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외진 곳만 골라 다니는 자의 고통
섬 島
도시의 삶에 지쳐 있는 이에게는 환상의 세계이다. 푸른 바다, 작렬하는 태양, 파도 하얗게 부서지는 백사장, 구릿빛 피부, 갓 잡아올린 생선, 산비탈 흰 등대, 담벼락에 기대어 있는 수선화, 수평선 너머로 깔리는 노을. 뭐 이렇다. 섬을 찾아오 ㄴ사람은 그런 것을 만난다.
첫째 날. 환호성을 지른다. 갯바위를 걷고 동백나무 터널을 지나고 백사장 거닐며 행복해한다. 좋겠다, 이런 곳에서 살면. 이러면서......
둘째 날은 첫날의 감격이 가라앉은 탓에 차분하게 산책을 한다. 슬그머니 내려놓고 갈 미움이나 갈등 같은 것에 대해 골똘히 사색하는 분위기이다.
셋째 날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슬슬 지겨워진다. 등돌려 두고 왔던 것들이 불안한 것이다. 결국 지하철과 극장과 술집과 이웃과 말이 풍성한 곳으로 돌아간다.
무엇이 여행객을 괴롭힐까.
침묵이다. 특히 거대한 수평선의 침묵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저 큰 한일(一)자가 미동도 않는 탓에, 바라보던 눈이 공연히 흔들리는데, 흔들리다보면 저 깊은 곳에 숨겨둔 것까지 자꾸 바깥으로 기어날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게 싫어 고개 돌리면 어제와 별다를 바 없는 무료함이 떡 버티고 있다. 떠나고 싶어진다. 어쨌든 그들은 섬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고 간다.
그러나 섬은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익사 모면할 정도의 몇 뼘 땅. 광활한 수평의 세상을 버티고 있는 수직의 장소. 방파제를 넘어 달려드는 거대한 파도와 초속 30미터으 강풍. 어부의 죽음. 가지가 한쪽으로만 늘어나버린 팽나무. 단 한 뿌리라도 더 캐려다가 비탈에서 떨어져버린 아낙.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주름. 급경사의 밭. 끝없이 이어지는 일. 이젠 됐다 툭, 떨어지는 동백꽃.
바다와 바람 외에는 모든 결핍의 장소. 이별과 쓸쓸함만큼은 풍족한 곳. 사람도 섬을 닮아버린다. 각자 독립된 고립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풍경이 된 채 달이 가고 해가 바뀐다. 섬은 고독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견디기 힘들다.
바다는 바람 하나에 표정이 바뀐다. 북서풍 물비늘이 일면 가장 황량한 곳이 된다. 이런 날 섬엘 오면 쓸쓸하고 고달프다는 생각뿐이다. 그러나 어느 바람도 일순 잘 때가 있는 법. 그러면 12월 바다는 액체 사파이어로 변한다. 아주 맑고 푸르다. 낚싯줄에도 푸른 물이 배어들 것만 같다. 혹한을 대비한 준비이거나, 또는 겨울잠 직전의 몸부림이거나, 침묵을 앞둔 처연한 축제 같다.(102) ......
도시에서 살기 때문에 욕망과 만나고, 그렇기 때문에 우울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웬만한 책임은 피할 수 있는 소설이 대부분이다. 대중 속의 고독도 사람의 일이라 작가가 그곳으로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너무 많이들 어두운 카페로 걸어들어가버렸다. 개인의 우울이 사회의 비참보다 더 크고 강렬해져버린 것. 이른바 문학적이다. 그러나, 문학을 키우는 것은 비문학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당신이 고향에 두고 온 것들 중에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
몇 년 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유학 온 여학생에게 내가 물었다. 흔히 가족이이나 친구, 또는 연인 중에 하나를 댈 텐데 서울 생활 삼 년째라는 그녀는 바람이라고 대답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독한 바람. 극도로 추웠던 바람. 너무너무 지겨웠던 그게 가장 그리운 거란다. 허락한다면 고향에서 한 사흘 그 바람만 맞다 돌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됐다.(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