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공유하시겠습니까? - 셀카 본능에서 잊혀질 권리까지, 삶의 격을 높이는 디지털 문법의 모든 것
구본권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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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대의 문법이 바뀌었다. 세상은 하루하루 눈부시게 변해가고 있고 변화를 따라 잡기에도 허덕이는 시대다. 특히 빠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세상은 조금만 방심하면 뒤쳐지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변화를 일견 긍정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정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손쉽게 접하고 거리를 지우고 언제나 만나고 싶은 사람과 연락할 수 있으며, 이전보다 자신을 대중앞에 드러내기 쉬운 시대이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숙고 없이 지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고 거대 권력으로 부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정보의 확산과 공유는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디지털 정신은 개개인에게 이전과는 다른 권력을 주었다. 거대 권력기과에 맞서는 개인의 힘은 과거에 비해 커졌지만, 동시에 국가기관의 힘도 비약적으로 커졌다. 우리들이 1984를 끊임없이 되뇌이는 이유다. 


실제 모든 정보는 충분히 약탈되고 공유될 수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해야 할 개인적인 지침은 무엇일까? 일단 디지털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법은 없다. 심지어 과거의 행적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과거는 포기하는 것이 좋다. 웹상에 공개된 정보를 지우기보다는 향후 자신의 행적을 통제하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향후 자신의 행적을 디지털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기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부터 외부와 접속하는 모든 기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교통카드기 되는 신용카드마저도....


이러한 것은 결국 세상으로 부터 철저하게 고립되는 것이다. 이건 사실상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다. 이 시대는 자신을 스스로 노출하는 시대이지 자신을 감추는 시대가 아니다. 이미 SNS를 통해서 자신을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하는 것을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행하고 있다. 이미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초기 설정부터 스스로를 노출하도록 초기화 하고 있다. 이러한 정보는 결국 어디론가 흘러가 어떻게 사용될 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최근 빅데이터 이론을 보면 이렇게 모집된 정보는 국가나 기업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고 실제 활용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페이스북의 글이나 트위터의 글이 법정의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고 있다. 개인의 생각을 증명하는 주요한 자료가 된다. 결국 아무생각 없이 그때 그때의 소회가 자신을 얽매는 동아줄로 변할 수 있다. 그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느끼지 못할 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잊혀질 권리가 대두되는 이유다. 


이 책의 장점은 단순하게 정보 통신에 대한 안내뿐만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삶의 풍경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 가를 고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삶의 태도와 행태가 달라지고 있다. 시간에 대한 감각에서 부터 교육문제까지 이 책이 전달해 주는 이야기는 간단하게 여길 수 없다. 


정보화 시대에 개인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개인이 최소한도로 알아야 할 지식은 무엇일까? 이 정보화 시대가 인류를 어디로 이끌고 갈 것인가?

이 책은 장미빛 미래라고 칭송되는 정보화 시대의 어두운 일면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 어두운 일면을 인식하지 않고 정보화시대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를 족쇄로 채우는 일이다. 


디지털시대의 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시대의 흐름에 떠밀려 갈 것인가 현명하게 항해해 갈 것인가?

다시 한 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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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음

 

이 영화 불쾌하고 무겁다. 마치 바다에 가라 앉은 것처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할 무게가 스크린을 타고 넘실거린다. 영화가 끝나고 왜 이런 불쾌감이 드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딱 지금의 우리가 갇혀있는 사회가 영화의 선박인 '전진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부터 이야기 하자 '전진호' ... 한때는 잘 나가던 이 배는 선주가 폐선처리해야 할 정도로 낡고 고장이 잦다. 완전히 폐기하는 것이 더 이익일 수 있는 이 배... 모든 사건의 배경이 된다.

강선장.. 선장은 '전진호'를 끔찍하게 사랑한다. 이 배를 다시 살리기 위해서 무엇인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는 저질러 버린다.

 

선원들... 갑판장과 기관장 그리고 선원들은 강선장의 지휘 아래 있다. 강선장도 이들을 잘 챙기는 편이다. 그러나 그이 리더십도 한계가 있는 법. 전진호의 상황은 선장의 리더십이 더 이상 통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유일한 홍일점인 홍매...조선족 밀항자인 그녀는 이 영화에서 피해자이자 구원자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지켜야 할 것으로 때로는 모든 이들의 갈등을 폭발시키는 매개체로...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그녀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피해자이나 구원의 상징이 되어 버린다.

 

스토리로 보면... 생존의 극한에서 벌어지는 우연적인 사고가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모를 인간의 밑바닥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자 보라... 여기 인간이 있다.

 

불편했던건 '전진호'가 이 사회와 너무 비슷하다는 점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결국 마지막 밑바닥을 보여야 함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자멸한다는 점에 있었다... 고 난 느낀다.

시대적 배경도 IMF로 난리가 났던 때이다. 자본의 이동은 유래없이 자유로워졌지만, 노동의 이동으 극도로 제한되는 신자유주의 시발점이 된 그 시절에 '전진호'를 살리기 위해 강선장은 모험을 한다. 이른바 밀항을 시도한 것.

 

불행한 사고로 밀항자들은 모두 죽고 홍매라는 조선족 여인 하나만 살아 남는다. 사건을 외부로 알리지 않으려면 홍매를 제거해야 하지만 홍매를 사랑(?)하는 동식은 홍매를 구하기 위해 강선장에게 대항한다....

 

이 영화를 도식적으로 풀자면 신자유주의로 돌입한 이 사회는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는 사회가 어떻게되던 상관없이 되어 버린다. '전진호'의 쇠락과 몰락이 상징하는 바다. 그러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들은 어떻게든 그 사회를 구해내야 한다. 그것을 대변하는 사람이 강선장이다. 그러나 이미 관철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인 질서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어림도 없다. 위험하더라도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밀항이다. 이 밀항은 자본의 요구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해야 하는 요구와 그 노동력이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소모품처럼 쓰여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부장적인 지도력의 파괴가 준비된다. 특히 선원들 중의 막내는 이시대의 청년과 연결된다. 선원 중 막내인 동식은 '전진호'가 무너지는 것이 안타깝지만 '전진호'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홍매로 상징되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강선장의 리더십을 해치고 결국 '전전호'를 살리는데 방해가 되므로 철처하게 응징된다. 이때 동식은 싸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사회에 복종하지만 결국 버려지는 것에 분노하듯이 그는 강선장을 따르지만 마직막을 함께 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한 거대한 비유... 그 비유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에서 느껴지는 불쾌함.

이 영화가 무겁고 아프지만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아직도 우리는 자욱한 해무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있다. 그 막막함에도 조금이라도 생존하기 위해 벌이는 싸움은 우리를 더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라는 거대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다 잊고 새롭게 경제를 살리자고 떠들어 대고 있다.

 

이런 영화가 '명량'에 밀려 고전하는 것이 아쉽지만... 결국 시간의 이 영화를 가치를 평가할 거라 믿는다.. 조조로 봤더니 하루가 좀 어둡게 느껴지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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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아서는 인류가 깡그리 멸망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그렇고, 세월호 참사 후 대응하는 인간들의 악마적인 모습들이 그렇다. 이런 폭력적인 종이 지구에서 한다는 짓은 자연을 파괴하는 일 뿐이니 인류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존재할까?

 

물론 선한 인간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전체를 포괄하는 새로운 인류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고 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개인의 자유가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이상형은 결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암울한 전망 속에서 본 영화가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이다.

 

인류와 유사한 종족이 인류와 투쟁을 벌인다. 양쪽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만 공존의 위한 평화보다 한 쪽의 절멸을 원한다. 증오를 통한 살육이 난무하는 이 영화의 주된 축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결론은 평화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이루는 조건이 상대방에 대한 인정인데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한 상대를 의심하는 한 상대를 제압하지 않는 한 평화는 그저 위태로운 동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초에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카인의 징표를 받았듯이 혹성탈출에서 유인원은 결국 유인원을 죽이고 만다. 외부에 대한 위협을 강조하여 내부를 통제하기 시작하면 폭력의 주된 희생자는 내부의 반대자가 된다. 이점에서 이 영화는 통상적으로 정치적이다. 정치란 매우 지저분한 통치행위란 관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권력은 결국 상대방을 통제하는 힘이기에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반대자를 제거하는 것은 권력의 본질이다. 권력이 등장하면서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이 벌어진 유인원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와 동일하게 움직인다.

 

결국, 인간과 유인원은 다르면서도 같은 종이라는 사실....

다름과 같음이 상대방을 절멸해야 할 이유로 작동한다는 사실...

인간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세운 유인원의 사회가 자신을 억압했던 인간의 사회와 동질화 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씁쓸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학살하던 제3제국의 나찌와 똑 같이 가좌지구를 무차별 폭격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인류애를 부르짖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나찌와 똑 같이 사람을 대상으로 죽음을 전파하는 전체주의자들일 뿐이다. 도시의 폭격에 웃음짓고 환호하며 떠드는 이스라엘 시민들을 보면서 세상의 악은 멀리 있지 않았다.

 

유대인인 한나 아렌트가 주장햇던 '악의 평범성'을 같은 유대인이 증명한다는 아이러니...

 

혹성탈출을 보면서 들었더 잡다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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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위증 1 - 사건 블랙펜 클럽 29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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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미여사의 책을 보면서 즐겁지만 무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소설은 일단 무겁다는 점. (내용도 그렇고 책 두께도 그렇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답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애정을 가지고 그리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다른 커다란 범죄사건에 비하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도 사건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깨닫게 하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미미여사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이 작품은 미미여사의 대표작인 '이유'의 확장판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졌다.

 

한 소년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학교에서 추락하여 사망한다. 조사와 탐문 결과 이 소년은 학교와 사회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이를 자살로 표현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학교시스템의 구멍으로 수시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익명의 투서로 인해 살인사건으로 번지면서 학교는 혼란으로 빠져든다.

 

학교라는 시스템에서 한 학생의 죽음은 우선 당사자의 가족과 그 교유들, 학교 관계자, 경찰들, 매스컴... 순차적으로 파장을 넓혀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학생이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다. 더구나 살인사건으로 소문이 번지면서 살인용의자로 지명된 학생에 대한 차가운 시선과 맹목적인 증오는 점점 학생들 사이에서 뭔지 모를 불안으로 번져가고.. 추가로 사고지만 사건과 연관되었다고 추정하는 학생의 죽음은 점점 더 사건을 미궁으로 이끌고 간다.

 

이 소설에는 사건을 풀어내는 강력한 인물도 나오지 않고, 사건을 초월한 초인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사건의 여파로 인하여 자신의 사고와 생활이 급격하게 변해버린 중학교 학생들이 스스로 사건을 풀기 위해 재판의 형식을 통한 진실 밝히기에 도전한다.

 

불량학생이고 타인에게 민폐만 끼치는 인간이지만 살인 혐의를 받는 학생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보겠다는 학생들의 의지와 그것을 지지하는 선생과 반대하는 학교와 학부모들의 갈등... 그리고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진상...

 

인간은 나약함과 함께 그 나약함을 이겨내는 강인한 무언가가 있다. 미미여사가 그려내는 그 나약함과 강함은 하나이다. 무엇이 그것을 규정하는 것인가는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성에 있다. 그럼에도 그 특성은 각각의 성격에 좌우되며 그 성격을 얼마나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는가는 작가의 역량이다. 이 점에서도 등장인물이 많은 이 소설은 입체적으로 인간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같아 보인다.

 

다만, 중학생들치고 너무 수준이 높아서...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내가 이미 꼰데가 되어 버려서 그런걸까?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에 서늘한 한기를 던져준 반가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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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배신 - 화이트칼라의 꿈은 어떻게 무너지고 있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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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다.... 미국의 교육받고 멀쩡하게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이 어느 날인가 벼랑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물론 경기 좋을 때야 잠시 직장을 쉬고 다른 직장을 구하면 된다. 문제는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실업은 곧 전반적인 실패로 귀결되고 만다.

 

미국얘기다... 그런데 마치 이 땅의 얘기 같다.

마흔 줄 넘어 다니던 회사에서 짤려나간 친구가 있다. 재경쪽 일을 보는 친구였는데 회사의 인력 감축으로 권고 사직을 받았다. 노동법에 따라 이 친구는 1개월치 월급을 받고 퇴사 했는데... 부인과 자라는 애들 둘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서 직장을 구해야 한다. 실업급여도 대략 6개월 정도 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고 실업급여를 받는 다는 것은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생활을 바닥에서 견디는 것일 뿐이다.

 

다음이 문제다. 실직 후 다시 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자신감? 긍정적인 사고?

재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절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직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새로운 직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터넷에 수없이 자소서를 올리고 적당한 직장에 이력서를 보내고 아무런 답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에도 이직을 도와주는 코칭 산업이 있는지 몰라도, 이제 취업을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취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코치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당당하고 항상 취업해 있는 상황을 그려보면서 실업자임에도 취업자처럼 행동하라고 코칭한다. 개인의 열망과 성격이 바로 취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인 것처럼.. 그렇게 황당한 코칭을 하면서 돈을 받는다.

 

바브라도 실직자가 되어 취업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만난 것은 몰락한 중산층의 비애였다. 실직이 오래 될 수록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경험했던 것이다. 물론 바브라는 이 실험을 관두고 다시 작가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계속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그 벼랑의 끝에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이 희망의 배신인 이유다.

 

다시 한국에 있는 친구 얘기다.

이 친구 취업을 위해 뛰다뛰다 실업급여 기간도 지나버리고... 지금 생계를 위해 일당 5만원짜리 잡일을 하고 있다. 토요일도 근무해야 한다고 하니 주 40시간 근무제는 아닌 모양이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다가 육체 노동을 하니 저녁 시간은 피곤해서 어디 움직일 기력이 없다고 한다. 여기서 사무직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악순환으로 접어 든다. 구직활동이 길어지면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한고 일은 어쩔 수 없이 남들이 기피하면서 임금이 낮은 직종 밖에 구할 수 없다. 아니 구하기만 해도 다행인 지경이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면 구직은 더욱 더 힘들어 진다. 그렇게 점점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신자유주의의 모습은 비슷하다. 리엔지니어링, 다운사이징... 결국 기업은 사람을 줄이고 이윤을 늘리고 자른 사람들은 계약직이나 아웃소싱으로 처리하고 ... 기술의 발전은 고용을 늘리기 보다 줄이고 있는 현 상황에서 복지는 취약하고.... 이른바 중산층이 분해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부는 상층으로 대다수는 하층으로 ...

 

어디에 희망을 둘 것인가?

아니 희망을 갖느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물론 대다수의 실직자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그러나 이 사회는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이다. 더구나 미국의 코칭 문화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개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리는 이데오로기 작용까지 하고 있다. 여기는 그렇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 흘러 넘치는 자기계발 서적들은 모든 책임은 결국 개인에게 있다고 설파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결국 이렇게 말한다.

고립된 절망에서 집단행동으로 나아가려면 태도와 마음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변화는 커리어코치들이 권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실업자와 불안한 취업자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호감'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 공통의 문제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이때 다앙한 사람들, 특히 만성적인 억압에 시달리는 블루 칼라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욱 이상적이다. .... 구직 활동을 하는 동안 한 번도 언급되는 것을 들어본 적 없는 이 자질은  다름 아닌 '용기'다 엄청난 역경 속에서도 같이 손잡고 변화를 위해 싸울 용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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