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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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이나 스릴러 소설을 읽어 왔지만, 홍콩을 무대로 중국인이 주인공인 소설은 아마도 처음이지 않나 싶다. 주로 일본작품이나 미국작품 최근엔 북유럽 작품들이 주였는데... 그런데 천호께이의 이 작품은 정말 근사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단편들이 연작으로 이어져 오면서 천재적 수사관인 '관전둬'의 일생이 주요사건과 함께 서술된다. 연작의 순서는 현재에서 과거로...단편들 하나하나가 끝까지 가지 않고는 범죄의 내용과 범인이 드러나지 않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맛이 생생하다. 모든 사건의 내용이 서술되거나 단서가 제공되어 있음에도 하나로 꿰어내어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이 마치 홍콩판 셜록 홈즈를 보는 느낌이다.

 

연작으로 시간이 순서를 따라 진행하는 구성이다 보니 홍콩이 처한 역사적 현실을 살펴 볼 수 있었고 그 사회의 모순에 따른 경찰의 임무와 태도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철학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냥 잘 짜여진 추리물 모음집을 넘어선다. 경찰의 집무집행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은 관료제적인 경찰제도와 민중의 보호를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경찰의 임무와 대치되면 끊임없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올바른 경찰의 모습이란 결국 민중을 보호해야 가치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증거하고 있다.

 

반사회적인 영웅, 흔히 안티 히어로에 대한 열망은 사회의 제도적 구성이 밀집화되고 경직화 되면서 그에 수반한 답답함을 해소해 주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경찰이라고 하면 답답하고 고지식하면 굼뜨고 권위적이면서 무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건 개인의 능력의 문제일 수 있지만, 경찰 조직이 가지는 성격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크다. 경찰 소설에서도 능력있는 경찰은 항상 제도와 부딪치거나 조직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제도가 가진 한계이기 때문이다. 다만 제도를 벗어나서 신념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한 법이고 그 의지의 대상은 경찰이 가진 정의를 집행하고 민중을 보호하려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 경찰에 대한 신뢰는 엉망이다. 세월호에 대한 수사도 집회 강제해산을 위한 폭력적인 물대포 사용도 그렇고... 어디에도 민중을 보호하고 민주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윗선의 눈치를 보며 보신하려는 의지만 충만하다. 경직된 제도속에서 책임은 없고 보신만 남은 조직이 사명감을 갖기는 더더욱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소설에서나마 이런 멋진 경찰이 있음을 대리 만족해야 하나? 읽는 내내 뭔가 씁쓸한 느낌이지만 읽는 내내 추리소설이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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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6-01-19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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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세계를 그린 SF작품에 고대문명의 짙은 향수가 배어 있다고 할까? 레드 라이징이 묘사하는 세계는 신화와 과학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여기서 레드의 의미는 다층적이다. 다른 곳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빨갱이'란 말에서 드러나는 레드의 음험함과 '레드 데빌'에서 나타나는 민족적 감수성의 열정이 동시에 나타나는 땅에서 살다보면 '레드'는 건들기 어려운 금단의 열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레드'는 게급이다. 그것도 골드를 유지하기 위한 여러계급은 색깔로 표시되는데 그 중 최하층 계급이다. (사실 소설에서 묘사되는 색으로서의 계급은 오히려 계층에 가깝거나 사회분업에 따른 직분에 가까워 보인다. 다만 레드는 사회학적 의미에서 피억압 계급에 가장 근접해 보이기는 하다)

 

이 SF소설은 이미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피어스 브라운의 이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엔더의 게임', '헝거게임', '파리 대왕'이 연상된다는 호평까지 받고 있으니 신작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많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리고 황금가지 출판사로 부터 가제본으로 책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망설이지 않고 신청한 이유도 역시 작품에 대한 기대감 이었다.

 

작품은 패턴은 어쩌면 평범할지 모른다. 고난받는 피억압계급의 주인공과 그에게 닥친 시련. 복수를 위해 증오하는 계급의 일원으로 변신하여 그들 속에서 성장하는 스토리. 성장과정에서 보이는 계략과 암투, 증오와 사랑. 그리고 좌절 속에서의 희망과 성공.

잘 짜여진 모든 소설들이 그러하듯 속도감 있는 전개와 우주적 스케일의 배경은 자체로서 흥미롭다. 더구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특성과 성격을 통하여 인물과 단체에 특성을 잡았다는 점에서 미래의 SF를 고대전쟁의 느낌이 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독특했다. 서구에서의 대중적 흥행의 성공은 이러한 익숙한 그들의 문화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신화와 함께 진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도 과학에 의한 의도적인 진화는 미래에 대한 작가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계급의 차이는 단순하게 권력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 권력의 차이에는 생물학적 기반이 전제되어 있다. 즉 최고 권력을 가진 골드는 이미 기존 인간이 상상하는 한계를 넘어서 있는 부분이었다.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자신이 증오하는 계급안으로 섞여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생물학적 변이에 따른 것이다. 즉 레드의 육체로는 골드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진화를 하면서 두가지에 적응해야 했다. 생물학적인 진화와 사회적 진화. 생물학적인 진화는 지난하고 느린 과정이었지만, 사회적 진화는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를 뛰어 넘어서 이루어졌다. 즉 인간이 만든 상상의 허구, 국가, 법률, 이데롤로기, 사회적 관계는 실체가 없는 인간 상상력의 허구임에도 인간이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진화의 무기였다.

이러한 상상의 진화를 뒤엎는 생물학적 과학적 진화의 세계, 가장 전투적이며 강인한 육체를 지닌 지배계급의 등장은 19세기 사회진화론의 미래 버젼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는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며, 약자는 강자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이 인간으로 누려야할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다는 것. 골드의 지배를 무너뜨리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인간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작품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레드라이징은 이제 첫발을 디뎠다. 작품은 복수를 위한 예비단계를 마쳤을 뿐이다. 본격적인 복수를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것이다. 이 작품은 연속되는 작품의 첫단추일 뿐이다. 따라서 복수의 장정을 가야하는 주인공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부 독자들이 '파리대왕'이나 '엔더의 게임'의 느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성장에 따른 격렬한 갈등구조 때문일터다.

계속되는 이야기에서는 어떤 작품이 연상이 될까? 그 다음은 바로 '왕좌의 게임'이 아닐까 한다. 개인적인 인간과 집단 속에서의 인간이 부딪치며 성장한 주인공의 선택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그들을 절멸할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전투뒤에 타협할 것인가. 지금까지의 역사는 부분타협이었다면 작가가 의도하는 작품의 결말은 무엇일까? 빨강이라는 음울하고도 열광적인 색에 대한 감정때문에 특이하게 몰입하게 된 작품을 보면서 궁금해졌다. 내가 작가라면 어떤 결말을 예비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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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 해방과 분단, 친일파, 현대사의 환희와 분노의 교차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서중석.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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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의 한국사 왜곡 특히 현대사 왜곡과 관련하여 서중석교수의 일침이 돋보이는 책이다. 더불어 현재의 분단체제의 기원과 의미를 두루 알고 생각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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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8-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고등학생들이랑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70-80년대 민주화투쟁도 선조님들의 투쟁이라고 하던데요 ^^;; 일제시대와 분단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떠나서 별 느낌이 없이 얘기해서 그것도 좀 신기했구요. 알면 바뀔까요?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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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고민을 언제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만 살아온 것 같다. 아니 소소한 고민에 묻혀 인생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은 고민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사실과 고민을 함으로써 삶을 통과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고민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류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아니다. 강상중 교수가 분석한대로 고민의 힘은 인간의 역사가 근대로 진입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이다. 중세를 넘어선 근대는 개인과 공동체가 분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모든 것이 신의 질서로 설명되던 조화롭고 통합된 시대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과 더불어 개인이 독립적으로 분화하는 시대이기에 이전과 다른 시대가 도래되었다. 더불어 개인의 불안과 좌절이 스며들어 온 시대이기도 하다.

사상적으로는 인간이 중심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대세가 된 시대가 근대이다. 그리고 그러한 근대는 매우 격변하는 시기였으며 그 시기로부터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민을 가져다 주었다. 강상중 교수가 보기에 현재는 초기 자본주의 발흥기와는 분명 틀리지만 그 근저에 존재하는 고민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기에 100년 전 인물인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통해 이 시대의 고민을 진단해 나간다.

재일 한국인으로 최초로 동경대 정교수가 되었던 강상중 교수는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고민을 안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고민하는 힘에 대하여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차별을 받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고민을 철저하게 수행하였기에 이 정도의 지위에 오르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불어 그의 청춘을 때로는 따스하게 안아주고 때로는 치열하게 채찍질 했을 두 사람의 그의 고민에 많은 단서와 해결점을 주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위치도 절묘하다. 베버는 사회학자로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분석적인고 과학적인 시각을 주고 나쓰메 소세키는 작가로 강상중 교수에게 통합적이고 구체적인 생활에 대한 시각을 주었던 듯 하다. 이 책에서는 베버의 분석과 소세키의 종합적인 면이 상호교호하며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다. 그 형식에서 사회학적인 논증과 현실의 배경에 대한 상황적인(소설적인) 실례가 덧붙여짐으로 인해 매우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의 목차를 보면 중요한 단어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 ‘자아’, ‘’, ‘지식’, ‘청춘’, ‘믿음’, ‘’, ‘사랑’, ‘죽음’, ‘노년’.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생을 통해 한번은 부딪쳐야 할 거대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주제들의 근저에는 자유불안의 문제가 놓여있다. 자유롭기에 불안한 것이 근대의 특징이다. 자유롭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면서 가져온 것이 바로 실존적 불안이었다. 각자의 자유가 무한하게 보장되는 그런 사회는 무엇인가 하나로 통합하기 쉽지 않고 서로 교통하기 쉽지 않은 사회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은 곧 자아의 확립의 문제이다. 자아는 자기 중심주의와 다르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타인의 인정여부이다. 타인과 교호하지 않고 자신의 성채에 굳게 갇혀 지내는 사람은 건강한 자아를 가질 수 없다. 이미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에서부터 근대의 고립적 인간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시작되었다. 각자의 사고와 생각이 가장 중요한 시대에서 자신의 자아를 구축하는데 서로에 대한 교집합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는 여전히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강상중 교수의 처방은 자아는 타자와의 상호인정에 의한 산물이라 정의하면서 해결한다. 중요한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를 타자에 대해 던질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타자와 연결하고 싶을 때, 즉 자신의 자아를 확립하고 싶을 때 해야 할 일은 진지함을 견지하는 일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지하게 타자와 마주하는 것. 그것이 자기중심적인 개인이 아닌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는 개인으로 서기 위한 돌파구가 된다는 점이다. 

돈이 세계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혹 돈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해도 사람들 앞에서 돈이 전부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점점 더 돈이 전부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추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무궁한 가치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다.

 

돈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노동의 보상과 같은 의미를 떠나 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원래는 돈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닌사람들도 점점 돈을 위해 일하게 되고 점점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돈을 위해 돈이 도는상태로 변하며, 결국에는 돈이 돌면 돌수록 돈이 늘어나게된다.

100년전의 자본주의 초기시절 산업자본주의에서 출발한 자본의 운동은 이제 국제적 금융자본주의가 중심이 된 시대로 변화되었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변화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시대의 추세는 이미 그 추가 기울어진 상태다. 시대의 흐름에서 모든 가치는 변하는데 만이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작해야 돈이지만 그래도 돈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말이 쉽지만 그것을 생활에서 구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역시 고민해야 돌파할 수 있는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정보화 시대에 많은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알 수 있다는 현실의 조건과 상관없이 과연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우선적으로 알고 있다사고한다는 다르다는 것, 정보와 지성은 같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인간의 지성은 학식과 교양이라는 요소에 더해 협조성과 도덕관이란 요건을 갖춘 종합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근대적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한쪽 면만을 발달시키고 주지화 시켰다고 막스 베버는 주장했다. 이성중심, 인간중심의 지식의 발달은 도구적 합리성으로 인류의 역사에서 처참한 전쟁의 상혼을 남기기도 했다. 따라서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닌 조화롭고 종합적인 지성의 획득을 과제로 한다. 과학이 그 행위의 긍극적이고 본래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이 우위에 있고 서구가 지식으로 세계를 제패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아는 것이 힘인 세상이다. 그럼에도 아는 것을 넘어서 사고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사고를 떠나서 인류가 품고 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다 보기 정말 청춘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일본을 쫓아 간다고 하지만 이런 것까지 비슷할 줄은 몰랐다. 이미 헤이세이 불황에 접어든 일본의 청년들이 갖는 경제적 어려움이 현재 우리사회의 청년의 고난과 비슷하다는 점도 그렇고 어느덧 청춘은 발랄한 출발점이라기 보다 빛 바랜 회색의 우울함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하다아마 젊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강상중 교수에게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던 되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른 것이다.

인간이 성장하는 것은 원숙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강상중 교수는 극단적으로 원숙함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표층적으로 원숙한 것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 그것이다. 청춘적으로 원숙한 것이란 고민을 깊이 있게 하는 것이다. 결국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고민의 힘은 사람을 젊게 만든다. 그래서 강상중 교수는 수많은 여성 독자들로부터 미중년이란 칭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믿음의 문제는 내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보인다. ‘믿는다는 행위는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사물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근대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현대는 믿음과 종교가 개인의 자유에 맡겨져 있다. 예전에는 종교도 공동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따르면 되었다. 그렇지만 과학과 합리주의의 발전은 이전 종교를 대부분 미신으로 몰아 경계 밖으로 몰아내어 버리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학과 합리주의적 이성이 이전의 종교가 했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가 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무엇인가 의존할 것을 찾게 된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의 대상조차도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결정해야 된다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저러한 점을 떠나 강상중 교수는 궁극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을 믿는다가 아니라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 내린다. 따라서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밀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한계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어쩌랴 그것이 인간이 처해진 존재 조건이고 고민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전제조건을 타파하기 위해 인간이 최소한으로 견지해야 할 태도인 것을..

정말 무엇을 위해 일하는 것일까? 돈이 많다면 일하지 않을까? 일상에 지치고 업무에 지친 사람들이 일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양가적일 듯 하다. 당장 때려치워야 할 고난 혹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나 수단.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사리사욕에서 벗어나 올바른 규칙을 지키고 일체의 낭비도 없이 노동하는 의미조차 잊고 사회속에서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서술한 바 있다. 그러나 분업화에 따른 개별화는 일하는 사람을 단편적으로 만드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자리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왜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 사람들은 무력해질까? 강상중 교수는 일을 통해서 비로서 거기에 있어도 좋다는 인정을 받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사람이 왜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타자로부터의 배려그리고 타자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일을 하며,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자체도 본래적이지 않은 감정이다. 아마 근대에 들어서서 일부일처제에 근거한 낭만적 로맨스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근대적 의미의 사랑이란 개념이 생겼다고 한다.

막스 베버는 본래의 의미가 박탈되고 수수께끼가 된 근대합리주의 속에서 종교를 예외로 한다면 성애와 예술이 손때가 타지 않은 유일한 최후의 처녀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직 사랑은 철저하게 분석되지 않고 신화적 영역에서 자신의 위치를 고고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뜻일까?

근대적 자유는 사랑마저도 황폐화 시키는 경향이 있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선택하는 사랑은 언제나 대체 가능한 사랑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사랑은 결국 에고이즘이란 주장도 타당하지만 사랑의 지속성과 상호작용을 생각하면 너무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사랑은 어떤 개인과 어떤 개인 사이에 전개되는 끊임없는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에 한쪽이 행동을 취하고 상대가 거기에 응하려고 할 때 그 순간마다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며, 그런 의지가 있는 한 사랑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상중 교수는 말한다. 사랑은 계속 변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 순간 둘 사이에 물음이 있고 서로 그 물음에 대해 반응 할 의지가 있는가 이다.

이렇게 항상 결단하는 사랑이 유지되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가 있다. 좀 더 고민해 볼 문제이다. 어쩌면 사랑은 필연적으로 둘이 만나서 둘의 자유를 서로에게 부과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느 하나에게 헌신한다는 의미에서의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살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회.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 무어라 딱히 비난하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신념 같은 형이상학적 죽음의 선택이던, 생활고와 같이 형이하학적인 죽음이던 죽음에 대해 뭐라 만류할 논리는 딱히 없는 듯하다. 이는 인간의 자유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삶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절대적 고립에서 벗어나 타인과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 인생에 대한 의미를 궁구하고 그 의미를 타인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럼에도 자발적 선택으로 택하는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이 어려운 문제에서 결국 마음이 가는 대로 의미를 찾느냐의 문제가 제기 된다. 삶이 의미 없다면 죽음도 의미 없다. 죽음이 의미가 있으려면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강상중 교수의 말은 무엇보다 삶에 대한 애착이 보여진다.

고령화 시대라는 말은 이제 익숙한 말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있었던 말이고 우리사회도 최근에 가장 많이 분석되는 말이기도 하다. 이제 환갑부터 시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제2의 인생설계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노년 하면 떠오르는 것은 육체적 쇠락과 사고력의 저하 그리고 분별력이 있어 원숙한 지혜를 갖는 다는 것이다. 현대의 노인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쇠락은 더뎌지고 있다. 하지만 분별력 있는 원숙한 지혜를 기대하긴 힘들다.

노령화 인구가 많다는 것은 사회에 새로운 주역이 등장했다는 의미다. 이런 세력이 앞으로의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모르지만 이 사회가 가지는 가치를 교란시킬 정도의 세력으로 될 것은 분명하다.

두려움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면서 이 사회에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노년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고민하는 힘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잠정적인 느낌은 살아가는 힘이 바로 고민하는 힘인 것 같다. 강상중 교수는 고민하는 인간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근대 이후 무섭게 변하는 현대 사회는 이미 인간이 그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다. 여기에 근원적인 불안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무엇인가 빠르게 변화고 있는데 거기에 의존할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기존의 가치들은 빠르게 소멸하고 새로운 가치들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인간은 실존적인 불안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불투명함이 사람들을 불안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의 힘이 필요해진다. 이러한 불안을 이겨내고 자아를 유지하며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타인과 소통하고 자유가 가지는 가치를 누리면서도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을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고민하는 힘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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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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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의 산문집이다. 

소설가는 소설로 현실을 드러내지만 이러한 글도 현실을 드러내는 중요한 지점이다. 오히려 소설의 허구적 배경보다 현실의 배경이 더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점에 있어서는 또 다른 글읽는 즐거움이 있다. 게다가 김영하라니...


이 산문집은 책의 말미에 쓰여있듯이 '읽다', '말하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에 앞서 나온 글들이다. 이러한 글을 쓰게 된 사정은 사색하고 글을 씀으로 인해 보다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읽다'에서는 책과 독서에 대한 산문들이 '말하다'에서는 공개장소에서 행한 강연을 묶을 예정이라 하니 다음 글들도 많이 기대된다. 특히 '읽다'에 대한 기대가 크다. 


'보다'에서는 시각적 측면이 강해서인지 유독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이 산문집을 통해서 김영하가 영화를 읽는 독법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영상에 대한 글은 개인적 체험에서 영화에 대한 분석까지 다양하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적 감수성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재미 있었다. 개인의 취향이 대중의 취향과 다를 수 있지만, 글로서는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가 영상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감이 떨어진다는 고백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이 산문 속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통찰은 대중적이다. 아니 대중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좋은 글은 다 그렇지만,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실에 대해 새롭고 꼼꼼하게 사색하고 통찰력있게 마무리하는 글들은 세상살이에 정리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럼에도 어렵다기 보다는 직관적이다. 그래서 작가는 작가인 법이다. 


소설가가 왜 산문집을 연달아 출간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현실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해서이다. 이미지가 흘러넘치는 세계에서 현실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냥 바라 보기만 해서는 다다를 수 없다. 이런 문제 의식에서 김영하는 말한다.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에서 좀 더 나아가야 한다.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 오는 장롱문짝 처럼 빠르게 흘러가 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현실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수 많은 변이와 중층적인 의미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 접근한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변이와 중층에 대한 고려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색하고 정리하는 데는 글쓰기가 최고라는 말이다. 작가니 할 수 있는 이야기이자 정확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당장 세월호만 생각해도 단순하게 배가 침몰하고 사람이 죽어간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안에 겹겹이 싸여있는 내용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가 위치한 좌표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피곤하고 짜증날지 모르지만 현실에 대해 사색하는 만큼 현실은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산문집에는 통찰력있는 아름다운 글들이 많다. 문장만으로 이미 좋은 책이다. 거기에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적절한 사례까지 편하게 더해 준다. 소설이 아닌 산문으로 다가와도 김영하가 사랑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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