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에 대한 서평을 하나 옮겨온다. 필자는 박정수(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씨이며,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의 역자이기도 하다. 그런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서평은 지젝에 대한 얼마간의 관심과 경탄을 담고 있을 듯하지만, 정반대이다. 서평자는 정말로(!)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며 그의 책들을 쓰레기 정도로 폄하하고 있다(서평 대상에 대한 혐오에 있어서 아마도 강유원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대한 서평 이후에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 않나 싶다).

 

 

 

 

안 그래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쓸 일이 있어서 더디게 읽고 있던 참이라 본격적인 서평이 씌어진 것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읽어보니 책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 서평이라(나는 서평자가 책을 읽어본 건지 그냥 불만스레 뒤적거려본 건지 의심이 간다) 그 반가움은 곧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취향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걸 논리로 포장하는 일은 보기에 흉하다. 어차피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서평이기에 길게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참고자료로서만 보존해둔다. <혁명이 다가온다>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한 읽기를 올려놓도록 하겠다.

컬쳐뉴스(06. 10. 26) 레닌은 어디서 반복되어야 하는가? 

1995년 『삐딱하게 보기』가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젝의 이름은 자크 라캉이라는 이름 뒤에 붙어 있었다. 여전히 ‘근간 예정’인 라캉의 『에크리』와 『세미나』들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알고는 싶은데 도대체 알 수 없는 개념 투성이의 낯선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그때 할리우드 영화와 일상문화를 통해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을 간명하게 설명해낸 『삐딱하게 보기』는 목마른 논을 적시는 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철학, 정치학, 사회학, 문학, 영화 비평 전공자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름이 되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라캉이라는 이름과 분리되어 슬로베니아학파라는 독자적인 학파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갔고 매년 한두 권씩 출판되는 번역서마다 성실하게 오역 교정까지 해주는 매니아들을 거쳐 대학담론으로까지 진입해 들어갔다(*아마도 나는 '번역서마다 성실하게 오역 교정까지 해주는 매니아들'의 주요 멤버인 듯하다. 다른 멤버들과 단합대회라고 가져야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꽂이에 읽다가 만 번역서들이 한 두 권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서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지젝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자꾸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그러니까 서평자가 가장 문제삼고 있는 건 지젝의 자기-표절이다. 이 책의 내용이 저 책에 또 실리고 한다는 것).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단적인 예로 13장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2판 서문 중 ‘공제의 정치는 존재하는가’와 거의 같다. 『혁명이…』와 『그들이…』의 2판 서문이 같은 해(2002년)에 쓰여진 걸 보면 똑같은 원고를 가지고 두 번 써먹었다는 얘기가 된다(*같은 단락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혁명이>가 <그들이>보다 2배 이상 길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선임자의 논문 표절 및 이중 등록 사건에 적용된 학자의 윤리를 지젝의 자기-표절에도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다들 모른 척 하는 건지 별 문제 없다는 건지 이 점을 꾸짖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지젝에 관한 연구서들이 다 하고 있는 지적이다). ‘독창성’이라는 케케묵은 근대적 기준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의 ‘혼성모방’ 작업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나마 잘 팔리고 있는 철학 상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느 쪽이든 이 침묵의 카르텔은 옳지 않다(*그러니까 한 책에 인용한 사례나 주장은 다른 책에서는 절대로 이용하면 안된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그의 사유를 틀 짓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크스의 『자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라캉의 『에크리』와 그의 책은 분명 ‘급’이 다르다. 이들의 책은 백년이 더 지나도 팔리겠지만(*왜 '읽히겠지만'이 아니라 '팔리겠지만'인가? 그리고 라캉의 <에크리>는 어디에서 팔린다는 것인가?) 지젝의 책은 그렇지 않다. 지젝과 사유 노선이 다른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나 들뢰즈․가따리의 『안티 외디푸스』가 백년은 몰라도 반세기 후에도 소장될지언정 지젝의 책도 그럴까?(*거의 관심법 수준인데, 다 맞다고 치자. 한데, <정신현상학>과 <자본> 정도가 아니면 다 쓰레기이고 소장가치가 없는 책들인가? 서평자의 단촐한 서가가 부럽다.)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그의 이름은 아무런 인식론적 사건도, 사유방식도 지시하지 못한다. 헤겔, 마르크스, 라캉, 데리다, 들뢰즈․가따리는 그 이름만으로 그들의 책에 담긴 지식의 효과를 지시하지만 ‘지젝’이란 이름은 그렇지 않다.(*물론 지젝의 독창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라캉을 선불교적 스승의 자리에서 현실 정치의 장으로 옮겨놓은 지젝에게 박수를 아낄 필요는 없다"는 서평자의 태도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재작년과 올해는 또 사정이 다른 건가? 하긴 대추리 사태가 재작년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물론, 오늘날 쇼호스트는 이미 생산된 가치를 이전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며, 지젝도 그렇다. 유명한 쇼호스트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듯이,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 라캉의 구조분석을 조합하여 후기 자본주의 대중문화와 정치지형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는 자기만의 분석틀을 개발했다(*나는 더 나간다고 보지만, 이것만으로도 의의는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젝의 책은 철학서라기보다는 평론집에 가깝다. 자신의 분석틀을 개발한 이후 그가 하는 일은 분석 대상을 수집하는 일이다(*서평자는 지젝의 사생활까지 꿰뚫고 있다). 매순간 촉각을 곤두세우며 각국의 변기구조나 음담패설 및 농담을 수집하고, 시간 날 때마다 할리우드 TV 프로, 영화나 고급 오페라, 소설, 종교, 철학, 정치적 이슈를 자신의 분석 테이블에 올려놓고 해부해 놓았다가 특정한 기획 하에 묶어 낸다. 『혁명이 다가온다』의 기획은 ‘레닌’이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레닌과 소비에트 혁명에 집중된 새로운 연구성과는 없다(*이 대목에선 서평자의 학식이 부러우면서 러시아문학 전공자라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해 이 책에서 다시 배워야 했다). 대신 이전의 분석들 중에서 레닌과 혁명, 정치학에 관련된 내용을 골라 약간의 수정과 편집 작업을 가하여 묶어 놓은 것이다.

이런 평론집의 가치는 그 기획의 적절함에 있다. 만약 ‘레닌의 반복’이라는 이 책의 기획이 적절하다면 그 결과는 레닌 전집의 재출간이나 판매 부수 증가로 나타날 것이고, 나아가 레닌이 일으킨 사건, 즉 혁명의 반복을 위한 실천 행위로 이어질 것이다(*아무튼 기이하다. 철학서는 안 팔려도 그만이지만, 평론집은 그 실제적 효과에 의해서 입증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책의 효과가 이 책 자체로 그친다면, 라캉과 지젝의 분석적 성과로 그친다면, 지젝은 자신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포스트-맑시스트들의 ‘혁명 없는 혁명’, 후기 자본주의 문화 시장에 흡수되어 버린 ‘혁명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비난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심지어 레닌까지 정신분석가의 음울한 분석 소파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죽음을 치렀다는 비판과 함께(*레닌을 들먹이려면 레닌 전집의 재출간까지도 책임져야 하는가? 러시아에서도 나오지 않는?).

그렇다면 ‘레닌’이라는 기획은 적절한가? 여기서 지젝은 자신의 내기를 걸고 있다.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그들과의 단호한 단절, 진화론적 역사주의와 다원론적 민주주의에 물든 사이비 혁명가들, 그 옛날의 사민주의자들과 오늘날의 좌파 자유주의자들과의 중단 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지젝의 이 내기를 그저 또 하나의 (정신)분석적 사례로 간주한다면, 그건 오독이거나 자기기만이다(*이제 책에 대한 염려에서 독자에 대한 염려로 관심이 확장된다. 그래서 서평자는 '지젝의 내기'를 접수했다는 것인가, 오독했다는 것인가?).

물론 이런 무의식적 오독에도 분석되어야 할 욕망은 있다. ‘나는 지젝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걸 잘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혁명의 내기가 실재 현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건 믿지 않아.)’라는 물신주의적 부인 속에서 지젝의 평론을 ‘철학’으로 승화시키거나 독창적인 ‘정신분석가’로 재성화(再性化) 시키는 지젝 매니아들이 있다면, 그들의 욕망은 후기 자본주의의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뿐이다(*문제는 '지젝 매니아들'인가? 지젝의 '철학'과 '독창적인 정신분석' 운운하는?).

이 책이 지젝의 정치적 내기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의 정치적 내기 속에서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문제는 무엇인가? 지젝의 '정치적 내기'인가? 아니면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물신주의적 부인'인가? 이하는 지젝과 무관한 서평자의 한국사회론이다. 서평자의 단골 레퍼토리인지?). 한국 사회는 지금 전체주의적 주변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주의적 중심부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의 두 광고가 이를 대변한다. 모 카드회사의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라는 CM송과 국가홍보처의 “아버지, 이것이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한민국입니다”의 멘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이다. 항상 때리는 아버지이거나 부재하는 아버지만 있었지 아들에게 향락의 교훈을 전해주고 자랑스런 국민국가의 상징적 대표로 호명된 아버지는 없었다.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외설적 명령을 노래하고 ‘자랑스러워라’ 라는 국민적 아버지의 자아-이상을 내면화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국민국가를 완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는 해소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드러내고 있다. 양극화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직은 불명확한 이 성공은 한미 FTA 체결 이후에는 훨씬 더 가시화될 것이다. 현 정부가 끊임없이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은 우리가 빼앗긴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식민주의 종속성의 망령을 떨쳐버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인데, 그 ‘우리의 욕망’ 속에는 미국의 자본가와 함께 한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자 하는 한국 자본가 계급의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계급적 분열을 은폐하는 주체 호명이다. 이 민족주의적 주체의 분열성은 평택 주한 미군기지 조성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을 향해 기지이전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수도에서 미군기지를 없애기)를 위해서라고 호소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대추리 주민의 삶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돌려주겠다는 전시작통권을 한사코 돌려받지 않으려는 식민주의적 욕망이 숨어 있다(*대추리를 짓밟은 것도 전시작통권을 돌려받겠다는 것도 현정부이다. '식민주의적 욕망'은 누구의 것인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조직된 노동자 계급, 신자유주의 경영 효율성을 위해 항시적인 해고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선진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면서 만성적인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 세계화된 노동 시장에서 좀더 고가의 임금을 위해 들어온 이주노동자들과 혼혈가족들, 자본주의적 개발 욕망에 의해 파괴된 새만금의 갯생명들과 어민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서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논리를 한꺼번에 정지시키며 ‘정신병’적 선택을 감행하고 있는 대추리의 주민들, 이들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혁명이 다가온다』가 기획한 ‘레닌의 반복’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이 반문은 지젝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출판기획자를 향한 것인가? 혹은 독자들? 이러한 태도에서 소위 좌파연하는 냉소주의를 읽어내는 건 나의 오독인가?) 

06.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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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phqa 2006-10-3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를 보러 온 지는 꽤 됐지만 글은 처음 남기네요. 대학에서 강의하신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개인적 프로필은 비공개인가요? 문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문학도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곳에 페이퍼에 쓰시는 글들만 모아도 책한권이 될 것 같은데, 혹시 '책'을 낼 계획은 없으신가요? 아님 혹시 벌써 내신 책이 있으신지?,,^^

로쟈 2006-10-3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밍아웃하셨군요.^^ 알라딘 서재는 개인 프로필 항목이 따로 없기도 하고 그냥 이곳은 '로쟈의 서재'입니다(간혹 면밀히 관찰하시는 분들은 제 신상을 알아내기도 하더군요^^). '책'이야 아직 내주겠다는 곳도 없지만, 낼 만한 형편의 글들도 많지는 않습니다. 온라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 많아서요...

Ritournelle 2006-10-3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수유+너머에서 세미나를 같이 해서 정수형을 조금 아는데 형이 지젝에 대한 조금은 가혹한 서평을 쓸 줄은 몰랐네요. 형은 지젝에 관한 개론서도 번역한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약간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로쟈님의 지젝에 대한 방어는 염두해 두겠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한 번 지젝을 거쳐가야 하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거든요. 찬찬히 지젝의 저서들을 탐독해 보아야 겠습니다. 그럼 날씨가 추워지는데 건강하시고요.

자꾸때리다 2006-10-3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냉소적이군요... 어떤 분들도 지젝의 책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 읽으면 된다고들 하던데... 이렇게까지 냉소적인 글이 나오다니... 그래도 현재 한국 지식계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학자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는 참...

로쟈 2006-10-3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적인(?) '인기'가 정당한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부당한 폄하의 논거가 될 수도 없겠지요. 지젝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마치 연예인처럼). 하지만, 그가 '철학자'도 아니며 그의 책 전체가 '소장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젝에 대해서보다는 발언자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한) 발언입니다. 서평자가 50년은 갈 거라고 한 데리다에 대해서도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많고, 일례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자 했지만 교수진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명예'는 데리다의 것이 아닙니다...

sommer 2006-1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향한 비판의 공통점은 그를 향해 쏘는 화살(형식주의)이 곧바로 그네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지젝의 헤겔 해석을 '칸트적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버틀러에게 지젝이 '역사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처럼, 지젝이 취하는 끝없는 '재명명'의 전략-한 번은 기호와 연관되는 명명으로 두 번째는 청자 혹은 독자들의 반응과 관련한 명명으로서-에 그의 의도대로 꼭 그렇게 반응하는 형국인 것이지요. 지젝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언급에 대해 호들갑 떨던 그들에게 오히려 자신을 '스탈린주의자'라고 선언했다던 일화처럼 말이지요.
'지젝이라는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깽돌이 2006-11-02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옮긴이의 글 보면,오늘날 정신분석학의 치료는 쇠퇴하고 무속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데,좀 의아해했습니다.한국에서 임상 정신분석은 활황인적이 없는걸로 알고 있어서요.인문학적인 정신분석 이론활용이야 만발했겠지만.국제정신분석학회 한국인회원 이제 달랑 3명인데말이죠 .제가 개인적으로 분석적 치료를 받고 있어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로쟈님도 건필하시고 유익한 글 많이 올려주세요.

로쟈 2006-11-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ture님/ 마지막 문구는 저로 리뷰에서 써먹은 겁니다.^^
깽돌이님/ 그렇죠, '쇠퇴'할 건덕지도 없었죠. 임상으로서의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이전에 라캉 관련 페이퍼에 댓글들이 많이 달린 적도 있습니다...

로쟈 2006-11-0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감은 코앞인데, 다른 원고도 밀려 있어서 죽을 맛입니다...

사량 2006-11-0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이른바 '다산성'의 저자들은 자기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주장의 되풀이를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김윤식 교수의 글들을 보면 지젝은 명함도 못 내밀지 않을까요. ;;; 지젝에게 잘 팔리는 지적 상품이라는 레테르가 붙는다면, 아마도 그가 글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6-11-0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어령 선생만 해도 200여권의 저서 중에서 중복되지 않는 것만 추리면 50여권쯤 된다더군요. 1년에 한권꼴. 이런 걸 고의적인 자기표절로 간주하는 태도는 너무 강파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의 어떤 대목을 다른 맥락에서 다시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계속해서 덧붙이면서 확장해나가곤 합니다. <혁명의 다가온다>도 그래서 독어본과 영어본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개정판 서문은 100페이지씩 다시 쓰기도 하구요. 제가 높이 평가하는 건 그 열정입니다(그걸 서평자는 '기획'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마누스 2007-01-06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는 서평자가 왜 이런 '쓰레기'를 썼는지 의구심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