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지젝!> 상영전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간략한 리뷰이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지젝!>에 대한 페이퍼와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을 다룬 '레닌주의와 대중유토피아'를 같이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21(09. 04, 20) 정치 경제, 두 겹의 싸움이 필요하다

아스트라 테일러의 다큐멘터리 영화 <지젝!>(2005)에서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아주 겸손한 학문이에요. 철학은 단지 ‘네가 이것이 참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게 뭐냐?’라는 식으로 질문할 따름이지요. 그런 겸손함이 역설적이지만 철학의 위대성입니다.”라고 답한다. 지젝 스스로 자신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은 <시차적 관점>(마티 펴냄)은 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충실한 책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기해온 문제를 해결하지도, 새로 더하지도 않으며 다만 ‘시차(視差, parallax)’라는 개념을 빌려서 재정의하며 재구성한다.  

‘시차’란 과학용어로 동일한 대상을 서로 다른 곳에서 보았을 때 서로 다른 위치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가장 단순하게는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각각 한쪽씩 가리고 보았을 때 나타나는 약간의 차이가 시차다. 서로 다른 시각(관점)이 만들어내는 차이를 시차라고 하면, 이것은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난다. 양자물리학에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신경생물학에서 의식현상과 회백질 더미,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 정신분석학에서 욕망과 충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성적 삽입의 대상이면서 출산의 기관이기도 한 질(바기나)의 시차 등등.  

지젝은 이 책에서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기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시차로 재정의한다. 그리고 철학과 과학,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양식에 나타는 시차적 간극들에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궁극적으로 변증법의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한 시도로 간주된다. 그가 보기에 시차적 간극이라는 개념은 변증법적 사유의 장애물이 아니라 그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하도록 해주는 열쇠다.    

지젝은 ‘시차적 관점’이라는 아이디어를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001)에서 얻어오지만, 칸트주의를 이론적 전거로 삼는 가라타니와 달리 헤겔적 사유에 접목시킨다. 그가 보기에 헤겔의 근본적인 교훈은 존재론의 핵심 문제가 ‘현실’이 아니라 ‘현상’이라고 본 데 있다. 흥미롭게도 지젝이 들고 있는 다양한 사례 가운데는 분단 한국의 상징적 장소도 포함돼 있다. 바로 비무장지대 남쪽에 위치한 통일전망대다. 이 ‘극장’ 같은 건물에는 ‘스크린’ 같은 창이 설치돼 있고, 북한의 ‘현실’을 전시 가옥들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다. 아무도 살지 않지만 저녁에는 동시에 불이 켜지는 집들이다. 여기서 현실은 틀에 맞춰진 외양(현상) 그 자체다. 아르헨티나의 사례도 흥미롭다. 2001년 12월 반정부 시위 때, 특히 시위 군중의 표적이 됐던 경제부장관 카발로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람들이 쓰던 자신의 가면을 쓰고 집무실에서 탈출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상의 가면이라는 정신분석적 교훈을 직접 실천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보여주는 순수한 차이는 한 요소와 다른 요소 간의 차이가 아니라 한 요소와 그 자체와의 차이다. 여기서 시차는 서로 대칭적인 두 관점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이 있을 때 그것을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으며 두 번째 관점은 그 첫 번째 관점에서 볼 수 없었던 무언가를 채우게 된다. 예컨대, 지젝은 마르크스의 시차를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라고 본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된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에서 지적한 대로,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다. ‘레닌을 반복하라!’는 그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된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차적 관점은 두 겹의 싸움을 요구한다. 

09.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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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항의 교착상태와 혁명의 필연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8 21:20 
    중앙대 대학원신문(260호) '冊과 담론' 코너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다루고 있다. '한겨레21'에도 서평을 실은 바 있어서 청탁을 받고 주저했지만 초점을 다른 쪽에 맞춰달라고 해서 결국은 수락했다. 하긴 그렇게 초점을 달리하면, 서평은 몇 편 더 쓸 수도 있겠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05. 07) 저항의 교착상태는 어떻게 돌파해야 하나 슬
 
 
2009-04-14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4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1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90년대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창출을 요구하고 있는 강내희 교수의 칼럼이다. 

  

경향신문(09. 04. 10) 청년세대와 대안문화

1993년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발칙한’ 내용을 담은 책이 나온 적이 있다. 90년대 초라면 서울의 압구정동이 소비의 메카로 떠오르고 ‘오렌지족’을 위시한 소비지향적 신세대가 등장하던 때이다. 문제의 책을 펴낸 저자는 미메시스라는 그룹으로, 이들은 ‘386세대’로 통칭되는 80년대의 청년세대가 금욕주의의 운동권 문화를 신세대에게 강요한다며 나름대로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90년대후 신세대 소비문화 빠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의 시대 변화를 감각적으로 반영했다고 생각된다. 한국말로 된 랩 음악을 처음 시도한 ‘난 알아요’의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이 책이 나오기 한 해 전이다. 당시 젊은 세대는 서태지에게 열광했고, 문제의 책은 신세대 감수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때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80년대 운동권 문화는 지나친 엄숙주의를 드러낸다고 보고 있었던 터라 서태지의 새로운 감수성 실험과 미메시스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방은 운동권이 강조하던 민족과 계급의 이름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위해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당시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족쇄를 벗어던지는 것만큼이나 욕망의 분출도 필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신세대가 걸었던 길은 한국사회가 본격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한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투항이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는 청년세대가 사회적 의제를 주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대학생들이 전국적 의제로 집단행동을 한 것은 통일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북으로 간다며 연세대 교정에서 농성을 벌인 96년이 마지막이다. 이후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시장의 소비자로 변해버렸다. 신세대는 운동권 선배의 금욕주의, 엄숙주의를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해방을 위한 욕망을 상품에 대한 욕망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문화의 성격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 15년 동안의 청년세대가 보여준 문화는 소비문화였다. 이들이 비판한 80년대의 청년세대는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넘어선 대안문화를 실험하려 했는데 말이다. 이전 세대가 문제점이 없었다는 게 아니다. 80년대 청년세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도전하면서 스스로 권위주의로 흐른 측면이 적지 않았고, 세계 동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곧 망해버릴 소련의 사회주의를 모델로 삼은 것이 단적인 예다. 그래도 당시 청년세대는 현실을 뛰어넘는 대안문화를 추구했다.

대안문화로 ‘새 해방’ 추구 기대
80년대 대학 곳곳에서는 시국 시위와 함께 마당극이 수시로 펼쳐졌다. 강의시간이면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그러나 개인의 관찰로 판단한다면 오늘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도전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개인의 패션과 스타일, 학점, 취업 등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으나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은 오히려 뒤로 미루는 듯하다.

오늘의 청년세대는 욕망의 표출에서 해방을 찾기 시작한 90년대 신세대의 직계 후배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해방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일까. 소비문화로부터 벗어나려고 기획하는 것일까. 청년세대가 새로운 삶을 실험하지 않는 사회는 새로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강내희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 

  

80년대 세대의 '정치적' 청년문화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에서 터져나온 '신세대 문화'가 결과적으론 자본주의 소비문화에 대한 투항으로 귀결됐다고 지적하면서 필자는 동시에 "오늘의 청년세대가 대안문화를 만들어내길 기대한다. 그러려면 그들은 자신의 욕망에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한다. 진단은 맞지만, 주문은 모호하다. 욕망에 충실하고자 했던 '압구정동' 세대의 문화가 대안문화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정말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지 못했던 때문이라고 보는 것일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미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 아닌가?(이명박 정권만큼 어떠한 도덕적 금제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탐욕에 노골적으로 충실한 정권이 또 있었던가? 장자연 리스트에 오른 포식자들만큼 자신의 권력욕과 성욕에 충실한 이들을 더 찾아야 할까? 이들은 모두 지 꼴리는 대로 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건 이미 청년세대의 구호가 아니다. 세상이 앞질러,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자본이 노골적으로 챙기는 구호가 '네 멋대로 해라'이며(물론 그들을 '소비주체'로 호명하는 구호다. "너도 이런 거 살 수 있어!"), '세상에 너를 소리쳐!'다. 이명박 장로님도 필진으로 참여한 청소년 '처세서'의 제목도 '네 멋대로 살아라'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불온한 대안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미 문화적 '주류'의 목소리다. 차라리 '별일 없이 산다'는 구호가 오히려 더 '불온'하지 않은지? "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라고 말하기. 혹은 "난 알아요!" 대신에 맥없이 "이제는 아무렇지 않"라고 주절거리기(그래도 '아무렇지 않'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다. 소심하긴 해도 '루저 문화'의 저항적 에너지는 '어'라는 한음절에 집중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저항,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시차적 관점>의 한 문단에서 암시를 얻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15쪽)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지난번에도 적은 바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이것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던 '부정 변증법'으로서는 진정 파악하기 어려운 변증법적 전환이다." 즉, 저항과 전복의 포즈만으로는 '자유의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다.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체위를 다 시도해본다고 해서 제도가 바뀌는 건 아니다. 지젝은 '혁명적 정치학'에서 두 가지 사례를 든다. 각각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사례다.  

"살롱에서 토론하며 자신들의 모순된 언행을 즐기던 자유론자들로부터 권력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권력자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역겨운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후반 혁명 전 프랑스에서 꽃피웠던 여러 자유사상가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을 혁명적 공포의 엄격한 새로운 질서로 전도시키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번역에서 '역겨운 예술가들'은 'pathetic artists'를 옮긴 것인데, '측은한 예술가들' 정도가 아닌가 싶다. 살롱에서 토론을 즐기던 자유론자들이나 권력에 나름 애교 있게 항의하던 예술가들이나 모순적이게도 한편으론 권력에 '기생'하는 족속들이었다. 오늘날 그런 이들의 사상과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건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회적 불안을 (살롱에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혁명적 공포'를 불가불 수반하는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고자 한 시도를 지지하는 일이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에도 피바람 부는 '혁명 만세'를 외칠 수 있는지.    

"유사하게 절대주의자, 미래파, 구성주의자 등이 혁명적 열정의 우위를 두고 경쟁하던 시기인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첫 문장의 '혁명적 열정'이나 두번째 문장의 '혁명적 열기'나 모두 'revolutionary fervor'를 옮긴 것이다. '강요된 집단화(forced collectivization)'는 '강제 집산화'가 낫겠다. 그런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실정적/긍정적 사회정치 질서로 옮기고자 했던 시도를 읽는 게 중요하다는 것. 요컨대 핵심은 '혁명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겨운 일이다.  

거기에 비하면, "혁명 이후의 현재가 짊어진 십자가에서, 그들 자신들이 자유에 대해 가진 만개하는 꿈의 진실을 인식하기 거부하는 혁명적인 아름다운 영혼들보다 윤리적으로 더욱 역겨운 것은 없다."(16쪽)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은 제시하면 "There is nothing ethically more disgusting than revolutionary Beautiful Souls who refuse to recognize, in the Cross of the postrevolutionary present, the truth of their own flowering dreams about freedom." 즉, 자유에 대한 열망을 실컷 늘어놓다가 정작 혁명적 공간이 열리자 '이런 게 아니었어'라고 부인/회피하는 태도를 지젝은 '아름다운 영혼'의 역겨운 태도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대안문화'가 아니다. '질서'가 바뀌지 않는다면 '대안문화'의 '대안'은 가식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 문제는 '저항'도 '도발'도 '전복'도 아니다. 그러한 에너지가 새로운 질서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이 생략된다면, 모든 체제비판은 체제 기생적인 비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여기저기서 "네 멋대로 해라"고 부추기는 시대에 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자기 개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유를 그러한 조건에 구속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면, 네 멋대로 하지 마라!.. 

09.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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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영혼'이란 일종의 비꼬는 듯한 표현인가요?

로쟈 2009-04-11 15:35   좋아요 0 | URL
헤겔의 용어입니다. '순진한 주관주의' 정도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겔은 주관적 관념론자가 아니라서 순진한 주관주의를 거시기하게 보았겠군요.

로쟈 2009-04-12 12:06   좋아요 0 | URL
그냥 누가 봐도 '순진한' 태도죠...

yoonta 2009-04-1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표현들이 난삽한 편이어서..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이 불분명했었는데 로쟈님 설명을 들으니 어느정도 이해가 가는군요.

결국 헤겔의 '부정의 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로군요.

체계를 단순히 거부하거나 도발하는 것은 최초의 반정립적 '부정'은 될 수있을지 모르나
최초의 체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체계를 구성하는 '부정의 부정'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


로쟈 2009-04-11 19:47   좋아요 0 | URL
지젝은 적어도 제 경우엔 헤겔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가 난삽한 건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10대말에서 20대 초중반이 보기엔 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이나 70년대 초반 태어난 사람들이나 다 아줌마 아저씨들일 뿐이겠지요.

로쟈 2009-04-12 17:52   좋아요 0 | URL
각 세대마다 나름의 고민이 있겠지만, 점점 좀스러워지는 듯해서 아쉽습니다. 요즘은 각자 생각만 하기 바쁘니까요...

paul 2009-04-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기다리신다는 "The Monstrosity of Christ" /Slavoj Zizek 이 출간된 것 같더군요.^^

로쟈 2009-04-12 17: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여름에나 읽을 수 있을 텐데요.^^;
 
지젝과 데리다 사이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관찰하는 위치에 따라 새로운 시선이 제시되고, 이 때문에 초래되는 대상의 명백한 전치"(39쪽)를 가리키는 '시차(parallax)'를 지젝은 "두 층위에 어떠한 공통 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14쪽)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차적 간극이 "변증법에 되돌릴 수 없는 장애물을 배치하는 것(posing an irreducible obstacle to dialectics)"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어떤 제거할 수 없는 장애물을 변증법 앞에 갖다놓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의 전복적인 핵심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 이 책에서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곧 지젝의 내기다. 그는 "이러한 시차적 간극을 적절히 이론화하는 것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재건하기 위해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은 퇴각 국면에 놓여 있다. 이건 굳이 지젝의 정세판단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이런 국면에서 오히려 레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레닌의 전략적 통찰은 이런 것이었다.  

"군대가 퇴각할 때는 군대가 진격할 때보다 백 배 많은 규칙들이 요구된다. .. 멘셰비키 당원이 '이제 퇴각하는군요; 나는 항상 퇴각을 지지해왔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동의합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함께 퇴각하십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한 회답으로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 우리의 혁명 법정은 반드시 사형을 선고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법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라고 답한다."(14-15쪽)  

지젝이 영어판 <레닌 전집> 제33권(1966)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목인데, 엊그제인가 러시아어 원문이 뭔가 싶어서 러시아어판 <시차적 관점>(2008)을 들춰봤다가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누락돼 있는 걸 발견했다. 국역본을 기준으로 하자면 "많은 현대과학들이 자발적으로 유물론적 변증법을 실천하지만, 그들은 철학적으로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적 반계몽주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란 문장 다음에 바로 16쪽으로 넘어가 "철학적으로 말하여..."로 시작되는 문단이 이어진다.    

Славой Жижек Устройство разрыва. Параллаксное видение The Parallax View

실수라기보다는 고의적인 누락으로 보이는데, "10월 혁명 이후 처음 몇 년의 열광적이고 창조적인 불안에 매료되기는 쉽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의 강요된 집단화의 공포 속에서 이러한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인식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같은 주장이 러시아 번역자에겐 불편했던 것일까?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적 열기를 새로운 긍정적 사회질서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여전히 인식하기 어려운 게 러시아의 현실이란 걸 암시해주는 듯싶어서 유감스럽다.   

아무튼 그래서 러시아어본의 참조 없이 레닌의 통찰을 영역문으로만 따라가보면, 먼저 그는 군대가 퇴각시에는 진격시보다 백배 이상의 'discipline'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역자는 '규칙들'이라고 옮겼지만 '규율'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라면 '백배 이상의 엄격한 규율'이라고 옮기고 싶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퇴각에 동의하며 맞장구치는 멘셰비키에 대한 레닌의 응답은 이렇다.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 our revolutionary courts must pass the death sentence, otherwise they are not our courts, but God knows what."(4쪽)  

국역본은 "For public manifestation of Menshevism"을 "멘셰비즘의 공식적 위상을 위하여"라고 옮겼는데, "멘셰비즘의 공표에 대해서"란 뜻 아닌가? 핵심은 분열적인/분파적인 주장의 공개적인 표명에 대하여 혁명 법정은 가차없이 사형 선고를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겠다.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 엄격하게 단도리를 하지 않는다면, 이건 뭐 혁명 법정도 아니라는 것.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혁명 법정'은 아니라는 것("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요"란 번역도 따라서 부정확하다).   

이어서 현재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지젝의 진단.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사회정치적 참패 때문만이 아니다; 이론 고유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러한 위기는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했다는 (심지어는 실질적으로 소멸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설명되어야 한다)."(15쪽)    

여기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라는 역할로 퇴조"는 "the decline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the philosophical underpinning of Marxism"을 옮긴 것인데, 나로선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토대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조"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한물간 것으로 취급되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재건해보겠다는 것이 국역본 표지의 문구대로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이다.   

그러한 도전에 나서면서 지젝이 먼저 구분하고 있는 것은 '유물변증법(materialist dialectic)'과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다. 유물변증법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이행은 '규정적 반성'에서 '반성적 규정'으로의 이행(전환)이며 이것이 핵심이다. 반성(reflection)이란 말에는 '반영'이란 뜻도 포함돼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유물변증법과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치 거울상처럼 좌우가 서로 바뀐 형국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단어 혹은 단어들의 위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 변증법적 전환은 "(억압적) 체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격렬한 춤사위에서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유의 체계(라고 부른 것으)로의 전환"이다. 간단히 말하면, "체계로부터의 해방에서 자유의 체계로의 전환(from the liberation from the System to the System of Liberty)"이다. 덧붙여, '부정변증법'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전환이라고 지젝은 말한다(리뷰기사 참조).   

이러한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지젝의 경우 헤겔-라캉주의와의 결합적 사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적으로 말하여, 스탈린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우둔함의 화신이라는 말은 요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며 사실 그 자체가 요점이다."(16쪽) 원문은 "That, philosophically speaking, Stalinist 'dialectical materialism' is imbecility incarnate, is not so much beyond the point as, rather, the point itself." 여기서 '우둔함의 화신'이라고 한 것은 '스탈린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의 결합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스탈린주의와 결합시킨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이며 이론적 과오이고 요점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바로 그러한 결합이 요점이고 문제의 핵심이다.   

"그 이유는 내가 주장하는 바가 정확히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을 헤겔적 무한판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즉 이를 골상학의 공식인 '정신은 뼈다'와 같이 가장 높은 것들과 가장 낮은 것들의 사변적 동일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은 "since my point is precisely to conceive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 as a Hegelian infinite judgment, that is, as the speculative idnentity of the highest and the lowest, like the formular of phrenology 'the spirit is a bon.'" 

역자는 여기서 두 번 나오는 'identity'를 '정체성'과 '동일성'으로 구별해서 옮겼는데, 내가 이해하기엔 둘다 '동일성'이란 뜻이다. 해서 "the identity of my Hegelian-Lacanian position and the philosophy of dialectical materialism"을 "나의 헤겔-라캉적 입장의 정체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이라고 옮겼지만 나는 "나의 헤겔-라캉주의적 입장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동일성"이라고 교정하고 싶다(identity of A and B 구문). 요컨대, 지젝은 '헤겔-라캉주의 =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등식을 '정신 = 뼈'라는 헤겔식 무한판단의 일종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완고한 네번째 교사(steely Fourth Teacher)'는 '스탈린'을 암시하므로 '완고한'보다는 '강철 같은'이 더 낫겠다. '스탈린'이란 이름 자체가 '강철(스탈)'에서 파생된 가명이기도 하고.  

이제, 나머지는 사소하다. 23쪽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한자 이름이 잘못 병기된 것, 24쪽에서 '내재적 견해들(inherited opinions)'이 '전승한 견해들'의 오역이라는 것 등. 25쪽 이하에서 '들뢰즈의 보편적 단일성이라는 개념(Deleuze's notion of universal singularity)'에서 'singularity'는 보통 '단독성' '특이성' '독특성' '개별성' 등으로 옮겨지는 개념인데, '단일성'은 처음 보는 듯하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 26쪽에서 "여기서 나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세 개의 주요 양식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이러한 다수성에 최소한의 개념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들은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정치적 질서이다."에서 '철학, 과학, 정치'는 '질서(order)가 아니라 지젝이 다루고자 하는 세 개의 주요 '양식(mode)'이다.   

그리고 28쪽 이하에서 'democracy-to-come'이라는 데리다적 개념은 '미래 중심 민주주의'라고 옮겨졌는데, 기존의 번역어 '도래할 민주주의'와의 관계도 각주에서 언급이 되면 좋았겠다. 29쪽에서 언급된 나보코프의 소설 <왕, 왕비, 악당>은 체스용어에서 따온 것이라 <킹, 퀸, 잭>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국역본의 제목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서론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데리다에 대한 지젝의 언급이었다. "나는 자크 데리다의 저작과 씨름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므로, 아마도 지금이 이러한 '극소 차이'와 그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의 근접성을 지적함으로써 그를 기억하고 기려야 하는 적절한 순간일 것이다."(28쪽)이라고 말하는 대목. 비록 라캉주의적 입장에서 데리다의 해체론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제기해왔지만 이 대목에서 지젝은 나름대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오래전에 '지젝과 데리다 사이'라고 제목을 단 페이퍼가 생각이 나서 먼댓글로 붙여놓는다... 

09. 0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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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네 멋대로 하지 마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11 11:05 
    어제 읽은 칼럼 한 편과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한 문단을 나란히 읽어보려고 한다. 밤늦게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어제 올려놓으려고 했던 페이퍼로서 지난주에 올린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보충의 의미도 갖는다. 쟁점은 '문화적 저항의 의의와 한계'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먼저 결과적으로 소비문화에 투항해버린 '신세대' 문화를 비판하면서 오늘의 청년세대에게 새로운 대안문화
  2. 시차적 관점과 사변적 동일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8-04 01:39 
    며칠전부터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를 다시 손에 들고 주로 후반부를 읽었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고 관심 때문이기도 한데, 사실 두께가 두께인 만큼 단숨에 일독하긴 어려운 책이어서 이렇듯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읽어두는 것. 단, 원서와 같이 읽기 때문에 진도가 빨리 나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독자라면 '지젝의 모든 것'이라고 할 만한 이 책을 여러 번 숙독해봄 직하다(일독도 어렵다면서?!). 그러기 위해선 약간의 교
 
 
릴케 현상 2009-04-0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댓글들을 안 다네요. 1등 놀이를 하게 만드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0 | URL
아직 아무도 안 읽으신 책인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4-06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독했습니다.번역바로 잡기는 한번 더 읽어봐야겠군요.

로쟈 2009-04-06 23:48   좋아요 1 | URL
지젝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정독해볼 만한 책입니다...
 

지난주에 출간된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리뷰기사들이 이번주에 올라올 듯한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고명섭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낮에 도서관에서 책을 좀 읽다가 온 터이다. '시차'(혹은 '시차적 관점')와 함께 핵심적인 키워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지만, 기사의 타이틀은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고 붙여졌다. 표지에 거꾸로 박힌 레닌 동상과의 조응을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겨레(09. 04. 04) 지젝의 주장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시차적 관점>은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이 스스로 ‘대작’이라고 부른 책이다. 한국어판으로 840쪽에 이르는 이 최신작(2006)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이은 네 번째 주저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 쓴 모든 저작의 문제의식을 종합해 변혁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 보려고 한다. 출판사에서 붙인 한국어판 부제는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인데,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그가 찾는 것은 철학적 돌파구라는 형식을 빌린 정치적 돌파구다.

이 책은 지젝의 다른 어떤 책보다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추천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까다로움과 관련해 “지젝의 글이 가끔 이해가 안 된다면, 이는 그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지 결코 잘난 척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다로움은 일차로 이 책의 비체계적 서술에 있다. 지젝은 형식상 3부로 나누어 철학적·과학적·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서로 겹치고 섞인다. 지젝은 철학·종교·문학·영화·예술, 그리고 온갖 일화와 사례를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의 접합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콜라주가 된다. 그는 모든 통념·관습·도그마를 분쇄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 도그마에 도전하는 생각들 자체의 맹점을 지적하고 깨뜨리고자 한다. 지젝의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는 책의 전편에 지뢰처럼 매복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2001년 저작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다. 지젝은 가라타니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쓴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기여는 여기서 그친다. 지젝은 가라타니가 제시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발상만 수용할 뿐 그의 나머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라타니는 그의 책에서 헤겔을 거부하고 칸트를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데, 지젝은 가라타니와는 반대로 칸트를 기각하고 헤겔을 승인한다. 헤겔주의자답게 그는 헤겔의 사유를 갱신하고 진척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난국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런 노력의 한 양상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재사유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패퇴해 철학사의 한 장으로 축소돼 버린 것이야말로 전망 부재의 오늘 현실을 보여 주는 철학적 사례로 이해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패배는 마르크스주의 혁명, 더 구체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궁극적 실패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도 함께 매장된 것이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출당하고 난 뒤 좌파적 사유에 남은 것이 ‘부정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 ‘부정 변증법’은 진정한 혁명을 사고할 수 없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현실)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다.” 부정 변증법만으로는 현실의 극복과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권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시 러시아 혁명의 긍정적 핵심을 복권시키는 일과 연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발상은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근본적 이유를 따져 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있다. 그런 사유를 요약한 말이 ‘시차적 관점’이다. 여기서 ‘시차’(視差, parallax)란 천문학에서 쓰이는 용어를 빌려온 것인바,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주체가 어떤 위치에서 보는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시차이며,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 관점이 ‘시차적 관점’이다.  

지젝이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 러시아 10월혁명 때 함께했던 혁명가 레닌과 모더니즘 예술가들의 경우다. 화가 말레비치나 시인 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은 혁명 초기에 열광적으로 레닌의 혁명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1920년대 이후, 특히 스탈린 시대에 모두 제거되거나 좌절하고 말았다. 이것은 스탈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스탈린에 앞서 레닌과 전위예술가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시차적 관점’의 결과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레닌이 좋아한 것은 고전 예술이었다. 그는 결코 전위예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위예술가들은 낭만적인 혁명 열정은 좋아했지만, 그 뒤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이 다른 시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대한 아주 긴 설명이다.(고명섭 기자) 

09.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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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겔-라캉주의와 변증법적 유물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04 00:17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의 리뷰기사를 옮겨놓은 김에 서문(번역본에서는 'introduction'을 음악용어인 '서주'로 옮겼다. 중간에 나오는 '간주'들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번역에서 의견이 다른 부분들을 지적해두고 싶다(이런 '품앗이' 교정이 방대한 분량의 이론서를 깔끔하게 우리말로 옮긴 역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는 나대로의 방식이다). 한 가지 핵심적인 사안과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궁리, 2008)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관련 페이퍼를 올려둔 바 있는 듯싶은데(사실 나는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다 읽지 않았다. 쓰고자 하는 글의 소재로 염두에 두고 있는 정도다) 서평 하나를 더 스크랩해놓는다(람혼님의 서평 http://blog.aladin.co.kr/sinthome/2636449 도 참고하시길). 랑시에르가 반박하고자 하는 상대 중의 하나는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인데, 그 점을 잘 부각시키고 있는 서평이어서다. 제목은 그 점을 좀더 강조한 것이다.   

 

교수신문(09. 03. 30) 지적 불평등? 부르디외, 당신이 틀렸어!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는 책이다. 철학,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심지어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어떤 주제를 어떻게 다루길래 이토록 반향이 큰 것일까. 저자인 랑시에르는 기존 학문의, 정치적 기획의, 교육적 실천의 전제조건이었던 지적 조건의 불평등이라는 테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며, 바로 거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근대 계몽주의를 거부하는 20세기 후반의 몸짓보다 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다. 랑시에르가 이 같은 주장을 제기한 배경에는 지적 불평등의 격차 해소를 두고 지루하게 이어진 논쟁과 갈등이 있다. 진보주의와 공화주의, 과학주의적 강조와 대중 자발성에 대한 강조 등으로 대립해온 모든 논쟁의 역사 이면에는 대중은 무지하고 지적으로 열등하며,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전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제 자체가 잘못됐으며, 자코토의 예 등 무수한 사례가 노동하는 대중의 무한한 지적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도 보여준다는 점이 저자의 진단이다.(오주훈 기자)

지난 해 겨울 한국을 방문해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주요 저작 한 권이 또 번역돼 출간됐다. 『무지한 스승』이 그것이다. 번역은 이미 랑시에르의『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를 훌륭히 번역한 바 있는 양창렬씨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번역자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옮긴이 주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무지한 스승』은 1818년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가 된 조제프 자코토의 지적 모험을 소개하고, 그가 이 경험으로부터 이끌어내고 있는 교훈들을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더불어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자코토는 루뱅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을 가르쳐야 했다. 그런데 그는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다. 요컨대,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코토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번역이 함께 실려 있는 책 한 권을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번역문의 도움을 얻어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도록 주문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학생들은 얼마가지 않아 자신들의 생각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됐던 것이다.  

자코토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낸다. 첫째, 스승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앎은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승의 덕목은 오히려 무지이다. 무지한 스승,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할 것에 대해 무지한 스승을 말한다. 그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무지한 자가 스스로 터득할 수 있도록, 그의 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인간들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 교육을 지식의 전달로, ‘설명’으로 생각하는 입장은 지능의 불평등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서 그 불평등의 간격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설명 자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설명을 듣는 자가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즉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평등은 목표로서, 달성해야 할 어떤 것으로 제시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이미 전제돼야 하는 것이다.  

셋째, 지능들의 동등성은 어떤 것을 배울 때 따라야만 하는 어떤 ‘올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터득하는 데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방식 및 절차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지한 사람들의 방법은 ‘우연의 방법’이다. 한번이라도 스승 없이 무언가를 알아가야만 했던 상황에 놓이지 않았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은 아주 일상적으로 그리고 세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코토는 이러한 학습방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넷째, 지능들의 동등성이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는, 무엇을 알아가는 지적 과정들에 실행되고 있는 지능들은 본성적으로 하나이고 보편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모국어를 익히는데 사용됐던 지능은 문학작품이나 수학의 증명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지능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자코토는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전체의 어떤 임의의 부분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에 대한 앎을 다른 부분과 연관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에 대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에 기초를 둔 이 방법은 전통적인 교육모델과 대립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지적 해방을 가능케 하는 교육 방법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특히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이 ‘지적 평등’이라는 관념이 갖는 중요성에서 잘 드러나듯이, 정치적 함의들을 갖는다.

전통적인 교육모델은 무엇보다도 진보의 이념을 전제하고 있다. 지식들의 전수와 그 축적 및 확산을 통해서 한 개인 혹은 한 사회는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실제로 자코토가 ‘무지한 스승’이란역설적인 주장과 함께 개입했던 시기는, 사회를 합리적 질서로 구성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이라는 비판적 시대를 완수하고자 하는 기획이 시작됐던 시대였다. 이 기획의 바탕에 놓여 있던 것이 바로 진보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지적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것은 세계의 분할,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분할을 하나의 사실로서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로부터 정치적 주체화와 해방은 주어질 수 없다. 따라서 해방은 다른 전제, 즉 지적 평등으로부터 출발해야 가능한 것임을 랑시에르는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법으로서의 ‘보편적 가르침’은,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이 출간됐을 당시 프랑스에서 지배적인 담론중의 하나였던 부르디외의 이론과도 대립한다. 부르디외는, 보편적 교육이라는허울 아래 사회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이 학교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랑시에르에 따르면, 자신의 반대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적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및 정치를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에게 정치는 소멸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이론적 틀에서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사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는 전위주의 혹은 엘리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전통이 존재한다.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은 이 전통에 대한 비판적 답변이며, 동시에 정치의 가능성이 어디에 놓여있는지에 대한 오랜 탐구의 결과이다. 그가 찾은 ‘지적 평등’이라는 논제는, 정치가 점점 더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의 시대에 다소 유토피아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랑시에르의 논의는, 정치적 주체화를 사유하기 위한 전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박기순 서울대 강사·철학) 

09. 0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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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1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31 2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Octopus 2009-03-31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중 "번역자는 한국 독자들의 이해에 필요한 내용을 옮긴이 주를 통해서 제공해주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 큰 불만이 있는 독자입니다. 대부분이 불필요한 역주, 그리고 '원문에는 이런 단어가 없지만' 하는 식으로 굳이 본문 중간중간 끼워넣은 괄호[ ]들은 독서의 속도감을 엄청나게 방해하더군요. 역자 본인도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주렁주렁 달린 옮긴이주의 존재 자체가 이 책의 주장에 위배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역자 후기에 언급했지요. 그런 거추장스런 사족 없이도 술술 읽히고 잔뜩 영감을 주는 책인데 말입니다.

로쟈 2009-03-31 22:35   좋아요 0 | URL
라캉의 <세미나>와는 대조되죠. 밀레는 역주 자체를 엄격하게 제한(금지?)한다더군요...

푸른바다 2009-04-01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으로서의 평등, 아니 생명으로서의 평등은 인정하지만, 전 '지적 평등'은 동의하기 힘들군요. 제 경험상 사람들의 지적 능력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4-03 08:41   좋아요 0 | URL
불한 대역본이라면 그런 '평등한' 지적 능력이 발휘될 수 없었겠죠. 자코토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문제는 제기해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