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알프레드 상시에 지음, 정진국 옮김 / 곰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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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발소에서 흔하게 보는 화가의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년 

 

 

1830년대에 화가들이 화려한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찾았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숲 속 풍경과 농촌 풍경을 진실하게 그리고 싶었다. 이 ‘바르비종파’의 중심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가 있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정착한 그는 시대와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이미지로 농민상을 그렸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은 없을 성 싶다. 밀레의 그림을 볼 때마다 무언가 가슴속에 와 닿는 것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의 밀레는 불행했다. 동시대의 화가들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 화랑들은 팔리지 않는다고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어떤 화가도 시골의 노동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밀레는 농부들에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여했다. 그림 속에 나오는 농촌 풍경은 밀레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농촌 생활의 일부였다. 농촌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일상적인 것에 품위와 무게를 불어넣으려는 그의 예술관을 형성했다.

 

 

 

 

 

 Scene #2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못한 자

 

밀레의 그림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이발소 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밀레가 왜 농민들의 모습을 고집스럽게 그렸는지 잘 모른다. 올해가 밀레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그림이 재평가받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나마 밀레의 그림이 아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기 한 권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밀레의 전기는 1881년에 나왔다. 밀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뒤이다. 전기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알프레드 상시에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를 높이 평가한 인물이다. 밀레 전(傳)은 단순히 밀레의 그림을 홍보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상시에는 밀레가 농촌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그리고 그의 예술관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들까지 삶의 전반적인 모습까지 글로써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화가로 활동하기 전, 도제 시절을 거친 젊은 밀레는 살롱에 인정받는 주류 화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 인근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장학금을 얻어 파리에 진출해 들라로슈의 제자가 됐다. 당시 들라로슈는 고전주의 풍 그림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고상한 분위기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고, 살롱은 그런 취향의 그림을 선호했다. 노동자나 농민은 그려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그림을 그려봤자 쟁쟁한 화가들이 등장하는 살롱에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밀레가 독창적인 화풍과 주제를 선보이기에는 파리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특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란 촌놈은 화려한 불빛이 넘치고, 소란스러운 음악이 연신 들려오는 이 쾌락의 도시가 부담스러웠다. 아웃사이더 밀레의 외로운 마음을 이해해주거나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려는 과감한 도전 정신을 알아주는 이도 많지 않았다. 들라로슈의 화실에서 같이 배우는 동료들은 간혹 스승의 정신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리는 밀레를 무시하기도 했다. 파리 생활에 정착하기 시작한 젊은 밀레는 미생(未生)이었다. 훌륭한 실력을 품은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않았다.

 

 


 Scene #3  바르비종의 화가로 완생하다
 
아무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 예술에 대한 방황이 더욱 길어질수록 밀레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득한 도시에 고립되어만 갔다. 심지어 그를 믿어주는 가족들마저 한 명씩 세상을 떠나면서 실의에 빠진 밀레는 거의 죽어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미생’ 밀레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화가로 완생(完生)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밀레는 아카데미와 살롱이 선호하는 누드화 제작을 포기하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목욕하는 여인을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들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누드를 즐겨 그리는 화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밀레는 아내에게 자신의 포부를 떳떳하게 밝혔다.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겠어. 그러면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당신 고생도 더 심해지겠지만 나는 자유롭게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할 수 있겠지.” (129~130쪽)

 

밀레가 오래전부터 자유롭게 생각했던 그림. 그것은 바로 농촌 예술이었다. 밀레는 어렵고도 큰 결심 했다. 그가 농촌 그림을 그리려고 바르비종으로 이사한 1849년은 예술가들에게 힘든 해였다. 밀레도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시골에 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밀레는 그림 주문을 받았고, 주로 그렸던 그림은 대부분 누드화였다. 자유로운 예술을 원하는 밀레는 도제 시절 때 배운 아카데미 풍 그림과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도전의 장소인 살롱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 예술의 씨앗을 다시 살리기 위해 여생을 바르비종의 흙에 묻기로 했다. 바르비종은 ‘미생’ 밀레를 바르비종파의 기둥으로 우뚝 솟게 만들어 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의 예술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테오도르 루소와 상시에라는 든든한 예술적 동지를 만났다.

 

 


 Scene #4  잊지 말자. 나는 할머니의 자부심이다 

 

밀레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명예를 누리게 되면서 예술가로서 완벽히 다시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밀레는 여전히 경건하고 엄숙한 농촌 그림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농민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농촌은 밀레에 딱 맞는 아틀리에였다. 풍족한 생활은 밀레를 세속의 명리에 쫓는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없었다. 밀레는 순결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매우 착한 심성이었다. 특히 그는 자연을 무척 사랑했다. 이러한 성품이 형성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 무척 컸다. 그에게 할머니는 위대한 종교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엄숙하지 않은 파리에서 생활하는 손자가 못마땅했으나 그가 위대한 화가라고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밀레는 할머니의 자부심이었다.

 

이것이 훌륭한 종교였다. 할머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 그것을 그토록 사랑하는 힘을 주었다. 할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고, 그들의 잘못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돕거나 가엾어했다. (밀레의 일기를 인용함, 23쪽)

 

밀레를 파리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을 때 그를 견디게 해준 원동력은 의외로 예술이 아닌 할머니에게서 배운 세상에 대한 애점이다. 세상이 그를 쌀쌀하게 대해주었어도 밀레 본인은 그런 세상을 저주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 ‘좋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아껴준 할머니를 생각해서 화가 이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못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도 있다. 좋은 사람 하나가 많은 못된 사람에 대한 위안이 된다. 도와주려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구걸하진 않았다.” (102쪽)

 

우리는 밀레를 이발소 그림으로 워낙 낯이 익어 편안한 농촌화가 정도로 여기지만, 상시에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밀레의 삶은 화가로 살아남으려는 파리 미생의 치열한 인생사였다.  그런 모습을 기록으로 보존한 밀레 전은 예술적 고뇌의 산물을 느낄 수 있다.

 

상시에는 파리에 익숙한 도시인마저 자연 앞에서 온화하게 만드는 밀레를 발견했다. 그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밀레를 되살려기 위해서 상시에는 화가의 전기를 써내려갔다. 세상을 사랑스럽게 보는 따뜻한 시선. 밀레는 자신이 사랑하던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사랑했던 것마저도 그림으로 되살려내는 위대한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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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30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4-11-30 22: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어제 에피소드에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거든요. ^^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 시인동네 시인선 15
안이삭 지음 / 시인동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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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은 나에게 의미가 되었다’고 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사물들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내게 커다란 의미가 된다. 그것들은 보잘것없는 한낱 미물일지라도 세상 모든 만물과 같이 숨 쉬며 삶의 새로운 의미와 영역을 만들어 나간다. 안이삭 시인은 집에서, 길에서, 자연에서 지나치거나 소멸할 수 있는 미물을 발견하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부여한다. 시인의 시는 세상 만물과 같이 숨 쉬며 삶의 새로운 의미와 영역을 보여준다.

 

 


너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야겠다
징검다리 건너다가
물억새 그늘 흔드는 작은 소요
반갑다, 피라미!

 

 

이쯤에서 가만히 서 있으마!
새끼손가락만 한 몸 구석구석 새겨진 팽팽한 경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어미의 어미 또 그 어미의 어미가 가르쳤구나

 

 

이 넓은 우주
홀씨 하얗게 날리는 봄날
한 물고기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오후

 

 

나지막이
내 이름을 일러주었다

 

 

(‘통성명’, 24쪽)

 


미물을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홀씨 하얗게 날리는 봄날’에 새끼손가락만 한 피라미의 눈에는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 거대한 생명체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도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같은 종족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도 넓은 우주 속에 살기 위해 헤엄치는 한낱 미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만함을 벗고 진지한 사색을 시도한다.

 

 


여자가 가진 것은
하얀 벽에 기대어둔 햇빛뿐이다

 

 

처음 보았을 때 여자는
벽에 기대 앉아
햇빛의 털을 고르고 있었다
두 번째 보았을 땐
햇빛의 갈비뼈를 퉁기고
햇빛의 발바닥을 핥아주고 있었다
세 번짼 오래된 햇빛을 꺼내어
때 묻은 소매로 닦고 있었다

 

 

여자는 자주 웃는다
자주 웃으며 이야기한다
반짝이는 나뭇잎에 귀를 문지르는 여자의 말상대는
햇빛이다

 

 

오늘도 여자는 길 위에 있다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나
누가 겁 없이
건들거리며 여자의 거처를 침범했나
날카롭고 무거운 노랫소리가
곧장 여자의 무릎으로 떨어져 꽂힌다

 

 

세실카페 모퉁이 저 끝에서
흥분한 바람이 펄럭이고 있고
1억 5천만 킬로미터를 달려온 햇빛은
마침내 여자의 머리카락에 닿아
"괜찮다, 괜찮다" 미끄러지고 있다

 

 

(‘세살카페 옆 고양이’, 18쪽)

 


사람이건 미물이건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추구한다. 괴로움을 따르고 즐거움을 배척하는 존재란 없다. 행복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요, 바람이다. 인생의 목적이 바로 행복이다. 누구든 행복한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행복한 삶을 원하고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괴로운 일이 없다면 즐겁고 행복한 일이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안락한 삶을 침범하는 고통이라는 손님을 맞아들여야 한다. 불청객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고 보내는 것도 힘들지만, 힘들고 힘든 것 역시 살아있음의 자각이다. 행복은 어느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자신이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내 피부와 마음에 닿은 저 포근한 햇빛마저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넘칠까봐
늘 위태로웠지
몇 개의 뼈와 가죽 안쪽에서
오랫동안 찰랑거리던 것
가끔씩 햇빛에 널어
꾸덕꾸덕 말라가는 것도 같았지만
잠깐 잦아들 뿐 다시 찰랑거리곤 했지
바람이 급하게 구름을 몰아가는 동안
개울물 독경 소리 흘러가는 동안
내 귀가 듣지 못하는 말 있었는지
들고 있던 것들 그만 내려놓고 싶어지네
낮아지고 낮아져서 그만
이마를 바닥에 대고 말았는데
주머니 속에서 때를 놓친 씨앗 한 알
오랫동안 잊고 지낸 작은 물고기
이런 하찮은 것들이 흘러나오데
돌멩이 적시며 개울로 스며들데

 

 

(‘새벽, 대흥사’, 43쪽)

 

 
대자연 앞에서는 인간도 어쩔 수 없는 미물, 산다는 것이 그렇게 덧없고 무상한데 코딱지만 한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우고 있다(蝸牛角上之爭). 끝없는 욕망으로 인한 타락으로 인간의 고결한 품성이 사라진 지 오래며, 오히려 미물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과연 인간은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자연의 맥박이 뛰는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겸손한 마음을 얻는다. 미물을 소중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깊은 성찰이 재료가 된 시는 옳기도 하고, 숭고하다. 미물의 세계에도 그들의 숭고함이 있고 성스러운 행위가 엄연하게 존재한다. 내 손에 꾹 쥐고 있는 욕심 덩어리를 내려놓고, 낮은 데를 굽어보면 아름다운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미물이 살아있다는 증거, 즉 우리 역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좋은 신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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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in angulo cum libro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

 

 

 

독일의 신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19세에 아그니텐베르크 수도원에 들어가 70년간이나 작은 골방에서 성경필사에 전념했다. 아 켐피스가 남긴 말로 알려진 저 라틴어 구절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년) 1권 서문 마지막에 인용되기도 했다. 에코(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는 아 켐피스를 모방의 도사라고 소개했지만, 그는 성경 필사의 모범이다. 아 켐피스는 일생동안 성경을 네 번 필사했는데 아름다운 필체로 평가받고 있다.

 

 

 

 

 

 

 

 

 

 

 

 

 

 

 

 

 

 

필사. 그것은 단순히 ‘손으로 쓰는 글자’가 아니라 ‘손으로 쓰는 기도’이자 ‘손으로 쓰는 명상’ 그 자체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글자를 읽는 행위가 아니다. 눈으로 하는 명상이다. 책을 오랫동안 보면 눈이 피로하고 침침하지만, 마음은 편안해진다. 종이책 특유의 냄새가 감돌면서 눈에 활자가 보일 정도로 약간의 조명이 비치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면 잠시나마 하루 동안 쌓인 고뇌를 잊을 수 있다. 아 켐피스는 성경을 필사하는 생활을 하면서 도서관에 보관된 수많은 장서도 읽어봤을 것이다.

 

내가 쉴 수 있는 '책이 있는 구석방'은 (헌)책방이다. 편히 앉을 수 있는 안락한 소파에, 겨울에 따뜻하게 누워서 책 읽을 때 편안한 전기장판까지 있는 서재도 책을 읽기에 좋은 공간이다. 하지만 컴퓨터와 TV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어서 독서를 몰입하는 데 방해된다. 온 사방에 수많은 책이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조용한 책방이 더 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다니는 책방에 한 시간 이상 책을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읽는 손님이 많이 없다. 그런 손님이 있더라도 나만큼 정말 오랫동안 책방 서가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둘러보고, 내 무릎 높이까지 쌓인 먼지 묻은 책들을 만지작거리는 손님은 없을 것이다. 책 한두 권을 살려면 무조건 두 시간 이상 책방에 머무른다. 내가 고른 책이 오래오래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인한다. 절대로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책 한 권 한 권을 만져보면서 훑어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한적한 분위기는 '책아일체'(冊我一體)가 되게 해준다. 

 

주말의 시작인 토요일에 책방에 방문하는 것이 제일 좋다. 특히 '무한도전' 방송이 시작되는 시간대 이전인 오후 2시부터가 적당하다. 점심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이제 책방에서 마음의 양식으로 지식에 허기진 두뇌를 채운다. 아니면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주 동안 스트레스로 뭉쳐져 딱딱해진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준다. 내가 원하는 책을 찬찬히 고르면 된다.

 

책방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간다. 먹고 살기 넉넉한 경제적 수준이라면 주말마다 책방에 가는 것이 소원이다. 많이 가는 편은 아니지만, 방문할 때마다 책방에 두 세 시간 오래 있는 일상이 익숙해지다 보니, 책방 서가에 어떤 분야의 책이 꽂혀 있는지 알고 있다. 이제 책방이 편해서 내 서재 같은 느낌이 난다.

 

오늘 책방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어린 젊은 커플이 방문했다. 책방에서 젊은 커플을 보게 되다니. 혼자 책 읽고, 혼자 밥 먹을 정도로 혼자 노는 생활이 편한 나도 약간 마음이 위축되었다. 책방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가 비좁아서 커플이 책을 고를 수 있도록 내가 몇 발 뒤로 물러서서 딴 곳으로 이동했다. 내가 있든 없든 커플은 거들떠보지 않겠지만. 그래도 남자는 연세가 많은 손님이 주로 찾는 책방에 자신처럼 젊은 남자가 혼자 책 읽는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그 남자의 눈과 딱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서로 못 본 척 시선을 회피했다. 커플은 생각보다 꽤 오래 있었다. 나는 그들이 얼른 떠나기를 내심 바랐다. 커플의 등장으로 조용한 독서를 할 수가 없었다. 커플은 어떤 책을 찾고 있었다. 둘이 딱 붙어서 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약간은 질투가 났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원래 책방에 처음 오는 손님은 책방 주인에게 자신이 찾으려는 책이 있는지 먼저 물어본다. 원하는 책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냥 돌아간다. 그런데 저 커플은 꽤 오랫동안 서가를 관찰했다.

 

커플이 서가를 둘러본 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그들은 주인에게 자신이 찾는 책이 있는지 물어봤다. 도대체 커플이 찾으려는 책이 무엇일까. 나는 책방에 오는 손님들이 원하는 책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몰래 살짝 귀띔한다. 커플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찾고 있었다. 주인은 그 책이 있는지 잘 모르는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직접 서가에 찾아보기로 했다. 책방을 오래 운영한 주인도 셀 수 없이 많은 책무더기 사이에 손님이 원하는 책을 바로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책방 전체를 오랫동안 관찰했던 터라 커플이 원하는 『인간 실격』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알고 있었다. 책방에 있는 『인간 실격』은 1995년에 웅진출판사가 찍은 것이었다. 출판연도가 좀 오래됐어도, 책 상태는 거의 새 책에 가까웠다.

 

나는 서가 한구석 모퉁이에 꽂혀 있는 『인간 실격』을 빼서 주인에게 건네줬다. 그러자 커플과 주인은 1분도 채 안 돼서 『인간 실격』을 발견한 내 모습에 놀랐다. 커플은 연신 '대박!'이라고 말하면서 고마워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별말씀을요'라고 간단히 말하면서 계속 서가에 책을 고르는 척 했다. 사실 커플이 책을 사고 돌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에 책을 찾아줬다. 커플은 『인간 실격』을 찾게 돼서 너무나 기뻐했다. 남자는 기쁨에 떨면서 『인간 실격』을 감명 있게 읽었다면서 책방에 같이 온 여친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내가 읽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같이 읽고 공유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았고, 더 질투가 났다. 다시 마음 편히 책을 읽으려는 갑자기 안구는 촉촉해지는 것일까. 너무 오랫동안 활자를 봐서 눈이 침침한 것이겠지... 음, 기분 탓일 거야...

 

 

 

 

 

 

오늘 세 시간동안 고르면서 구입한 책은 총 세 권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 구판(문예출판사, 1995년), 『세계 러브스토리 걸작선』(도솔, 1993년), 레미 드 구르몽의 소설 『색, 색, 색』(문지사, 1993년)이다.

 

 

 

 

 

 

 

 

 

 

 

 

 

 

 

 

 

 

 

 

 

 

 

 

 

 

 

 

 

 

 

 

러셀의 책은 올해 같은 출판사에서 새 표지로 복간되었다. 황문수 님이 번역했는데, 복간본도 구판처럼 같은 번역자의 손을 거쳤다. 복간본이 나오면서 황문수 님이 번역을 새롭게 손을 봤는지 잘 모르겠다. 일단 두 권을 같이 비교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세계 러브스토리 걸작선』은 알라딘 검색, 심지어 중고샵에서도 찾을 수 없는, 완전 유령이 되고 만 책이다. 영미 작가들이 쓴 사랑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국내에 널리 알려지거나 작품이 많이 소개된 작가의 작품도 있다. 『인간 희극』(문예출판사, 2006년) 또는 『휴먼 코미디』(2012년, 문학동네)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윌리엄 사로얀, 『수선공』(동인, 2009년-품절)의 버나드 맬러머드, 『나의 안토니아』(열린책들, 2011년)의 윌라 캐더, 존 업다이크 그리고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까지 책에 수록된 작가 라인업이 괜찮다.

 

마지막 책으로 『색, 색, 색』은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 시 「낙엽」을 쓴 레미 드 구르몽의 소설이다. 우리나라에서 구르몽은 「낙엽」의 시인으로 많이 알려졌는데, 『색, 색, 색』은 국내에 유일하게 번역된 그의 소설이다. 프랑스어 원제는 『Couleurs, Contes Nouveaux Suivi de Choses Anciennes』. 1908년에 발표되었다.

 

구르몽은 젊은 나이에 결핵의 일종인 낭창에 걸려 얼굴이 추해지자 아파트 서재에 파묻히듯이 살았다. 심지어 말을 더듬는 습관도 있어서 구르몽은 집에 틀어박혀 지낼 정도로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외출하지 않고, 서재 속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지냈다. 서재에서 같이 지내는 유일한 그의 친척이라면 반려묘. 구르몽은 책이 가득한 서재를 '나의 헛간'이라고 불렀다.

 

책방에서 나의 동지를 우연히 만났다. 구르몽의 고독, 그리고 속세를 멀리하여 자신만의 유일한 안식처가 있는 이 고독한 시인에게 연민이 느껴지면서도 동질감이 느껴졌다. 세상을 완전히 단절하는 밀폐된 은둔이 아닌 가능한 한 내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성찰할 수 있는 건강한 고독. 그런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곳은 바로 내가 쉴 수 있는 책방이 아닐까 싶다. 이제부터 자주 가는 책방을 '나의 헛간'이라고 불러야겠다. 나의 지적 헛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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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곁에 늘 있을 것 같은 가족,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그 빈자리에 밀물처럼 오는 공허감과 슬픔을 견디기 힘들다. 죽음은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하게 된다. 이런 우울한 날에 가라앉은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특별한 장례식을 열 수 있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한다. 미국의 브라스밴드 리더는 조문객들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싫어서 살아 있는 상태처럼 지팡이를 짚고 서서 조문객을 맞이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떡 하니 서서 조문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생전 모습 그대로.

 

또 어떤 고인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테이블에 앉아 조문객을 맞았는데, 한 손에는 맥주잔을, 다른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고인은 맥주를 즐겨 마시고, 끽연가였다고 한다. 비록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이지만, 죽어서도 생전 모습을 조문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내려는 고인의 배려가 돋보인다. 이러한 이색 장례식은 조문객들이 고인을 특별하게 애도하는 날로 기억하게 되지만, 강심장이 아닌 이상 시체를 가까이 보는 것은 엽기적이다.

 

 

 

 

 

 

 

 

 

 

 

 

 

 

 

 

 

 

과연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상태로 장례식을 치른다면, 조문객들의 슬픔을 덜어줄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방법이 실용화된다면? 19세기 후반 프랑스 상징주의 작가 빌리에 드 릴아당의 소설집 『잔혹한 이야기』(물레, 2009년)에 수록된 단편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는 죽음에서 비롯된 인간의 슬픔 감정을 무뎌지게 만드는 장난감이 등장한다.

 

단편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난감의 이름이 특이하다. 마지막 숨의 화학성분 분석기.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내뱉은 숨을 장난감에 모아둔다. 장난감은 숨의 화학성분을 분석해 죽음이 임박하는 신호를 포착한다. 살아있을 때 나오는 숨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숨의 성분을 장난감이 분석하고, 구별한다. 즉, 장난감이 사람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신호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신호를 확인했다면 가슴 아픈 일을 미리 확인할 수 있으며 고인을 떠나보내도 침울한 감정의 늪에 오랫동안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장난감을 발명한 사람은 이것을 어린이들이 많이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을 어른에 비해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발명가는 이 장난감이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진보적인 물건이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놓는다. 소설은 이 특이한 장난감을 광고하는 듯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릴아당은 인류의 감성을 지배할 정도로 커져만 가는 당시 과학기술의 위력을 경계한다.

 

과학의 섬세한 기술이 인류의 원초적인 감정마저 조절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다면 영 달갑지 않다. 그리고 이런 장난감이 실제로 세상에 나온다면, 실용화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든다. 발명가는 숨 분석기가 연말연시에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이라고 강조한다. 글쎄, 썩 유쾌한 장난감은 아니다. 내가 죽게 되는 시점을 이 장난감이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아무래도 꺼림하다. 오히려 장난감을 받는 사람이 더 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발명가는 이 보석 같은 발명품을 할아버지 생신 기념 식사 때 주면 좋다고 말하는데,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장난감을 당장 부수거나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장난감은 실생활에 쓰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이 장난감에 니트로글리세린이라는 성분이 들어있는데 폭탄에 들어가는 주재료이다.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이 예정된 죽음 날짜보다 더 빨리 저승사자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면, 이 장난감에 약간의 충격을 주면 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건강하고 멀쩡했던 사람도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기 마련인데 죽을 운명은 죽음의 신만이 점지해준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고인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 살아남은 자들은 그렇다. 고인이 너무 그리워서 유품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고인의 채취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유품을 간직한다면 잠시나마 슬픔을 달랠 수도 있다.

 

 

 

 

 

 

 

 

 

 

 

 

 

 

 

 

 

지금도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덜어줄 수 있는 기술이 나오고 있다. 최근에 고인의 유품과 그가 생전에 남긴 흔적들을 영원히 보존하는 소셜 네트워크까지 등장했다. 리브스온(LivesOn)이라는 앱은 고인 대신에 소셜 네트워크를 관리한다. 고인이 과거에 남긴 기록들을 분석해서 이것과 유사한 내용의 글과 사진을 올린다. 고인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나 가족은 리브스온이 올려주는 고인의 게시물을 확인할 수 있다. 리브스온은 고인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다. 그야말로 컴퓨터 알고리즘이 사람 흉내를 낸다. 고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서비스가 될 수 있다. 리브스온 개발자는 이 서비스를 활성화해서 고인의 쌍둥이를 만들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쌍둥이라기보다는 죽은 자를 온라인 공간에서 복제한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죽은 사람이 온라인 공간에서 살아남는다? 아무리 알고리즘으로 작동된다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가 과연 죽음이라는 우울한 사건을 덜 비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서 생전 모습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지만, 진정한 애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기 싫은 마음이 벌써 두려워서 즐거운 잔치로 장례식을 치른다거나 컴퓨터가 고인의 생전 모습을 흉내 내도 깊은 슬픔을 덜어줄 수 없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고인을 애도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고인과의 이별에 슬퍼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고인을 기릴 수 있는 살아남은 자의 예의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계에 의존하는 모습은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는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 된다. 물론 식음을 전폐하고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릴 정도로 깊은 슬픔에 헤어나지 못한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몽테뉴는 나이가 들어서 이가 갑자기 빠지듯이 우리가 맞이해야 할 죽음도 자연스러운 삶의 단계라고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몽테뉴의 말을 곱씹어본다면, 상대방이 죽으면 어떻게 감정을 다스려야 할지 몰라서 두렵더라도 거기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걱정에 집착하면 마음만 병들 뿐이다. 누구나 겪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을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게 착실하게 살아간다면 미리 죽음에 겁먹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어진다. 천상병 시인의 유명한 시구처럼 죽음을 소풍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삶의 순리라고 받아들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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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
김향아 지음 / 책과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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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윤동주 시인은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부끄러워했다. 삶의 어려움과 엄숙함에 쓰인 자신의 시가 진실한 것인지 자아 반성을 통해 얻은 시인의 결론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러나 시인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는 지금도 우리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순수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유복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이타적인 시인의 시선은 언제나 주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는 쉽게 써져서 나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세상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감성이 아니면 이런 주옥같은 시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김향아 시인의 제1시집 『세월이 소리 없이 가버렸다』은 인생 살기 어려운 시대에 나온 쉽게 쓰인 시다. 시는 대체로 단조로운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이 긴 시는 많아야 두 쪽 이상 넘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집에 시적 감정을 질질 끌면서 길게 쓴 시가 없다. (이 시집에서 제일 긴 내용으로 이루어진 시가「울 오빠」이다) 그리고 시인은 난해하면서도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다. 시구 한 줄 한 줄에 여성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 있어 독자의 눈과 마음에 단숨에 박혀 버리게 만든다.

 

 

그냥 당신이 좋아요
왜냐고 묻지 마세요
이유가 없거든요

 

그래도 알고 싶다면
지나가는 바람에게
살며시 물어보세요

 

혼자 하는 독백을
스치던 바람이
들었을 것 같군요

 

당신이 보고플 땐
하늘을 보았어요
떠 있는 뭉게구름이
알려 주겠군요

 

당신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묻는다면
"그냥"이라 말하겠어요

 

 

(「당신이 좋은 이유」, 76쪽)

 

 

김향아 시인의 시는 원태연, 용혜원, 이정하의 사랑시처럼 독자에게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대상 또는 그와 함께한 시간을 그리워한다. 대상을 향한 보고 싶은 감정을 절제하지 않는다. 시에 드러나는 주제는 단순하고, 어디에서 본 듯한 상투적인 표현이 많이 보이게 된다. 시는 쉽게 읽혀지더라도 시인의 개성이 돋보이지 않는다.

 

시를 즐겨 읽고, 시 작문을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야박하게 평가했을 것이다. 이게 과연 정말 시라고 쓴 것이며 독자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을 수준이 되는지 시인의 능력에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대한문인협회에 등단했다. 하지만 시를 냉정하게 문학성 위주로 평가한다면, 기교와 표현력이 부족한 ‘아마추어’ 수준에 벗어나지 못한다. 시를 너무 쉽게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면 「비가 내리는 날」은 감수성이 충만한 독자라면 매력적인 시로 보겠지만, 비가 내리면서 느끼게 되는 센티멘털을 전달하는 비유가 새롭지 못하다.

 

 

비가 내린다
마음에도 내린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이내 사라지지만

 

마음으로 내리는 비는
차곡차곡 쌓인다

 

쌓이고 쌓여 강을 이루면
그대 내게 올 수 있도록
작은 종이배 하나 띄우렵니다

 

 

(「비가 내리는 날」, 21쪽)

 

 

비는 하늘에서 뚝뚝 떨어진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우울해지고, 잊고 있던 감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갑자기 울고 싶어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얼굴에 내리는 슬픈 감정의 눈물로 대치되는 비유법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러한 비유는 시를 쓰지 않는 사람도 생각할 수 있다. 참신한 비유도 너무 흔하게 사용되면 독자의 딱딱한 마음을 녹이는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시를 쓰게 되면 다양한 비유법을 알아야 하고, 기존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시는 모든 감정을 문장으로 술술 풀리듯이 써내려가는 쉬운 글이 아니다.

 

시인의 첫 시집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많이 받지 못할 만큼 부끄럽다. 그렇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쉽게 썼다는 점에서 시인의 노력을 높게 사고 싶다. 약간 오글거리는 면은 있으나, 대체로 시가 귀여우면서도 순수하다. 반면에 슬픈 여운이 느껴지는 시도 있다. 시집에 병으로 쓰러진 오빠를 걱정하는 각별한 애정(「울 오빠」) 그리고 어머니의 따듯한 품을 그리워한다(「늦은 눈」).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없든 같이 있든 그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는 지고지순한 사랑 감정을 과감하게 표출하기도 한다(「당신이 좋은 이유」「님이시여!」「기다림 2」「그거 알아요?」「꿈」)

 

 

어디쯤 와 있을까?
지금 나의 위치는
세월이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달려왔다
잠시 뒤돌아본 나의 삶에는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빌딩처럼 서 있구나!

 

행복했던 시절들
멈추고 싶었던 순간들
너무나 슬펐던 기억들
지우고 싶은 시간들

 

내 곁에 머물렀던 그리운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갔을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린
보고 싶은 사람들......

 

 

(「삶」, 116쪽)

 

 

하지만 시인은 그들을 그리워하기보다는 그들과 함께했던, 이제는 소리 없이 지나가버린  세월의 흔적을 만나고 싶어 한다. 시인에게 시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추억의 대상(어머니,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 등)들을 다시 불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시인의 마음으로 되돌아온 것들은 문장으로 형성되어 독자들 앞에서 복원된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고 산 건 아닌지 자아 반성을 한다.

 

평범한 시를 읽었다고 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혹시 시인이 첫 시집이 흡족하지 않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점점 더 인생 살기 어려워지는 요즘, 이런 쉽게 쓰인 시가 나는 더 반갑다. 쉽게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순수한 마음으로, 순수한 표현을 구사하는 시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 순수한 감정 그대로 다음 시집에서도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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