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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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화 없는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책상을 왜 항상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책상은 양탄자로, 양탄자는 옷장으로, 옷장은 신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방에 틀어박혀 모든 것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물과 언어의 짝짓기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는 공책에 자신이 바꾼 새로운 단어들을 적어놓고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차츰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쓰던 원래의 언어를 대부분 잊어버리게 되어 자기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남자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만든 셈이다. 노인은 외계인이 됐다.

 

중학생 시절 이 슬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공책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모든 낱말을 바꾼 것이 그 남자 자신이며, 그이가 많은 것을 기억하려 노력할 것이지만, 기억이란 기록보다 불완전하고 미심쩍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속에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남자 이외에도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세상을 등지고 수십 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의 한없는 자유로움과 한없는 무의미함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서 평소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던 일탈을 실행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이들 틈에 있어도 한없이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때 우리의 대화를 끈끈하고 이끌어주던 종교적 믿음과 사상적 명분 등의 거대한 신념체계들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나를 광고하고 나의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능력 있음과 나의 무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자본의 세계에 설득해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도태되는 것, 내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잘 포장된 진실 속에서 이제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밤의 불안을 각종 자기개발서로 덮어가면서 이렇게 서서히 ‘나’라는 인간은 소모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모든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거나 가벼운 잡담이다. 겉도는 대화, 체면치레인 몇 마디 말, 외로움을 고립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끼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간결한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함축적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언어로 택했을 뿐 언어의 굴레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변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의 어려움이다. 개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동참, 뚜렷한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을 꿈꾼 사람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기존의 이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물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이 명명식은 남자에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옹알이를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말문을 트고 하나하나 단어를 익혀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을 짖지 않는다. 이처럼 책상이 반드시 '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그는 그 식대로 바꿔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소통조차도 불가능해지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침묵했고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둘째의 말 배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옹알이하던 때의 갇히지 않았던 그 말들이 이제 딱딱한 형식과 약속 속에 갇히고 있다. 책상은 역시 책상일까.

 

낱말을 자기식대로 바꾸어버려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린 한 남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소통불가능의 상태였다.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자적 형태의 이웃들 틈으로 난 균열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단절의 감정을 밀봉하려고 서로를 향해 배시시 웃는 가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선택한 방법이 어리석기 그지없더라도 달라지기를 바랐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 이 회색빛 주인공에게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나만의 낱말을 만듦으로써 거짓 소통에서 멀어져보려 한 이 남자에게 어리석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낱말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른 남자는 낱말이 가진 강제성을 알고 있었을까? 낱말은 나의 사유를 돕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나의 사유의 확장을 억압한다. 유교가 사회의 지배논리였던 시대에는 권력자에 의해 유교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형성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일부종사니 상명하복이니 입신양명 등의 낱말이 그렇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인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연구해 상품이 많이 팔릴만한 이름을 짓는다.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해 한 마디 슬로건을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의 연구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포장되어 출시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방금 했던 생각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곱씹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성찰지능을 가졌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느낌에 대해 느끼기.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대화는 번복과 부정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무릇 정리와 숙고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짝 포장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세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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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서평단 모집 (2014.04.22~30)


─ "무엇을 사든 고장이 보장됩니다!"

 


올이 풀리지 않는 나일론 스타킹, 2500시간 사용 가능한 전구는 왜 사라졌을까?

새 컴퓨터 모델은 왜 호환이 잘되지 않을까? 아이팟 배터리 수명은 왜 18개월일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 눈부신 기술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물건들은 점점 더 빨리 고장 나는가?
‘계획적 진부화’ 개념을 통해 보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진실

경영학에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란 용어가 있다. 기업이 내구 소비재의 대체 수요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는 행동을 말한다. 진부화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진부화란 기술적 진보로 인해 기존 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옛날 청동기가 뗀석기를 대신하고, 증기 기관차가 마차를 대체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심리적 진부화란 광고나 유행에 의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경우 기존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는 겉모습, 즉 외양과 디자인의 차이, 심지어는 포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애초 설계 시점부터 제품의 수명이 조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이 삽입되어 있다. 1940년 듀폰사에서 출시된 스타킹은 올이 풀리지 않고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만큼 튼튼했지만, 자외선 차단 첨가물의 양을 조절한 이후부터 여성들은 규칙적으로 새 스타킹을 구입하게 되었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 수명은 1500시간이었고,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무려 2500시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제너럴 일렉트릭 등 기업 간 담합으로 1000시간 이하로 정해졌다. 수리가 불가능한 아이팟의 배터리가 제조 단계에서부터 이미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 가치의 쇠퇴를 대량 생산하는 ‘발전된’ 사회 일회용 제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일회용 콘돔과 생리대, 그릇, 포장 등 각종 생활 용품뿐만 아니라 수리할 수 없는 휴대용 라디오, 3년 주기로 바꾸는 자동차, 유행에 따라 리모델링하는 건물, 유통 기한이 도입된 식료품, 정년퇴직 등 이제 제품 수명 단축의 논리가 산업 생산 전체를 지배한다. 경영학자 시어도어 레빗은 다윈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product life cycle)’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계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겐세일, 정기 세일, 가격 파괴, 가격 인하, 할인, 특가, 프로모션 행사 등과 동의어가 된 소비주의는 염가 처분, 가치 하락과 상실의 정신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덕, 원칙, 이상의 상실”을 부추긴다. 

모든 
것은 판매 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가치 하락을 겪는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 벼랑 끝에 선 생태계,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향하여

평균 18개월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2002년 미국에서는 작동 가능한 휴대 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전자 제품 폐기물의 처리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셈이다.

 한편 제한된 자연 자원의 고갈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의 문제도 발생한다. 아프리카 콩고는 휴대 전화 생산에 필요한 콜탄 때문에 전쟁 중이다. 중국 서부에서 진행 중인 희토류 개발은 투르크계 주민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며, 나이지리아 니제르 삼각주의 석유 개발은 오고니 부족의 학살을 불러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신상’으로 교체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는 이런 현상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휴대폰을 오래 사용하자는 구호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건은 반드시 고장 나고 우리는 새 물건을 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검소한 생활을 제안하는 차원을 넘어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책에서 라투슈는 검약과 자기 통제, 내구재의 공동 사용, 에너지 자립을 갖춘 전환 마을 운동, 비재생자원 관리를 위한 세계 공동 기구 설립 등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 방법론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즉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민음사) 차례

 

머리말

서론: 성장 중독

 

1 말과 사물_계획적 진부화의 정의와 성격

1 계획적 진부화란 무엇인가?

2 제품이 죽어야 소비 사회가 산다

 

2 계획적 진부화의 기원과 영역

1 계획적 진부화의 등장

1 인류학적 상수

2 전통이라는 장애물

3 위조의 시대

4 사고방식의 전환

 

2 계획적 진부화의 영역

1 ‘일회용 제품’의 등장

2 디트로이트 모델

3 진보적 진부화

4 유통 기한의 도래

5 음식의 진부화

 

3 계획적 진부화는 도덕적인가?

1 계획적 진부화의 사회적 역할

2 진부화와 윤리

3 인간의 진부화

 

4 계획적 진부화의 한계

1 소비자와 시민의 반응

2 진부화와 생태 위기

결론: 탈성장 혁명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낭비사회를 넘어서』 지은이 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

1940년 프랑스의 항구 도시 반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파리 11대학 경제학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로, 발전 지상주의와 경제를 통한 세계 지배라는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서로『메가머신(La Megamachine)』(1995), 『탈성장에 걸다(Le Pari de la decroissance)』(2006), 『평화로운 탈성장 소론(Petit traite de la decroissance sereine)』(2007), 『소비 사회를 넘어서(Sortir de la societe de consommation)』(2010), 『검소한 풍요 사회를 향하여(Vers une societe d’abondance frugale)』(2011) 등 다수가 있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옮긴이 정기헌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란츠의 레퀴엠』, 『퀴르 강의 푸가』, 『프랑스는 몰락하는가』, 『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 『리듬분석』 등 다수의 책을 옮겼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 『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와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4월 22일(수)~2014년 04월 30일(일) (8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 발표일은 2014년 05월 01일 (목) 오후에 공개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5.07(수)~05.18(일) 11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 발표 페이지에

개인블로그/알라딘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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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2
헨리 나우웬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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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누가복음 6:36)

 

 

 

작은 아들은 결국 떠났다. 녀석의 말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장차 내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주십시오.” 결국 녀석의 몫을 주었다. 떠나버렸다. 먼 타국으로. 멀리서 온 객들에게 간간이 아들의 소식을 듣는다. 흥청망청 돈을 쓰고 창기와 몸을 섞는 방탕한 삶을 살고 있단다. 타들어가는 이 마음, 큰 아들은 결코 알지 못하리라. 큰 아들은 묵묵히 집안을 세우고 있다. 들에 나가 종일 일하고 돌아온다. 믿음직스런 녀석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내 마음을 모른다. 집 떠난 작은 놈을 향한 나의 간절한 마음을. 차라리 일을 팽개치고 미친 듯이 동생을 찾아 나서기를 내심 바랬다. 그 놈의 귀향을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매일 밖으로 나갔다. 하염없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늙어가고 있다.

 

 

 

 

렘브란트   「탕자의 귀향」  1668년

 

기적과도 같이 아들의 귀향 소식을 들었다. 아비에게 아들의 귀향, 그것은 기적이었다. 먼발치에서 거지꼬락서니를 하고 둘째가 터덜터덜 걸어온다. 체면 무시하고 달려갔다. 어린 아들을 두 팔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놈은 말했다. “아버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의 하나로 대해 주세요.” 아비 마음 모르기는 첫째나, 둘째나 매 한가지다.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좋은 옷을 가져다가 내 아들에게 입히라.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잔치를 열자. 내 아들이 돌아왔다. 죽은 줄 알았던 내 아들이 돌아왔단 말이다.”

 

하지만 이를 본 큰아들은 “아버지를 여러 해 섬기고 따랐지만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다”며 반발한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 아니냐?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으니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타이른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다. 신자들은 말할 것 없고 비신자들도 이 이야기는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한량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가슴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 내용을 기초로 렘브란트는「탕자의 귀향」 이란 그림을 그렸다.

 

‘나는 탕자인가, 아님 그의 형?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면 대부분의 이들은 작은아들인 탕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런데 네덜란드 출신의 가톨릭 사제였던 헨리 나우웬은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점점 변해갔다. “내가 바로 작은아들이었고, 큰아들이었으며, 이제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한 폭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몇 날 며칠을 꼬박 그 그림에 푹 빠져있었다고 고백한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그는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만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다.

 

그는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 등을 세밀하게 하나씩 탐색해 이 책에 옮겼다.

 

그는 먼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을, 다음엔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그 다음엔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이는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그 그림을 통해 결론적으로 깨닫게 된 세계는 내가 ‘탕자’라는 것, 그러면서 또 ‘큰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결국은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길을 잃은 탕자라면, 그 모든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인 아버지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예민한 감각을 보여준다. 그가 이 그림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깊이 있게 감상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에 빨려 들어갈 듯한 깊은 감상을 통해 열린 더욱 깊은 묵상은 놀라움을 줌과 동시에 감동과 큰 은혜를 선사한다.

 

저자는 자신의 모습을 탕자에서 큰아들의 모습으로 빗대는 순서를 거쳐, 끝내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우린 매일, 매시간 떠나고 돌아오길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힘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다 쓰러진 자녀를 비웃지 않으신다. ‘귀향’의 조건으로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채 잘못을 고백하는 걸 요구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는 한없는 관용과 용서로 자녀를 안타깝게 떠나보냈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반가이 집안으로 맞아들이신다.

 

꿇은 아들을 감싸 안은 늙은 아버지의 그 사랑. 고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다. 조건을 뛰어넘는 그 사랑, 자격과 상관없이 받을 수 있는 그 사랑. 하늘 아버지가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 사랑이리라. 귀향길은 화해의 길이다. 사랑의 길이다.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 길. 그 길은 배움의 길이다. ‘아버지처럼 용서하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삶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선하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여정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참을성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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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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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과 만나는 일도 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에 날려 온 홀씨가 바늘 끝에 내려앉는 말도 되지 않는, 그 기가 막힌 확률로 수많은 책 가운데 하나가 독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이 심한 걸까.

 

저자의 이름을 다른 책에서 우연히 자주 보게 된다거나 번역을 맡은 사람을 다른 매체에서 보게 되면 이내 그 책을 구하게 된다. 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도 그렇게 만난 책이다.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미남미녀는 온데간데없고,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보편적이지 못한 외모나 성격을 가진 채로 묘사되고 있다. 아밀리아는 사팔뜨기 회색 눈에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이며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다. 라이먼은 작은 키에다가 폐병까지 지닌 곱추등이다. 마빈 메이시는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포악한 성격 때문에 멋진 외모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이다.

 

어느 날 사료 창고로 쓰이던 카페에 지저분한 몰골의 라이먼이 찾아온다. 그 후 카페는 새 단장을 하여 고단하고 지친 마을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으로 위안을 주고 마을에 유일한 사교 장소가 된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던 아밀리아는 라이먼에게 새 옷을 입히고 정성껏 보살펴주는데, 이 같은 아밀리아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 모두가 놀라는 눈치다. 아밀리아는 보잘것없는 라이먼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돈 밖에 모르던 아밀리아는 이전에 없던 활력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 그렇게 사랑의 힘은 위대한 것이어서 카페는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찾는 안락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평화는 지속되었지만 어느 날 나타난 마빈 메이시로 인해 카페는 슬픈 운명을 맞게 된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의 전 남편이었다. 마빈 메이시는 아밀리아를 사랑했지만 아밀리아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고작 열흘간의 결혼 생활은 파탄을 맞았다. 마빈 메이시는 잘생긴 외모를 가졌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을 정도로 못된 짓만 하고 다녔으므로 그런 그가 다시 나타났으니 마을은 긴장할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도 외로운 사람이 바로 아밀리아다. 라이먼 때문에 그토록 싫어하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 예전처럼 홀로 외롭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마빈 메이시와 같은 공간에서 지낼 것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결투를 신청하게 되고, 결과는 라이먼과 마빈 메이시의 승리로 끝이나 그 둘은 마을을 떠나게 된다. 아밀리아에게 크나 큰 고통을 안겨준 채로.

 

그 후 카페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가엾은 아밀리아는 슬픈 카페에 홀로 갇혔다. 스스로 목수에게 부탁해서 모든 문을 판자로 막아버린 것이다. 더 이상 카페에서 예전의 평화로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으로 바뀌어 아무도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떠난 삭막한 아밀리아의 마음처럼 흉측하게 변한 카페로.

 

 

 

 

우리는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  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

 

소설을 보면 그 모든 말에 수긍하게 된다. 도대체 누가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그래서 세상이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제멋대로 생기더라도 성격적으로 장애가 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의미 없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마술 같은 사랑의 힘을, 사람을 변하게 하는 사랑의 존재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덧없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짧은 사랑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 남는다는 이치를 말해주고 있다. 작가의 사랑론을 인용해 본다.

 

“사랑이 신비로운 이유는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상호적 경험이 아니라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요, 외로움을 더욱 심화시키는 일이다.”

 

故 장영희 교수가 ‘그로테스크(grotesque)’하다고 표현했듯, 사랑에 고통 받는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조화롭지 못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신장에서 나온 돌로 장식한 시곗줄을 선물하거나 콜라 병에 꽂아놓은 백합처럼 등장인물의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지를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5쪽)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슬픈 카페의 노래』는 사랑 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의 사랑이야기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 받는 일보다 더 큰 괴로움을 안겨줄 지라도 기꺼이 사랑에 빠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물음표 하나를 던져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싶은가?’라고.

 

 

사랑할 수 없는 여자, 사랑받을 수 없는 남자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기에,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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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의 기억들, 마음을 여는 진실한 의사소통으로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마음의 상처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평생에 걸쳐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겪은 불안과 좌절, 원망과 두려움은 아이의 신체와 정신에 각인되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아동심리학자 앨리스 밀러는 무조건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과 부모에 대한 원망을 금기시하는 도덕적 규범이 학대받은 아이들의 정당한 분노를 억압하며, 자아의 혼란과 질병의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어머니 눈 밖에 나서 발작이 멈추느니, 차라리 발작이 나더라도 어머니 마음에 드는 아들이 되고 싶어요.” (마르셀 프루스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평생 천식으로 고통 받았던 소설가 프루스트.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에 저항할 수 없었던 그의 처지와 천식이 무관하지 않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어머니의 사랑조차 잃게 될까 봐 늘 전전긍긍했다. 어머니의 눈 밖에 나느니 차라리 발작을 택하겠다는 그의 태도는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던 아이의 애정에 대한 왜곡된 집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소설가 중에서도 기억력이 뛰어나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이 기억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구현해낸다. 그 기억력의 산물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기까지 걸린 세월은 무려 14년. 일체의 소리가 스며들지 못하게 막아놓은 코르크로 둘러싼 밀실에 천식과 싸워가면서 소설을 써내려갔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 시기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이후였다. 프루스트의 지독하면서도 외곬에 가까운 추억을 묘사하는 진지함은 어쩌면 특출한 기억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상실에서 비롯된 고통과 허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천식 발작을 참을 수 있게 만들 정도로 허약한 자신을 지탱해주는 커다란 존재의 상실감은 38세의 젊은 프루스트에게는 감당하기에는 벅찼을 것이다. 몸과 마음을 조이는 천식 발작을 멈추기 위해서 죽은 어머니를 되살려야 했다. 그런 유일한 방법이 바로 소설을 쓰는 것. 결국 프루스트는 모든 기억을 토해내듯이 써내려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를 마지막까지 손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14년 동안 이어진 코르크 밀실 속에서의 고행이 끝나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나’(마르셀)에게 어릴 적 기억과 감각을 되살려주게 만드는 추억의 매개물을 제공한다. 여기서 그 매개물이 바로 그 유명한 마들렌과 홍차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면 고립시켰다. (85~86쪽)

 

찰나의 미각이 과거의 부활을 불러일으키는 이 감각적 전환의 장면은 단순히 우연히 맛보는 마들렌과 홍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들렌과 홍차를 ‘나’에게 준 어머니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루스트 연구가에 의하면 프루스트 회상의 배경에는 어머니의 존재가 크다고 말한다. 프루스트가 단지 마들렌을 즐겨 먹을 정도로 좋아해서 추억의 매개물로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연히 마들렌을 사오게 한 어머니의 모습을 프루스트는 잊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각별한 애정이 없다면 우리는 마들렌과 홍차가 연출한 이 유명하고도 너무나도 섬세한 장면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연과 감성에서 비롯된 기억을 ‘비의지적 기억’이라 하면, 의지와 지성에서 비롯된 기억은 ‘의지적 기억’이라고 한다. 전자의 기억은 과거에 대한 총제적인 삶의 장면을 그려내지만, 후자의 기억은 단편적인 부분의 장면에 불과하다. 마르셀이 입 안에 홍차에 의해서 녹아드는 마들렌 조각에서 감미로운 회상에 젖어드는 것은 비의지적 기억이다. 어머니가 준 마들렌과 홍차를 통해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레오니 아주머니라는 분이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을 발견한다.

 

반대로 평생 프루스트의 삶에서 떨어지지 않은 어머니는 작가의 의지적 기억을 이끌어낸다.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는 동안 어두컴컴한 밀실 속에 지내는 느낌에서 방에 홀로 어머니를 기다렸던 유년 시절의 그리움이 떠올렸을 것이다.

 

어린 마르셀은 잠들기 전에 어머니의 키스를 받고 싶어 한다. 어머니의 키스는 마르셀에게는 유일한 삶의 위안이다. 늦은 저녁식사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의 방에 찾아오지 않거나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모습에 어린 마르셀은 무척 괴로워한다. 앞에서 언급한 밀러의 주장대로라면 어머니의 키스를 원하는 어린 마르셀의 모습은 어른이 돼서도 어머니의 애정에 집착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키스를 그리워하고, 어머니가 자신의 곁을 떠나면서 생기는 유년기 특유의 불안감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잠을 자러 올라갈 때 내 유일한 위안은 내가 침대에 누우면 엄마가 와서 키스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녁 인사는 너무도 짧았고 엄마는 너무 빨리 내려갔기 때문에, 엄마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문짝이 두 개 달린 복도에서 밀짚을 엮어 만든 작운 술이 달린 푸른빛 모슬린 정원용 드레스가 가볍게 끌리는 소리가 들릴 대가 내게는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다음에 올 순간을, 엄마가 내 곁을 떠나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을 예고해 주었기 때문이다. (32쪽)

 

어머니가 자신의 방으로 오는 소리만 들어도 어린 마르셀은 벌써부터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고독을 예감했고, 무척 견디기 어려웠다. 마르셀은 어머니의 키스로만으로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 곁에만 있어주길 원했다.

 

비의지적 기억은 한 번 떠올리게 되면 그 때 그 미묘한 감정적 변화의 순간을 재현할 수 없다. 마르셀은 또다시 마들렌과 홍차를 먹어보지만, 순간적으로 밀려온 특별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다. 반면 의지적 기억은 금방 잊혀질 수 있는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프루스트의 비의지적 기억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소재이면서도 동시에 평생 작가를 괴롭힌 병적 집착이다. 유년 시절 속 어머니를 묘사하기 위해서 프루스트는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서랍에 깊숙이 숨겨왔던 기억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태양도 끝날 날이 있을까. 작가 이병주는 중편소설 ‘예낭 풍물지’의 맨 마지막 문장을 “태양도 끝날 날이 있다”로 끝맺는다. 감옥에서 나온 폐병환자인 주인공에게 어머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주인공은 “어머니가 숨을 거두는 날, 나는 지구도 그 맥박이 멎을 것을 확신한다”며 비통해 한다. 어머니의 부재(不在)는 곧 태양이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태양이 시들고, 지구가 시시해진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하늘이자 땅이다. 엄마 없는 유년은 빈방처럼 썰렁하고, 찬밥처럼 시들하다. 엄마를 기다리는 기형도 시인의 유년 풍경이 그렇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그리운 어머니는 항상 늦게 온다. 기형도의 시 ‘엄마 걱정’에서처럼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안 오시는 것이 엄마다. 프루스트는 방으로 찾아오는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에 불안감을 예감했다면, 기형도는 그리워하는 존재의 등장을 암시하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은 상황에 초조해하고 불안에 떤다. 어머니의 부재가 만든 상실감을 잊기 위해서 어린 시인은 혼자 엎드려 훌쩍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리운 것은 사라진 자리에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일까. 기형도의 이 시에 대한 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년 시절에 느낀 엄마 걱정은 무섭고 괴로웠지만, 성인이 된 시점에서는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죽은 어머니의 모습과 그녀의 존재를 통해서 느꼈던 불안하고 괴로웠던 부정적 기억을 프루스트도 소설로 그리움으로 환기시키는 동시에 치환시킨다. 그렇다고 부정적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때 그 기억의 장면이 마음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프루스트와 기형도는 ‘어머니’라는 여백에 남아있는 허전한 추억을 소설과 시로 채우고 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은 항상 이렇게 늦다. 사라지고 나서야 어머니를 떠올린다. 사실 떠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떠났기 때문에 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없음으로 해서 있었던 사실을 각인시키는 부재의 역설이다. 없는 자리, 사라진 자리에서야 그 존재의 지극함을 깨닫는 애통함은 모든 ‘있는 것’이 있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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