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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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에는 땅값이 ‘하루치 1천 루블로’라는 솔깃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 땅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당일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농부 바홈은 많은 땅을 차기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걷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출발점까지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홈은 죽고 맙니다. 1분도 제대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 1분도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쓸쓸한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3아르신(1아르신은 약 70cm)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만들만큼만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바홈을 가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홈은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국으로 갔을까요, 지옥으로 갔을까요? 이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이력서를 차분히 헤아려보면 그 이면에는 욕망이 숨가쁘게 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바홈이 이루지 못했던 욕망은 우리 앞에 던져진 삶의 한계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바홈에게 땅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바홈이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면 세상은 정말로 공평할까요?

한 순간 바홈을 변명해보고 싶었던 까닭은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을 우연히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5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천국에 간 집달리」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리코른은 집달리라는 직업상 남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법(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자 천상(天上)의 재판관은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리코른처럼 가슴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방향에 따라 산과 강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공평함 앞에서는 나침반은 방향을 잡기가 곤란합니다. 지난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길 아닌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셀 에메는 삶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오늘을 보면서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꼭 길이 아닌 곳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재판관의 무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나오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놀라운 삶을 다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삶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작가의 비범한 생각은 거짓말 같은 결과라는 절묘한 반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는 삶의 상실감과 고통을 아주 희극적으로 그러니까 익살스럽게 드러내면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삶의 본질을 파고들면서 종횡무진 달려가는 작가의 글 솜씨로 인해 책 읽는 즐거움이 대단했습니다. 정말이지 ‘에메의 작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이었습니다. 삶이 가벼워지고 통쾌해졌습니다.

사실 이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표제작인「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있었습니다. 얼핏 제목만으로도 이 남자가 사뭇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은 ‘뒤티유월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치 열린 문으로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 남자의 삶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벽(壁)은 단단한 고체(固體)입니다. 이런 벽을 사람이 통과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란 물렁물렁 하지만 비나 물같은 액체(液體)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액체화된 몸입니다. 동시에 일상의 권태를 한 순간 녹여버리는 즐거운 몸입니다.

뒤티유월의 기발한 자유스러운 모험을 보면서 호모 오피스쿠스, 즉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책상을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지금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직장에 다닌다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전혀 행복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백번 허망함이 밀려왔다 쏠려갔습니다. 지긋지긋한 외로움으로 가득 찬 사무실의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들 마음도 벽이 되고 맙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자존심을 건드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벽과 벽이 충돌하는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어떤 보람을 요구하는 행동’은 ‘자기 안에서 확대의 욕구,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이런 열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는 스스로를 ‘가루가루(늑대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본능은 길들여진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벽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분명하며 금지(禁止)가 곧 삶이라는 것을 을씨년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금지의 벽이 가지고 있는 양면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 「생존 시간 카드」도 귀를 활짝 열리게 했습니다. 외면하기에는 아까운 이 단편에서는 섬뜩하게도 ‘쓸모없는 사람’은 알맞게 희생양이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즉 생존 시간 카드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생산적인 사람들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있어 어떤 사람의 무용성 정도에 따라 일수(日數)를 정해놓고 그 일수만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분수(分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절박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자기만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살면서 우리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지겹고 무기력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분수라는 것이 얼마든지 지옥의 늪일 수도 있겠다는 불편함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즉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아픔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면서도 남의 인생을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상상력 부재로 괴로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 심정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작가는 분수에 맞는 재미없는 삶을 마구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마치 조각난 삶의 퍼즐을 테두리 없이 맞추는 행복한 고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퍼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맞출 때마다 우리들 마음만큼이나 딱딱하고 비통한 삶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유리창의 빗방울들이 한데 모이면서 물줄기를 만들며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꽉 막혀 있던 현실의 벽들이 한없이 잘게 부서졌습니다.

늘 세계 여행을 꿈꾸는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파리에 세워져 있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불리는 마르셀 에메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알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행이라고 하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이라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익숙한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고향인 몽마르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작가의 생활을 엿보는 것도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여행이라는 것을 습득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셀 에메를 그리워하는「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은 얼마만큼의 분수(分數)가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벽으로 드나들었던 것처럼 분수를 얼마든지 분수(粉水)로 액체화하면서 보다 쉽게 “불쌍한 욕망 기계에게 얼마만큼의 물이 필요한가요?”라고 특유의 위트로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몽마르트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벽을 만드는 사람보다도 벽을 드나드는 남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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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데이 2012-11-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우아 님. 저는 문학동네 편집부의 김선희라고 합니다. 올려주시는 리뷰 늘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띠지를 새로 제작하면서 오우아 님의 이 리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에 등록된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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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을 보내는 방법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 혹은 성당에 가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결혼 전까지는 집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난 후 교회 혹은 성당이 좋았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취향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했습니다.

삼십대 후반 그러니까 결혼 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달콤한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쓰디 쓴 약을 삼켜야 했습니다. ‘왜 아내의 잘잘못을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일까?’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아 더욱 답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톨스토이의『부활』을 읽다가 ‘참다운 용서의 가르침’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이제까지 용서라는 좋은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이지 가슴을 물컹거리게 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해야 한다.”

일곱 번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것도 모자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굳이 어떤 종교를 따져 묻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삶의 좋은 안내서라고 해도 무방했습니다. 이런 찰나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던 아내가 불쑥 “우리 성당 가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으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왜?”라고 차갑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내의 욕구불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겨우 ‘한 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이제 일요일은 주말(週末)이 아니라 주일(主日)이었습니다. 어쩌면 매일 매일이 주일이었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내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회의감에 젖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아쉬워하면서도 늘 적당히 지나쳐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동행하면 더 이상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여전히 삶의 고난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렇듯 막상 성당이 아닌 곳에서 믿음이 흔들리면서 서로 다른 자신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신앙심이 약한 것일까요? 믿음이 어긋나고 있을 무렵에 윌리엄 폴 영의 『오두막』을 읽었습니다. ‘미국 현지 600만 부 돌파!’라는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이 한몫했지만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울려 읽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하느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하느님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라는 다소 거짓말 같은 두려움과 설레임이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고 합니다. 이 소설에서 맥이 선택되었습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어른이 된 맥이었지만 결혼해서 다섯 자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닥쳐오면서 그는 ‘거대한 슬픔’에서 허우적거렸습니다. 야영장에서 마지막 날 막내인 미시가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라고 위로하면서 미시를 찾아보지만 결국 납치범에게 근처의 ‘오두막’에서 살해되었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맥에게 오두막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오두막을 떠올릴 때마다 사랑하는 딸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으로 거대한 슬픔에 흠뻑 젖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오두막으로 찾아오라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미시가 납치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라고 반문해보고 싶었습니다. 저자 말대로 가죽 표지에 길트(glit,금박)로 장식된 테두리가 있는 값비싼 책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친근하게 하느님이 아닌 ‘파파’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짓궂은 장난 이상으로 비통한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두막으로 가는 것을 어렵게 선택한 것은 맥에게 운명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고르라면 낯선 오두막에 들어가자 치자나무와 재스민향이 감도는 자신의 어머니의 향수 냄새를 풍기는 파파가 “나는 눈물을 수집한답니다.”라고 대답할 때였습니다. 또한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종교적인 조건화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라는 솔직한 고백을 듣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오두막』을 통해서 맥이 고민했던 문제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우연한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사랑의 끝이 어디까지 가늠하게 합니다. 누구누구를 벌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치유하며 사랑의 흔적을 끝없이 남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 혼자가 아닌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사랑은 삶의 희망이었습니다. 너는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 책에서 세 사람(파파-성부, 예수-성자, 사라유-성령)이 한 몸이 되어 맥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메시지는 우선적으로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에서 배울 수 있지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미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음으로 동사(動詞)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령, 나와 당신이 친구라고 했을 때 서로가 바라만 봐도 기쁜 관계 속에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반면에 명사형(名詞形)인 ‘기대’로 바뀌면 놀랍게도 서로에게 계율이 됩니다. 우정이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될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돌이켜보면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고민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맥처럼 딸의 비참한 죽음 이후로 아무것도 해결된 것도 없이 그렇게 몇 년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슬픔의 집이 있다면 아마도 오두막입니다. 동시에 그곳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곳입니다. 오두막에서 슬픔을 외면하지 말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해보는 것이 참다운 인생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끝내는 우리 모두 마음이 아이처럼 흰색(白色)으로 빛나길 바래봅니다. 우리가 보통 황금(黃金)이라고 불리는 금색은 알고 보면 전혀 금색이 아니라고 합니다. 수많은 빛깔 중에서 노란색만 반사시키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화가 치밀어 오르면 얼굴이 붉게 되거나 괴로울 때 얼굴이 검게 됩니다. 슬픔을 제대로 반사시키지 못해 아이처럼 해맑게 울고 웃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힘들고 지칠 때 왜 내가 불행의 주인공이어야 하는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이럴 때 하느님은 최악(最惡)이 됩니다. 반대로 하느님이 최선(最善)이라고 해서 불행을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자 말대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중심(中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두막』의 감동처럼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겸손해지며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오두막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맥과 같이 과거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비루한 삶에 지친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불행이 쌓여도 삶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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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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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우유 빛처럼 하얗게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의학적으로 눈이 멀기 때문이다. 실명이 되는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장 큰 어려움은 실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있다. 모든 병(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혼란스러움은 사뭇 다르다. 솔직히 누구나 조금씩은 공감하고 있을 것이지만 누군가의 불행한 이야기는 지루할 수도 있다. 불행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은 병든 세계를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일까? 작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문학으로 현대사회의 정체성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병이 무엇인가? 라는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실명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즉 멀어버린 눈이 멀지 않는 눈에 실명을 옮기는 것이다. 맹인을 피한다고 해서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희망은 제로에 가깝다. 이유인즉 맹인을 볼 수 없는 곳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불이 켜지고 차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데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는 차가 멈춰 서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에서 시작된다. 사방에서 경적이 울려대지만 정작 운전자는 움직일 수 없다. 차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운전가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차가 고장난 것이라면 평범한 사고이다. 그러나 도무지 까닭을 모르는 운전자의 실명은 심각한 사고이다.

이 운전자는 도시 전체를 눈멀게 하는 최초의 사람이다. 사람들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사이에 백색 질병은 도시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즉 운전자를 집까지 데려다준 남자, 그가 찾아간 안과의사, 그리고 안과의사한테 진찰을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은 정상이다. 오히려 그녀는 장님인척 살아야하는 묘한 운명에 놓인다. 위기를 느낀 정부가 실명이 된 모든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체 눈먼 사람들이 차차 동물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암울하게 목격한다. 더욱 충격적인 장면은 갈수록 부족한 식량을 앞에 놓고 여성을 강간하는 남자들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먼저 이런 공포 속에서 인간의 눈먼 욕망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가령, 눈이 먼 남자를 도와준 멀쩡한 남자가 도둑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도둑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이 더 이상 삶의 해독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이다.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멀쩡한 남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침내 비정한 세계에 눈이 번쩍 뜨게 되는데 이것이 눈먼 도시에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신의 양심을 강요한다.

작가는 양심이란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 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이 한 순간 동물이 되어버린 지옥 같은 굴레에서 가장 안전하면서도 굉장한 힘을 지니게 하는 것은 ‘수치심’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수치심이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말한다. 이것이 곧 우리의 존엄성이 양심을 제대로 바라보게 한다. 눈먼 사람들이 정신병원을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것이 아니라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깊은 고뇌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정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도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동정심으로부터 탈출하게 만든다.

끝으로 도시라는 것은 어떤 곳일까? 하늘로 치솟는 빌딩과 시끄럽게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무심하게 일상을 걷는 곳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길을 잃어버린다. 작가의 솔직한 표현을 빌리자면 도시는 미쳐버린 미로(迷路)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색 공포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눈망울을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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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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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학창시절 K가 떠올랐다. K는 남자이면서도 ‘여자’라는 놀림을 받았다. 곱상한 외모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미스터 K가 아니라 미스 K로 불려졌다. K에게는 미안할 일이었지만 남자답지 않았다는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런데『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으면 전혀 스타일이 다른 두 명이 나온다. 한 명은 이 책의 주인공인 오콩코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아버지다. 오콩코는 아버지가 ‘아그발라’라고 불려지는 수모 때문에 괴로워한다. 아그발라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며 아무런 칭호도 없는 남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오콩코는 아버지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증오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남자에게 있어 삶의 두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즉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처럼 사는 것과 남자로 태어나서 남자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서 오콩코가 선택한 삶은 강(强)한 남자였다. 아버지의 아름다움이었던 친절함과 게으름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정작 오콩코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배경은 아프리카 우무오피아의 마을이다. 이곳에서 오콩코는 세 명의 부인과 함께 산다. 그에게 여자는 부의 척도이자 남자다움의 상징이었다. 저자 말대로 남자가 가족의 우두머리고 아내들은 그에게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남들보다 권위적이고 공격적이며 때로는 폭력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부와 명예 앞에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하지만 그의 묘한 운명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뜻하지 않는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그는 부족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낯선 기독교가 삶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갈등을 힘겹게 이겨내고 강한 남자가 된 오콩코에게는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중심은 여기에 있다. 철옹성 같았던 자신의 고향이 기독교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그동안 정당화되었던 내부의 질서가 와르르 무너졌다. 그들이 의심하지 않았던 전통적인 진리가 과학적으로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러한 부끄러움과 나약함이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오콩코에게 치명적인 상처였다. 그는 자살로 불같은 욕망을 더욱 타오르게 했다.

돌이켜보면 강한 남자를 위한 변명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니체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라고 말했듯 그의 떳떳한 죽음은 끝가지 자신의 믿음을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오콩코에게 행복은 남자처럼 사는 것이며 혁명적인 삶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의 불행에 맞서는 방법이 양적(量的)인 행복으로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말하는 데 있어 정신적으로 양보다 질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행복을 양적으로 생각한다면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다.

그러면 질적(質的)인 행복은 무엇일까? 일찍이 빅터 프랭클은 역설적 의도(paradoxical intention)를 말했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어떤 상태를 회피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것을 과장해서 직면하게 한 후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하는 심리치료 방법이다. 그의 말대로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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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 때 그곳으로 가는 길에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사람들은 벚꽃이 하늘거리는 빛깔의 향연 아래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봄날의 오후였습니다. 일찍이 소동파 시인은 춘소(春宵)라는 시에서 ‘춘소일각지천금(春宵一刻指千金)’이라고 했습니다. 풀이하자면 봄밤의 일각은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봄날의 밤이 이런데 낮은 이보다 더 할 것입니다.

내가 그곳으로 가고자 했던 것은『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툼한 책은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장편소설입니다. 전쟁, 살인, 약탈, 강간…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물컹거렸습니다. 아프카니스탄의 나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비극입니다. 더구나 폭탄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터집니다. 최소한의 사람에 대한 예의조차 없습니다. 그러니 폭탄이 터지는 밤을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카불의 사진전」을 보고 싶었습니다. 눈으로만 읽었던 그곳 사람들의 참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의 숨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비록 두려움의 정체를 29장의 사진이 다 보여줄 수 없었지만 어쩌면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마리암과 라일라 같은 두 여자의 영혼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29장의 사진 하나하나를 볼 때 마다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사진이 나를 보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이 책은 내 가슴을 슬프게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프카니스탄의 참상을 보았습니다. 알듯 하면서도 알 수 없는 고통이 온 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슬픔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남의 일이라고 하며 침묵했던 양심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더 이상 그곳이 파괴되지 않기를 희망했습니다.

페르시아어로 ‘꽃 속에 있는 물’이라는 뜻을 카불은 예로부터 문명의 십자로였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가 공존했으며 특히 한때는 불교의 중심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고대 인도에서는 카불을 이상의 도시로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18세기 유럽의 한 여행가는 ‘아시아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찬란함도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암울한 역사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곧 공산주의에 맞서 무자히딘이 독립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자히딘이 정권을 쟁취했을 때는 민족 간의 분열로 인해 수많은 내전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전쟁의 당사자는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이 오늘을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엄격한 이슬람주의로 인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도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프카니스탄의 역사는 고통에 가깝습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내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다거나 안타깝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원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누군가가 무섭다고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맘 편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신(神)이기도 하고 민족(民族)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믿는 그들은 누군가를 믿지 않는 상대방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가족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딸을 강간하게 합니다.

생각해보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6.25을 겪어야 했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흘렸던 눈물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여전히 그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은 삶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립니다.『천개의 찬란한 태양』에서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무기이라는 것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또 다른 눈물이 눈시울을 젖게 했습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순식간에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바로 이슬람 국가의 뿌리 깊은 전통 때문입니다. 즉 여성들이‘부르카’를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르카는 눈만 빼고 온 몸을 가리는 옷입니다.

우리와 사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나라든지 그들의 문화와 함께 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카가 여성의 차별과 희망을 상징하는 대명사된 것은 너무나 모순적입니다. 분명 그것은 감옥이었을 것입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한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슬람 여성들이 사는 단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것은‘타하물(참는 것)’입니다.

그동안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을 보면 단지 독특한 의상을 입었다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라시드에 의해 여성의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마리암과 라일라를 생각할수록 타하물이 이런 것이구나, 알 수 있었습니다. 라시드는 전형적인 이슬람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라미(사생아)로 태어난 마리암과 결혼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5세이었고 마리암은 15세였습니다. 그는 한 손에 코란을 또 한 손에는 돈으로 마리암에게 사소한 것 까지 조롱하고 경멸했습니다. 가령, 마리암이 “공산주의가 뭔데요?” “칼 마르크스가 누군데요?” 몰라서 물어보면 “춥고(입 닥쳐)”라고 쏘아댑니다. 마리암은 그와 결혼 생활하면서 두려울 때는 견딜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마리암이 라시드를 떠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남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어쩌면 라시드보다 집이라고 해야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녀는 라시드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 집이 제일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그녀에게 집은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삶의 굴레인 동시에 희망이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집을 떠났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지겠지만 그 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제 목숨을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가 엄마가 되고 싶은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비록 아기를 낳다가 7번 실패했지만 그녀는 엄마가 된다는 것이 자기의 아까운 생을 사랑할 방법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들려줍니다.

마리암은 굳이 삶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도 그럴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위험천만하고 앞날은 민둥산만큼이나 갈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희망은 무모해보입니다. 더구나 딸 같은 라일라가 라시드의 둘째 부인으로 들어오면서 뜻하지 않는 반쪽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이제 라시드의 집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라일라 또한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습니다. 결국 라일라에게 남아있는 것은 운명적으로 마리암과 함께 살아야 하는 라시드의 집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라일라는 딸을 낳고 아들을 낳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낳기 전에 라일라는 심각한 갈등합니다. 그녀의 딸은 사랑했던 타이크의 선물이었다면 아들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일라는 아들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라일라는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이 부분이 무척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두 여성을 괴롭혔던 수많은 고통을 보며 적지 않게 분노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들의 마음은 따뜻했으며 아물지 않을 것만 같았던 상처마저도 “나는 엄마야.”라고 말하던 잔잔한 외침이 아직도 귓속을 맴돌았습니다. 피보다 눈물이 날카롭기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들이 참고 견뎌야 했던 아픔을 기꺼이 용서했기 때문입니다. 라일라가 라시드의 아기를 낳을 수 있었던 것도 마리암이 라일라를 위해 폭력적인 라시드를 죽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 이순간의 삶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라일라가 불안한 카불로 되돌아갔던 것도 용서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부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카불의 미래가 없다고 하며 떠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일라는 여자가 아니라 엄마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카불의 사진전」을 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태양이 떠 있고 그 태양 아래 벚꽃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 나오는 마리암과 라일라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찬란한 인생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한창 꿈 많고 아름다울 나이에 오히려 삶과 죽음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전쟁이 할퀴고 간 혼돈 속에서 웃음이 말라버린 얼굴은 건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두 여자는 마침내 엄마와 딸이 되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살아가는 방법이 이 보다 더 극적일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고 있을 때 두 여자는 적이 아니라 동반자로 ‘사와브(착한 일)’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지 연약한 여자라고 해서 사랑받기 위한 사와브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와브! 이것이 매혹을 잃어버린 도시 카불이 말하는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만약 사와브가 없었다면 카불의 비극은 여전히 포연(砲煙)이 자욱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슬람 여성들이 차별을 온 몸에 감싼 부르카를 입으며 망사로 세상을 보는 것 보다 더 흐릿합니다. 어쩌면 두 여자가 보여주는 가슴 떨리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위로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사와브입니다. 그것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도 무방합니다. 찬란한 태양 아래 같은 인간으로 사는 삶의 문제입니다.

이 책을 통해 아프카니스탄의 고통을 봤습니다. 고통이라는 단어를 되씹을수록 가슴이 저렸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똑같이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피와 눈물로 얼룩진 아프카니스탄에서 폭력적인 한 남자의 아내가 된 두 여자의 운명은 이슬람 사회의 모순을 눈물겹게 합니다. 한편으로는 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걸까? 라는 고민 때문에 답답하다 못해 막막했습니다.

과연 신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잘못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카뮈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 세상 모든 악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 책임은 전능한 신에게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인간이 자유롭기에 그에게 책임이 있다면 신은 전능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논하기 보다는 우리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폐허 앞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가 정말로 가슴 벅차게 ‘사와브’를 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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