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여리면, 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만 해. 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 갓을 씌워야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테네시 윌리엄스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중에서

 

 




세상을 살다보면 혼란스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일들이 전혀 뜻밖일 때 인생은 쉽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찰랑찰랑 했던 행복이 어느 순간 우리 몸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불행 때문입니다. 불행은 눈물을 빨아올리면서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합니다. 온 몸이 가벼워진 탓에 그만큼 비틀거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10분이면 갈 거리를 불행한 사람들은 몇 분 몇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에게 제일 좋은 치료는 무엇일까요? 테네시 윌리엄스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뉴올리언스 시의 극락이라는 곳’에 내린 이유는 친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극락에는 자신의 여동생 스텔라와 제부인 스탠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블랑시는 그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리라 여겼습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들이 남겨놓은 차용증서 때문에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밝히면서 친절하게 위로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극락은 빈민가였으며 여동생 부부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더구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여동생이 왜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탠리와 결혼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스탠리가 가지고 있는 추진력 때문일까요? 스텔라는 판매원에 불과한 스탠리가 나중에 출세할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탠리가 천재여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추진력 때문이었습니다. 

추진력? 블랑시는 못마땅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스탠리가 화약통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스탠리가 진짜 남자라고 한다면 신사다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신사는 인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술, 음악이라는 광채 덕분에 부드러운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는 짐승 같은 행동을 했으며 짐승 같은 본성을 지녔습니다. 그가 즐기는 포커 파티를 석기 시대에 살아남은 유인원들의 잔치라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스탠리에게 심장이 터질 듯 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습관에 대해서는 서로 참아줘야 하는데 그녀는 금세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녀는 여리면서도 매력적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환상이라는 보물을 간직한 그녀는 언젠가 백만 탄 왕자를 만나 부유한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녀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바람대로 미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미치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랑의 상처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둘 다 근심이 가득하고 심각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차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미치에게 말했던 마법 같은 말들이 스탠리를 통해서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그녀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했다고 용서를 빌지만 미치는 그녀의 거짓말에 놀아난 스스로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진실은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치의 변심을 두고 오히려 돼지 같다고 아주 현실적으로 미워합니다.

일찍이 카를 힐티는『행복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는 거을 얻게 된 것을 약속하며, 혐오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욕망에 속은 사람은 불행하지만, 참기 힘든 것과 마주친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태도이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책망하지 않는 것이 교양인, 완전하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취할 태도’라고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블랑시의 욕망은 불나방 같았습니다. 불나방에게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불나방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불빛은 매우 부자인 사람입니다. 그럴수록 불나방은 자신을 세련된 여자라는 환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했을 때 헤어지면 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불나방 같은 사랑은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결국 불나방의 사랑은 서로에게 낯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사랑이라는 욕망은 낯선 친절에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言)이 어떻게 생겼을까, 라고 조금은 붕 뜬 질문을 파울로 코엘료에게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영혼의 연금술사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독자층을 지닌 그의 글은 햇살 같다. 후덥지근하거나 끈적끈적하지 않고 따뜻해서 좋았다. 거센 비바람으로 우리 삶이 위협받고 있을 때 그는 먹구름을 밀쳐내며 ‘신(God)을 믿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작은 존재가 신(God)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순례의 길에서 그의『승자는 혼자다』를 만났다. 이 소설에서 그는 놀랍게도 “짧다.”라고 말했다. ‘사랑’ ‘신’이라는 짧은 단어가 그렇다는 것이다. 단어가 짧은 만큼 말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세상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고’ 는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세상은 공간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일상은 공간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만지거나 혹은 만질 수 없는 공간을 지배하는 것을 짧게 말한다면 바로 ‘승자’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빈 공간은 칸영화제다.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의 매력 때문에 잠 못이루는 것은 아니다.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추억에 불과했다. 이제는 레드카페 위를 걸어가는 스타에 열광한다. 모차르트의 삶을「아마데우스」로 만든 필로스 포먼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천재를 발견한다.’고 했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려하게 패션쇼로 몰락한 칸영화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있다. 칸영화제를 찾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아픔을 파고들고 있다. 영화는 단지 그들에게 선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과시를 목숨과 맞바꿨다. 이렇게 칸영화제를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허영에 가득 찬 세 가지 욕망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름다움에 가려진 거대한 삼각형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서 온 사람들을 작가는 아직 성취하게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슈퍼클래스라고 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작가는 어떻게 해서 승자가 혼자가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고독한 상태에서 작가는 유명인 신드롬이라는 악마를 찾아냈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믿기 시작할 때 그것은 찾아온다. 저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슈퍼클래스다. 모든 사람들의 꿈, 그늘도 어둠도 없는 세계, 그 무엇을 요구하든 오직 ‘예’라는 대답만을 듣는 세계….’ 결과적으로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런 순간에도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슈퍼클래스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저 허황된 꿈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슈퍼클래스 즉 승자다. 승자는 우연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필요에 의한 철저한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지만 승자는 자기의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안다. 승자의 방향은 곧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방향이다. 승자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거꾸로 가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하미드 후세인은 중동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승자의 방향이 삶의 절박함을 넘어서는 자신감이라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승자의 방향이 비즈니스라고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에서 러시아의 갑부 이고르는 남을 이용하거나 배반했다. 또한 배우 지망생 가브리엘라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그리고 슈퍼모델 재스민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정작 알코올 대신 미네랄워터를 마셔야 했다.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그럴듯하게 당연시 되는 꿈의 대가이자 덫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처럼 승자가 혼자가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가지 읽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승자는 혼자가 아니다.’를 깨닫게 되었다. 승자가 혼자가 아닌 이유는 이고르와 에바의 비극적인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고르의 멈출 수 욕망으로 인하여 에바의 삶은 무척이나 공허했다. 그럴수록 에바는 사랑을 되찾고자 했지만 이고르는 아내의 요구를 외면한 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에바가 “당신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거야. 우리의 결혼 생활도, 우리의 사랑도 파고할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안전한 결혼 생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그녀가 떠나버리자 이고르는 사랑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바에 집착했다. 더구나 에바를 찾기 위해 세계를 파괴하며 살인마가 되었다. 그는 ‘더 큰 사랑을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어느 누구보다 이고르는 더 큰 사랑을 위해 승자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고르에게 사랑과 성공은 한 몸이었다. 성공한 만큼 사랑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험난한 세상과 싸워 이긴 이고르에게 위대한 존재를 위해서 어느 누군가의 희생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승자가 혼자이듯 그의 사랑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곧 작가에게는 ‘좁은 사랑’으로 보였다. 반면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넓은 사랑이란 누구의 가슴에든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믿음이 강해서였는지 사랑의 능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의 가슴을 넓은 사랑으로 채워야 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꼭 좋은 환경에서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고난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보낼 때 말하기가 어렵더라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예.”라는 예의바른 대답은 소심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반면에 “아니오.”라는 대답은 모든 것의 끝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단단한 생각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결코 원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 ’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마감하고 영(靈) 최후의 심판대에 올랐을 때 신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너는 사랑했느냐?”고 묻는 까닭을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온갖 돈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꿀 힘이 승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자에 대한 완벽한 은유는 승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돈, 권력 그리고 빼어난 미모가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승자라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해야 사랑을 잘 할 수 있을까? 요시모토 바나나의『무지개』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한 순진한 질문이 목구멍 속으로 쑥 들어갔다. 작가의 목소리에는 사랑이 어리석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한 번쯤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도 정작 당신이 그 누구의 아무것도 아닐 때가 있다는 외로움을 말이다. 그럼에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곧 사랑을 어리석게 하고 만다.

이 소설에서 이런 고민을 안고 타히티로 여행을 온 에이코가 나온다. 여행의 목적이 ‘바다에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 거북과 상어, 가오리와 함께 수영을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라구나리움 투어였다. 하지만 라구나리움 투어는 변명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도쿄에서 숨 가쁘게 타히티로 도망쳐올 까닭이 없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도쿄에는 그녀의 직장이 있었고 불안했지만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심한 몸살도 있었다.

타히티를 좋아해서 타히티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오너였던 다카다를 어느 순간 그녀는 사랑했다. 그러나 남들 마냥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두려워했다. 어쩌면 완벽한 사랑이었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완벽함이라고 하는 것은 살면서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사람들로부터 쓴 소리를 들어야 하거나 손가락질을 당하는 아픔을 견뎌야 했다.

어느 날 운명적으로 불어온 사랑을 그들이 순간 다카다는 그의 아내에게서 마음이 멀어져 있었을 때다. 그때 그녀가 무지개마냥 그의 고독한 시간의 알맹이들을 반짝이게 했다. 그녀가 타히티를 좋아한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에게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되돌아보면 사랑의 힘이 솟구칠 때가 있다. 평소에는 잘 몰랐다가 불쑥 천사같은 사람이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에이코에 따르면 천사는 인생에 빛을 선사해주는 존재다. 자신이 애지중지 기른 고양이를 정성껏 돌보는 에이코의 마음을 둘러싸며 다카다에게는 독특한 감정이 생겨났다. 그런가 하면 에이코는 고양이를 돌보면서 동식물을 좋아하는 다카다의 소중한 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카다가 사랑을 고백할 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욕망에 얼룩지지 않는 눈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에 빠졌을 때의 결심은 그녀는 쉽게 믿지 않았다. 작가 말대로 ‘사랑하고 있을 때는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힘도 사랑의 힘에 불과할 뿐 자신의 중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는 있다고 해서 아내의 발목에 잡힌 사장님과 불륜을 저지를 수 없었다. 다카다가 아내를 선택한 것은 잘못이자만 그래도 결혼까지 했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타히티에 온 그녀는 세상에는 그토록 무서운 상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와 함께 수영하는 레몬색 상어는 작고 얌전했다. 노란색이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상어뿐만 아니라 햇살이 비칠 때 산호의 색깔이 바뀌면서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엷게 빛날 때 그녀는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 있음을 경이롭게 바라봤다.

그녀는 무지개를 바라보면서 ‘갖가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괴로운 일도 있으리라. 그래도 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반드시.’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무지개』처럼 어리석다면 문제꺼리가 많을 것이다. 그만큼 사랑은 아플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유효기간을 알 수 없는 불륜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불륜은 사랑의 정답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피할래야 피할 수없는 것이 또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가 뭔가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애정이 아니라 오기와 자존심일 것이다.

지난 날 사랑의 아픔을 불러내고 있는 이 소설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불륜도 사랑일까? 라는 물컹거리는 감정이 아니었다. 비록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고 하더라도 망연자실 하며 넋을 놓아버릴 만큼 나쁜 사랑은 아니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들은 사랑의 가능성으로 공감했다. 사랑의 가능성이 진실을 향하고 있다면 작가 말대로 진실이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일곱 가지 색깔로 빛날 것이다. 무지개 같은 사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잔 손택은『문학은 자유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정신적 약탈자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1Q84』는 제목에서부터 끝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1Q가 IQ라는 단순한 오해도 있었지만 조지 오웰의『1984』와 유사하다는 단순한 의견이 더욱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조지 오웰이 말한 ‘빅 브라더’와 달리 하루키는 ‘리틀 피플’을 말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리틀 피플이 공기번데기를 만들 때 하늘의 달이 두 개가 돼.”라는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메시지가 뒤흔들었습니다. 왜 하늘의 달이 두 개일까?라는 물음이 곧 Q(question park)이며 이 소설의 ‘1Q84'라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무대는 1984년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갈비뼈를 무수히 부러뜨려야 했던 아오마메와 덴고가 나옵니다. 20여 년 전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들은 서로 손을 한 번 잡았습니다. 그러나 쫀득한 감정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그들이 오랜 사랑의 공백을 끝내고 1984년 만나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떨림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오마메의 말을 옮기자면 “우리는 좀 더 일찍이 용기를 내어 서로를 찾아야 했어요. 그랬다면 우리는 본래의 세계에서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사랑의 언저리를 맴돌던 그들이 서로를 끌어당겼던 것은 어느 날 하늘의 달이 두 개인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달, 닐 암스트롱이 발견한 달은 노랗습니다. 반면에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달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초록색 빛을 내는 작고 일그러진 달입니다. 조금은 엉뚱하다고 느끼겠지만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루나틱(lunatic)인데 달에 의해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눈앞의 1984년은 가짜 세계였습니다. 대신에 1Q84가 진짜 세계였습니다.

그들이 1Q84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미래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사지 트레이너인 아오마메는 성폭력을 일삼는 남자들을 살해하거나 보복하는 쿨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리고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였던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의 상상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뭔가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완벽한 삶을 쫓아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슴은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1Q84에서는 시간 또한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었습니다. 작가 말대로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습니다. 만약 시간이 반듯하거나 혹은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균일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런 인생은 아마도 고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든지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1Q84에서 그들은 과거를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덴고 말대로 ‘과거를 바꿔 쓰는 것’이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하루키는 과거를 바꿔 쓰는 것으로 그들의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봤습니다. 살면서 어슴푸레한 느낌만 있었던 그들의 사랑이 비로소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루키는 우리의 희망 하나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이 행복하리라는 그럴싸한 기대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루키의 사랑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리틀 피플이 만든 공기 번데기에 있었습니다. 선과 악이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리틀 피플이 ‘1Q84’라는 왕국을 세우기 위해 종교적 리더 후카다를 리시버(받아들이는 자)로 삼았습니다. 또한『공기 번데기』를 쓴 그의 딸 후카에리는 퍼시버(지각하는 자)이자 마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합은 우리들에게는 불쾌한 성폭행으로 보였지만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습니다. 도덕이라는 잣대가 오히려 위선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1Q84에서 아오마메와 덴고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1984에서는 작고 초라한 그들이었지만 1Q84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아오마메에게 후카다는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운동권 출신의 공동체 지도자에서 종교적 리더가 된 후카다는 사회의 악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덴고는 후카에리의『공기 번데기』를 리라이팅하면서 시시각각 좁혀오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후키에리의 액막이를 통해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안전할 수 없었습니다. 1Q84에서 불문율은 마더를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마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상실되고 맙니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후카다를 통해 리틀 피플의 실체를 알게 된 아오마메에게 마지막 선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카다를 죽이면 덴고가 살고 후카다를 죽이지 않으면 덴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후카다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오마메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도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덴고를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약 아오마메에게 사랑이 없다면 후카다 말대로 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사랑은 어떤가요? 일찍이 융은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꽃이라고 하는 것은 새살이 돋아나려는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슴을 저미는『1Q84』를 읽으면서 낯설고 독특한 감정이 묻어났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사랑을 다시금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 자히르!

당신은 우리를 어디론가 떠나게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일찍이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에 눈 먼 사람을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전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뭇가지가 사랑한 후에 놀랍게도 다이아몬드 가지로 반짝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머릿속을 스치는 남녀 간의 흔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결혼 문제가 놓여 있지만 빛이 납니다. 반면에 오자히르! 당신을 사랑하면 웬일인지 우리는 고독해졌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외로움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은 어두웠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겉을 화려하게 하는 타인의 사랑이라면 당신과의 사랑은 나를 정면으로 만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노예인가요? 자유인가요?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에서 처음 만난 당신을 통해 사랑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종군 여기자 에스테르는 어느 날 당신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에스테르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랬습니다.

에스테르는 떠나기 전 그동안 같이 살아온 남편에게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즉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질문에도 똑같이“예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곱씹어 보면 사랑의 앞모습은 전자이며 사랑의 뒷모습은 후자였습니다. 전자가 사랑의 노예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랑의 자유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자유는 다름 아닌 ‘자아 찾기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매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코 이런 삶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죽음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절망의 굴레는 그녀 말대로 어제와 같은 삶입니다.

오늘이 어제의 허기를 채우며 가까스로 산다고 한다면 ‘어떠한 모험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외로움’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의 슬픔을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불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피 묻은 천조각인가요?

그녀는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삶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면 총알이 빗발치는 진짜 전쟁에서 그녀가 찾고자 했던 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인간의 어두움이 속살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밖에서 이루어지는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의 한계 중에서도 ‘신의 사랑’에 불과했습니다. 신의 사랑이란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의 모든 면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군인이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피 묻은 천 조각을 주면서 ‘아들과 아내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가슴 뭉클한 사연을 통해 그녀는 우리는 혼자가 아닌 같이 살 수 밖에 존재라는 것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즉 ‘우리가 이웃들을 사랑한다면 그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143,5㎝?

오자히르! 당신은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파편화된 삶의 고통에 맞서며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치여 혹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사랑 때문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가치가 제로인 상태에서 당신의 사랑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찻길 선로 같은 사랑이 얼마나 활력이 없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기찻길 선로는 143,5㎝로 반듯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길이를 줄이거나 늘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기찻길 선로 같은 규칙적인 사랑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의 오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은 아마도 그 거리를 찾아내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