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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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言)이 어떻게 생겼을까, 라고 조금은 붕 뜬 질문을 파울로 코엘료에게 하면 뭐라고 대답할까? 영혼의 연금술사로 자리매김하며 수많은 독자층을 지닌 그의 글은 햇살 같다. 후덥지근하거나 끈적끈적하지 않고 따뜻해서 좋았다. 거센 비바람으로 우리 삶이 위협받고 있을 때 그는 먹구름을 밀쳐내며 ‘신(God)을 믿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작은 존재가 신(God)에게 다가서는 것이다.

순례의 길에서 그의『승자는 혼자다』를 만났다. 이 소설에서 그는 놀랍게도 “짧다.”라고 말했다. ‘사랑’ ‘신’이라는 짧은 단어가 그렇다는 것이다. 단어가 짧은 만큼 말하기도 쉽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세상의 빈 공간을 채워준다고’ 는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세상은 공간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일상은 공간의 일상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만지거나 혹은 만질 수 없는 공간을 지배하는 것을 짧게 말한다면 바로 ‘승자’가 아닐까?

이 소설에서 빈 공간은 칸영화제다. 세계 3대 영화제중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사람들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인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의 매력 때문에 잠 못이루는 것은 아니다. 걸작이라고 불리는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추억에 불과했다. 이제는 레드카페 위를 걸어가는 스타에 열광한다. 모차르트의 삶을「아마데우스」로 만든 필로스 포먼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천재를 발견한다.’고 했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화려하게 패션쇼로 몰락한 칸영화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고 있다. 칸영화제를 찾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과 아픔을 파고들고 있다. 영화는 단지 그들에게 선택사항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과시를 목숨과 맞바꿨다. 이렇게 칸영화제를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허영에 가득 찬 세 가지 욕망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아름다움에 가려진 거대한 삼각형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삼각형의 세 꼭지점에서 온 사람들을 작가는 아직 성취하게 있는 사람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세상을 지배하는 슈퍼클래스라고 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면서 작가는 어떻게 해서 승자가 혼자가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고독한 상태에서 작가는 유명인 신드롬이라는 악마를 찾아냈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믿기 시작할 때 그것은 찾아온다. 저들이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슈퍼클래스다. 모든 사람들의 꿈, 그늘도 어둠도 없는 세계, 그 무엇을 요구하든 오직 ‘예’라는 대답만을 듣는 세계….’ 결과적으로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그런 순간에도 세상에서 완전히 혼자일 수밖에 없는 세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슈퍼클래스야말로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저 허황된 꿈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슈퍼클래스 즉 승자다. 승자는 우연을 기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필요에 의한 철저한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지만 승자는 자기의 방향이 옳다는 것을 안다. 승자의 방향은 곧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방향이다. 승자는 항상 다른 사람들과 거꾸로 가는 것이다. 가령, 이 소설에서 하미드 후세인은 중동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승자의 방향이 삶의 절박함을 넘어서는 자신감이라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승자의 방향이 비즈니스라고 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따라갈 수 없게 된다. 이 소설에서 러시아의 갑부 이고르는 남을 이용하거나 배반했다. 또한 배우 지망생 가브리엘라는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야 했다. 그리고 슈퍼모델 재스민은 샴페인 잔을 들고 있으면서도 정작 알코올 대신 미네랄워터를 마셔야 했다.

작가는 이 모든 것들을 그럴듯하게 당연시 되는 꿈의 대가이자 덫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처럼 승자가 혼자가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 소설을 끝가지 읽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승자는 혼자가 아니다.’를 깨닫게 되었다. 승자가 혼자가 아닌 이유는 이고르와 에바의 비극적인 사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고르의 멈출 수 욕망으로 인하여 에바의 삶은 무척이나 공허했다. 그럴수록 에바는 사랑을 되찾고자 했지만 이고르는 아내의 요구를 외면한 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에바가 “당신은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될 거야. 우리의 결혼 생활도, 우리의 사랑도 파고할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안전한 결혼 생활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그녀가 떠나버리자 이고르는 사랑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바에 집착했다. 더구나 에바를 찾기 위해 세계를 파괴하며 살인마가 되었다. 그는 ‘더 큰 사랑을 위해서라고’ 변명했다.

어느 누구보다 이고르는 더 큰 사랑을 위해 승자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고르에게 사랑과 성공은 한 몸이었다. 성공한 만큼 사랑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험난한 세상과 싸워 이긴 이고르에게 위대한 존재를 위해서 어느 누군가의 희생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승자가 혼자이듯 그의 사랑은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곧 작가에게는 ‘좁은 사랑’으로 보였다. 반면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넓은 사랑이란 누구의 가슴에든 피어나야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믿음이 강해서였는지 사랑의 능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우리의 가슴을 넓은 사랑으로 채워야 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꼭 좋은 환경에서만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고난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가는 누군가 구원의 손길을 보낼 때 말하기가 어렵더라도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고 했다. “예.”라는 예의바른 대답은 소심하고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만다. 반면에 “아니오.”라는 대답은 모든 것의 끝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는 단단한 생각이다.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이고 결코 원하지 않는 게 무엇인지 깨닫는 데 ’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마감하고 영(靈) 최후의 심판대에 올랐을 때 신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살아 있을 때 너는 사랑했느냐?”고 묻는 까닭을 이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온갖 돈에 의해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바꿀 힘이 승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승자에 대한 완벽한 은유는 승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었다. 돈, 권력 그리고 빼어난 미모가 아니라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승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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