스로도 말하고 있지만, 이 수동적이고 비자발적인 글쓰기를 조정하고 있는 그 힘이 정확히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는 로넬 자신도 알지 못한다. 개념화 할 수도 개념화 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 힘의 기원을 "타자"라고 한다면, 그에게 글쓰기란 언어를 읽어버린, 혹은 언어 밖에 있는-그러나 끊임없이 말하기를 갈망하는- "타자"를 위하여 자기 손을, 자기 몸을 빌려주는 행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넬의 글들에는 "왜 나는 내가 쓰고 있는 이것을 쓸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과 고뇌가 밑바닥에 깔려있다. (글쓰기의) 주체가 생성되기 이전, 자아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자아에 각인되어 있는 타인의 흔적에 대한 채무의 이행이든, 그 희미한 기억에 대한 집착이든, 욕망이든, 어쨌든 그는 호텔 프론트의 전화 교환원처럼 리셉션 데스트에 앉아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그의 귀에 들리는 소리를 받아쓴다.

결정되지 않은 한계의 순간
서양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이성적 사고가 그 체계 유지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은폐하고 망각해 온, 끊임없이 철학의 주변으로, 이성의 뒤꼍으로 배재해 온 그 "것"이 로넬의 철학적 사고가 향하고 있는 곳이다. 망각되고 배재되고 지워지는 과정에서 그 저항의 손톱 자국이라도체제 안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며, 그 사유되지는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각인 (inscribed, written) 되어있는 그 변형과 소멸, 왜곡과 망각의 흔적을 문헌에서 찾아 읽는 것, 그것이 로넬의 해체철학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고, 설명하거나 개념으로 가둘 수 없지만,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 유령과도 같이 - 그것, 즉 단일자 (singularities)에 대한 긍정과 celebration에 로넬철학의 핵심이 있다. 해체는 결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테러리스트적 파괴가 아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도, 냉소적 허무주의도 아니다. 해체는 가혹하리만치 세밀한 문헌분석과, 타자, 단일자, 혹은 ‘유령’의 부름에 응하는 진실하고 엄밀한 글쓰기, 그리고 익숙한 사유체계의 뼈대가 드러날 때까지 확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몰아 부치는 의심과 회의이다.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의 소리 없는 비명과 눈물 (로넬은 이를 "ethical scream"이라고 말한다), 쉽게 개념화 할 수 없는 내 몸에 난 타자의 흔적, 역사의 결에 거꾸로 난 손톱 자국…  로넬의 철학은 그것들을 향해있지만, 굳이 그것을 설명하고 정리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어가 목젓까지 올라왔다가 나오지 못하고 목에 걸려버리는 그 순간, 그의 펜은 그곳에 머문다. 이것이 한계인지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가능성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일 것이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언어 속에서 철학은 끊임없이 그리고 가차없이 흐트러지고 다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아비탈 로넬을 다룬 영화로 로넬 외에 슬라보이 지젝, 쥬디스 버틀러, 마사 누스바움, 코넬 웨스트 등 동시대를 사는 흥미로운 서양 철학자 8인을 담은 아스트라 테일러 (Astra Taylor) 감독의 <음미되어진 삶: Examined Life> (2008)가 있다. 또한 로넬의 <전화수첩 The Telephone Book>에서 영감을 받아 아리아나 레인즈 (Ariana Reines)가 각본을 쓴 연극 <전화: Telephone>가 현재 뉴욕의 Cherry Lane Theatre에서 상연 중이다.(장지은 뉴욕대 박사과정)  

09. 04. 14.  

P.S. '어리석음'에 대한 로넬의 연속 강의 동영상은 http://www.youtube.com/watch?v=SaP6rRor32Q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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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4-15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루는 사상가들과 주제들을 보니 벤야민이나 지젝을 방불케 하는 '전방위 비평가'이신 것 같군요.ㅎㅎ이제는 좀 파렴치한 기대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부디 '번역되어 주시옵소서'하는 바람이 듭니다.

로쟈 2009-04-15 21:30   좋아요 0 | URL
책들이 두꺼운 편이어서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