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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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얼음이야. 정말이지 넌 도미니카 여자 같지가 않아.

차라리 내가 더 도미니카 사람 같아.”

『염소의 축제』중에서




얼음을 물끄러미 생각해봤다. 단단한 차가움이 앞섰다. 세상은 얼마든지 얼음이 되거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에 ‘얼음 같은 여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다시 그 말을 되새겨 볼 때 뭔가 강렬함이 새겨졌다. 단순히 얼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얼음보다 더 단단한 그러면서도 통증이 느껴졌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통증은 얼음 같았다. 그것은 절망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망이라고 해서 우중충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 오히려 우라니아는 얼음 같은 여자를 변명하면서 우리의 생을 혼란스럽게 했다. 절망이라는 것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얼음을 조금씩 깨뜨리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2010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답게 이 소설에서 얼음도 하나의 열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의 결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감의 욕망을 더 단단하게 얼음이 될 때까지.

『염소의 축제』는 가혹했다. 독재자는 왜 살해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답답했고 참을 수 없었다. 독재자에 대한 불안한 감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더구나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경하면서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독재자가 즐기는 축제인지 모른다. 독재자는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킨다. 비록 그것이 권력 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불과할지라도 독재자는 나쁜 영웅이다. 독재자는 그가 바라던 세계를 열었음에도 결국에는 조롱을 당한다. 조롱을 당하는 그 순간부터 독재자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야멸찬 폭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면 독재자에 얼룩진 역사의 방향은 어긋나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 트루히요의 독재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설에서 트루히요는 ‘조국의 아버지’, ‘자선가’라는 호칭으로 사랑받았다. 하지만 트루히요는 거짓과 위선으로 몰락했다. 뿐만 아니라 ‘염소’라는 최악의 질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염소일까? 트루히요는 철저한 규율과 훈련 덕분에 193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영웅과 신비주의자가 지닌 무자비한 규율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그는 4시에서 1분도 빠르지도 않고 늦지도 않고 정확하게 일어났다. 그런가하면 무더운 여름에도 그가 원하지 않으면 땀을 흘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강박관념은 특히 외모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외모는 영혼의 거울이네.”라고 엄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아마도 그의 강한 남성성은 이때부터 단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비판에 노출될수록 혹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염소’라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반면에 그만큼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라는 냉혹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달콤한 성욕으로 위로했다. 동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쾌락을 받쳤다.

도미니카 사람들이 트루히요를 우상화하는 것은 권력의 중독성과 닮았다. 하지만 권력을 넘어서면 어떤 당혹스러움이 가슴을 할퀴면서 나아갔다. 그것은 곧장 사람들의 잠재적 콤플렉스 즉 잠자던 야수성이라는 모순된 힘을 깨웠다. 그러니까 그들의 트루히요에 대한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분노였다. 분노에 가득 찬 염소의 축제에서 도미니카 여성들은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도미니카 여성들의 수동성보다는 아이러니하게도 도미니카 남성들의 ‘적극적 수동성’에 실망하게 된다. 도미니카 여성들은 그들의 딸, 아내가 아니었던가. 이 소설에서 아구스틴의 딸이었던 14살 우라니아도 트루히요의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라니아의 처녀성은 파괴되었다.

35년이 지난 후, 우라니아는 다시 조국을 찾았다. 14살 순결을 잃어버렸던 고통을 소녀 혼자 버텨내기에는 얼마나 참담한가. 순결을 잃어버린 후 그녀는 미국에서 다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선택한 치료법은 공부였다. 그녀에게 공부는 기쁨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오락이었다. 그녀는 텅 빈 마음을 메우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도중에 그녀는 사악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트루히요 시절에 관한 책을 읽고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역사를 읽으며 행복하면서 특별한 역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특별한 역사에 배신당한 것을 알았으며 자신의 아빠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저주를 퍼부었다. 그녀가 35년 만에 조국을 방문한 이유는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구스틴을 병문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구스틴의 몰락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이 그녀를 얼음 같은 여자로 만들었을까? 이 모두가 트루히요의 탓일까?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됐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범죄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범죄자는 비난받거나 처벌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해되고, 치료받고, 교정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질병은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으로 해석되었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기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된 것이며, 의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으로 죽지 않기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그녀의 마음 한 켠에는 아버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망이 흘러 넘쳤다. 원망은 그녀 마음의 모서리를 차갑게 만들었으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가두어버렸다. 어린 그녀의 뺨을 람피스(트루히요의 아들)이 만졌을 때 아구스틴은 소스라치게 화를 냈다. 그녀가 그 이유를 묻자 아구스틴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이야.”라고 말했다. 처음과 달리 트루히요의 권력에서 외면받자 아구스틴은 실연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트루히요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어린 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아버지를 구원하기 위해 더러운 파티에 참석한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의 하반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것이 아구스틴에게는 평생 죄의식으로 맴돌았다. 그는 죄의식을 날려버리기 위해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왔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로부터 면죄를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미국에서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허구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트루히요의 역사가 진짜 삶이 아니었을까. 한 때는 조국의 아버지였으나 독재자, 호색한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니었을까. 트루히요가 만든 세상은 위험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자유’의 잣대였다. 독재자 앞에서 더 많은 자유는 오히려 더 많은 자유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한편으로는 염소의 축제가 ‘유혈 축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혈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염소가 살아있는 한 자기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토해냈다. 그러나 우라니아는 분노를 토해내지 못했다. 대신에 자신을 얼음으로 만들었다. 아구스틴이 트루히요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하였듯 우라니아는 아구스틴에게 맹목적인 앙갚음을 했다. 그녀는 도미니카 여자라는 현실을 기꺼이 배반했다. 결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는 쌀쌀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염소의 축제』에서 우라니아의 불행은 사소하지 않았다. 바로 처녀성이 상실되었다. 여자에게 처녀성은 평생을 아껴야 할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성의 파괴는 단순한 신체적인 고통만은 아니다. 결국에는 사랑의 파괴라는 멍에가 되고 만다. 이런 그녀에게 불행한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다독거린다면 그것은 불행했던 순간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얼음 같은 그녀가 녹을 수 있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얼음 같은 상처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라고 몰아세우면 그것은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얼음은 녹으면 사라지고 마는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마음의 감옥이라거나 마음의 불모지라고 하지 말자. 얼음은 마음의 순결이어야 한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르가스 요사는 “나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내 문학작품에 때문에 수상을 결정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문학작품은 뭘까? 로울로 가예고스 상 수상 연설문에서 작가는 “문학은 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문학은 반체제와 반항을 의미하며, 작가의 존재 이유는 항변과 반대와 비판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작가는 독재자 소설『염소의 축제』를 통해 트루히요 역사의 거짓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정의의 이름으로 누가 역사의 승리자이며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군들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트루히요 역사를 읽을수록 분명해지는 허구 앞에서, 그 모든 것의 거대한 위선 앞에서 그녀의 삶은 얼음 같았다. 어쩌면 차가운 열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너머에는 키치(kitsch: 원래는 싸구려 예술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로 순응주의를 표현함)에 대한 절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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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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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바슐라르,『몽상의 시학』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의『영웅의 서』를 읽는 동안 괴테가 땅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는 책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숨을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책처럼 숨을 쉰다? 만약 책이 나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의 까다로운 독서에 다가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책처럼 숨을 쉬는 것이 즐겁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온갖 글자들로 가득 찬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곧 ‘있어야 할 이야기’라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있어야 할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한다. 작가는『영웅의 서』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란 ‘이야기’라고 하면서 사뭇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기에서 말한 이야기는 글자들이 만들어낸 단순히 재미가 있다거나 없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때로는 정의, 때로는 승리, 때로는 성공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이 얼마나 부조리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버젓이 일어나곤 한다. 작가는 그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이야기에 살려 한 죄’라는 강렬한 욕망을 한껏 뿜어낸다고 했다.

『영웅의 서』에서는 놀랍게도 반 친구 두 명을 칼로 찌르고 도망간 완벽했던 오빠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 소녀 유리코가 나온다. 가족의 단란함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서져버려 가슴이 요동치던 유리코는 오빠의 방에서 책의 정령인 빨강 책, 아쥬로부터 오빠는 “너무나 빨리 그것에 씌고 말았어.”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쥬가 말한 그것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오빠가 그렇게 무서운 것을 저지른 것은 영웅이 오빠에게 들러붙어 나쁜 짓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아쥬는 영웅이 나쁘다고 했다. 정말로 영웅이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면 영웅에게 홀려버린 오빠에게 잘못은 없다는 게 유니코의 소녀다운 생각이었다. 유니코 말대로 오빠는 피해자이며 희생자다. 정말로 그럴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위험하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지 아픔이 느껴졌다. 더구나『영웅의 서』에서 완벽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히로키마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를 계기로 한 순간 잃어버린 것들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을 동안 알 수 없었던 것들이 터무니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얼마나 약하며 기쁨은 얼마나 쉽게 빼앗기는지, 그리고 사악한 힘은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로키를 변화하게 만든 사악함의 정체가 ‘영웅’이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여자 친구 미치루를 위해 히로키는 영웅다운 행동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히로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되었다. 히로키의 영웅다운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복수는 히로키에게 복수의 끝으로 되돌아 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영웅에 대한 갈망과 강박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영웅의 정체는 뭘까? 소설에 따르면 영웅의 양면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영웅의 씩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영웅의 초췌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모든 사물에는 앞과 뒤가 있듯 영웅에게도 빛과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이러한 빛과 그림자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한쪽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열정으로 말이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도 짙어진다.’ 그래서 영웅의 빛이 정의라고 한다면 영웅의 그림자인 불의가 서로 경쟁하면서 어느 순간 사람의 혼을 빼앗아버린다. 겉만 봐서는 히로키의 복수의 끝은 정의롭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불의라는 것이 없이는 발현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슬픔이라고 할까.

그런데『영웅의 서』는 앞서 말한 대로 초등학교 5학년 유리코의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유리코는 행방불명된 오빠를 걱정하는 모습은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리코는 여자이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는 않았다. 유리코에게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같은 용기가 있었으며 ‘이름 없는 땅’에서 기이한 책과 싸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오직 오빠를 구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다. 오빠는 영웅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황의(黃衣)를 입은 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고 있다. 바로 영웅의 사본인『엘름의 서』의 주문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리코는 오빠없는 세상은 불안하다고 하면서 ‘신비한 새로운 세계’(테두리)로 접어들었다. 이 테두리에서 유리코는 인간과 책이 싸우는 원인이 봉인된 영웅이 파옥(破獄)되었음을,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다시 ‘죄업의 대륜’을 타고 영웅을 봉인해야함을, 하지만 무명승으로 부터 결코 영웅은 봉인될 수 없음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영웅이 봉인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코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아른거렸다. 오빠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의를 입은 왕에게 매료된 ‘최후의 그릇’이기는 해도 유리코에게는 언제나 오빠였다.『엘름의 서』에 무슨 사연이 들어있는지 확실히 알 지 못했지만 오빠는 커다란 분노를 발산하고 싶었으며 이런 욕망이 영웅이라는 자신보다 더욱 큰 존재를 만나게 했다. 비록 테두리 영역에 사는 자들은 이름 없는 땅을 순환하는 이야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도 결코 유리코가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테두리에서 오빠는 없다. 오직 무명승 즉 ‘죄업을 진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명승에서도 미숙한 무명승인 오빠가 진짜 무명승이 되기 위해서 지금 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화는 ‘맑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이다.

누구나 히로키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영웅의 서』에 나오듯 영웅의 어두운 황의를 입은 왕에게 이끌리게 된다. 무명승이 될 수 있겠다는 두려운 마음에 가슴 아래께가 묵직했다. 무명승은 ‘하나이자 만, 만이자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아침에 한 아이가 아이를 죽이는 세계는, 저녁에 만 명의 군사가 살육을 하기 위해 내닫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하나의 정의가 만 개의 불의이며 만개의 불의가 하나의 정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하나 히로키의 복수심이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인지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된다고 했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잔 손택의 논리대로 한다면 히로키의 불행이 복수심을 낳았고 복수심이 영웅에게 홀려버린 것이다.

복수심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우리들 상식으로는 치료해야만 한다. 혹은 선은 강하고 악은 약하다는 흑백논리로 영웅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성세대의 판결’에 대해 『영웅의 서』로 기묘하게 저항했다. 기성세대의 판결을 따르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좀 더 편한 해결이며 굳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영웅의 서』는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오빠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과 ‘울어도 되지만, 절망해선 안 돼.’라는 메시지를 책의 정령들의 입을 빌려 어린 소녀 유리코에게 타이르듯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 뭔가 새로운 해결책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용서와 절망해서 안 돼, 라는 것은 나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 없는 세상에서도 우리들이 숨 쉬는 것은 다 아는 것들을 반복하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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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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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소설은 ‘언어의 향연’이 안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조어법(造語法)을 빌리자면 ‘언어안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말해 줄 사람은 없으리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안한 길을 오직 ‘나’만이 언어들을 주섬주섬 챙겨야 한다. 작가에게 루마니아의 독재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에서 주고받은 말들은 간결하면서도 어둡게 부서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특한 은유(隱喩)라는 간절함이 삶의 메마름을 적셨다. 이번『마음짐승』도 마찬가지다. ‘마음’과 ‘짐승’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가지고 작가는 ‘마음짐승’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정작 그녀의 언어는 시적이며 은유적이라 우리는 남몰래 가슴에 새길 수밖에 없다. 

『마음짐승』을 찬찬히 펼치면 루마니아 독채 치하에서 대학생 롤라의 죽음이 있고 죽음을 전후로 작중화자인 ‘나’와 에드가, 쿠르트, 게오르크라는 세 남자와의 얽히고설킨 굵직하게 아픈 시간들이 있다. 얼굴에 빈곤한 지방을 가졌던 롤라는 자신이 살던 메마른(굶주림) 고향을 떠나 도시로 왔다. 메마름이 모든 것을 먹어치웠지만 롤라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곧 ‘내 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맹목적인 증오가 있었다. 맹목적인 증오란 구내식당에서 접시 위의 고기를 먹는데 숟가락만 먹는 것이다. 나이프와 포크를 쓸 수 있으면 그녀가 굳이 짐승처럼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짐승처럼 먹어야 했다. 

만약 롤라가 ‘내 사랑’을 하고자 했다면 어땠을까? 자살했을까? 아마도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4년 뒤에 내 사랑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사랑은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와 달랐다. 내 사랑은 하얀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는 남자다. 반면에 한 밤중에 전차를 타는 남자는 옷 속에 그림자만 들어 있다. 그러나 독재 치하에서 그녀의 맹목적인 증오는 더 이상 숨 쉴 구멍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빨간 수첩을 가진 당원에도 불구하고 당은 그녀를 경멸했고 국가적 수치로 여겼다. 이유인즉 그녀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자살로 끝나지 않고 침묵을 남겼다. 그녀의 친구 에드가의 말대로 ‘침묵하면 불편했지만’ 오히려 침묵으로도 많은 것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침묵…그럴 것이다. 삶의 소중한 것을 침묵으로 무겁게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이 소설에서 보듯 ‘마음짐승’을 쉬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소설을 읽으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짐승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먼저 ‘생쥐’일 수 있다. 털을 벗어놓고 무(無)로 사라지는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노래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얻는다. 그녀가 그를 갖고자 하므로 그가 아닌, 그의 들판을. 그리고 그녀는 그를 소유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인간’일 수도 있다. 누군가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당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문득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나무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무인간처럼 지루한 삶을 버티며 살 수 있을까? 나무인간이 독재자들이 만든 하나의 허영이라고 한다면 사는 동안 우리는 흉측한 짐승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짐승과 달리 묘지를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묘지는 독재자들이 가장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오는 청춘들은 묘지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한다. 단지 이 세상에서 ‘걷고, 먹고, 자고, 다른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해서 묘지를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는 독재자의 오류보다도 더 가장 큰 오류였다. 이 소설에서 ‘나’는 어떤 죽음이든 자루와 같다고 했다. 그 자루에는 허리띠, 창문, 호두와 노끈이 들어 있다. 자루에 든 네 가지는 곧 맹목적인 눈물과 같다. 

이중에서 호두와 관련된 테레자의 죽음은 남다르다. 사람들은 벼락출세한 자, 자기를 기만한 자, 양심불량자를 ‘자두 처먹은 놈’일고 불렀다. 또한 독재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테레자의 겨드랑이 아래에 죽음의 덩어리인 호두가 있었다. ‘나’에게 그녀의 호두가 문제인 것은 ‘호두는 우리에게 대항했으며 모든 사랑에 대항해 자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모든 걸 누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우정을 갉아 먹었다.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증오인지 불분명했으나 사랑이 풀과 지푸라기처럼 섞여 자라나길 바랐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식물이 되고 말았다. 

『마음짐승』을 쓴 헤르타 뮐러는「문학이 증인이 될 수 있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꽃잎과 나뭇잎을 먹었다. 그들과 내 혀가 친척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비슷해질 수 있도록.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아니었다.’ 그들(식물)은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사랑을 모르는 것일까? 우리 사는 곳이 지옥이며 더욱 더 지옥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부조리한 권력의 생리 때문일까? 부패한 권력 앞에서 사랑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좀 더 불안하게, 좀 더 하찮게… 작가에 따르면 하찮음은 상실이 이미 습관이 되었을 때의 정거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2010년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한 둘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욕망의 바벨탑이 허물어지고 세워지기를 계속하고 있다. 일찍이 역사학자인 부르크하르트는『세계사적 고찰』에서 ‘우리는 경험을 통해 어느 한 순간 영리해지기 보다는 영원히 지혜로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9년 노벨문학상 작가인 헤르타 뮐러를 통해 우리는 루마니아의 참다한 역사를 새로운 서사구조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작가와 루마니아의 역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차우셰스쿠 정권하에서 하루하루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작가는 생의 의지를 깨달았다. 작가가 말하는 생의 의지는『마음짐승』에서는 에밀 시오랑이 말한 ‘이유 없는 불안’이었다. 다시 말하면 독재하의 이유 없는 불안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실존의 물음부터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이다. 

『마음짐승』은 불행하다. 겉보기에는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내면에는 타살의 흔적들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살, 타살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피부’다. 폴 발레리는 ‘가장 깊은 것은 피부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마음짐승』에서 빈곤한 지방을 가진 얼굴이며 이발사와 손톱가위는 피부를 억압한다. 그러보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피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스럽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나무인간이 된다면 피부는 부서지기 쉬우며 감정의 호르몬은 더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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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3 - 10月-12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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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였다. 예전에 나의 알람은 새벽 5시에 울렸다. 새벽 5시는 깜깜한 창문 밖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잠자던 태양이 이제 막 일어나는 시간과 같다는 오랜 생각때문이었다. 더구나 4자에 대한 트라우마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2009~2010년 사이에 하루키 신드룸을 일으킨 장편소설 [1Q84](전 3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Q84](1,2권)을 읽고 이것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속편 [1Q84](3권)이 나왔다. 하지만 [1Q84](전 3권)을 다 읽고 다시 한 번 같은 고민을 해봤다. 얼마든지[1Q84](4권)이 가능했다. 새벽 4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의[1Q84](전4권)은 우연한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1Q84](전 3권)의 시가 여행은 놀랍게도 직선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1Q84](전 3권)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조지 오웰의  [1984]를 쉽게 떠올렸다. 조지오웰이 1949년 디스토피아 소설인 [1984]를 발표했다. 조지 오웰에게 시간은 직선적이었다. 이로 인해 [1Q84](전 3권)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다. 시간에 있어 직선의 형태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미래고 다른 하나는 과거다.[1Q84](전 3권)에서 전공투가 나오고 옴진리교 종교 집단이 나온다. 이것을 보면 이 소설의 세계는 과거다. 하지만 밤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다는 대목에서 시간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때로는 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미래일 수도 있다. 그래서[1Q84](전 3권)의 시간은 이 소설에 나오는 덴고의 말처럼 꽈배기 도넛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덴고 이외에도 아오마메가 나온다. 아오마메는 청부살인을 하는 비즈니스 우먼이다. 그녀는 세상을 자기 멋대로 사는 남자들을 살해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개미처럼 일만 하다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고 만다. 그들에게 편한 죽음은 용서할 수 없으나 어디까지나 타살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했다. 이런 그녀가 선구라는 종교 집단의 리더를 살해하고 나서 어떤 운명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 뿐만이 아니라 덴고도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덴고는 후키에리의 [공기 번데기]를 새로 쓰면서 평범하지 않는 일에 휘말리게 된다. 즉 그들은 1984년을 살면서 어느 순간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데 다름 아닌 1Q84였다.1Q84에서 Q는 quetion마크인데 이 소설에서는 리틀 피플이 나오고 달이 두 개 뜬다는 의문과 만나게 된다. 이 세계에서는 '내가 이상해진 건지, 아니면 세계가 이상해진 건지' 혼란스럽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세계의 중심(重心)이 가벼워진 것일까? 즉 어디까지가 현실 세계이고 어디서부터가 가상의 세계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까? 아오마메와 덴고가 살던 1984년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주님의 왕국'이었다. 주님의 왕국은 '우리의 수 많은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삶에 당신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아멘'이라는 구원의 왕국이다. 하지만 구원의 왕국을 거꾸로 말하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상의 세계인 1Q84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Q84는 [공기 번데기]에 나오는 리틀 피플이 말하는 것처럼 마더와 도터의 왕국이다. 사람들에게 마더와 도터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다. 다만 도터는 어디까지나 마더의 마음의 그림자다. 결국 마더와 도터가 되면서 달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터가 된다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가 상실'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일까? 달이 두 개가 되는 1Q84의 왕국은 우울하다. 리틀 피플이 예전과 달리 표면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1984년의 현실이 남긴 상처였다. 모든 것이 상실되고 있는 참다한 상황에서 1984와 1Q84은 겉모습만 다를 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1Q84에서 아오마메가 덴고가 리틀 피플을 지각하고자 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또 다른 구원의 메시지였으며 결국에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다고 저자가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4에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 하지만 1Q84에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가치가 있었다. 

하루키는 [1Q84](전 3권)에서 아오마메와 덴고의 사랑과 함께 1984년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1Q84](전 3권) 에서 서로의 손을 잡은 것은 단순한 포옹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느끼는 온기였다. 우리가 온기를 잃어버린다면 이 세상은 정말이지 1Q84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세상이 위험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자기 자신 이하로 떨어지는 것도 안 된다. [1Q84] (3권)가 끝나는 대목에서 우리는 1984년이 아닌 오늘을 사는 진정한 삶의 자세를 깨달을 수 있다. 즉 '이 세계는 나름의 수 많은 수수께끼와 모순으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지 못하는 수 많은 어두운 길을 우리는 앞으로 수 없이 더듬어 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기꺼이 받아들이자. 나는 이곳에서 이제 어디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벽 4시 달, 여전히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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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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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장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입니다. 이러한 까닭에는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변화, 인생의 매력, 인생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오블론스키는 자유주의자입니다. 그것은 자유주의자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유주의가 그의 생활방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그는 자기 집의 가정교사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자들이란 나사와 같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이 돌아간다고 변명했습니다. 더구나 그를 찾아온 레빈이 결혼했고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끌리는 것은 마치 지금 배가 부른데, 빵집 옆을 지나면서 빵을 훔치는 것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좋은 냄새를 풍기는 빵을 훔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블론스키의 갑자기 불어 닥친 사랑은 매력적이면서 외로운 여자에 대한 연민이었습니다. 하지만 레빈은 아름다운 타락한 창조물인 파충류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오블론스키가 두 여자가 있는데 한 명은 자신의 권리만을 주상합니다. 그 권리란 그녀에게 도저히 줄 수 없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또 한 명은 모든 걸 희생하면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누구를 선택하는가를 따지면서 바로 여기에 끔직한 드라마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레빈은『플라톤』의 향연의 두 가지 사랑을 기억했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한쪽 사랑만 알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쪽 사랑만 압니다. 그리고 육체적 사랑만 아는 사람이 꼭 쓸데없이 드라마를 운운한다고 하면서 그런 사랑에는 드라마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플라토닉한 사랑에도 드라마는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덕군자로 불린 레빈은 이 세상의 모든 아가씨를 두 부류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온갖 인간적인 약점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여자들입니다. 또 하나는 어떠한 약점도 없고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여자입니다. 레빈에게 오블론스키의 처제였던 키티가 전부였습니다. 오직 그녀만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레빈이 키티와 결혼하려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브론스키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공작의 딸 키티에게 젊고 매력적인 장교인 브론스키는 좋은 남편감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공작부인이 말했던 야만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뚜렷한 직업도, 사회적인 지위도 없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일에 매달려 있는 레빈이 야만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키티는 사랑을 선택하는 데 망설였습니다. 왜냐하면 브론스키는 대단히 사교적이고 침착한 사람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거북한 느낌이었습니다. 반면에 레빈을 생가할 때는 너무나 담백하고 깨끗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이 어떠한 위선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브론스키와 함께 할 미래는 찬란하게 빛나는 행복한 전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레빈과의 미래는 앞날이 안개처럼 흐릿해보였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그녀는 레빈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결혼 상대자였던 브론스키는 가정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교계에서 만나는 아가씨들과 교제하면서 그는 황홀함만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에게 결혼은 남의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결혼할 의사도 없으면서 아가씨들을 유혹하는 것이 그저 젊은이들 사이에 흔한 나쁜 행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키티의 작은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큰 불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빠 문제로 페테르부르크 철도역에서 안나 카레니니가 브론스키를 만나면서 그들의 불길한 징조는 시작되었습니다. 무도회에서 그들이 보여준 운명적인 사랑을 보면서 그 순간 키티는 10년을 산다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안나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 기차에서 브론스키를 우연한 만났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객차에서 브론스키를 보면서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떨리던 억제할 수 없는 불꽃이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핀 지 오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그녀가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라는 고백을 듣기라도 한 듯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당신이 이 기차에 타고 있는 줄 몰랐어요, 어째서 모스크바로 떠나시나요?”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당신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서 떠난다‘는 것을. 이러한 그의 사랑은 마중을 나온 그녀의 남편을 보면서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그이 예리함은 ‘그녀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사랑할 수도 없어’라고 단정했습니다.  


사람들은 안나가 모스크바에 다녀온 뒤로 많이 변했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브론스키라는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림자가 없는 사나이, 그림자를 잃은 사나이는 어떤 경우일까? 사나이가 그림자를 잃은 건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무분별한 사랑 행동에 대해 그녀의 남편인 알렉섹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을 파고들다 보면 우리는 종종 그 속에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던 것을 발견하고 하지. 당신의 감정, 그건 당신의 양심 문제야.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 앞에서, 나 자신 앞에서, 하느님 앞에서 당신의 의무를 일깨워 줄 의무가 있어 우리의 삶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어. 그리고 우리를 묶은 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야. 이 결합을 파괴할 수 있는 건 오직 죄악뿐이지.” 안나는 이런 남편을 브론스키에게 인형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즉 그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관청의 기계였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데 있어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형이하학적인 반면에 남자들은 사랑으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만들고자 합니다. 안나가 브론스키에게 사랑을 갈망하고자 하였지만 브론스키는 그녀에 대한 사랑에서 사회적인 출세로 옮겨갔습니다. 그럴스록 안나는 사교계에서 지옥에 놓인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안나에게 수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안나는 ‘난 사랑을 원해 그런데 사랑이 없어 그러니 모든 게 끝난 거야’라고 토로했습니다. 그리고는 브론스키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고 하면서 책망하는 것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심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안나는 당신이 그에게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모습 그대로 그를 온전히 사랑하고자 했습니다. 그 사람의 미덕이나 명예를 증오했습니다. 그 사람이 착하고 훌륭한 사람일수록 자신은 그 사람의 손톱 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불행만이 앙상하게 가슴을 후볐습니다. 그 사람은 뭐랄까, 당신을 사랑하는 데도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마는 ‘심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안나는 질투하는 여성이 아니라 ‘심장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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