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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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김소연 ‘장난감의 세계’ 중에서, 『수학자의 아침』)

 

 

 

 Scene #1  누군가에게 추천하기가 애매한 책

 

독서가 은밀한 관음의 쾌감을 선사할 때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한사코 흐트러뜨리는 책이 그렇다. 윤곽을 잃어버린 피사체 위에 더 또렷하게 맺히는 상, 혹은 더 적극적으로 초점을 풀어 마치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을 탐색하듯 유쾌한 방황에 나설 때 그 쾌감은 시작된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숨에 따라 읽을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는 상대 주체가 된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고, 그런 독서는 느리다 못해 산만해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숨은 그림, 또 방황의 울렁거림, 그 느낌을 만끽할 때의 내가 머물던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쉽사리 놓지 못한다. 물론 그 느낌의 기억들이 내가 읽은 텍스트의 주제나 내용, 혹은 어떤 구절과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다시 읽더라도 복기할 수도 없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모호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떠올리며 매번 느끼던 당혹감도 그런 꺼칠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내용과 개인적 감상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전달할 수 없고,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자니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면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양서나 고전 추천도서 목록을 소개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몇 권 꽂혀있지 않은 책장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다가 ‘뭐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라는 식으로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소개해서 공감을 얻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아마도 거기에 부합되는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다.

 

 

 

 Scene #2  마들렌 과자 하나로 ‘나’를 발견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작가들은 바로 이야기 때문에 구속을 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포기하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지고 이야기에 매달리다 보면 사물을 정밀하게 표현할 수 없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운 소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바로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프루스트는 사건의 전개가 강조되는 이야기보다 사물 그 자체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글쓰기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첫째이며, 소설도 글쓰기의 연장일 뿐이라는 신념 위에 철저히 묘사의 수련을 쌓아 오던 프루스트였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15쪽)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니가 재워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화자인 ‘나’(마르셀)의 어린 시절. 여름에 레오니 고모집이 있는 콩브레에서 보냈던 일. 성당의 엄숙한 아름다움. 그런 속에서 예술 종교 철학 사랑에 점차 눈 떠간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내용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과거를 찾아가는 계기의 특별함에 의해 이 평범함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성인이 된 화자가 어느 날 침울해 있는데 어머니가 홍차와 과자를 준다. 홍차를 마시다가 그는 느닷없이 몸속에 솟구치는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1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극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극적인 감각의 전환 장면이 없었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일상 속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내려간 지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86, 88쪽)

 

화자가 마들렌을 혀로 맛보는 이 장면만 여러 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맛이 어린 시절에 맛 본 차 맛과 겹치면서 생생한 과거를 떠 올린 게다. 홍차 적신 마들렌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그렇게 만나는 과거는 경험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참신하다. 화자, 즉 프루스트는 말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가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을 내 안에서 찾도록 일깨워주었다고.

 

반면 화자의 오감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범속한 일상을 생생한 감동의 그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 이동과 중문 복문으로 구성된 문장은 중첩된 이미지끼리 어울리면서 사물을 한층 의미심장한 것으로 확충한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았다.” (16쪽)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이런 태도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Scene #3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

 

한편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담고 있다.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Scene #4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

 

끝없이 붙잡고 미끄러지는 과거를 쫓는 욕망, 지금의 현재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달음박질. 이 두 가지 삶의 반응은 주체와 대상이 달라진 줄도 모른 채 환상 같은 맹목의 힘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한 순간 어떤 계기에 멈춰 서서 돌이켜본 뒤 그 잃어버린 시간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된 자의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만은 아니다. 사물도 사람도 책도, 한 순간의 기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1부부터 기억의 장황하고 중층적인 서사, 집요하고 밀도 높은 묘사와 사념의 문장들로 이어지는 소설은 질로나 양으로나 단숨에 읽기는 어렵다. 나는 두어 차례 이 책에게서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총 5번이나 거절당했다. 1부 1권에서 반 정도 화자의 기억을 따라가는데 간신히 성공했을 뿐이다. 얼른 1권 2부로 넘어가야하는데 이놈의 마음은 자꾸 딴 데만 보려고 하다니. 요즘처럼 삶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점점 빨라지는 속도의 세상 속에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프루스트는 모두 잡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문자가 촘촘하게 구성된 문장의 그물망을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프루스트는 소설을 써내러 갔다.

 

눈앞의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하고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껴본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일생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 거기에 그 속에 배치된 사소한 사물마저도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

 

그렇게 본다면 프루스트는 정말 겸손하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과거를 복원하고 특별한 데자부를 경험하는 것은 우연히 맛본 마들렌 덕분이다. 마들렌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서 화자는 다시 마들렌 조각을 맛보지만, 그 때 그 순수하고도 온 몸에 전율이 돋는 그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을 글 중간에 살짝 토로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으로 다시 가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85쪽)

 

 

 

 Scene #5  황량한 삶 속에서의 경험한 축복의 시간 

 

철학자 베르그송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프루스트는 시공간을 넘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했는데 여기서 ‘비의도적 기억’과 동시간성을 통한 의미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를 기억으로 이어가고 싶어 한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기억을 이을 사람 또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어떤 매개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비의도적 기억이 현재에 소환되어 현재와 동시성을 갖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기억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기억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다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한 번 가면 지나가버리고 마는 유한적인 삶을 소중히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프루스트는 자신의 인생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한 부분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기 쉬운 과거의 영상을 기억을 통해 떠올림으로써 불가시(不可視)의 실재(實在) 시간을 찾아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의미 있거나 절실 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현재와 과거의 동시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통해 프루스트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다. 잃어버린 시간이 가망 없고 부질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우연의 회상이 그립기도 하다. 

 

이러한 절심함 때문에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창작생활을 했다. 14년 동안 코르크로 방음된 밀폐된 방에 갇혀 천식과 싸우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등지고 죽음에 쫓기며 문장을 다듬어가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를 불행했다고만 할 것인가? 그는 코르크 밀실에서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갔을 뿐이다. 잠시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과거에서 잃어버린 마르셀, 즉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 황량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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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는 지금까지 3종이 번역, 출판되었다. 2005년 열림원에서 故 장영희 교수 번역으로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로 나왔다. 올해 초에 새로운 표지로 단장하여(표지 속 인물은 작가 카슨 매컬러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185번)로 나온 것으로 매컬러스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처녀작인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종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문예출판사판은 현재 절판이다.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계문학 작품들은 옛날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흡사하다. 흰 색 바탕에 한가운데에 작은 그림을 넣었다. 표지 그림은 반 고흐의 「아를의 밤의 카페」이다. 화려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흐의 카페는 작품 속 인물인 아멜리아, 라이언 그리고 마빈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기 전 행복했던 카페의 분위기가 연상된다.  과거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슬픈 카페의 노래』는 세계문학선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 중 하나이다. 

 

내가 가진 책은 1996년 초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유명한 세계문학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 소개한 이력이 있는 문예출판사답게 정현종 번역본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아마도 카슨 매컬러스의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한 출판사가 문예출판사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번역본이 남아 있어서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이 잊힌 감이 있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표지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매컬러스의 다른 단편소설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덧없는 생’, ‘사랑의 딜레마’, ‘나무, 바위, 구름’, 3편이다. 1972년판 당시에는 ‘사랑의 딜레마’는 처음에 ‘가정불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덧없는 생’은 ‘체류자’로, ‘사랑의 딜레마’는 ‘가정의 딜레마’라는 바뀐 제목으로 ‘나무, 바위, 구름’과 함께 단편집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열림원)에 수록되어 있다.

 

 

 

 

 

 

 

 

 

 

 

 

 

 

 

매컬러스의 작품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로테스크한 고딕 문학이 특징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전개된다. 그녀는 ‘남부 고딕문학’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슬픈 카페의 노래』『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외에도 1946년 작 『고딕 소녀』(The Member of the Wedding)도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극화하여 상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1961년 작 『바늘 없는 시계』는 『슬픈 카페의 노래』와 함께 수록되어 나온 적 있으나 출간된 지 오래되어서 시중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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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에서의 죽음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 더크 보가드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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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통감했다 (토마스 만)

 

 

 

 

 Scene #1  아름다움에 사로잡힌 예술가, 아셴바흐

 

 

            

 

G. Mahler / Symphony No. 5  Mov. IV. Adagietto

 

 

 

 

아름다움은 위험하다. 미에 사로잡힌 자는 달콤한 질식에 숨통이 조여 오는 줄도 모르고 그저 헐떡거릴 뿐이다.

 

마치 죽은 자가 지상과 저승의 경계를 이루는 스틱스 강을 건너듯 안개 낀 베니스를 건너가는 장면이 음울한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의 느린 4악장을 배경으로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자기통제야말로 한 인간이 발전해 가는 일종의 운명이라 믿고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누리며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아셴바흐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작품에 열렬한 유희적 흥취가 결여됐다는 자각과 함께 ‘이국적인 바람’과 ‘새로운 피를 솟구치게 할 무엇’을 좇아 베니스로 향하게 된다.

 

 

 

 

 Scene #2  예술가의 정체성

 

 

 

 

 

 

언뜻 들으면 ‘열정에 우롱당해 사랑에 빠진 늙은 남자가 가당치도 않은 희망을 품은 채’ 혼란스러워 하는 감정의 때늦은 모험이야기 같다.

 

 

 

늙음과 젊음의 대비, 삶과 죽음의 대립을 테마로 예술가와 시민성, 예술적인 삶, 디오니소스적 도취와 무질서, 절대성의 지향 등을 내포한 이 소설은 예술가의 정체성을 늘 고민한 토마스 만의 다른 소설들과도 일맥상통한다.

 

 

 

 

 

 

영화 감상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소설과 영화의 다른 점을 두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는 소설 속의 작가인 아센바흐는 영화에서는 음악가가 된다. 영화는 문인보다는 음악가를 그리는 것이 훨씬 수월함에서이다. 음악가로부터는 그의 음악을 듣게 할 수 있는 반면 문인은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간접적으로 표현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아센바흐가 작곡가로 등장하면서 음악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두번째는 소설의 서사구조를 삭제하고 또 덧붙이는데 있다. 영화는 소설의 1, 2장을 삭제했고 3장에서 시작하여 소설 줄거리를 쫓아가면서 원작에는 없는 7번의 회상 장면을 삽입한다.

 

영화는 아센바흐가 오직 미소년을 보려는 감정의 격량속에 휘말릴 때마다 말은 사라지고 음악이 깔리면서 보고자 하는 시선의 욕망을 부각시킨다. 토마스 만이 언어를 매개로 빼어난 산문 예술을 창조했다면 비스콘티는 시각과 말러의 음악을 매개로 탁월한 영상 예술을 만들어내었다.

 

음악은 이야기를 따라 빈번하게 사용되면서 후에 진행될 복잡하고 다의적인 표현을 암시한다. 아센바흐가 타치오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소년에 대한 감정의 변화, 이별,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그를 동반한다. 음악은 타치오에게 결코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아센바하의 감정을 선취하여 알려준다. 이 순간부터 아센바흐는 언제나 아름다운 소년을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음악에 깊이 압도되는 장면은 아센바흐의 죽음에서이다. 그가 죽어가면서 쓰러지기 직전 관광객들이 거의 떠난 쓸쓸한 해변에서 아카펠라로 이어지는 자장가를 들으며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갈 때 뒤이어 아다지에토가 비통한 시간의 파동이 되어 죽음의 길에까지 동반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을 통해서는 정신에 도달할 수 없고, 오직 감각을 완전하게 지배하게 될 때만 성취할 수 있다. 예술이란 그렇게 고양된 정신을 감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이 하나로 겹친 미소년 타치오를 통해 신체성에 깃든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관능들은 정말 극복되고 배제되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Scene #3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예술가는 어떤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좇아 채집하는가. 아름다움의 심연은 결코 살짝 외접해 지나가는 방식으로는 들여다 볼 수 없다. 예술가가 절대미라는 실체의 겻불이나마 쪼이려면 광기와 혼돈의 염천 아수라를 돌파해 비밀의 불씨 하나라도 챙겨 와야 한다. 그 영감의 불씨로 비로소 창작의 열탕을 끓일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극단까지, 끝까지 간다는 것에는 죽음의 냄새가 풍긴다. 그렇기에 제정신을 잃고 미에 침 흘리는 탐미적 예술가들은 시나브로 죽음의 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그들은 경련적 혼돈을 일으키는 이 황홀의 느낌을 따라 죽음의 불길로 뛰어드는 부나비들이다.

 

그러나 영화 초반부에서 아센바흐는 예술의 불온한 광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물로 나온다. 탐미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광기어린 열정은 명철한 조형적 기율의식으로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건강하고 건전한 교육적 예술을 신봉한다. 그의 신분이 이제는 창작혼이 시들해진 대학교수로 나오는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던 그가 한없이 무너진다. 휴양차 방문한 베니스에서 ‘완벽하게 신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타치오를 그만 목격하고 만 것이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정체모를 돌연한 설렘의 물살이 인 바로 그 순간, 그는 아름다움의 심연에 위험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존재를 흔드는 치명적 아름다움은 가장 오래 기다린 자를 위해 오는 건 아니다. 아름다움의 섬광은 이처럼 매복과 기습에 능하다.

 

아센바흐의 이성은 에로스의 신에 무릎 끓었다. 베니스에 콜레라가 창궐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 와도 무감각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정열의 노예가 돼 버렸다. 관광객은 하나 둘씩 떠나거나 죽어가고, 화장기 걷힌 베니스는 썩은 내 나는 폐허로 변해 있다. 결국 그는 죽어야 했다. 콜레라에 전염된 듯 신열에 떨며, 식은땀을 흘리며, 바닷가 의자에 앉아 타치오를 바라보며 그렇게 쓰러져가야 했다.

 

 

 

 

 

 Scene #4  같지만 다른 아셴바흐의 죽음 

 

원작이 ‘예술가에 대한 성찰’이였다면, 영화는 ‘예술가를 위한 변명’이다. 따라서 똑같은 아센바흐의 죽음도 그 성격은 다를 것이며 토마스 만이 보는 아셴바흐와 루이스 비스콘티가 보는 아셴바흐는 동명이인일 것이다.

 

먼저 원작과 영화 초반부에 설정된 아센바흐의 심리적 처지부터가 다르다. 원작에서의 시인 아센바흐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고전적 예술로 이미 성공한 인물이다. 즉 그는 베니스에 올 때부터 아폴론적 요소로 자족해 있는 예술가이다. 그러다가 예기치 못한 쇼크로 그 자족 상태가 무너져간다.

 

이에 비해 영화에서의 음악가 아센바흐는 당초 탐미 없는 예술로 쓰디쓴 실패를 맛본 처지다. 그는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결핍으로 한계를 느끼던 차였다. 베니스에서 그는 미의 충격적 광기를 접하며 이 결핍 상태가 점차 채워져 감을 느낀다. 니체가 “인간은 자기 운명이 자기를 어디로 더 데려갈지를 모를 때 가장 높이 솟는다”고 했던 바로 그 디오니소스적 고양의 황홀감을 맛보며 죽어간다. 따라서 원작의 죽음이 돌연사라면 영화의 죽음은 안락사이다. 전자가 비참한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행복한 죽음의 향을 피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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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변화 없는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책상을 왜 항상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책상은 양탄자로, 양탄자는 옷장으로, 옷장은 신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방에 틀어박혀 모든 것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물과 언어의 짝짓기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는 공책에 자신이 바꾼 새로운 단어들을 적어놓고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차츰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쓰던 원래의 언어를 대부분 잊어버리게 되어 자기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남자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만든 셈이다. 노인은 외계인이 됐다.

 

중학생 시절 이 슬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공책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모든 낱말을 바꾼 것이 그 남자 자신이며, 그이가 많은 것을 기억하려 노력할 것이지만, 기억이란 기록보다 불완전하고 미심쩍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속에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남자 이외에도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세상을 등지고 수십 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의 한없는 자유로움과 한없는 무의미함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서 평소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던 일탈을 실행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이들 틈에 있어도 한없이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때 우리의 대화를 끈끈하고 이끌어주던 종교적 믿음과 사상적 명분 등의 거대한 신념체계들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나를 광고하고 나의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능력 있음과 나의 무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자본의 세계에 설득해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도태되는 것, 내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잘 포장된 진실 속에서 이제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밤의 불안을 각종 자기개발서로 덮어가면서 이렇게 서서히 ‘나’라는 인간은 소모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모든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거나 가벼운 잡담이다. 겉도는 대화, 체면치레인 몇 마디 말, 외로움을 고립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끼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간결한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함축적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언어로 택했을 뿐 언어의 굴레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변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의 어려움이다. 개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동참, 뚜렷한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을 꿈꾼 사람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기존의 이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물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이 명명식은 남자에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옹알이를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말문을 트고 하나하나 단어를 익혀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을 짖지 않는다. 이처럼 책상이 반드시 '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그는 그 식대로 바꿔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소통조차도 불가능해지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침묵했고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둘째의 말 배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옹알이하던 때의 갇히지 않았던 그 말들이 이제 딱딱한 형식과 약속 속에 갇히고 있다. 책상은 역시 책상일까.

 

낱말을 자기식대로 바꾸어버려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린 한 남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소통불가능의 상태였다.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자적 형태의 이웃들 틈으로 난 균열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단절의 감정을 밀봉하려고 서로를 향해 배시시 웃는 가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선택한 방법이 어리석기 그지없더라도 달라지기를 바랐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 이 회색빛 주인공에게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나만의 낱말을 만듦으로써 거짓 소통에서 멀어져보려 한 이 남자에게 어리석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낱말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른 남자는 낱말이 가진 강제성을 알고 있었을까? 낱말은 나의 사유를 돕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나의 사유의 확장을 억압한다. 유교가 사회의 지배논리였던 시대에는 권력자에 의해 유교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형성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일부종사니 상명하복이니 입신양명 등의 낱말이 그렇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인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연구해 상품이 많이 팔릴만한 이름을 짓는다.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해 한 마디 슬로건을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의 연구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포장되어 출시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방금 했던 생각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곱씹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성찰지능을 가졌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느낌에 대해 느끼기.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대화는 번복과 부정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무릇 정리와 숙고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짝 포장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세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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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 사회를 넘어서  

서평단 모집 (2014.04.22~30)


─ "무엇을 사든 고장이 보장됩니다!"

 


올이 풀리지 않는 나일론 스타킹, 2500시간 사용 가능한 전구는 왜 사라졌을까?

새 컴퓨터 모델은 왜 호환이 잘되지 않을까? 아이팟 배터리 수명은 왜 18개월일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 눈부신 기술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물건들은 점점 더 빨리 고장 나는가?
‘계획적 진부화’ 개념을 통해 보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진실

경영학에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란 용어가 있다. 기업이 내구 소비재의 대체 수요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는 행동을 말한다. 진부화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진부화란 기술적 진보로 인해 기존 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옛날 청동기가 뗀석기를 대신하고, 증기 기관차가 마차를 대체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심리적 진부화란 광고나 유행에 의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경우 기존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는 겉모습, 즉 외양과 디자인의 차이, 심지어는 포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애초 설계 시점부터 제품의 수명이 조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이 삽입되어 있다. 1940년 듀폰사에서 출시된 스타킹은 올이 풀리지 않고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만큼 튼튼했지만, 자외선 차단 첨가물의 양을 조절한 이후부터 여성들은 규칙적으로 새 스타킹을 구입하게 되었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 수명은 1500시간이었고,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무려 2500시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제너럴 일렉트릭 등 기업 간 담합으로 1000시간 이하로 정해졌다. 수리가 불가능한 아이팟의 배터리가 제조 단계에서부터 이미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 가치의 쇠퇴를 대량 생산하는 ‘발전된’ 사회 일회용 제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일회용 콘돔과 생리대, 그릇, 포장 등 각종 생활 용품뿐만 아니라 수리할 수 없는 휴대용 라디오, 3년 주기로 바꾸는 자동차, 유행에 따라 리모델링하는 건물, 유통 기한이 도입된 식료품, 정년퇴직 등 이제 제품 수명 단축의 논리가 산업 생산 전체를 지배한다. 경영학자 시어도어 레빗은 다윈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product life cycle)’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계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겐세일, 정기 세일, 가격 파괴, 가격 인하, 할인, 특가, 프로모션 행사 등과 동의어가 된 소비주의는 염가 처분, 가치 하락과 상실의 정신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덕, 원칙, 이상의 상실”을 부추긴다. 

모든 
것은 판매 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가치 하락을 겪는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 벼랑 끝에 선 생태계,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향하여

평균 18개월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2002년 미국에서는 작동 가능한 휴대 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전자 제품 폐기물의 처리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셈이다.

 한편 제한된 자연 자원의 고갈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의 문제도 발생한다. 아프리카 콩고는 휴대 전화 생산에 필요한 콜탄 때문에 전쟁 중이다. 중국 서부에서 진행 중인 희토류 개발은 투르크계 주민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며, 나이지리아 니제르 삼각주의 석유 개발은 오고니 부족의 학살을 불러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신상’으로 교체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는 이런 현상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휴대폰을 오래 사용하자는 구호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건은 반드시 고장 나고 우리는 새 물건을 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검소한 생활을 제안하는 차원을 넘어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책에서 라투슈는 검약과 자기 통제, 내구재의 공동 사용, 에너지 자립을 갖춘 전환 마을 운동, 비재생자원 관리를 위한 세계 공동 기구 설립 등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 방법론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즉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민음사) 차례

 

머리말

서론: 성장 중독

 

1 말과 사물_계획적 진부화의 정의와 성격

1 계획적 진부화란 무엇인가?

2 제품이 죽어야 소비 사회가 산다

 

2 계획적 진부화의 기원과 영역

1 계획적 진부화의 등장

1 인류학적 상수

2 전통이라는 장애물

3 위조의 시대

4 사고방식의 전환

 

2 계획적 진부화의 영역

1 ‘일회용 제품’의 등장

2 디트로이트 모델

3 진보적 진부화

4 유통 기한의 도래

5 음식의 진부화

 

3 계획적 진부화는 도덕적인가?

1 계획적 진부화의 사회적 역할

2 진부화와 윤리

3 인간의 진부화

 

4 계획적 진부화의 한계

1 소비자와 시민의 반응

2 진부화와 생태 위기

결론: 탈성장 혁명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낭비사회를 넘어서』 지은이 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

1940년 프랑스의 항구 도시 반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파리 11대학 경제학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로, 발전 지상주의와 경제를 통한 세계 지배라는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서로『메가머신(La Megamachine)』(1995), 『탈성장에 걸다(Le Pari de la decroissance)』(2006), 『평화로운 탈성장 소론(Petit traite de la decroissance sereine)』(2007), 『소비 사회를 넘어서(Sortir de la societe de consommation)』(2010), 『검소한 풍요 사회를 향하여(Vers une societe d’abondance frugale)』(2011) 등 다수가 있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옮긴이 정기헌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란츠의 레퀴엠』, 『퀴르 강의 푸가』, 『프랑스는 몰락하는가』, 『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 『리듬분석』 등 다수의 책을 옮겼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 『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알라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와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4월 22일(수)~2014년 04월 30일(일) (8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 발표일은 2014년 05월 01일 (목) 오후에 공개됩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5.07(수)~05.18(일) 11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낭비 사회를 넘어서』서평 발표 페이지에

개인블로그/알라딘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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