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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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야만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폭풍의 언덕』중에서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

어떤 사람의 영혼이 달빛이거나 불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제목만큼이나 사랑하는 방법이 폭풍 같습니다. 그녀는 서로가 사랑한다면 서로의 영혼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이야 합니다. 만약에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영혼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이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릴 때부터 버려진 아이였는데 캐서린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자신이 사는 ‘위더링 하이츠’에 데려왔습니다. 시커먼 악마 같은 두 눈을 가진 히스클리프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말광량이였던 캐서린만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힌들리 오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학대가 문제였습니다.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기에 족한 것입니다. 캐서린 이런 현재만을 생각해서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히스클리프를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소중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이상한 쾌감

정말로 마음씨가 착하면 얼굴도 선해지는 걸까요? 치장한 인형 같았던 에드거와는 달리 촌뜨기였던 히스클리프가 크고 푸른 눈과 번듯한 이마를 원했습니다. 캐서린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 같은 두 눈을 천사 같은 눈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일과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멸시를 받으면서 점차로 이러한 우월감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게 하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며 오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침내 폭풍이 치던 어느 날 밤, 히스클리프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불같은 성미를 억누르지 못해 사랑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캐서린의 마음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마치 가시나무가 인덩덜굴 쪽으로 휘어진 것이 아니라 인동덩굴이 가시나무를 감은 격으로 말입니다.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은 폭발하는 불이 가까이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우울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영혼에 폭풍이 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달라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서로의 기쁨에 열중하자 에드거는 반대로 불쾌감으로 점점 창백해졌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그는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있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악에 물들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는 동안 힌들리는 노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거리는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갑자기 히스클리프를 좋아하게 된 예지치 않은 불행이었습니다. 캐서린은 겉모습과 달리 히스클리프의 속은 사나운 늑대라고 하며 반대했지만 이사벨라는 훌륭하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캐서린의 이기심일까요? 이사벨라의 질투일까요? 그러나 진짜 정답은 히스클리프의 복수심에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대접을 받았던 삶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와 결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이사벨라는 비참해질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캐서린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던 건은 에드거처럼 어떤 의무감이나 인정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삶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에드거가 팔십 년 동안 캐서린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하루 동안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캐서린이 에드거를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을 천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는지 격정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이 것이며, 당신은 나를 사랑했는데도 무슨 권리로 자신을 버리고 갔느지, 에드거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는지,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는데…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것이며,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 놓은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말했습니다. 캐서린이 괴로운 나머지 흐느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 용서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으며

그러나 캐서린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하면서 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히스클리프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는 교회 묘지의 머슴에게 부탁하여 캐서린의 관 뚜껑을 열고는 조금 느슨하게 하고는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캐서린에 옆에 묻힐 때 자신의 관도 한쪽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넘나들기 위해서 입니다. 캐서린이 죽은 뒤 그는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유령이라는 게 있을 있다면 그런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유령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며 그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다시 한 번 캐시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관 두껑을 뜯어냈는데 그때 그 귓전에서 진눈깨비를 몰고 오는 바람을 물리치는 따뜻한 숨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캐서린이 땅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성격은 비참함을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파멸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가 훨씬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악마 같은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이로 인해 외롭고 더욱 상실감이 클 뿐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가까워진 그의 고백을 들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꿋꿋하게 그 소원의 성취를 열망했던지 그는 그것이 꼭 성취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소원이 성취되리라는 기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는 고백한다고 해서 어떤 구원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오랜 싸움에 대한 자신의 성격의 설명할 수 없는 면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생활을 하며 신자답지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성경이란 것에 한 번도 손도 대지 않은 탓에 그는 틀림없이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뒤적거릴 여유도 없습니다. 만약 이제라도 돌아가기 전에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성경 말씀에 나오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뉘우칠 게 없으며 너무 행복하지만 아직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행복이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있지만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남들이 바라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바라는 천국에 거의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궤도

히스클리프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의 유령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괴상하다고요? 어쩌면 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은 행복인 동시에 고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랑의 궤도는 사랑의 유령을 불러낼 정도로 영혼을 넘나듭니다.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궤도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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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오우아님, 오랜만에 리뷰 보니 반가워요.
저는 저 위의 두 문장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네요.
그럼에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연약하고 한심한 사랑도 있지요.
 
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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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 중에서

 

 

이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는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즐겨 불렀다. 하지만 삶의 박자를 전혀 맞추지 못하며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는 한 박자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랐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게 이거구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로 살아야만 했다. 거짓말은 지금의 삶이 초라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변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거짓말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제목과 같은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해리는 자신이 거짓말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짓말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끌어안고 있다.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의 직업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그의 재능의 파괴자였다. 사랑하면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리라 믿었는데 오히려 그는 ‘등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물어버린 어떤 뱀’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거짓말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쾌한 방법일 것이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게 되었을 때 돈값을 훨씬 잘할 수 있다는 해리의 절망을 공감하게 된다. 돈값은 우리의 영혼을 콜레스테롤로 가득 채우기 때문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죽음 앞에서 딱딱해질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혼란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통증을 소진하는 것은 어떨까? 거짓말을 파괴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은 다른 영혼이 되는 것인데 킬리만자로에 올라가는 것은 아주 좋은 파괴이지 싶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

 

 

그러면 왜 킬리만자로를 일까?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킬리만자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마치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거나’(「킬리만자로의 눈」), 반대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나 자신을 놓아버리면 내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을 자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뭔가에 정신을 파는 방법’(「이제 내 몸을 뉘며」)이었다. 그래서 평행한 길은 놔두고 근육이 아플 정도로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것은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하얀 코끼리 같은 산」) 피곤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 즉 ‘생각할 의무, 써야 할 의무, 다른 의무들을 등 뒤에 뒤에 버리고 왔다’(「심장이 둘인 큰 강 1부」)는 행복이 아닐까?

 

헤밍웨이의 단편집『킬리만자로의 눈』은 아주 단순하게 거짓말을 파괴하는 소설 같았다. 어느 순간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음 혹은 허무에 빠진 우리에게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송어 낚시를 하라고 한다. 사소하다고 하면 너무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아주 ‘좋은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매일 맞고 꺽이며 사는’(「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두려움에서 벗어나 ‘댐이 터진 것 같은 절대적 흥분상태’를 느낄 것이다.

 

 

일찍이 단편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는 문학이란 삶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삶에 충실하고, 삶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인물은 움직이는 캐릭터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헤밍웨이의『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디론가 쏜쌀같이 움직였다. 낮보다는 밤이 더 강렬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에 불을 켜두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빛이 아주 좋고 정말 아름답다’(「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혹,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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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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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지상의 아름다움이요 동물들의 귀감이지 -헌데, 내겐 이 무슨 흙 중의 흙이란 말인가? 난 인간이 즐겁지 않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햄릿』중에서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뭘까요? 셰익스피어의『햄릿』에서 햄릿은 죽는 것이 자는 것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결말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면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비로소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는 건이 꿈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곧 불행의 걸림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햄릿을 ‘화분에 떡갈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햄릿은 분재가 적당했습니다. 하지만 떡갈나무가 자라면서 결국에는 화분을 깨뜨리는 비극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덴마크 왕이었던 아버지가 독사(毒蛇)에 물려 죽은 것으로 알았던 햄릿은 어느 날 유령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유령은 바로 아버지의 혼령이었습니다. 유령은 그에게 듣고 나면 복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수라는 것이 가볍다 가벼운 한 마디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을 성난 고슴도치 깃털처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령이 말한 복수의 정체는 살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유령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독사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진짜 독사는 다름 아닌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클로디어스라는 그의 삼촌이었습니다.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를 독차기 위해 사악한 기지를 발휘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던 것입니다. 지옥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그는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령과 복수를 약속하며 악당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왕비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최고로 악독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최악의 속도로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느낀 정신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는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성급한 결혼 때문에 햄릿은 자기 인식에서 멀어졌습니다. 햄릿의 변신이 자신의 딸, 오필리아를 사랑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플로니어스 재상에게도 정작 그것은 아무런 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필리아가 결혼하고자 했을 때 햄릿은 그녀에게 순결한가? 라고 물었으며 당신의 순결은 당신의 아름다움에게 어떤 대화도 허락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자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은 햄릿의 야망이 너무 좁아서 생긴 거라고 했지만 그는 호두 알 속에 갇혀 있다 해도 그의 야망은 무한 공간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악몽을 꾸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음이 울적하여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저 더럽고 병균이 우글거리는 증기의 집합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이러한 난폭한 운명 앞에서 햄릿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라고 고뇌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만약에 죽는다고 한다면 잠 한번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자면서도 꿈꿔야 한다면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햄릿은 불행을 견디지 못한다면 양심 때문에 비겁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수의 칼날을 접는 대신에 연극을 통해 왕의 양심을 심판하고자 했습니다. 햄릿에게 연극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과거에나 현재에나 본성에 거울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미덕에게는 자기 몸매를, 경멸에게는 자기 꼴을, 바로 이 시대와 이 시절은 그 형체와 생김새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들이 연극을 보고 있을 때 그 극적인 표현이 너무나 교묘하여 영혼을 때림에 그들이 즉각 죄상을 공표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제목은 비엔나에서 있었던 살인을 본뜬「쥐덫」이었습니다.「쥐덫」은 악랄한 작품이었지만 죄 없는 영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연극을 보고 왕이 움찔한다면 오직 죄 지은 사람에게는 찔리는 게 있을 것입니다.

 

오만한 죽음이여

그래서일까요? 불안했던 왕은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편 플로니어스는 왕비에게 햄릿이 왕을 몹시 화나게 한 것을 꾸짖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왕비의 내실의 휘장 뒤에 숨어 왕비와 햄릿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왕비가 햄릿에게 사악한 혀로 꾸짖는 질문을 던지자 햄릿은 경박한 혀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햄릿은 휘장 뒤에 있던 플로니어스를 발견하고는 살해했습니다. 이런 피비린 나는 행위에서 햄릿은 왕비에게 나쁜 쪽은 내버리고 나머지 반쪽으로 더 순수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햄릿이 플로니어스를 살해하자 재상의 아들 레이티즈가 폭도를 일으켜 왕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은 죄가 없다며 칼날의 방향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햄릿 때문에 오필리아가 실성하여 끝내 물에 빠져 죽자 이것을 복수의 원인으로 생각한 왕과 레이티즈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즉 햄릿과 레이티즈가 칼로 기량에 공식 내기를 할 때 약간의 속임수로 레이티즈 칼에 독을 바르는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이것이 실패한다면 차선책으로 햄릿에게 독배가 든 술잔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햄릿 대신 왕비가 독배를 마셨고 그 찰나에 햄릿은 레이티즈의 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지푸라기 하나에 대한 큰 믿음

살다보면 햄릿처럼 한 방울의 악 성분 때문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운명과 위험에 놓였을 때 진정으로 위대함은 무엇일까요? 루소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 그토록 불행한 것은 오직 그들 자신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고 이성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면 이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그 불행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이성은 그것들을 없애 주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불행의 가장 비통한 상처는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불행이 닥쳐왔을 때 그것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성을 쓰지 않고 짐승 같은 망각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으로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햄릿의 생각은 반에 반만 지혜일뿐 나머지는 비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피할 수 없다면 불행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럴 때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믿음으로 그것을 견디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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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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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사랑이란 한숨으로 만들어진 연기인데

정화되면 연인 눈에 반짝이는 불길이고

성질내면 사랑의 눈물 먹고 자라는 바다야.

(………………………)

줄리엣: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예요.

거지들은 자기 값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진실된 내 사랑은 한없이 크게 자라

그 재산의 절반도 계산할 수 없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달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마세

누구나 한번 쯤 사랑의 맹세를 해봤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말보다 내용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밤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달에게 맹세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내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사랑의 관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처럼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하겠다면 품위 있는 자신에게 맹세해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무너무 성급하거나 무모 하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개 친다.”를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번개와 꼭 같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사랑의 새싹은 여름의 숨결로 자라나 다음 만날 땐 예쁜 꽃이 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그들의 가문이 오래 묵은 앙숙이었는데 그들이 숙명적인 몸에서 연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몬터규 집안의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그는 로잘린과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눈가리개 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슬픔이 짧아지지 못했습니다. 큐피트의 화살로는 로잘린의 과녁을 맞출 수 없게 되자 그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한편 캐풀렛 집안에서는 줄리엣의 신랑감으로 귀족 청년 파리스 백작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캐풀렛 부인은 캐풀렛 가문의 오랜 축제가 열리는 저녁에 줄리엣에게 파리스의 젊은 얼굴 , 그 책을 읽어보고 아름답게 적어 놓은 기쁨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그런데 그날 밤 축제에서 줄리엣에게 제본 안 된 사랑의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미오였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자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로미오가 값비싼 보석 같은 진정한 아름다운 줄리엣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조카 티볼트가 그만 격분했습니다. 티볼트가 몬터규 집안의 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작은 소동이 조용해지자 로미오는 줄리엣의 손을 잡고 성자상의 부드러운 키스로 침입 사건의 죄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줄리엣은 성사상의 입술은 기도에 써야 하면서도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로미오는 기도하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줄리엣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은 첫 키스를 하였지만 서로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들의 사랑은 가혹했습니다.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로미오는 줄리엣의창가 아래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줄리엣은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라고 안타깝게 말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름만이 그녀의 적일 뿐 이었습니다. 몬터규는 로미오의 손도 발도 아니고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다른 이름을 가져 그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장미가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줄리엣의 비밀을 듣고 있던 로미오는 만약 그녀가 자신을 애인이라 불러 준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로미오라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장식이 아니에요!

그들은 사랑하는 방향을 결혼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줄리엣이 마음의 연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혼인으로 축복해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젊은이의 사랑이 진실로 마음속이 아니라 눈 속에 있구나, 의심하였지만 로미오는 옛 짧은 애인 로잘린처럼 사랑에 혹 한 것이 아니라 줄리엣과는 호의를 주고받는 다고 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두 집안의 원한을 순수한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면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로미오가 기쁨에 넘쳐 줄리엣에게 상상 속의 행복을 드러내달라고 하자 그녀는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미오에게 불길한 앞날이 걸쳐 일어났습니다. 로미오가 시비 끝에 티볼트를 살해하여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 숨어 지냈지만 끝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그의 잘못은 사형인데도 죽음이 아니라 추방을 내린 것은 자비로운 일이라고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추방!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끔찍했습니다. 더구나 줄리엣이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하며 추방은 자비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역경의 달콤한 우유인 철학으로 위로하면서 로미오가 만투아로 건너가 사는 동안 사면을 요청하고 때를 봐서 그들의 결혼을 공표하겠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

이렇게 해서 줄리엣은 로미오와 헤어졌는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갑진 않으나 고맙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비탄에 잠긴 그녀는 로미오와 맺어 준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조언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로렌스 수사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자결할 의지력을 가진 그녀에게 죽음과 비슷한 치유책을 알려주었습니다. 즉, 지금의 치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파리스와 결혼에 동의하고 죽음의 축소판이 든 약을 먹게 되어 묘지에 누워 있으면 그와 로미오가 그녀가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 수사의 계획이 담긴 편지보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죽음을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사악한 마음이 재빨리 드는 걸까요? 로미오는 줄리엣과 함께 누워 있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약장수에게서 독약을 사고 나서 줄리엣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궁 앞에서 파리스 백작을 만나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음마저 아름다움을 정복하지 못한 줄리엣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 독약이었던 슬픔의 치료제를 마셨습니다. 줄리엣이 깨어나고 나서 꿈이 좌절된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로미오의 검을 들고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찌르며 죽었습니다.

 

무서운 아름다움

스무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위험이 줄리엣의 눈에 있다고 했던 로미오는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어떤가요? 사랑은 내게 힘을, 힘은 도움을 줄 거라고 했습니다. 최종철은 『로미오와 줄리엣』,「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줄리엣의 자결이 보여 주는 이 슬픔 속의 기쁨, 예이츠의 표현을 빌리면 이 ‘무서운 아름다움’(terrible beauty)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비극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주된 구성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사랑의 모순어법에서 나온다. 서로 미워하는 두 원 수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운명에 한편으로는 대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은 짓궂은 여름 바람 맞으며 한가로이 나부끼는 거미줄에 올라타도 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운명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줄리엣이 말한 것처럼 유일한 내 미움이 유일한 사랑을 낳을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은 꽃을 피웠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마침표이거나 물음표, 그리고 느낌표라고 한다면 장식에 불과하지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은 죽음표여야 합니다. 죽을 정도로 사랑한다면 아낌없는 마음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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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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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무기여 잘 있어라』중에서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사람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니시트 헤밍웨이의『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프레더릭은 “나는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의 품위(品位)를 이성적으로 완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이 아닌 “음식을 먹도록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캐서린과 잠을 자도록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먹고 자고는 단순합니다. 단순함은 굳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은 우리는 영광이나 명예를 그 밖에 인간에 부여된 정의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말은 그에게 마치 빗속에서 듣는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설스럽다고 적당한 착각을 했습니다.

미국인이었던 프레더릭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탈리아 군대 소속으로 앰뷸런스 부대의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이렇다 할 공방전 없이 잠시 안개마냥 가라않자 할 일이 없어 휴가를 가게 된 그는 군종신부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날카롭고 투명한 쾌감으로 밤낮을 반복했습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군종신부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군종신부는 아가씨가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신부가 말한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영국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스코틀랜드인 미스 바클리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현실이 되었습니다. 약혼한 청년이 참전하자 그녀는 간호사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청년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삶을 살다

그들은 이상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전사하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자 그녀는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캐서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 장교 위안소에 가는 것보다 밤이 되어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뻔한 게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카드 대신 말로 하는 브리지 게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분간 그녀에게 친절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정말로 친절하며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또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만나러 왔다가 막상 만나지 못하면 기분이 여간 쓸쓸하고 공허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개시되어 그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영국 야전 병원을 지날 때,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성(聖) 안토니오 상(로마 가톨릭의 기적의 수호성인)이 새겨진 목걸이를 주면서 꼭,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운전병과 함께 참호 속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다리에 부상을 당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병동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군종신부와는 전쟁 혐오증을 이야기 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은 진짜 장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장교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사병)에게 전쟁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내 종교예요

그래서 군종신부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가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을 위해 뭔가 하고 싶어지고 희생하고 싶어지고 봉사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군종신부말대로 한낱 정열과 육욕에 지나지 않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는 사랑과 별도로 행복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르며 직접 느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군종신부가 말한 그것! 그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물어봤지만 군종신부의 대답은 만족할 수 없었지만 견고했습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말 꿈만 같은 캐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간호해주면서 그가 원하는 것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녀가 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없으며 오직 그가 원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내가 바로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행복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당신 곁을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내 종교예요.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그들은 생리적인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불안했던 이유는 바로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꼭 말해야만 했습니다.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약간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 때문은 아냐.”“나 때문이라곤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어쨌든 덫에 걸린 기분이 드느냐는 거죠.”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그 순간, 그녀는 ‘언제나’라는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로 사랑하면서 일부로 오해를 만들어서 다투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남이며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며 당신 같은 용감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겁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만 용감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용감한 사람이 영리하다면 아마 이천 번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용감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율이 2할 3푼인 타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야구에서 평범한 이류 타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상에서 몸이 회복되자 그는 캐서린을 병원에 남겨둔 채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전쟁에서 신성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들이 무의미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후퇴하는 과정에서 임무를 실패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생사의 갈림길을 빠져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대를 이탈한 죄로 야전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문을 받는 장교들이 하나같이 총살을 당하자 그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캐서린이 스트레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의 동료가 그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 맞선 고독을 느낄 뿐, 결코 고독하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밤과 낮이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겪은 것은 낮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밤이 더 유쾌하다는 것만 다를 뿐 낮과 거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는 범죄자 같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기쁨 덕분에 그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 말대로 앞으로는 그가 체포되지 않을 곳에서 멋지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네가 삶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죽는다

그들은 체포를 당할까 봐 국경을 넘었으며 마침내 스위스에 도착하자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온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위스는 멋진 나라, 훌륭한 나라였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출산을 기다리며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초산이라는 자연의 이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녀의 용기는 완전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녀 또한 전혀 죽을 까닭이 없었지만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해서 얻게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덫의 끝, 즉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그것에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치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비열한 장난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종말을 그는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모닥불 위에 던져진 개미가 잔뜩 붙어 있는 통나무로 투영했습니다. 통나무에 불이 붙자, 개미들은 뜨겁지 않는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에는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얼마든지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던 것은 위스키를 마시려고 해서 그런 것이지 개미를 살려주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여야 한다

그는 그녀가 끝내 사망하자 간호사를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껐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마치 조상(彫像)에게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이토 준이치는『민주적 공공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who)는 무엇(what)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 개시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죽음은 생리적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녀의 얼굴이 조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에게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는 우리와 다르게 생리적 덫의 비대칭적인 위치를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즉 사랑, 죽음이라는 무엇의 덫이 아니라 존재라는 누구의 덫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이천 번 죽을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용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타율이 2할 3푼 그 이상을 넘어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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