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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베 얀손, 일과 사랑
툴라 카르얄라이넨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토베 얀손,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지만 '무민'이라고 했을 때 한번도 무민스토리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무민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그 귀여운 캐릭터를 창조해 낸 사람이 바로 토베 얀손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솔직히 '남성과 대등한 여성의 지위와 독립성, 창의성, 평가가 중요했고, 일에서도 삶에서도 평범한 여성이 역할에 굴복하지 않은' 토베 얀손의 삶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150여편의 도판이 실려있다는 것에 더 혹하는 마음에 책을 펼쳐들었다. 그래서 책을 받자마자 도판을 한차례 훑었고 무민의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꽤 흥미롭게 보기는 했지만 선뜻 그녀의 일생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그닥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그녀의 어린시절, 가족, 친구,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글을 읽어갈수록 점점 더 그녀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하고 캐릭터로만 접해봤던 무민의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게 되었다.
"먼 훗날 사람들은 우리가 흥미롭고 중대한 시기를 겪는 특권을 누렸다며 떠들어대겠지. 하지만 난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너무 엄청난 일이 벌어져서 자꾸 우리를 작아지게 하는 것 같아. 전쟁이 오래갈수록 사람들은 야심을 품을 만한 기력이 없어져. 점점 위축되고, 시야도 좁아지고, 국가주의적 화법과 표어, 구식 편견과 원칙, 그리고 자기자신에게 점점 얽매이게 돼"(92)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토베 얀손은 전쟁터로 끌려간 동생, 친구를 비롯한 모두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전쟁터로 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두가 그들의 사망통지를 받을 뿐이라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했다.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그녀는 화가로서의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귀엽기만 한 무민 캐릭터의 모습과는 달리 초기의 무민은 새까맣고 입도 동물 주둥이처럼 길쭉하게 나와 돌연변이 늑대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뭔가 좀 괴기스러운 분위기도 느껴지고 암울해보였다. 단지 겉모습만 봤을 때 그랬다는 뜻이다. 그런 무민의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다. (토베 얀손이 핀란드의 하얀 겨울 숲을 보며 살았다는 것에 감사한다. 무민이 하얗고 뭉툭한 코를 가진 귀여운 캐릭터로 변모된 것은 하얀 눈이 나무 그루터기에 두텁게 쌓여있는 한겨울 숲을 바라보다가 '커다랗고 둥그런 흰 코'처럼 늘어져 있는 그루터기들을 발견해서 생겨난거라고 하니까 말이다)
"적어도 초반에는 자신을 위해 썼다. 책을 쓰면서 토베는 전쟁과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났다. 많은 핀란드인들이 집에서, 그리고 전쟁터에서, 약물과 특히 독한 술로 정신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무민골짜기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쓰면서 토베는 그토록 잔혹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모로코와 통가 왕국에 세우려 했던 예술가 공동체를 위한 구상과 비슷한 존재였던 것 같다."(139)
"토베는 무민 동화에 묘사된 자연이 가능한 한 현실적이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크기는 제각각이더라도 달은 항상 제대로 된 방향에서 떠올랐다. 무민들이 사는 세계는 바다와 폭우, 험준한 산과 동굴로 이루어졌지만 꽃이나 빽빽한 숲도 있었다. 무민 골짜기는 아늑하고 동네같으면서 안전한 환경이며, 모험이 전개되는 배경은 정확히 그와 반대된다. 예측불가능하고 위험천만한 바다와 산악지대는 온갖 재난이 닥쳐올 것만 같다. 무민 가족은 광활한 세상으로 나갔다가 평화로운 골짜기에 위치한 집으로 돌아오면서 늘 안심한다. 물론 돌아오기 위해서는 먼저 떠나야 하지만 말이다."(145)
예술가 공동체를 구상하며 그 이상향을 무민 골짜기에 넣었다라거나 무민동화에 묘사된 자연이 가능한 한 현실적이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무민의 이야기에서 바로 드러난다. 전쟁 상황과 떨어질 수 없는 당시의 세계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특히 2차세계대전때의 원자폭탄 투하의 공포는 '무민 골짜기에 나타난 혜성'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버튼 하나로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깨달음은 무민 동화에 확실히 영향을 미쳤고 인류전멸의 위협은 이 책의 주제가 되었는데 어린이책의 주제로는 이례적인 것이기도 했다.
"행복이나 실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해봐. ...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에게 화를 내거나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봐. 잠도 못 자고, 추위도 못 느끼고 절대 실수도 저지르지 않고, 또 배탈이 났다거나 그게 가라앉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일을 함께 기뻐해주지도 맥주를 마시지도 못하고, 양심에 찔리는 기분도 못 느낀다고 말야........."(173)
토베 얀손의 삶을 이야기할 때 무민을 빼놓을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무민의 이야기에도 토베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어린이가 보는 동화라고 무조건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녀의 생각은 조금 위험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 깊이를 보게 된다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책을 다 읽고나니 이제 알겠다. "토베의 삶은 진정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