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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여자, 시골에서 막 올라온 휘둥그래진 눈을 한 여자.
그녀가 자신도 몰랐던 욕망을 발견하게 될지, 혹은 너무 순진한 나머지 비참한 세상의 매운 맛을 보게 될지 아직은 모른다. 다만, 영화 <브루클린>의 주인공 에일리스처럼 혼란스럽고 외로워 할 것임을, 그러다 이내 돌아갈 수 없게 된 스스로를 알아차리게 될것임을 안다. 결국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야심찬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다. 앞에 놓인 삶이 살기도 전에 지긋지긋해서 도망쳐온, 익명의 도시에서 더 지긋지긋해진 생계와 악전고투하게 되는, 그러다 본질이 변질되버리는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다. 지긋지긋함은 같지만 살펴보면 다르다. 두번째의 것은 내가 선택했다. 그래서 더 슬프고 더 괴롭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혹여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미 많이 변해 본질이 없으니 돌아가지 않은 셈이된다. 그러니 이 소설을 어찌 좋아하지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이야긴데.
“(15) 안젤라는 집(좀 더 정확히는 잠시 신세지는 여자의집)으로 3번 전차를 타고 갔다. 전차는 텅 비어있었다. 안젤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보려다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묻는 사람은 고사하고 그녀를 애써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그녀의 슬픔에 빠져들었고, 그들 역시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가씨의 슬픔과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흐느낌이었다. 물론 자기 연민 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다정도 하여라, 함께 훌쩍여주는 모스크바의 사람들. 안젤라, 2020년의 서울 사람들은 이어폰을 꼽고 스마트폰을 본답니다. 눈물은 아마 마스크 속으로 감출 수 있을거예요.
지하철에서 서울사람들을 구경하려다 갑자기 통곡이 밀려왔던 날들이 생각났다. 사연있는 젊은 여자처럼 보일까봐 고개를 푹숙였는데 사람들은 내가 우는 거 다 알았겠지. 줄줄줄 흘러가지고 닦이지도 않을 정도로 터진 눈물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서울 살이 4년차까진가 그랬다. 정작 운 사연은 기억 안나는 데, 여튼 기분이 비참했고, 그 와중에 서울 사람들은 너무 다들 멀쩡해 보여가지고 더서러웠고 나만 이방인같았다. ‘저는 지금 어딜가나 사람이 있어 놀라운 인구밀도와 이동하기 위해 버려지는 속절없는 시간들이 3년 째 적응이 안돼서 눈물이 차오르는 데 여러분은 이게 일상이라는 거죠?’ 4년이 지나고 나자 놀랍도록 적응이 되었다. 지금은 도시의 이 무심한 다정함이 좋다. 그것도 매우.
“(319) 마리나는 앉아서 개미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개미들은 모두 자기 힘 닿는 한, 혹은 힘에 부치는 양의 흙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등에 무거운 달걀을 이고서 일렬로 가고있었다. 개미는 무거운 짐에 눌렸다가도 계속 끌고 갔다. 가는 도중에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멈췄다 가기도했다. 아마 멈춘 그 순간에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는지도 모른다.”
이번주를 버티게 한 것은 지난주에 읽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이다. 아마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녀들처럼 바삐 살아내자. 이악스러운 사랑스러움. 계산을 하긴 하지만 결국은 아주 쪼꼬만 계산인. 사실은 다음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이지도 이타적이지도 않은 선택과 현실인식. 그리고 그 현실인식에 도움되는 사랑, 현실, 또 사랑들. 사랑이 지날수록 그녀들은 뻔뻔해지지만 가진 것 없는 평범한 여자들에게 뻔뻔함의 의도와 선악을 묻는 것은 무망한 일이다.
“(96) 그녀는 두 부류의 남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부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고, 두 번째 부류는 돈 많은 남자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남편은 아내한테 붙어서 살아간다. 그러면 여자는 둘이서 함께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 물론 힘든 일이다. 반면 돈 많은 남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무례하며 결국은 아내를 버린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당나귀로 살 것인지, 자기를 마구 짓밟고 척추를 부러뜨려도 참고 살 것인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물론 지조와 성공 두 가지를 다 갖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여자, 아직은 세상과 자신이 궁금한 여자. 자신을 잘 몰라 불분명한 경계선 때문에 많은 것을 침범당하게 내버려두는 여자. 혹은 침범하는 여자.
바삐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물정을 몰라 어물쩡하던 그녀들은 살아야하고 살아있으므로, 매일매일 먼지를 닦아내고 끼니를 만들어내면서도, 가진 자원들을 재료 삼아 삶에 불어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해간다. 문제는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 와중에 사랑한다. 아무튼 기운이 넘치는 여자들이다.
“(197) 마리나가 창가로 다가왔다. 루스탐을 발견하고는 그녀 역시 시선을 그의 눈높이에 맞췄다. 그들의 시선이 만나는 자리에 엄청난 양의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전기장에 모기나 딱정벌레가 앉는다면 그대로 죽어서 떨어질 것이다.”
빠지는 사랑에 속수무책인 시절을 지나 완숙해진 그녀들은 때때로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하려 하거나 사랑하기로 한 것을 사랑하기도 한다. 사랑은 불가항력일까? 천만에 어떤 사랑은 전혀 어렵지 않다. 젊음 혹은 매력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가능성과 재능을 꽃피워보려는 그들 삶의 노력방식을 십분 이해했다. 내게 그런 재능과 목표가 있었다면, 하나밖에 모르는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했다면, 뭐가 대수일까. 하나를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게. 하지만 그녀들은 다른 것을 포기하는 방식을 취하지도 않는다. 가능하면 여러가지 다 갖는게 뭐가 어때서?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깔끔하게 손터는 것도 방식이다. 애초에 가진 게 없었으니 0이 되어도 본전이라고 속편하게 생각한다.
“(122)
“내가 성공하다니요?” 안젤라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니콜라이(안젤라의 돈많은 애인) 말이야…”
“아…….” 안젤라는 영혼 없이 ‘아’를 길게 발음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 아닌 자기 자신의 성공을 원했다.”
소설은 가까운 과거의 러시아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몇편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한 여성의 일대기를 빠르게 크로키하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82년생 김지영보다 농밀하게 내면을 그려낸 55년생 마라쯤이라해둘까?
소설을 덮고서 심장이다 저릿저릿했다. 삶에 대한, 퍽이나, 깔끔한 인정. 아, 참, 열심히도 살았구나. 그것은 슬프거나 애석해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과몰입할 필요도 없는 그냥 사실일 뿐이다. 가끔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을 때, 이렇게까지?하며 억울하고 서글펐는 데. 이렇게까지해야 겨우 유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까지해서 작게나마 얻어낸 것들을 포기할 수도 없더라. 열심, 그것은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벌을 걸친 댓가일 뿐.
한동안 내가 천착해 읽었던 책들은 어떤 부분을 잡아채며 못견딜 순간들을 견뎌낼 자그마한 단서를 제공했었다. 응시하는 글들이라고 해야하나. 그런데 살만큼 살아본 작가가 속도감있고 담담하게 그린 통째의 삶들은 그 머무름을 배제하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부분에 과몰입하지 않는 여성작가가 그리는 전체로서의 이야기. 나에게는 적당한 순간 적당히 찾아온 소설이었다. 부분에 천착하다 보면 과몰입하게 되고, 과몰입하는 순간 내가 가장 딱해지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술도 안마신 채로 자기연민에 빠진 어른을 보는 것은 볼썽사납다고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술을 마시고(자기연민 좋아), 그 상태를 자책없이 유지하고 싶어 결국엔 돈을 벌고 운동을 하는 것 같다. 알콜 중독자라는 소리다..
“(133) 나타샤는 여전히 술을 마셨지만 예전과 달리 매일은 아니었다. 며칠간 마시면 오랫동안 맨정신으로 생활했다. 이를테면 3일 동안 술을 마시고, 3일 동안 숙취가 지나고, 3주동안 금주를 하는 식이었다. 의학 용어로 ‘관해’라고 불렀다. 3주에 한 번 관해는 정말 엄청난 발전이었따. 하지만 의사들은 완치를 보장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최면술 치료를 권하지도 않았다.
최면술 치료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침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면 사람이 변하는데, 보통 상태가 악화되곤 했다. 나타샤가 지금처럼 근면하고 명랑하고 착한 상태로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맨정신으로 우울하고 탐욕스럽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이었다.”
중요한 진실에 굳이 가닿을 필요는 없다. 약간은 미친채로 (그러나 미친척한다고 믿는채로) 근면하고 명랑하고 착하게 살자. 어쩜 그게 진실아닐까. 버티는 티끌에게 필요한 것은 생활과 갈증해소일 뿐! 목이마르다. 더 많은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좋은 소설이라 많이 읽히면 좋겠다. 모처럼 자신있게 추천한다.
#고양이는달에도흔들리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