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짬짬이 해방일기를 읽고 있다. 내가 읽은 김기협의 세번째 책이고 번역한 것까지 하면 다섯번째 책이다. 세어보니 이 저자의 책을 꽤나 많이 읽어 스스로도 놀랐다. 

해방후부터 건국시까지 우리 근대사를 일지형식으로 기록한 글인데(1권은 해방전후) 쉽게 해방전후의 국내외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글을 보자면 보수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보수라는 말을 들으면 꼬장꼬장한 선비를 떠오른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긍지와 그에 대한 책임을 느끼며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 말이다. 

역사속으로 들어가 우리 사회의 모순의 그 뿌리를 더듬는, 어찌보면 역사학자로서 너무 당연한 작업도 '박정희의 독재는 경제성장을 위해 필요 악' 같은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가 난무한 세상에 살다보니 소중하게 느껴진다.  

혹자는 영남의 비정상적인 한나라당 사랑을 영남의 왠만한 집안은 일제시대, 전쟁통을 거치며 싹 다 박살이 나서 자식들을 제대로 건사할 수 없었다는데서 찾기도 한다. 역사학자 였던 저자의 아버지도 비명횡사했으나,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중혼관계였던 저자의 어머니 역시 당대의 뛰어난 국어학자로 세자식을 잘 가르치고 키워냈다. 한국전쟁 일지를 남긴 아버지 김성칠의 작업에서도 이념이 아닌 '민족'과 '사람다움'을 생각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보인다.  

미군이 고엽제를 묻었다고 이리 온 tv에서 떠드는데, 늘 '혈맹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보수단체들은 어찌 말이 없는지 모르겠다. 외국군대의 주둔은 열렬히 옹호하고, 식민지 협조자의 신원공개엔 그리 화를 내는 단체가 과연 '보수'단체인가. 그들이 지키고 싶은 제도는 '식민지' 제도인가 싶다.

이 땅에서 진짜 만나기 어려운 건 진보가 아니라 보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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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05-3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왜, 내 월급을 생각했지???

무해한모리군 2011-05-31 22:1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아 글샘님 댓글을 보면서 왜 내 월급은 이렇게 안오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turnleft 2011-06-01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실 한국 사회에서 "건전한" 보수 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라고 봐요.
이념보단 이권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회주의자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일관된 철학을 유지한다는 것만으로도 진보의 프레임에 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땅 보수의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요. 후에 진보진영이 집권한 후에야 그 안에서 다시 보수진영이 갈라져 나오지 않을까요?

무해한모리군 2011-06-01 08:51   좋아요 0 | URL
네.
롤모델을 찾기 극히 어려운 나라에 살고 있어요.
때로는 너무 빨리 변하는 시절에 살아남기도 힘겨웠던게 아닌가 하며 이해해 보다가도, 소위 지도층이란 사람들이 제나라 사람들에게 한 일이 너무 끔찍하기도 하구요.

Mephistopheles 2011-06-01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우리나라 보수가 어디 있어요..그건 진정한 보수를 우롱하는 두번 죽이는 행위에요.

무해한모리군 2011-06-01 22:2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친일파놈들 이땅에서 천대만대 떵떵거리게 살게해준 미군정이 더 용서가 안되는듯 합니다.

마녀고양이 2011-06-01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 우리나라에서 만나기 힘든 것은 진정한 보수지요.

무해한모리군 2011-06-01 22:24   좋아요 0 | URL
세대가 바뀌면 달라지려나 했더니...
 

그러니까 

나는 사랑에 빠졌다. 

오늘 아침만 해도  

지하철에서 그의 글을 읽다 

잠시 멍해져 있었다 

깊은 감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이 삼십분 정도 여유가 있길래 2800원을 투자해  

찻집에 들어갔다

오직 조용히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  

그가 꼭꼭 씹어 뱉어주는 시들을 보고 

흐렸다 개었다 하기를 수십차례 

심지어 점심시간 잠시 낮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와 떨어져 있기 싫어 

베고 잤다. 폭신하니 좋았다. 

아... 이렇게 화창한 날 

이 우울해지기 쉬운 때에 

읽는 것도 생각도 조심해야 하는 법인데

어쩌자고 나는 이 책을 빼어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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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1-05-29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기대가 컸나봐요. 잔잔한 안개처럼 내리는 느낌들, 지난 흔적에서 쌓였던 느낌들을 상기시켜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수명시인을 다시 보게해주어 다행이구요.
하지만, 첫장 [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아 다듬은 구절이 마음자리를 맴돕니다. 이렇게..."...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사랑은 능력이다."...

등 뒤로부터 훑고가는 바람이 좋고, 나무에 꽃에 느낌을 기대어도 좋은 계절입니다. ㅎㅎ

pjy 2011-05-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첩장이 물결처럼 넘쳐나는 볕좋은 봄-_-; 어쩌자고 나는 이 리뷰를 보고 말았단 말인가..

무해한모리군 2011-05-27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소라의 바람이분다까지 들으면서 완전 우울에 몰입중입니다 --

2011-05-27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8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30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5-27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어쩝니까...전 읽기도 전에 쓰러져 버릴 것 같습니다.ㅠ

무해한모리군 2011-05-28 12:34   좋아요 0 | URL
아 시가 참 이렇게 좋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처럼 때론 낯설고 때론 익숙한 단어들의 움직임을 느꼈어요 ^^

turnleft 2011-05-28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러니까, 이 책이 그렇게 좋나요?

무해한모리군 2011-05-28 12:33   좋아요 0 | URL
시에 대해 쓴 수필인데 글 자체가 시같네요.
연재한 글들이니까 인터넷으로도 읽으실 수 있을거예요.
미문을 가진 사람이예요 ^^

비로그인 2011-05-28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휘님의 숨겨야 할 비밀스러운 페이퍼네욥 ^^
얼마나 좋으셨으면 "푹신" 하기도 하셨을까나..^^ 옆에 두고 있는데 모양새만으로는 그리 푹신해 보이진 않는데요~ ㅎ

무해한모리군 2011-05-28 12:35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의자에 앉아서 베고 낮잠을 자 보시면 아시게 됩니다 ㅎㅎ
정말 폭신해요 ㅋㄷㅋㄷ
그런데 어째 퇴근길에 들고오다가 표지에 흠집이 좀 생겨버려서 속상해요

마녀고양이 2011-05-28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에 대한 리뷰 많이 봤는데
휘모리님 페이퍼에서 그냥 두손 들고, 그로기 상태 되었습니다.
저도 무장 해제 되기 위하여 이 책을 읽어봐야겠군요~

즐거운 주말되셔여.

무해한모리군 2011-05-30 12:25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시를 말한 글들이 제일 좋았고, 정세글은 그보다는 좀 덜하고 그랬어요.

Mephistopheles 2011-05-28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의 표지가...아밀라아제로 뒤덮여 있진 않겠죠...(베고 잤다고 하시길래..)

무해한모리군 2011-05-30 12:24   좋아요 0 | URL
이마로 살짝만 베고 잤어요 ㅎㅎㅎㅎ

2011-05-29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30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처럼 온전히 둘이서만 보내는 주말이다. 
광주 무등산과 묘역을 다녀오려 했는데, 
비가 많이 온단 소식에 포기하고
게으른 주말을 보낸다.  

미뤄뒀던 집안일을 하고,
옥수수도 쪄먹고, 만두도 구워먹고, 
과자도 먹고, 매운오뎅탕이랑 맥주도 마셨다. 

아주아주 오래 자고
세수도 하지 않고 홈웨어 차림으로 집 앞 찻집까지 걸어가
말차 한잔을 하며 책을 읽었다. 

나가수를 보고
임재범이랑 같이 울고,
김연우가 탈락해서 분개하다,
 
겨우 책을 다시 집어든다. 

벌써 하루가 다가다니 어리둥절. 

톰소여의 모험을 읽으려니 도저히 일요일 밤 내 마음과 맞지 않다.
런던이 사랑한 천재들을 뽑아들고 왔는데 역시 런던의 찬란하고 그리운 사진들이 나의 우울을 부추겨 던져버린다.
건조하게 해방일기 어떨까하며 가져오다(딱딱한 글이라는 얘긴 아니다) 옆에 던져둔 허수경의 특별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 보인다. 특별하긴 했으나 하나 좋을 것 없었던 판형 때문에 내게 미움을 받고 있다. 그러게 일반본으로 사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  

- 비행장을 떠나면서 中 

울지 마 울지 마 결혼반지 잃어버린 육십 넘은 동백꽃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내일 헐려나갈 천년 넘은 집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십수 년째 거짓말만 하고 있는 시인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이런 것도 눈 감는 거라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건너가는 철새처럼 울지마
울지 마 울지 마 포유류와 조류의 갈림길에서 어류와 갑각류의 갈림길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 해온 존재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 여기는 이국의 수도 中

 
   


신형철이 느낌의 공동체에서 그녀의 시에 대해 <절대적으로 부도덕한 세계 앞에서 절대적으로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웠다.(중략)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고 평한다. 

무엇도 읽을 수 없을 듯한 일요일밤 그녀의 언어를 꼭꼭 내가 씹고 있는 것은 아마 그래서 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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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5-2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무슨 책을 읽을까 지금 엄청 고민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보다도 사실은 이제 일요일이 다 가고 있기 때문에 책 읽어도 집중을 못할 것 같아서 그냥 일찍 잠자리에 들까 싶기도 하구요. 전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싫어요, 휘모리님. ㅜㅡ 일요일밤이요.

무해한모리군 2011-05-23 08:3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한 열권을 집적거린 후에 티브이를 멍하게 보다 잠들었어요 ㅠ.ㅠ

비로그인 2011-05-22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몰락의 에티카 읽는 중인데,, 왠지 반갑습니다.
휘님 :D

무해한모리군 2011-05-23 08:3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굿모닝 ^^

제겐 참 어렵고도 아름다웠던 책으로 기억되요..
왜.. 내용은 생각이 안날까요? ^^;;

굿바이 2011-05-2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우의 노래를 들으며 커다란 유리볼에 밥을 비벼 씩씩거리며 먹었습니다. 분해서요^^
밥은 너무 맛있고 김치는 왜 그렇게 잘 익었는지요.
그리고 분한 마음으로 다시 윤대녕의 소설과 박정대의 시집을 읽었어요. 좋은 밤이었죠~

무해한모리군 2011-05-23 12:47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모습이 왠지 눈에 그려지네요.
아 저도 다음주엔 윤대녕을 읽어야겠어요 ^^

하늘바람 2011-05-2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기는 신혼이라는 느낌
아주 편안해보이고 좋아보여요
나도 그랬던가 싶기도 하고요

무해한모리군 2011-05-23 12:48   좋아요 0 | URL
너무 편안한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ㅎㅎㅎ
하늘바람님만큼 아이 키우며 일해낼 수 있을까요? 휴..

노이에자이트 2011-05-2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차 한 잔이라고 했는데 그게 뭔가요? 말젖으로 만든 몽골 음료 같기도 하고...

무해한모리군 2011-05-25 11:05   좋아요 0 | URL
가루로된 녹차요 ^^

노이에자이트 2011-05-26 16:33   좋아요 0 | URL
음...그렇군요.
 

허망한 죽음에 억울하다는 생각만 든다.   

재보궐 선거 지원을 나갔다 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라고 들었다. 

올해의 시작에 하셨던 인터뷰의 마지막 구절을 옮겨온다.

"현재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 농민운동을 보면 휴업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거든. 이것이 무얼 의미하는가 하면, 사회 개량화라는 측면도 있기는 하겠지만, 정치사상적으로 보면 이들이 변혁운동의 전망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거든. 희망이 없잖아. 희망이 있어야 운동을 하는데, 그게 없으면 운동을 못하는 것이거든. 곧 있으면 혁명세상이 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해. 힘차게 준비해야 되거든. 그런데 그러면 이전에는 못했냐 하면 그건 아니야. 이제 우리 세상이 온다는 카운트다운을 남겨 두고 있는데, 이제 와서 놀고 있는거야. 놀지 말고 빨리 힘을 내서 준비해야지. 지금과 같은 때가 언제 다시 올지는 모르는거야."

http://www.vop.co.kr/A00000350511.html 

추모게시판

 http://kdlp.org/chumo_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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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5-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은 왔어. - 문익환 목사님

조선인 2011-05-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통사고 나신 줄 몰랐기에 금요일 저녁 처음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더랬습니다.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5-16 11:01   좋아요 0 | URL
저도 위독하신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큰 어른 빈자리가 너무나 클 듯 합니다.

Mephistopheles 2011-05-1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요상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고 밖에...빨리 떠야 할 양반들은 벽에 X칠하며 살 기세들이고 오래오래 남아 계셔야 할 분들은 빨리도 가시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글샘 2011-05-1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하나 떠나시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바라 2011-05-1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봽지는 못했지만, 정광훈 의장님 하면 언제나 집회현장에서 '아워 워드 이즈 아워 웨폰'이라고 외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바람구두 2011-05-1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변함없이 진지한 모습이군요.
저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바람 2011-05-1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세상에~
 

2주전 주말 결혼식이 있어 완도에 다녀왔다. 

26살 어린 신부는 떡기술을 배워 고향 완도에 떡집을 낸 신랑을 따라 내려 가느라 급히 결혼을 하게 됐다. 

토요일 첫기차를 타고 광주에 내려 
터미널 앞에서 그닥 남도스럽지 않은 백반을 먹고, 
스무분 정도의 어르신들과 열명 남짓한 순천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화순시티투어 버스를 탔다. 

신랑은 담양버스투어를 하고 싶어했는데
내가 운주사가 가보고 싶어서 화순으로 정했다. 

쌍봉사는 문이 열려있지 않아 쪽문으로 겨우 구경을 했고,
점심으로 먹은 청국장은 그저그랬으며,
온천은 목욕 싫어하는 신랑이 가기 싫어해서 멍하니 1시간을 기다려야했지만 
대체로 괜찮은 공짜 여행이었다. 

아이들은 뛰고,
노인분들은 심드렁해하는 가운데
열성적으로 해설하시는 해설자분이 대단했고, 

운주사는 꼭 한번 다시 들러보고 싶은 독특한 사찰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터에 쭉 하니 늘어선 투박한 돌탑과 돌부처님들
불국사에 약수뜨러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낸 내눈에도
왠지 모르게 포근하고 정겨운 광경이었다. 
참 고인돌은 내 생각보다 훨씬 큰 돌이었다. 

 

 

 

 

쌍봉사와 운주사 벽엔 모두 지옥도가 그려져 있는데
운주사 쪽이 훨씬 무서웠다. 
설설 끓는 가마솥에 죄인들을 다리를 잡고 마구 던져넣고 있었다.  
죽림욕이 무산되어 입이 튀어나온 신랑에게 잘 보라고 말해줬다. 
마누라 불신 지옥인 법.  

광주역으로 돌아오니 저녁무렵인데 남들이 온천욕 하는 사이
이것저것 주워먹으며 온천주위를 다녔던 터라 배고프지 않았지만
이대로 광주를 떠날 수는 없어서 오리탕을 먹었다. 조금도 배부르지 않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ㅎ 

광주역앞에 모텔에 숙소를 잡았는데,
일박에 5만원이나 하는 것치고는 뭔가 부실한데다
마리가연주하는음악 2권을 어서 읽고 싶은데 너무 어두웠다. 
어쩔 수 없이 커피숍을 찾아 나왔다.
2권을 다 읽고, 먼저 읽은 신랑과 종교에 대한 수다를 좀 떨고,
몹시 어두운 여관으로 돌아와 골아떨어졌다. 

그 여관의 딱 하나 장점은 아침으로 토스트와 우유를 주고,
과자와 라면을 무한대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라면 토스트 우유를 몽땅 아침에 먹어주고
터미널에서 완도행 버스를 탔다. 
차창 밖으로 기아자동차 공장 정문에 적힌
'품질은 우리의 자존심. 우리는 빛고을의 희망'이라는
문구를 읽는데 왠지 마음이 아렸다.

광주에서 완도는 생각보다 참 멀었다.
화순도 그렇더니 광주에서 완도 사이의 길 주변도 곳곳이 공사중이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결혼식은 멸치잡이를 하시는 시댁 어른들도 좋아보이시고,
어린 신부도 참 이쁘고, 
신랑친구들이 장식한 트럭 웨딩카도 귀여웠고,
이런저런 이벤트도 사랑스러운 결혼식이었다.
많이 혼내키며 일시키던 부하직원이었는데,
성공한 떡집 사장님이 될듯하다. 

피로연 음식으로 전복을 세개나 먹어주고,
같이 앉은 서울내기들이 잘못먹는 틈을 타서 홍어회, 회무침, 우럭포구이, 자연산굴무침까지
배부르게 먹어줬다.
촌놈들 ㅎㅎㅎ

서울 올라가는 차시간이 세시간 남아서
8년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서점을 찾았다.
읽던 책을 다 읽었으니 3시간 정도 부담없이 읽을 책을 고르려했다. 

신간및 베스트셀러 매대는 생각보다 최신간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소녀지옥]을 살까했더니 옛날 일본식 괴담은 취향을 많이 타니 신랑님께서 다른걸 고르란다.
평소엔 읽지도 않던 마리여사 타령이다. 이럴땐 마리여사라나 ^^;;
그래서 두께가 적당해보이는 김연수의 [7번국도]를 고르려고 했더니 이번엔 또 나온지 좀 됐는데 반응이 별로없어 불안하단다. 내가 읽을 책인데 자기가 왜 불안한가!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해서 책장쪽으로 옮겼다.
[삼성을 생각한다2]은 김용철변호사가 쓰지 않은 것이라 패쑤
몇몇 사회과학 서적은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 두껍고 심각해서 패쑤
그리하여 우리가 고른 것은 위저드베이커리였다. 

아 신랑과는 절대 같이 책사러 가지 말아야지.
어쨌거나 완도 빵집에서 커피한잔하며 읽자니,
제법 잘 어울리는 책을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인연이 있어야 책과도 만나나 보다.
서울아가씨가 완도로 결혼해 오게 한 그 무엇 말이다. 

5월엔 무등산에 오르기로 했다.
비맞기를 즐기던 내가 오늘 출근길에 내리는 비는 나도 모르게 전속력으로 뛰어 피했다.
이제 자연도 한결같지 않은 시절이니 사라지기 전에 내눈에 많이 담아두자는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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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4-2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건, 투덜거림을 빙자한 달콤한 신혼일기인 걸요! 그저, 근사할 뿐입니다. 털썩!

무해한모리군 2011-04-26 09:22   좋아요 0 | URL
그것 참 이상하네요.. 투덜거림 맞는데 ㅎㅎㅎ
마노아님도 같이 수다떨 남자인간 하나 구하세요!

양철나무꾼 2011-04-2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익힌 전복은 좋아해요.
나머지는 음~잘 못먹는 서울내기입니다.
그러니까 위저드베이커리는 저도 참 좋았어요~

근데 결혼하신지가 언젠데...아직도 깨를 볶으신단 말예요?
왕 부럽~!!!
전 5월엔 자연을 내눈에 담아두자는 건 엄두도 못내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등이 줄줄이 포진하고 있어서 말예요~ㅠ.ㅠ

무해한모리군 2011-04-26 10:15   좋아요 0 | URL
저도 살짝 익힌 전복이 좋아요.
전... 못먹는데 별로 없어요 ㅎㅎㅎ
신선하지 않은 것만 빼고는요.
어른이 되도 약간의 동화는 늘 필요한거 같아요.

저는 우리 신랑이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과 쭉 사겨왔고, 더 놀라운 점은 그러면서도 자기도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인데,, --;;
우리 커플의 분위기는 여자고등학교 기숙사 같아요..

차좋아 2011-04-25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있었겠다아... 저 요즘 맛있는게 자꾸 먹고 싶어져요.
제 아내는 둘만 있을 때 책읽으면 아주 삐지는데 남편님은 안 삐지나 봐요?ㅎㅎ

무해한모리군 2011-04-26 10:15   좋아요 0 | URL
신랑은 말을 걸어요 ㅎㅎㅎ
아내에게 만들어주세요~

2011-04-25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6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4-2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주역으로 돌아오니 남들이 온천욕을 한다고 했는데 그곳에 온천이 있나요? 궁금....

무해한모리군 2011-04-26 22:28   좋아요 0 | URL
화순에 있는 온천에 갔어요 ㅎㅎㅎ

pjy 2011-04-27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촌것들 아니예요~ 매우 땡기는 음식들이네요^^
참, 사진정리하다보니 저희 엄마아빠가 남원에서 결혼하셨는데 고인돌을 배경으로 찍으신 단체사진이 있더라구요~~ 그게 어디인지 급 궁금해지네요ㅋ

무해한모리군 2011-04-28 09:02   좋아요 0 | URL
남원쪽에 고인돌공원 검색해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정말 생각보다 무척커서 어떻게 옮겼는지 신기하더라구요.
권력을 가지면 그 세를 과시하고 싶은게 인간의 본능인가봅니다.

감은빛 2011-04-28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주사, 홀로 여행길에 재밌는 인연을 만났던 곳이지요.
운주사의 와불은 여러번 보아도 큰 떨림을 전해주는 것 같아요.

책을 고를 때, 옆에서 뭐라 하면 제대로 집중하기 어렵지요.
<위저드 베이커리> 저도 재밌게 읽었던 책이네요.

무해한모리군 2011-04-28 09:05   좋아요 0 | URL
그 사찰의 분위기 자체가 참 좋았어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였습니다.

으흐흐 오이지군은 때로 무척 수다스러워요 ㅋㄷㅋ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