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내다본 창 밖 풍경은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그래서였을까? 문득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네는 살면서 사랑을 많이 해봤나?”

 

원칙주의자로 일만 알고 살아온 항공 책임자 리비에르는 상대의 대답을 다 듣지도 않는다. “자네도 나랑 같군. 시간이 없었단 말이지.” 이 작품 속에서 리비에르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쯤 됐을 것이다.

 

그래, 그도 나처럼 즐겁고 달콤한 것들을 언젠가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미뤄 왔을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삶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그런 여유를 얻는다면 그때는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사랑도 있는데.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난 그녀의 미소 때문에, 그녀의 모습 때문에,

그녀의 상냥한 말씨 때문에,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와 잘 어울리기 때문에, 언젠가 기쁨을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해”라고 말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이여, 이런 것들을 스스로 변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맺은 사랑은 또 그렇게 풀릴지 모르니,

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그대의 애정 어린 연민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도 마세요. 그대의 위로를 오래 받은 나의 사랑이

울기를 잊어버리면, 그로써 그대의 사랑을 잃을 수도 있으니.

그러니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나를 사랑해 주세요.

그대가 영원한 사랑으로 나는 늘 사랑할 수 있도록.

 

 

-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20쪽) - 

 

 

이 시를 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은 8세 때 호메로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읽고, 14세 때 서사시 『마라톤의 전쟁』을 쓸 만큼 조숙한 소녀였다. 그러나 소아마비에 척추병, 동맥파열 등이 겹쳐 늘 자리에 누워 지내야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와 시 쓰기. 그녀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뒤,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당신의 시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을.’ 여섯 살 연하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보낸 연서였다.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웠다.

 

이들은 주위의 반대 때문에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가서 둘만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그곳에서 사랑의 힘으로 병을 극복한 그녀는 네 번의 유산 끝에 훗날 조각가로 활약하는 아들까지 낳았다. 15년 동안 ‘옛 슬픔에 쏟았던 정열’과 ‘어릴 적 믿음’을 아우르는 행복 속에 살다가 남편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헤아려 보죠. 존재와 은총을 베푸는

이상적인 존재의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게 느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햇빛과 촛불 곁에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조용한 필요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투쟁하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해요.

사람들이 칭찬으로부터 돌아서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해요.

옛날에 내가 슬픔에 쏟았던 정열로, 내 어린 시절의 신앙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가 잃어버린 성자들과 함께

내가 잃어버린 것 같은 사랑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내 평생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해요!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오로지 그대를 더욱더 사랑할 거예요.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58쪽) -

 

 

「내가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요?」는 그녀가 ‘한평생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온전히 사랑한 남편에게 바친 연애시다. 병석에 누워 지내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해 준 남편을 통해 ‘잃은 줄만 여겼던’ 열정을 되찾고 한없이 큰 사랑 속에서 삶을 마감한 그녀의 생애를 생각하면 더욱 애틋하다.

 

 

 

 

 

 

 

 

 

 

 

 

 

 

 

사랑은 꼭 이렇게 해피엔드로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 『시라노』는 주인공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사랑처럼 말이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무적의 검술가인 시라노는 재기 넘치는 록산느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지만 흉물스러운 코를 가진 추남이라는 생각에 선뜻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지 못한다. 반면 록산느는 그저 잘생겼을 뿐인 크리스티앙에게 반한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열정적인 연애편지를 써주고, 그의 영혼을 담아낸 편지 덕분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크리스티앙은 곧 전쟁터에 나가 죽고 록산은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시라노는 그 후 14년간 매주 록산을 찾아가 위로해준다. 괴한의 습격을 받아 큰 부상을 입은 날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모자를 눌러쓴 채 록산느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읽어준다. “록산느, 부디 안녕히, 난 곧 죽을 것이오! 내 마음은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을 것이오. 지금도, 저 세상에 가서도 당신을 한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 당신을….”

 

어느새 황혼의 어둠이 짙게 깔리지만 시라노는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나간다. 록산느는 시라노가 지켜 왔던 숭고한 침묵의 진실을 깨닫는다. “어떻게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죠, 이렇게 어두운데? 아! 너무나 많은 것들이 죽고 태어나는군요! 왜 지난 14년 동안 입을 다무셨나요? 이 편지에 남은 이 눈물은 당신이 흘린 것이었나요?”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시라노는 칼을 치켜든 채 죽음의 여신을 향해 마지막 대사를 외친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늘 성공할 거라는 희망으로 싸우는 건 아냐! 헛된 명분을 위해 의미 없는 싸움을 해왔으니까!”

 

에드몽 로스탕은 17세기 프랑스의 실존 인물인 이 주인공에게 기형적으로 거대한 코라는 외적 장애를 준 대신 더욱 헌신적인 사랑을 구현토록 했다. 게다가 세상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정신은 시라노를 더욱 멋진 인물로 만들어 준다. 처음부터 록산느가 사랑했던 것은 크리스티앙의 외모가 아니라 고귀한 사랑의 마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에서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른 아무것도 아닌, 오직 사랑 그 자체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라는 구절처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절대적 사랑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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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도 코가 큰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하더라구요.
시도 잘 쓰고, 칼도 잘 쓰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니~ 부럽네요.
저도 한때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부질없이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4-03-05 21:52   좋아요 0 | URL
저도 건강을 위해서 운동 하나쯤은 해봐야하는데.. 엄청 돌아다니면서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몸 움직이는 운동은 하기 싫은지 모르겠어요.. ^^;;
 
독서의 역사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정명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재미와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쉬고 싶거나 잠들기 위해 책을 들기도 한다. 또,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모르는 것을 배워 알기 위해 책을 뒤지기도 한다.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손쉽게 퍼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책의 매력이다.

 

내가 바로 떠올린 책은 잠자는 우리 정신을 일깨우는 책, 그래서 우리가 마구 불편해지는 책이었다. 그런 책을 발견하는 감동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만약 휴식이나 재미를 얻고자 한다면,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음악 감상, 야외활동, 수면, 영화 감상 등을 통해서도 목적달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생각의 날을 세우고 성찰의 폭과 깊이를 키우는 데 책에 비할 만한 것은 없다. 철학책이 존재하는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을 읽는 데서 얻는 만족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내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독서는 대부분 묵독할 때, 즉 소리 내지 않고 읽을 때 가능한 것 같다.

 

소리 내어 책을 읽게 되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상념은 물리칠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사색 속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그런데 묵독의 역사는 소리 내어 읽기의 역사에 비해 짧다고 한다. 고대의 도서관에서만 해도 다들 소리 내어 웅얼거리며 책을 읽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독서가들이 얼마나 집중해서 책을 소화해낼 수 있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책이 많지 않던 시절이니, 어쩌면 같은 책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반복적인 독서가 암송으로 이어지고, 암송을 할 수 있을 정도니 의미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읽을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더 효율적인 독서법으로 묵독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책을 소리 내어 읽건 소리 없이 읽건, 책의 글자가 제공하는 사전적 의미, 즉 글쓴이가 애초에 의도한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그친다면 독서의 묘미는 줄어든다. 책 읽는 이가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독서가의 능력과 욕망에 따라 확대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심지어 대단한 독서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똑같은 책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만 해도 다시 읽어 보니, 그때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독서가는 분명 수동적인 의미수용체만은 아니다. 책 읽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의미를 생산하면서 변화해간다. 침묵한 채 정신을 긴장시키고, 찬찬히 문자를 눈으로 집중해 따라갈 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발견해 낸다면, 이미 변화의 출발점에 섰다. 우리가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일 수 없다.

 

책 읽기와 관련한 좋은 점들을 나열하자면 길다. 그럼에도 책 읽기는 솔직히 위험하기도 하다. 천식을 유발하는 책 먼지만 위험한 것은 아니다. 시력이 약해져서 안경을 써야 하고, 심지어 보르헤스와 같은 작가처럼 영영 시력을 잃을 수도 있다. 두꺼운 안경이 없으면 책을 읽을 수 없는 나는 지금처럼 책을 계속 보다가는 언젠가 시각장애인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곤 한다. 비록 곁에서 책을 읽어 줄 사람을 구하거나 점자책을 활용하는 등 다양한 대안을 찾기야 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껏 읽을 수는 없을 테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무엇보다도 독서의 가장 큰 위험은 현실의 삶과 단절되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읽는 습관이 지나치게 되면 실제 삶을 질식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책 읽기의 중독에 빠지면 진짜 현실이 아니라 책 속의 현실에 갇혀 삶을 등한시할 것도 같다. 나는 책이 내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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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yana 2014-03-0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경신의 <도서 대출 중>에서 본 <독서의 역사> 리뷰가 떠오르네요. 책장에 꽂아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먼지 털고 한 번 펼쳐봐야 겠네요. ^^;;

cyrus 2014-03-04 23: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Tatyana님. 저도 오래전부터 읽으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읽은거예요. 제가 독서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 책 지루하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재미있었어요.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제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 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 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틈이 안 보이는데. 들어가면.

  또 틈이 있는 벽보판까지.

 

 

 

  (중략)

 

 

 

  타워 크레인이. 철근 하나를 공중 100M 높이로 끌어올리고 있다.

  아아아아아아 나는 무모성을 본다. 근면과 광기. 성실과 맹목. 나는 보고 또 보고.

  굴착기는 맹렬하게 아스팔트를 뚫고. 자갈을 뚫고. 암반을 뚫고.

  정신없이 퇴적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그러나.

  의외로 곱고 새하얀 그 순결한 흙을 퍼올리는 포크레인이

  지하 20M에 있다는 것은.

  열정도 신념도 아닌. 연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하지만 세상을 연민으로 바라보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러나

  아아아아아아아 가엾어라. TNT 사제 폭탄을 들고

  은행엘 쳐들어간 청년은 자폭했고(중앙일보 9월 2일자).

  술집 호스티스는 정부에게 알몸으로 목졸려 죽었고(한국일보 6월 15일자).

  방범대원은 한밤에 강도로 돌변하고(경향신문 12월 7일자).

  아들은 술 취한 아버지를 망치로 내리쳐 죽이고(서울신문 4월 11일자).

  노름판을 덮친 형사가 판돈 몽땅 꼬불치고(MBC라디오 12시 뉴스 7월 26일자).

  교사가 여학생을 추행하고(조선일보 11월 30일자).

  신흥사 주지들 칼질 뭉둥이질(KBS제2라디오 8월 3일자).

  디스코홀서 청소년들 집단적으로 불타 죽고(연합통신 4월 14일자).

  前 중앙정보부차장이 억대 사기를 치고(동아일보 3월 6일자).

  아 세월은 잘 간다.

  눈 먼 세월. 잘 간다.

  나는 손 한번 못 댄 세월. 잘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 속으로.

  잘 간다.

 

 

  - 황지우 「활로를 찾아서」중에서 -

 

 

 

꽃피는 춘삼월이라고 했다. 만물이 희망의 싹을 활짝 틔우는 계절이다. 봄꽃이 평년보다 사흘 정도 빨리 필 것이라는 예보가 나올 즈음 안타까운 사건사고 소식이 전해져 마음을 아리게 한다. 리조트 붕괴로 이제 막 피는 청춘들의 목숨을 앗아간 안타까운 소식의 여운이 지나지 않았건만 생활고에 시달리던 세 모녀의 동반 자살이 또 한 번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무엇이 그들의 가슴을 짓눌렀기에 그리 됐을까. 이들은 서울 반지하 셋방에 살면서 고달픈 삶의 무게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식당일을 하는 60대 어머니와 병마에 시달리던 30대 큰딸, 그리고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둘째 딸의 기구한 삶은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스러지고 말았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가장 노릇을 하던 어머니가 넘어져 팔을 다친 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면서부터다. 그동안 세 모녀는 방세와 공과금이 밀린 적은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방세와 공과금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까지 세 모녀의 삶은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암담하고 견디기 힘들었으면 죽음을 선택했을까? 무엇보다도 ‘같이 죽자’하고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세 모녀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을까? 아마도 엄마는 딸들을 생각하고, 딸들은 노모를 생각하며, 그렇게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을 것이다.

 

반면 세 모녀와 반대로 더러운 마지막도 적지 않다. 선임들의 가혹행위에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병사의 죽음을 은폐하고 동료 병사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금한 조의금까지 빼돌린 파렴치한 간부들의 행태가 뒤늦게 알려졌다. 온갖 해악을 저지르고도 일신의 안위만 영위하고자 타인의 죽음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군상이 주변에 어디 하나둘인가.

 

경주 리조트 강당 붕괴, 대학생 9명, 사망 70여명 부상 (한국일보 2월 18일자)

“공과금 밀려 죄송해요”, 모녀 셋 안타까운 선택 (중앙일보 2월 28일자)

가혹행위로 자살 육군병사 조의금까지 가로챈 여단장 (동아일보 2월 28일자)

 

눈 뜬 장님처럼 우리는 눈 먼 세월을 보냈다. 약자를 외면하고 따돌렸던 우리가 계속 눈을 감는다면 손 한 번 못 댄 세월은 그렇게 간다. 아직 오지 않은 사고와 사건과 사태와 우발과 자발과 불발의 세월이 이어질 것이다. 열정과 희망의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세월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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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 국회 기자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국회 정치의 모든 것
양윤선.이소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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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슬랩스틱 희극인이자 무성영화 감독 찰리 채플린. 그의 1936년작 「모던 타임즈」는 산업화의 폐단과 그 속을 살아내는 노동자들의 아픔을 절묘하게 풍자한 역작으로 불린다. 70여년이 넘도록 각기 다른 국가에서 각기 다른 역사가 생성되는 동안에도 항상 현시대의 고민에 투영돼 재해석 되고 있다.

 

영화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시계는 생산과 효율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에 쫓기는 노동자의 삶을 상징한다. 컨베이어벨트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찰리 채플린 분)은 하루 종일 양손에 든 공구로 나사못을 조이는 단순한 일을 반복한다. 자본가인 사장 지시로 작업반장은 기계의 속도를 점점 더 높인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생산성이 증대되고 사장은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다.

 

공장의 화장실에는 감시 카메라가 있어 조금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동급식기계는 점심식사의 여유조차 사치인 노동자들의 입에 음식물을 투여한다.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조여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과 작업반장이 컨베이어벨트의 커다란 톱니바퀴에 끼여 이리저리 돌며 쫓고 쫓기는 장면은 그야말로 슬랩스틱의 진수를 보여준다. 중년 여성이 입은 옷의 가슴팍에 달린 단추를 나사못으로 착각해 조이려는 장면에서는 웃음보가 터진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날 멈춰선 채 정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국회를 보노라니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떠오른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과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영화에 국회의원이란 단어는 아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이 속한 곳에서 효율성을 제고해야 하는 산업화, 현대화의 산물이라고 보면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리라는 거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채플린이 나사못을 조이듯 무의식으로 의사봉을 휘두르고, 눈을 치켜뜨며 습관처럼 호통만 치니 말이다.

 

다만 우리와 다른 면이 있다면 둥글게 돌아가는 시간이란 궤적에는 얽매이지 않는 점이랄까. 급한 것이란 없다는 듯 매년 같은 행동을 여유롭게 반복한다. 국민에 고용된 노동자라는 점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듯 대통령이나 권력자에게 고용된 것인 양, 그들이 급여를 주는 것인 양 착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정치 뉴스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정치인들은 왜 싸울까?’ 매일 저녁 정치인들이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채널을 돌리고, 선거 때마다 뽑을 사람이 없다고 푸념을 하는 건 결코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만 정치에 관심이 있을 뿐이고, 가족이나 주위 사람 중 정치하는 사람이 있을 때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모든 국민이 마음 깊숙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가 정치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과 국익을 위한 정치가 되기를 모두가 소망하고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나라 정치에 많은 불신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 어떤 사람이 해도 ‘정치가 달라질 것이 없으니 알아서 하세요’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 우리 국민이 깨어있지 못하고 무관심했기 때문이고 이대로 놔두면 정치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신뢰는 무너진 지 오래고, 정치 자체에 대한 염증은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로 굳어져버렸다. 더 이상 정치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아니 정치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려 들지도 않는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정치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국회는 또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가 제대로 알긴 할까.

 

『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의 공저자이자 국회의 24시간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국회방송 소속 양윤선, 이소윤 기자는 국회의원들을 ‘용병’에 비유한다. 나를 대신해 싸워 줄 용병. “국회의원은 지역과 직능을 대변한다. 모든 사람이 링에 올라갈 수는 없다. 대표 선수를 올려 대신 싸우게 하는 이유다. 우리는 코치가 되어 선수를 지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일은 언제 하나 싶지만 국회의원은 원래 ‘싸우는 사람’이다. 하나의 법안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이를 조율하고 타협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인들은 그저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흔히 언론과 브라운관을 통해 본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저자들은 '내 한 표가 무엇을 바꾸겠나'라는 생각으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정치는 미래를 위해 미리 들어놓는 보험이고, 투표행위는 보험료라는 정치인의 말을 인용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악순환될 수 밖에 없고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 추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차선, 차악, 차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점진적인 정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기를 꿈꾸며 바른 민주주의의 정치를 바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얻고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혜택과 국익을 위한 정치를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역감정을 만든 정치꾼들에게 속지 말고 자신의 이익을 지켜내기 위해서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잘못된 정치를 바꾸고 진정한 민주주의로 도약하는 귀한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힘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중요한 정치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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