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이다. 그는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졸업했을 때, 졸업증서에는 ‘유대인’이라는 글자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이 가슴에 노란색으로 된 ‘다윗의 별’ 표시를 하고 다니는 것과 유사한 인상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레비는 자신도 독일 유대인들처럼 ‘다윗의 별’을 표시된 옷을 입은 채 수용소에서 폭력과 차별의 세월을 보낸 줄이야 생각이나 했을까.

 

사실 레비는 대학 졸업을 못할 뻔 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이 유대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938년 파시스트 정권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유대인에게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경제적 활동을 제한함)을 모방해 ‘인종법’을 제정한다. 유대인은 공립학교 입학을 할 수 없게 되는데 재학생은 학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인종법 공포 이후로 잠잠했던 반유대주의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생계가 막혔던 레비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서클에 가입하여 저항 활동을 한다. 1943년 파시스트 정권은 붕괴되었지만,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점령했을 때 레비가 소속된 유격대가 체포되고 만다. 이때부터 레비의 수용소 생활이 시작된다.

 

레비의 작품은 반유대주의자로부터 받은 차별과 그들의 왜곡된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레비는 광기의 전쟁 앞에서 파멸되고 불안에 떠는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민할 뿐만 아니라 왜곡된 이성에서 비롯된 반유대주의의 허상을 고발한다.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레비는 전쟁의 살상과 죽음의 수용소를 탄생시킨 인종차별 도그마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작가의 말’ 중에서)

 

레비의 말은 언뜻 반유대주의의 끔찍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의 광기를 염두에 둔 듯한 느낌이 난다. 우리는 히틀러라고 하면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가 생각난다. 그는 유대인을 지독하게도 혐오했다. 어린 시절 유대인으로부터 좋지 않은 경험 때문에 반유태주의 감정을 가졌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히틀러에 관한 기본적인 오해 중의 하나가 출신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 개인적 인간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이해된다. 『나의 투쟁』에서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추방하고, 그곳에 지배민족인 게르만족의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을 게르만족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세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강조했고 ‘세균’을 제거하는데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히틀러를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그가 성장했던 빈은 오래전부터 반유대주의가 남아있던 지역이었다. 비록 『나의 투쟁』에서 보여준 히틀러의 주장은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논리적으로 허술하지만, ‘유대인은 모두 적이다’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고, 병적인 증상으로 인한 집착은 학살과 수용소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라도 확신이 강할수록 전염병처럼 더욱 퍼지게 된다. ‘유대인=적, 세균’이라는 전제는 ‘적과 세균은 제거해야 한다’로 이어져 ‘유대인은 제거’라는 끔찍한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세균 같은 유대인을 제거한 자는 청결하고 건강한 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반유대주의의 삼단논법은 수용소에서도 곳곳이 퍼져나갔다.

 

벽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그린 이상한 벽화들이 있다. 예컨대 웃통을 벗은 착한 포로가 짧게 이발을 한 혈색 좋은 머리통을 비누로 열심히 씻는 모습과 전형적인 유대인의 코와 푸르스름한 피부를 지닌 나쁜 포로가 눈에 띄게 더러운 옷을 껴입고 머리에 빵모자를 쓴 채 마지못해 손가락 하나만 세면대의 물에 담그는 모습이다. 첫째 그림 밑에는 ‘So bist du rein’(이렇게 해서 너는 깨끗해진다), 둘째 그림 밑에는 ‘So gehst duein'(이렇게 해서 너는 뒈진다)이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좀 더 밑에는 고딕체의 흐릿한 프랑스어로 ’La proprete, c'est la sante'(청결은 건강이다)라고 적혀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 55쪽)

 

유대인은 불결하고 씻지 않는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대인을 ‘세균’처럼 멸시하던 히틀러의 발상과 유사하다. 유대인이 아닌 자는 비누칠을 할 수 있고, 깨끗한 물로 세척할 수 있다. 그러나 옷, 신발, 이름마저도 빼앗겨버리고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한 유대인은 씻을 수가 없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세면실이 아닌 가스실이다.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독일군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나 빨치산 활동에도 제약을 준다.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의 경험을 토대로 그들의 치열한 삶을 그린 『지금이 아니면 언제?』에 유대인을 싫어하는 빨치산 부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유대인 멘델은 사랑하는 부인이 독일군에 처형당한 사실에 유대인으로서 독일에 저항하기로 결심한다. 유대인 율법에서는 살인을 금지하는데 멘델은 아내의 복수를, 그리고 유대인의 평화를 파괴하는 독일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기로 한 것이다. 오랜 여정 끝에 게달레 부대를 만나 무장활동을 하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감정에 괴로워한다.

 

 

멘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데 피오트르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헌데... 그러니까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대체 뭔데 그렇게 뜸 들여?”
“정말 예수를 고자질한 게 유태인들이 맞나요?”

 

(프리모 레비  『지금이 아니면 언제?』 중에서, 149쪽)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마치 ‘한 지붕 두 가족’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다. 오랜 세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다름’보다 ‘같음’을 강조하며 양자 사이의 화해를 꾀하는 움직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서로 화해하고 상생하기 위한 길은 순탄치 않다. 여전히 반유대주의는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레비가 경고한 것처럼 잠복성 반유대주의는 불쑥 나타나 유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다. 미국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집단 KKK가 유대인 마을에 총기를 난사하고, 그리스 국적 의사는 자신의 병원에 유대인 진료를 거부하기도 했다. 의사의 집에 수색하는 과정에 나치의 문양이 새겨진 칼도 발견되었다.

 

아우슈비츠가 무너지고 사라졌어도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레비는 화학자이면서도 글쓰기를 통해 잘못된 사고의 인식이 만들어 낸 비극을 증언하고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가 경고했던 ‘불길한 경종’을 다시 한 번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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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슨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이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백석,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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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Scene #1  심령술에 빠진 추리소설가

 

탐정하면 셜록 홈즈를 떠올리지만 셜록 홈즈하면 코난 도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완벽에 가까운’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반해 그 창조주인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흥미진진한 소설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도일은 그러나 “홈즈가 지겨워졌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홈즈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893년. 작가는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폭포에 떨어뜨려 죽인다. 작중 인물에 싫증이 난 것일까. 작가의 명성을 압도하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일까.

 

그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런던 시내에는 검은 상장을 단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군중은 소설 속 홈즈의 집이 있는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로 몰려가 가상의 인물을 연호했다. 항의편지에 시달리던 출판사는 작가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원성에 결국 홈즈를 부활시켰다.

 

도일은 ‘홈즈의 작가’가 아닌 ‘역사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사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도일은 역사소설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초현상을 소재로 다룬 공포소설도 쓰기도 했다. 홈즈는 초현상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이성과 명석한 논리로 무장한 인물인 반면에 도일의 실제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만은 않았다. 도일은 말년에 심령술에 무척 관심이 많아 세계심령학회 회장도 지냈다. 1920년대 영국은 심령학이 엄청난 유행이었는데 그 때 ‘코팅리 자매의 요정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코팅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요정’으로 추정되는 사람 형상과 함께 사진에 찍힌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조작된 사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일은 이 사진가 진짜라고 믿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요정들의 출현』이라는 책도 발표했다. 유명 인사가 사진을 진짜라고 주장하자 꽤 많은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자 사진의 위조사실이 밝혀졌다. 코팅리 자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사진 속 요정은 마분지와 실로 만들어낸 요정이라고 실토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홈즈의 작가 도일마저 조작된 사진을 쉽게 믿고 만 것일까. 당시 1920년대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우울한 심리상태는 요정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믿게 만들었다.

 

 

 Scene #2  초현상적 사건을 소재로 다룬 네 편의 소설

 

간혹 우리는 매사가 불안하며 심약해지만 헛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짜로 믿고 만다. 아니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수록 가짜라고 해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아마도 도일은 평소에도 초현상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세계의 불가사의를 모은 책에서도 종종 소개되는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리 설레스트 호는 처음 건조되었을 때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 후에 ‘마리 설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872년에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지기 직전에 배는 미국 보스턴을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항해하는 설레스테 호가 발견되는데 돛을 펼쳐져 있었으나 장난감 배처럼 수면 위에 고정되듯이 멈춰져 있었다. 문제의 배를 발견한 데이 그라티아 호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배의 승무원은 8명이었으며 선장 브릭스의 처와 5살 된 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마리 설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은 채 표류하듯이 배는 그렇게 움직였다. 가장 의심스런 일은 외부의 습격을 받을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도일은 마리 설레스테 호의 승객으로 실종된 폐결핵 전문가 하버쿡 젭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의 진술을 토대로 설레스테 호가 실종된 이유를 독자에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낸다. 물론 화자는 하버쿡 젭슨이다. 

 

젭슨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게 된다. 그의 병상을 돌보던 흑인 노파로부터 젭슨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돌멩이를 받는다. 노파는 이 돌이 아버지에, 그 아버지에, 또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귀중하고 성스러운 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젭슨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을 주게 되었다. 둥그스럽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돌을 젭슨은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보관한다.

 

상처가 회복된 젭슨은 요양을 겸해서 마리 설레스트 호에 승선하게 된다. 선원을 제외한 또 다른 승객은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셉티미어스 고링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데다가 밤이 되면 그의 얼굴에 나오는 음흉한 표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느껴진다.

 

항해할수록 설레스테 호에 괴이하고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선장의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고, 가족을 잃은 선장은 실의에 빠져 멘탈이 붕괴되고 만다.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하고 만다. 선장을 잃은 설레스테 호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돈 채 목적지를 향하지만, 엉뚱하게도 배는 목적지에 완전히 떨어진 아프리카 대서양 쪽에 표류한다.

 

이 때 수수께끼의 인물 고링이 드디어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선장과 그의 가족을 제거했다. 배에 탑승한 선원 중에 고링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선원과 승객을 한명씩 제거할 수 있었다. 고링은 왜 셀레스테 호에 탑승해서 이런 잔인무도한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젭슨이 가지고 있는 검은 돌 하나 때문에 치밀한 살인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사실 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돌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가죽 깔때기』는 오컬트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라이어넬 데이커는 탐험가 로버트 리플리처럼 진귀하고 마술적인 물건을 수집하고, 초현상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수집한 물건 중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 깔때기가 있는데 데이커는 친구인 ‘나’에게 깔때기에 관한 불가사의한 비밀을 언급하는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의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 직접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해보라고 제안한다. 친구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받아들이는데 머리맡에 깔때기를 둔 채 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꺼림칙하게 여기면서 잠을 청하는데 기괴한 내용의 꿈을 꾼다. 죄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그녀를 벌하기 위해서 검은 옷을 입은 몇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목마에 포박당한 여인의 옆에는 물을 가득담은 세 개의 양동이와 국자가 있다. 그리고 사내 한 명이 문제의 가죽 깔때기를 여인의 입 속으로 찔러 넣는데... 끔찍한 벌을 받는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나’가 목격한 꿈의 내용은 어떤 장면일까?

 

『경매품 249호』는 미라가 등장한다. 옥스퍼드 올드칼리지 기숙사에 미라가 있다. 흑마술에 탐닉하는 올드칼리직 학부생 벨링엄은 자신의 방에 미라를 보관한다. 그것이 기숙사 전체를 발칵 뒤집는 무시무시한 사건의 전말이 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경매품 249호’라는 상표가 붙인 미라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공격한다. 주인공 스미스는 기숙사에 발생하는 괴사건을 비웃었지만 자신도 공포스러운 일을 경험한다. 벨링엄의 방에 보관된 미라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라는 왜 기숙사 학생들만 골라 습격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북극성호의 선장』은 도일이 젊은 시절에 고래잡이배에 탔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배경과 전개가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과 유사하다. 의학도 존 멜리스터 레이가 북극성호에 탑승하면서 겪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이다. 배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는 곳에 갇히고 만다. 주위에는 온통 하얀 빙하만 있을 뿐이다. 유빙이 배에 부딪히는 순간,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로 침몰할 위기에 놓여졌다. 그런데 북극성호의 선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밤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거대한 얼음의 땅을 향해 멀뚱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얼른 빙하의 세계를 탈출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 선장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니. 존은 선장의 모습에 어이 없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이없는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한다. 선원이 유령을 목격했다는 등 항해가 지체될수록 선상에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항해하면서 일용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선장이 실종되고 만다. 선원들은 배에 저주를 받았다고 두려움에 떤다. 북극성호도 마리 설레스트 호처럼 저주받은 배가 된 것일까? 그리고 선장과 선원을 두렵게 만든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Scene #3  '오컬트 소설가' 코난 도일

 

네 편의 작품에 장르를 구분하자면 똑부러지게 말하기가 애매모호하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도일 나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마술과 심령술에 대한 코일의 독특한 관심을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훗날 『가죽 깔때기』와 『경매품 249호』그리고 홈즈 시리즈에 포함되는 일부 작품들에서도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네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초현상을 믿지 않는 이성적인 인물과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는 인물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물도 초현상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순간 믿게 된다. 상당히 이성적일 것 같은 도일이 평생 심령술에 푹 빠진 채 살았던 그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도일의 작품 세계는 흥미진진하다. 도일은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SF소설도 쓸 정도로 장르소설의 시초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동안 홈즈 시리즈만 읽은 독자라면 잠시 홈즈를 잊고 도일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본다면 특별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역사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던 도일의 수식어에 ‘오컬트 소설가’라고 하면 본인은 만족스러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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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도정일 산문집 도정일 문학선 1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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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쓰잘데없이 고귀한 그들의 선물

 

가난한 부부에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축복하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고작 1달러 87센트를 가진 델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백금 시곗줄을 사주고 싶은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시곗줄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구하기 위해서 길고 탐스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대신 짐에게 머리를 잘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백금 시곗줄을 구입했지만 델러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 때문에 짐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애를 태운다.

 

드디어 짐이 돌아오고 그는 델러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럴 수가! 짐은 델러가 무척 갖고 싶었던 머리빗 세트를 선물로 사온 것이다. 자신이 받는 주급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머리빗이다. 그러나 머리빗을 꽂을 수 있는 머리카락이 없다니. 애써 미소를 짓는 델러는 머리는 금방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짐에게 보여줬다. 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고 시곗줄을 산 델러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동안 어디에다 간직하도록 해요.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훌륭한 것 같소. 나는 당신의 빗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계를 팔아버렸다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날 밤 세상에 어떤 부부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판 것을 알고는 깊은 사랑을 확인했으니까, 선물은 상대방을 향한 고마움의 징표이다. 받는 이에 대한 배려가 핵심이다. 따라서 가격보다는 물건에 담기는 의미가 중요하다. 짐과 델러가 서로에게 받은 선물은 당장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부 간의 진한 사랑과 희생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곗줄과 머리빗은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선물이다.

 

 


 무엇과도 비견될 수 있는 고귀한 것들

 

지금까지 살면서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을 하나라도 가진 적이 있던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소중하게 여긴 보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와 구슬치기에서 얻은 알록달록 색깔 구슬들 아니면 산타 할아버지가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와 양말에 선물을 놓고 간 것. 비록 그 선물이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것은 아니었지만 순수했던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준 진짜 선물이라고 생각해 애지중지 여긴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겐 보물 상자가 있었다. 아끼던 상자를 가지고 이사를 할 때면, 작은 상자 안에 소중한 물건들을 더 많이 넣으려고 물건들을 넣었다 뺐다 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마음속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과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면, 그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을 채워갈수록 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좁아질 것이고, 상자 안에서 재물과 욕심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우리 마음속 상자는 따뜻한 사랑만으로 충만해져갈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 나의 보물상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욕심과 사랑 중에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행복할까? 그리고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오늘 하루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갈까?

 

너무나 여유 없이 앞만 보며 메마른 길을 달려온 삶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 보물 상자에서 욕심과 재물은 조금 덜어내고 사랑과 행복을 좀 더 채워야 한다. 보물 상자에 채울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은 세상이 쓰잘데없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소풍에 가면 즐거웠던 보물찾기 게임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찾기 힘들다면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어보면 좋다. 제목만 봐도 책 속에 우리가 찾아야 할 고귀한 것들이 목록처럼 나열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이 책 속에 목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남의 목록에 의존해서 찾는 것보다는 독자와 자신이 앞으로 계속 찾고 만드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자발적인 삶을 위한 임무이다.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삶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스스로 찾아보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한 번 뿐인 삶이 마감할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결국 소중한 것의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놀이 방식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나름 고귀한 것을 두 개만 소개해본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1 : ‘너는 누구인가’, 자기 인식의 질문

 

일단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을 우리는 왜 질문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갑작스럽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하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네가 누구인가는 마침내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너보다 더 큰 것, 너를 연결할 더 큰 어떤 것을 찾았는가?” (‘누구시더라’ 중에서, 14쪽)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식할 수 있다. 일찍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만든 철학의 명제로 삼았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골몰하는 일에 대해, 폐쇄성의 혐의를 둔다. 혹은 관계에 무관심하다고 여기거나, 공동체로부터 도피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란 우선은 사회적인 원리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기 안의 격률을 갖고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이들은, 자기 안의 격률로 인해 타인과 그의 흔적들에 역시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너는 누구인가’라는 이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또는 쓰잘데없는 질문 속에는 ‘자각(自覺)’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를 알아야 ‘나’를 둘러싼 세상도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이 질문은 기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이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굳이 대학교나 철학책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이 질문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도정일 교수는 평생을 바쳐 인문학적 질문을 위해 집요하게 몰두한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비참한 참상을 기록한 이탈리아 출신 작가 프리모 레비를 들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기억 투쟁’)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 시절 때 탐독했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나는 짐승으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레비는 이런 구절을 통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2 : 문학

 

백범 김구 선생의 건국이상이 ‘문화국가’였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아직 궁핍하던 시절, 백범은 ‘부강한 나라’를 가로질러‘문화국가’를 역설했다. 몇 단계 건너뛴 화술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과 대조되는 평화주의자의 안목이 경탄스럽다.

 

백범 선생이 말하는 ‘문화’에는 여러 가지 분야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문학’이 빠질 수 없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문학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책을 멀리하고 학창시절에 문학을 외우는 과목이라는 기억이 강하게 남은 사람은 문학이라는 말을 어렵게 느낄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단순히 문학(소설, 시)을 읽고 즐기는 행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시 배달부의 인기’) 특히 문학 읽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게 만드는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문학적 연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은 정신의 성장이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문학을 수능시험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절대로 문학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알 수 없다. 수능에 나올 문제를 기막히게 맞힌 족집게 강사도 문학 독서를 통한 ‘위대한 감각’을 가르치지 못한다. ‘위대한 감각’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를 깨닫는 능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 독서가 쓰잘데없은 시간 낭비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성과 감성을 겸비하는 윤리적 인간이 되려면 문학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Epilogue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고 나면 꼭 자신만의 고귀한 목록을 찾아보라. 쓰잘데없는 것도 좋다. 나는 ‘자기 인식의 질문’, ‘문학’ 이외에도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관용, 도서관 등등. 최소 5개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목록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오늘에 감춰진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내줄 아는 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쏟는다면 기분 좋아지는 나 자신을 덤으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 사랑, 관용, 선물, 희망. 아무나 좋다. 이 세상에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꼭꼭 숨겨져 있어도 좋지만, 그래도 찾기 쉽도록 눈에 띄면 좋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중함과 고귀함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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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이들에게 과학을 돌려주자’라는 기업 광고의 슬로건이 큰 호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광고 내용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과학자가 꿈인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과학자보다는 아이돌 가수가 더 많은 장래 희망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선택한 장래 희망이라는 것이 어른들이 한 번에 들어도 기분 좋을 만한, 소위 돈을 잘 벌고 안정되어 보이는 직업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곧 좋은 진로’라 배우며 자란 2030 세대는 성인이 돼 지독한 꿈의 부재를 겪고 있다. 단군 이래 최악의 세대 방황은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어질 듯하다. 초등학생 10명 중 3명은 공무원이 되길 희망한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의 대답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새내기 대학생이나 전공 불문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취업 준비생의 대답과 꼭 같다.

 

부모가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을 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꿈이 없다고 미리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직업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 내가 미혼이라서 아이의 장래희망에 관심을 가지는 부모의 심정을 느끼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결국 직업은 연봉을 많이 받거나 사회적으로 인기가 높은 것도 좋지만, 적성에 맞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적성을 제대로 찾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낭비에 가깝다. 과거와 같이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직장’,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일자리가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직업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의 소설 『멍키스패너』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소네는 직업의 참된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파우소네는 떠돌이 조립공이다. 철탑, 다리, 석유시추설비 등등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구조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노동 경험이 많다. 그는 안정적인 집과 아내도 없다. 항상 작업할 때 사용하는 ‘멍키스패너’와 함께 전 세계를 떠돌면서 지낸다. 건장한 사내도 하기 꺼리는 조립공 작업을 파우소네는 즐거운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파우소네는 기계 구조물을 다루는 노동에서도 예술가처럼 창조해내는 순수한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는 진정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파우소네는 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기계를 조립하고, 3D에 가까운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선호하게 될 걸까? ‘꿈’에 대해서 자신의 정의를 내리는 파우소네의 답변은 안정적인 직업의 꿈을 좇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한다. 전 세계를 여행하듯이 온 세상의 조선소, 공장,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업에 관한 꿈은 자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일수록 좋다고 한다.

 

“나로서는 꿈이 진짜로 실현되는 것이 좋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꿈이란 사람이 평생 동안 옆에 가지고 다니는 질병이나, 아니면 습기가 찰 때마다 고통을 주는 수술의 상처로 남아 있게 되지요.” (프리모 레비  『멍키스패너』  중에서, 10쪽)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의 꿈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회하기도 한다. ‘아, 내가 공부만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부모님의 설득에 귀담아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꾸준히 준비했더라면 일하는 것이 즐거웠을 텐데...’ 안정적인 생활과 연봉에만 초점을 맞춘 직업을 선택해서 생활할수록 어린 시절 순수했고 꿈은 어느새 아쉬움이 가득한 그리움으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처음부터 꿈꾸던 장래희망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 힘들다.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사랑해서 직업으로 삼아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121쪽)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 운명인데 우리는 너무 무심코 직업을 단정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것도 돈 벌기 쉽고, 해고 위험의 부담이 없는 안정적인 직업 말이다. 그러나 파우소네의 표현처럼 직업의 영역은 광활한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직업이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몇 십 년 후에 새로운 직업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선호하고 원하는 직업 중에는 언젠가는 미래에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면 힘든 노동이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고용주의 노예일 뿐이다. 파우소네는 일과 노동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진정한 노동(직업)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노동이 아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강요받지 않는 즐거운 것이다.

 

레비는 파우소네를 ‘또 다른 자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예술가적 자아를 뜻한다. 두 손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파우소네에게 예술가의 면모를 발견한다. 레비는 파우소네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대화를 유도하는데 바로 글쓰기 작업으로 파우소네의 삶을 소설로 새롭게 창조시킨다.

 

 

 

 

 

 

 

 

 

 

 

 

 

 

 

 

 

레비의 삶에 있어서 글쓰기와 화학 연구는 인간적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노동이다.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서 수용소 안에 갇힌 인간과 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인간 군상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수용소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글로 기록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눈물겨운 기억 투쟁이다.

 

1986년 레비와 대담한 필립 로스는 그를 ‘화학자-작가’라기 보다는 ‘예술가-화학자’에 가깝다고 했다. 『주기율표』에서 레비는 화학이 ‘파시즘의 해독제’라고 말했다. 화학 실험이 인간적인 노동인 것이다. 그래서 『주기율표』를 읽어보면 화학 실험을 한 편의 그림처럼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사람을 분주하게 하지만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자전거 타기와 비슷한 일이다. 또 증류가 아름다운 건 변신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액체에서 (보이지 않는) 증기로,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말이다. 위로 아래로 두 겹의 여행을 하는 사이 마침내 순수한 것이 도달한다. 이것은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조건이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에서, 89쪽)

 

레비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이 우리 삶의 치유제가 되고, 파우소네처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보면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에 불과할 수 있겠다. 오히려 자식이 파우소네처럼 떠돌이 기계 조립공처럼 산다면, 부모는 당장 자식의 호적을 팠을 것이다.

 

레비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것의 어려움과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직업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결국 어린 시절 꿈을 직업으로 전환시키는 멋진 삶이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레비는 운명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많은 직업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입관과 증오를 갖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은 해롭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직업을 증오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직업의 결실이 일하는 사람의 손에 남아 있도록, 직업 자체가 형벌이 아닌 것이 되도록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 한다.” (프리모 레비  『멍키스패너』  중에서, 121~122쪽)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프리모 레비의 『멍키스패너』 을 읽어봤으면 한다. <타임> 지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은 이 책의 서평에서 ‘독자들 가운데 공무원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썼다. 자식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멍키스패너』를 읽고나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자식의 꿈과 장래희망을 부모의 마음대로 정하고 간섭한다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 또한 증오하게 된다. 부모의 그늘이 이제 막 성장하려는 자식의 미래를 가리지 말고,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뺏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꿈을 돌려줘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것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직업을 선택할 때 앞으로의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을 가꾸어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을 더하여 ‘진정한 자아실현’에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 제 삶과 직업을 통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만족스럽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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