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7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Scene #1  심령술에 빠진 추리소설가

 

탐정하면 셜록 홈즈를 떠올리지만 셜록 홈즈하면 코난 도일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작가 코난 도일이 창조한 ‘완벽에 가까운’ 명탐정 셜록 홈즈는 추리소설의 상징적인 인물인데 반해 그 창조주인 코난 도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흥미진진한 소설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도일은 그러나 “홈즈가 지겨워졌다”고 토로한 바 있다. 홈즈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1893년. 작가는 『최후의 사건』에서 홈즈를 폭포에 떨어뜨려 죽인다. 작중 인물에 싫증이 난 것일까. 작가의 명성을 압도하는 그에게 질투를 느낀 것일까.

 

그 반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런던 시내에는 검은 상장을 단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고, 군중은 소설 속 홈즈의 집이 있는 런던 베이커가 221B번지로 몰려가 가상의 인물을 연호했다. 항의편지에 시달리던 출판사는 작가를 달래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았다. 그러나 독자들의 원성에 결국 홈즈를 부활시켰다.

 

도일은 ‘홈즈의 작가’가 아닌 ‘역사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다. 사실 홈즈 시리즈가 나오기 전에 도일은 역사소설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리고 초현상을 소재로 다룬 공포소설도 쓰기도 했다. 홈즈는 초현상을 믿지 않을 정도로 이성과 명석한 논리로 무장한 인물인 반면에 도일의 실제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만은 않았다. 도일은 말년에 심령술에 무척 관심이 많아 세계심령학회 회장도 지냈다. 1920년대 영국은 심령학이 엄청난 유행이었는데 그 때 ‘코팅리 자매의 요정 사진’이 공개되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코팅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요정’으로 추정되는 사람 형상과 함께 사진에 찍힌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이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한 눈에 봐도 조작된 사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도일은 이 사진가 진짜라고 믿었으며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요정들의 출현』이라는 책도 발표했다. 유명 인사가 사진을 진짜라고 주장하자 꽤 많은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자 사진의 위조사실이 밝혀졌다. 코팅리 자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사진 속 요정은 마분지와 실로 만들어낸 요정이라고 실토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홈즈의 작가 도일마저 조작된 사진을 쉽게 믿고 만 것일까. 당시 1920년대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침울한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우울한 심리상태는 요정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를 믿게 만들었다.

 

 

 Scene #2  초현상적 사건을 소재로 다룬 네 편의 소설

 

간혹 우리는 매사가 불안하며 심약해지만 헛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진짜로 믿고 만다. 아니면 현실에서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 강할수록 가짜라고 해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아마도 도일은 평소에도 초현상에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세계의 불가사의를 모은 책에서도 종종 소개되는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마리 설레스트 호는 처음 건조되었을 때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 후에 ‘마리 설레스테 호’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872년에 선박의 승무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라지기 직전에 배는 미국 보스턴을 출발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조레스 제도 부근에서 항해하는 설레스테 호가 발견되는데 돛을 펼쳐져 있었으나 장난감 배처럼 수면 위에 고정되듯이 멈춰져 있었다. 문제의 배를 발견한 데이 그라티아 호의 선장은 선원들을 시켜 조사하도록 했다. 셀레스테 호를 조사하던 선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고 갑자기 황급하게 그곳을 떠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배의 승무원은 8명이었으며 선장 브릭스의 처와 5살 된 아들도 함께 타고 있었다.
 
마리 설레스테 호의 수수께끼는 정밀하게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의문점이 늘어갔다. 나침반 상자가 망가져 있고 나침반도 고장 나 있었다. 선장실에 항해용 기계류나 측정기가 보이지 않은 채 표류하듯이 배는 그렇게 움직였다. 가장 의심스런 일은 외부의 습격을 받을만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구명보트는 없어졌는데도 살아남는데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전혀 가져가지 않았다.

 

사고 원인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여 “선원들이 외계인에 의해 납치되었다, 회오리바람이나 거대한 바다뱀이 갑판 위의 선원들을 쓸어갔다, 해적의 소행이다, 선원들이 갑자기 미쳐서 모두 자살했다”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였으나 아직도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는 않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된다.

 

도일은 마리 설레스테 호의 승객으로 실종된 폐결핵 전문가 하버쿡 젭슨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여 그의 진술을 토대로 설레스테 호가 실종된 이유를 독자에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낸다. 물론 화자는 하버쿡 젭슨이다. 

 

젭슨은 남북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게 된다. 그의 병상을 돌보던 흑인 노파로부터 젭슨은 용도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돌멩이를 받는다. 노파는 이 돌이 아버지에, 그 아버지에, 또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귀중하고 성스러운 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젭슨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을 주게 되었다. 둥그스럽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돌을 젭슨은 버리지 않고, 호주머니에 보관한다.

 

상처가 회복된 젭슨은 요양을 겸해서 마리 설레스트 호에 승선하게 된다. 선원을 제외한 또 다른 승객은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셉티미어스 고링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데다가 밤이 되면 그의 얼굴에 나오는 음흉한 표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느껴진다.

 

항해할수록 설레스테 호에 괴이하고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선장의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고, 가족을 잃은 선장은 실의에 빠져 멘탈이 붕괴되고 만다.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자살하고 만다. 선장을 잃은 설레스테 호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돈 채 목적지를 향하지만, 엉뚱하게도 배는 목적지에 완전히 떨어진 아프리카 대서양 쪽에 표류한다.

 

이 때 수수께끼의 인물 고링이 드디어 숨겨왔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배가 아프리카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선장과 그의 가족을 제거했다. 배에 탑승한 선원 중에 고링이 심어놓은 스파이가 있었다. 그래서 나머지 선원과 승객을 한명씩 제거할 수 있었다. 고링은 왜 셀레스테 호에 탑승해서 이런 잔인무도한 음모를 꾸미고 실행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젭슨이 가지고 있는 검은 돌 하나 때문에 치밀한 살인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사실 저 평범해 보이는 검은 돌 속에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가죽 깔때기』는 오컬트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설이다. 라이어넬 데이커는 탐험가 로버트 리플리처럼 진귀하고 마술적인 물건을 수집하고, 초현상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수집한 물건 중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가죽 깔때기가 있는데 데이커는 친구인 ‘나’에게 깔때기에 관한 불가사의한 비밀을 언급하는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나’의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게 만들면서 직접 불가사의한 일을 경험해보라고 제안한다. 친구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받아들이는데 머리맡에 깔때기를 둔 채 잠을 자는 것이다.

 

‘나’는 꺼림칙하게 여기면서 잠을 청하는데 기괴한 내용의 꿈을 꾼다. 죄인으로 추정되는 여인과 그녀를 벌하기 위해서 검은 옷을 입은 몇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목마에 포박당한 여인의 옆에는 물을 가득담은 세 개의 양동이와 국자가 있다. 그리고 사내 한 명이 문제의 가죽 깔때기를 여인의 입 속으로 찔러 넣는데... 끔찍한 벌을 받는 여인의 정체는 무엇이며, ‘나’가 목격한 꿈의 내용은 어떤 장면일까?

 

『경매품 249호』는 미라가 등장한다. 옥스퍼드 올드칼리지 기숙사에 미라가 있다. 흑마술에 탐닉하는 올드칼리직 학부생 벨링엄은 자신의 방에 미라를 보관한다. 그것이 기숙사 전체를 발칵 뒤집는 무시무시한 사건의 전말이 될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경매품 249호’라는 상표가 붙인 미라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을 공격한다. 주인공 스미스는 기숙사에 발생하는 괴사건을 비웃었지만 자신도 공포스러운 일을 경험한다. 벨링엄의 방에 보관된 미라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미라는 왜 기숙사 학생들만 골라 습격하는 것일까? 그리고 미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

 

『북극성호의 선장』은 도일이 젊은 시절에 고래잡이배에 탔던 경험이 반영된 소설이다. 소설 배경과 전개가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과 유사하다. 의학도 존 멜리스터 레이가 북극성호에 탑승하면서 겪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쓴 것이다. 배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는 곳에 갇히고 만다. 주위에는 온통 하얀 빙하만 있을 뿐이다. 유빙이 배에 부딪히는 순간,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로 침몰할 위기에 놓여졌다. 그런데 북극성호의 선장은 제정신이 아니다. 밤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거대한 얼음의 땅을 향해 멀뚱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다. 얼른 빙하의 세계를 탈출해야 할 시급한 상황에 선장은 엉뚱한 행동을 하고 있다니. 존은 선장의 모습에 어이 없어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어이없는 사건이 하나씩 발생하기 시작한다. 선원이 유령을 목격했다는 등 항해가 지체될수록 선상에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항해하면서 일용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선장이 실종되고 만다. 선원들은 배에 저주를 받았다고 두려움에 떤다. 북극성호도 마리 설레스트 호처럼 저주받은 배가 된 것일까? 그리고 선장과 선원을 두렵게 만든 유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Scene #3  '오컬트 소설가' 코난 도일

 

네 편의 작품에 장르를 구분하자면 똑부러지게 말하기가 애매모호하다.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은 마리 설레스트 호 사건을 도일 나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흥미 본위로 쓴 소설이다. 이 불가사의한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주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 마술과 심령술에 대한 코일의 독특한 관심을 보여주는 첫 작품이다. 훗날 『가죽 깔때기』와 『경매품 249호』그리고 홈즈 시리즈에 포함되는 일부 작품들에서도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네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초현상을 믿지 않는 이성적인 인물과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는 인물이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이성적인 인물도 초현상을 경험하고 목격하는 순간 믿게 된다. 상당히 이성적일 것 같은 도일이 평생 심령술에 푹 빠진 채 살았던 그의 이력을 생각한다면 도일의 작품 세계는 흥미진진하다. 도일은 챌린저 교수가 등장하는 SF소설도 쓸 정도로 장르소설의 시초로 평가받을만하다. 그동안 홈즈 시리즈만 읽은 독자라면 잠시 홈즈를 잊고 도일의 또 다른 작품들도 읽어본다면 특별한 매력을 느낄 것이다. ‘역사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던 도일의 수식어에 ‘오컬트 소설가’라고 하면 본인은 만족스러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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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도정일 산문집 도정일 문학선 1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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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쓰잘데없이 고귀한 그들의 선물

 

가난한 부부에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축복하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고작 1달러 87센트를 가진 델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백금 시곗줄을 사주고 싶은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시곗줄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구하기 위해서 길고 탐스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대신 짐에게 머리를 잘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백금 시곗줄을 구입했지만 델러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 때문에 짐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애를 태운다.

 

드디어 짐이 돌아오고 그는 델러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럴 수가! 짐은 델러가 무척 갖고 싶었던 머리빗 세트를 선물로 사온 것이다. 자신이 받는 주급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머리빗이다. 그러나 머리빗을 꽂을 수 있는 머리카락이 없다니. 애써 미소를 짓는 델러는 머리는 금방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짐에게 보여줬다. 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고 시곗줄을 산 델러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동안 어디에다 간직하도록 해요.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훌륭한 것 같소. 나는 당신의 빗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계를 팔아버렸다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날 밤 세상에 어떤 부부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판 것을 알고는 깊은 사랑을 확인했으니까, 선물은 상대방을 향한 고마움의 징표이다. 받는 이에 대한 배려가 핵심이다. 따라서 가격보다는 물건에 담기는 의미가 중요하다. 짐과 델러가 서로에게 받은 선물은 당장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부 간의 진한 사랑과 희생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곗줄과 머리빗은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선물이다.

 

 


 무엇과도 비견될 수 있는 고귀한 것들

 

지금까지 살면서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을 하나라도 가진 적이 있던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소중하게 여긴 보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와 구슬치기에서 얻은 알록달록 색깔 구슬들 아니면 산타 할아버지가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와 양말에 선물을 놓고 간 것. 비록 그 선물이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것은 아니었지만 순수했던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준 진짜 선물이라고 생각해 애지중지 여긴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겐 보물 상자가 있었다. 아끼던 상자를 가지고 이사를 할 때면, 작은 상자 안에 소중한 물건들을 더 많이 넣으려고 물건들을 넣었다 뺐다 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마음속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과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면, 그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을 채워갈수록 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좁아질 것이고, 상자 안에서 재물과 욕심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우리 마음속 상자는 따뜻한 사랑만으로 충만해져갈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 나의 보물상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욕심과 사랑 중에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행복할까? 그리고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오늘 하루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갈까?

 

너무나 여유 없이 앞만 보며 메마른 길을 달려온 삶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 보물 상자에서 욕심과 재물은 조금 덜어내고 사랑과 행복을 좀 더 채워야 한다. 보물 상자에 채울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은 세상이 쓰잘데없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소풍에 가면 즐거웠던 보물찾기 게임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찾기 힘들다면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어보면 좋다. 제목만 봐도 책 속에 우리가 찾아야 할 고귀한 것들이 목록처럼 나열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이 책 속에 목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남의 목록에 의존해서 찾는 것보다는 독자와 자신이 앞으로 계속 찾고 만드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자발적인 삶을 위한 임무이다.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삶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스스로 찾아보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한 번 뿐인 삶이 마감할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결국 소중한 것의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놀이 방식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나름 고귀한 것을 두 개만 소개해본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1 : ‘너는 누구인가’, 자기 인식의 질문

 

일단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을 우리는 왜 질문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갑작스럽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하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네가 누구인가는 마침내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너보다 더 큰 것, 너를 연결할 더 큰 어떤 것을 찾았는가?” (‘누구시더라’ 중에서, 14쪽)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식할 수 있다. 일찍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만든 철학의 명제로 삼았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골몰하는 일에 대해, 폐쇄성의 혐의를 둔다. 혹은 관계에 무관심하다고 여기거나, 공동체로부터 도피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란 우선은 사회적인 원리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기 안의 격률을 갖고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이들은, 자기 안의 격률로 인해 타인과 그의 흔적들에 역시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너는 누구인가’라는 이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또는 쓰잘데없는 질문 속에는 ‘자각(自覺)’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를 알아야 ‘나’를 둘러싼 세상도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이 질문은 기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이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굳이 대학교나 철학책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이 질문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도정일 교수는 평생을 바쳐 인문학적 질문을 위해 집요하게 몰두한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비참한 참상을 기록한 이탈리아 출신 작가 프리모 레비를 들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기억 투쟁’)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 시절 때 탐독했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나는 짐승으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레비는 이런 구절을 통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2 : 문학

 

백범 김구 선생의 건국이상이 ‘문화국가’였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아직 궁핍하던 시절, 백범은 ‘부강한 나라’를 가로질러‘문화국가’를 역설했다. 몇 단계 건너뛴 화술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과 대조되는 평화주의자의 안목이 경탄스럽다.

 

백범 선생이 말하는 ‘문화’에는 여러 가지 분야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문학’이 빠질 수 없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문학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책을 멀리하고 학창시절에 문학을 외우는 과목이라는 기억이 강하게 남은 사람은 문학이라는 말을 어렵게 느낄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단순히 문학(소설, 시)을 읽고 즐기는 행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시 배달부의 인기’) 특히 문학 읽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게 만드는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문학적 연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은 정신의 성장이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문학을 수능시험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절대로 문학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알 수 없다. 수능에 나올 문제를 기막히게 맞힌 족집게 강사도 문학 독서를 통한 ‘위대한 감각’을 가르치지 못한다. ‘위대한 감각’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를 깨닫는 능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 독서가 쓰잘데없은 시간 낭비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성과 감성을 겸비하는 윤리적 인간이 되려면 문학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Epilogue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고 나면 꼭 자신만의 고귀한 목록을 찾아보라. 쓰잘데없는 것도 좋다. 나는 ‘자기 인식의 질문’, ‘문학’ 이외에도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관용, 도서관 등등. 최소 5개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목록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오늘에 감춰진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내줄 아는 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쏟는다면 기분 좋아지는 나 자신을 덤으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 사랑, 관용, 선물, 희망. 아무나 좋다. 이 세상에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꼭꼭 숨겨져 있어도 좋지만, 그래도 찾기 쉽도록 눈에 띄면 좋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중함과 고귀함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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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이들에게 과학을 돌려주자’라는 기업 광고의 슬로건이 큰 호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광고 내용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과학자가 꿈인 어린이들이 많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과학자보다는 아이돌 가수가 더 많은 장래 희망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요즘 아이들이 선택한 장래 희망이라는 것이 어른들이 한 번에 들어도 기분 좋을 만한, 소위 돈을 잘 벌고 안정되어 보이는 직업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곧 좋은 진로’라 배우며 자란 2030 세대는 성인이 돼 지독한 꿈의 부재를 겪고 있다. 단군 이래 최악의 세대 방황은 다음 세대들에게도 이어질 듯하다. 초등학생 10명 중 3명은 공무원이 되길 희망한다고 한다. 초등학생들의 대답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새내기 대학생이나 전공 불문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취업 준비생의 대답과 꼭 같다.

 

부모가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을 때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아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가 꿈이 없다고 미리 조바심 낼 필요는 없다. 아이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직업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다. 내가 미혼이라서 아이의 장래희망에 관심을 가지는 부모의 심정을 느끼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결국 직업은 연봉을 많이 받거나 사회적으로 인기가 높은 것도 좋지만, 적성에 맞으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적성을 제대로 찾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낭비에 가깝다. 과거와 같이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직장’,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일자리가 아닌 자아실현을 위한 직장을 선택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직업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의 소설 『멍키스패너』에 나오는 주인공 파우소네는 직업의 참된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파우소네는 떠돌이 조립공이다. 철탑, 다리, 석유시추설비 등등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구조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노동 경험이 많다. 그는 안정적인 집과 아내도 없다. 항상 작업할 때 사용하는 ‘멍키스패너’와 함께 전 세계를 떠돌면서 지낸다. 건장한 사내도 하기 꺼리는 조립공 작업을 파우소네는 즐거운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파우소네는 기계 구조물을 다루는 노동에서도 예술가처럼 창조해내는 순수한 즐거움을 찾고자 한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는 진정한 ‘호모 파베르(Homo Faber)다.

 

파우소네는 왜 복잡하기 짝이 없는 기계를 조립하고, 3D에 가까운 육체적으로 고된 노동을 선호하게 될 걸까? ‘꿈’에 대해서 자신의 정의를 내리는 파우소네의 답변은 안정적인 직업의 꿈을 좇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한다. 전 세계를 여행하듯이 온 세상의 조선소, 공장,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직업에 관한 꿈은 자신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일수록 좋다고 한다.

 

“나로서는 꿈이 진짜로 실현되는 것이 좋아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꿈이란 사람이 평생 동안 옆에 가지고 다니는 질병이나, 아니면 습기가 찰 때마다 고통을 주는 수술의 상처로 남아 있게 되지요.” (프리모 레비  『멍키스패너』  중에서, 10쪽)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어린 시절의 꿈을 그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회하기도 한다. ‘아, 내가 공부만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 때 부모님의 설득에 귀담아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꾸준히 준비했더라면 일하는 것이 즐거웠을 텐데...’ 안정적인 생활과 연봉에만 초점을 맞춘 직업을 선택해서 생활할수록 어린 시절 순수했고 꿈은 어느새 아쉬움이 가득한 그리움으로만 남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처음부터 꿈꾸던 장래희망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 힘들다.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일을 사랑해서 직업으로 삼아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인물은 많지 않다.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121쪽)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것이 사람 운명인데 우리는 너무 무심코 직업을 단정적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것도 돈 벌기 쉽고, 해고 위험의 부담이 없는 안정적인 직업 말이다. 그러나 파우소네의 표현처럼 직업의 영역은 광활한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전혀 모르는 직업이 많을 것이고, 앞으로도 몇 십 년 후에 새로운 직업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선호하고 원하는 직업 중에는 언젠가는 미래에 사라질 수 있다.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면 힘든 노동이라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돈을 벌기 위한, 고용주의 노예일 뿐이다. 파우소네는 일과 노동의 즐거움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진정한 노동(직업)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노동이 아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강요받지 않는 즐거운 것이다.

 

레비는 파우소네를 ‘또 다른 자아’라고 불렀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예술가적 자아를 뜻한다. 두 손으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파우소네에게 예술가의 면모를 발견한다. 레비는 파우소네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대화를 유도하는데 바로 글쓰기 작업으로 파우소네의 삶을 소설로 새롭게 창조시킨다.

 

 

 

 

 

 

 

 

 

 

 

 

 

 

 

 

 

레비의 삶에 있어서 글쓰기와 화학 연구는 인간적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노동이다.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서 수용소 안에 갇힌 인간과 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인간 군상을 묘사함으로써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고 했다.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수용소에서의 삶을 기억하고 글로 기록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눈물겨운 기억 투쟁이다.

 

1986년 레비와 대담한 필립 로스는 그를 ‘화학자-작가’라기 보다는 ‘예술가-화학자’에 가깝다고 했다. 『주기율표』에서 레비는 화학이 ‘파시즘의 해독제’라고 말했다. 화학 실험이 인간적인 노동인 것이다. 그래서 『주기율표』를 읽어보면 화학 실험을 한 편의 그림처럼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증류는 아름답다. 무엇보다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사람을 분주하게 하지만 다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자전거 타기와 비슷한 일이다. 또 증류가 아름다운 건 변신이 일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액체에서 (보이지 않는) 증기로, 증기에서 다시 액체로 말이다. 위로 아래로 두 겹의 여행을 하는 사이 마침내 순수한 것이 도달한다. 이것은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조건이다.”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에서, 89쪽)

 

레비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직업이 우리 삶의 치유제가 되고, 파우소네처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보면 현실적이지 않은 생각에 불과할 수 있겠다. 오히려 자식이 파우소네처럼 떠돌이 기계 조립공처럼 산다면, 부모는 당장 자식의 호적을 팠을 것이다.

 

레비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것의 어려움과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직업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결국 어린 시절 꿈을 직업으로 전환시키는 멋진 삶이란 쉽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고 레비는 운명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많은 직업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슬프게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입관과 증오를 갖고 현장으로 내려가는 것은 해롭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직업을 증오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직업의 결실이 일하는 사람의 손에 남아 있도록, 직업 자체가 형벌이 아닌 것이 되도록 싸울 수 있고 또 싸워야 한다.” (프리모 레비  『멍키스패너』  중에서, 121~122쪽)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프리모 레비의 『멍키스패너』 을 읽어봤으면 한다. <타임> 지 칼럼니스트 버나드 레빈은 이 책의 서평에서 ‘독자들 가운데 공무원이 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썼다. 자식이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라면 『멍키스패너』를 읽고나서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자식의 꿈과 장래희망을 부모의 마음대로 정하고 간섭한다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 또한 증오하게 된다. 부모의 그늘이 이제 막 성장하려는 자식의 미래를 가리지 말고, 아이들의 순수한 꿈을 뺏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꿈을 돌려줘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것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직업을 선택할 때 앞으로의 삶에 대해 그리고 그 삶을 가꾸어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을 더하여 ‘진정한 자아실현’에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 제 삶과 직업을 통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만족스럽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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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샘터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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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봄은 훨씬 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봄은 다시 왔다. 마음의 봄. 이해인 수녀는 마음의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이해인, ‘봄 일기’ 중에서)

 

 

봄은 우리에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라고 일러준다. 하루의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찡그리지 않고 미소를 띠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희망을 건네주는 일이 될 수 있다.

 

 

3월님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일전에 한참 찾았거든요.
모자는 내려놓으시지요-
아마 걸어오셨나 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 걸 보니
그래서 3월님.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어요?
아, 3월님. 바로 저랑 이층으로 가요.
말씀드릴 게 얼마나 많은지요.

 

(에밀리 디킨슨, ‘3월’ 중에서, 장영희  『다시, 봄』 인용, 41쪽)

 

 

때로는 이 시인처럼 혼자만의 방에 봄을 데리고 들어가 고요히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며 명상에 잠기는 것도 좋다.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귀한 손님이라서 봄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봄과 같은 사람’ 어디 없나? ‘봄과 같은 사람’, 이해인 수녀는 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봄과 같다고 했다. 생명의 기운 가득한 봄에 먼 길을 떠난 장영희 교수, 김점선 화백은 ‘봄과 같은 사람’이었다.

 

 

 

 

‘봄과 같은 사람’은 얼어붙음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휴식 같은 친구이기도 하다. 몸은 천근만근, 머릿속은 뒤죽박죽. 달콤한 휴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엉뚱한 공상이라도 좋다.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도 좋다. 일상을 벗어나 나만의 감정과 상념에 빠져 그렇게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 딸기 쇼트케이크처럼 작지만 달콤한 휴식에는 복잡한 글이나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저 한 줄의 시만이, 한 줄의 휴식에 유일한 친구가 된다. 그럴 때 김점선 화백의 그림이 곁들인 장영희 교수의 글을 다시 본다.

 

장영희 교수의 글을 읽으면 가슴이 짠하게 느껴진다. 순간이나마 착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가끔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솔직하게 내면을 드러내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글이 갖는 힘이다. 불편한 몸이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유쾌하게 살아 온 그의 태도가 주는 힘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크리스티나 로제티, ‘생일’ 중에서, 장영희  『다시, 봄』 인용, 99쪽)

 

 

장영희 교수는 로제티의 시에 대해 진정한 생일은 사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했다. 이런 사랑을 만난 환희와 기쁨이 잘 표현된 시로 누구라도 이런 사랑에의 동경과 소망을 품어 보게 된다. 그녀는 7월에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싶은 소망을 가졌다. 비록 한여름의 태양과 바다를 사랑할 수 있는 달은 아니지만, 치열한 계절의 순환이 시작되는 4월에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4월처럼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왔다. 한 권의 시화집으로.   

 

그녀가 눈을 감은 5월 9일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점선 화백의 49재 날이었다. 자유로운 생각과 유쾌한 성품을 녹여낸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던 김점선 화백은 장영희 교수와 꼭 닮은 친구였다. 섬세하고 눈물 많은 교수와 호탕하고 거침없는 화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모습이 여린 장 교수는 수많은 고통으로 담금질된 단단함이 있었고, 겉모습이 단단한 김 화백은 누구보다 여린 속내를 가진 사람이었다.

 

 

“김점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은 터프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고 여리다. 겉은 씩씩하고 대범하지만, 속은 섬세하고 여리다. 겉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순하고 착하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세상은 싸움터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장 교수에게 그 연민은 문학적 힘을 통해 표현된다. 특히 시는 삶의 용기와 희망을 전달해주는 가장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다. 고달픈 삶의 연민에서만 그치지 않고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시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장 교수의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해 무작정 동경이라든가 허상을 꿈꾸기보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시와 삶이 동떨어진 게 아닌 현실감 있게 주변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시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머리로 읽는 시도 있지만 그것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뇌로 읽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시험성적을 위해서 한 편의 시를 동물을 해부하듯이 시구 하나하나 해석해서 읽는다면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책 속에 담긴 영시의 위로는 삶의 고통으로 지친 우리의 심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준다. 누구나 삶의 아픔을 한 번 이상은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위안과 휴식은 보편적이면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읽는 이에게 생의 활력과 심적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영시와 장 교수의 글 그리고 김 화백의 그림이 ‘휴식’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새러 티즈데일, ‘연금술’, 장영희  『다시, 봄』 인용, 71쪽)

 

 

영시의 편편이 가슴에 스며드는 내용인 데다가 장 교수의 깊고 따사롭고 예리한 글과 김 화백의 살아 있는 색채가 펼쳐진 이 책은 감동 그 자체다. 너무 머리를 쓰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 부족한 우리에게 잠깐 숨을 돌리게 한다. 365일 하루도 같지 않은 날들. 사실 매일매일이 선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장 교수는 어느 계절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고, 매일매일이 소중한 하루라고 말한다. 봄부터 겨울까지의 자연 변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깊은 내면 등 세상의 모든 것이 영시와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한 편의 ‘희망과 위로의 러브레터’가 된다. 그래서 6월의 봄은 사랑이 필요하고,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요청되는 마음의 봄이다. 

 

장영희와 김점선의 존재는 희망이자 자유 그리고 사랑이었다. 짧았지만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간 그들은 최고로 멋진 삶을 살았다. 늘 웃을 줄 아는 두 사람. 우리 모두가 장영희, 김점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봄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글과 그림으로 사랑할 힘을 얻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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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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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가라앉힌
밀물 위로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가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기억해다오.

 

(베르톨트 브레히트 ‘후손들에게’)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 낸 최악의 개념이요 가장 잔혹한 행태이다. 전쟁은 막대한 물자가 소모되고 수없이 많은 인명의 살상과 살아남은 자의 생활고통이 뒤따른다. 이러한 전쟁을 인간은 어쩌자고 자꾸 되풀이 하는 것일까. 전쟁은 언제나 강자의 교만과 악의에 의하여 도발되고 패자는 굴종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승자의 교만은 자멸을 재촉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쟁이 우리 심리에 끼친 상처의 자각을 검증하지 않고 단지 내면의 그림자로 가만히 두는 것을 일상화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종종 전파를 타고 '내전'이라는 국제뉴스를 접하게 된다. 우리 사회와는 무관한 그래서 단지 미디어나 영화를 통해서, 그리고 이제는 뉴스나 게임을 통해서만 정보를 얻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 문명의 잔혹성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어떠한 체험을 했고 무엇을 느꼈는지 반성도, 성찰도 없는 사회의식 속에서 성장해 왔다. 전쟁을 정확히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심리적 상처'와 '정신의 황폐함'이다. 전쟁의 공포와 고통을 그냥 놔두면 저절로 치유될 수 있을까?

 

“자유의 순간은 우리의 마음을 괴로움으로 가득 채웠다. 그 누구도 전염병처럼 퍼지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상처는 마르지 않는 악의 샘이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겨놓고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의 빛을 꺼뜨린다. 상처는 압제자들에게는 익명으로 되돌아가고 생존자들 속에서는 증오로 연속한다.” (20쪽)

 

홀로코스트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정서장애에 걸리는 자가 많았고 여전히 불안, 불면증과  같은 '홀로코스트 증후군'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이 겪은 고통을 덜어낼 수 있는 깊은 감정교류가 없이 그대로 자신들의 감정을 고갈시키면서 지내왔기 때문이다.

 

아유슈비츠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인 프레모 레비도 ‘홀로코스트 증후군’과 유사한 증상에 시달렸을 것이다. 자신은 『휴전』에서 쓴다는 체험을 강렬하고 행복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작가의 말이 씁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는 자신의 증언을 ‘공포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세상의 혼돈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끝난 뒤에 자유의 기쁨을 만끽해보지만, 새로운 전쟁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그런 미세한 조짐을 레비는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진실에 차마 눈 맞추기 어려워 부러 모르는 척할 때가 있다.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폭력적 상황과 공포, 죽음, 억압의 구조에 눈을 돌리고자 할 때에 이 나약함을 직시하도록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게 문학의 역할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이후 귀향의 과정에서 독일 뮌헨에 들른 레비는 자신들을 절멸의 수용소로 보낸 독일인들이 자신에게 무언가 질문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거리의 독일인들은 레비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입을 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단단히 답변할 준비를, 마구 쏟아내야 할 증언을 준비하고 있던 레비는 철저한 무관심에 경악한다. 레비는 그런 상황에 혼란과 고통을 느끼며, 문학의 힘을 빌려『휴전』을 집필했다.

 

레비는 영혼마저 표백하는 파시즘의 실험적 광기와 수용소 공간의 낯선 윤리를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통해서 증언했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풍경을, 다는 아니어도 대충은, 볼 수 있었다. ‘생지옥, 짐승, 도살, 피눈물 등 인간의 이름을 수식하는 모든 음울한 비유들의 무덤’(『이것이 인간인가』 중에서)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레비는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다. 그것은 지옥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번에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지낸 10개월간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라면 『휴전』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8개월 동안의 귀환의 여정을 기록했다. 레비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고통스러웠지만, 동행하는 동료들과 에피소드나 여정 속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특별한 일화까지 담았다. 화학을 전공한 과학도답게 레비는 절제된 감정과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종전의 흥분과 불안이 공존하는 환경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처신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거침없는 입담과 생활력을 지닌 그리스인 나훔, 군 보급품인 생선에 물을 채워 러시아군에게 비싸게 되파는 체사레 등 인상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특히 그리스인 나훔이 말하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만의 생존법은 강렬한 블랙유머다. 우리는 전쟁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식량과 물이다. 전쟁이 나면 먹고 마시는 것에 지장을 받는다. 비상식량을 가득 준비해도 전쟁이 길어지면 하루를 연명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나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식량보다는 신발을 먼저 생각한다. 만약에 신발이 없다면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레비는 나훔의 생각에 반박한다. 전쟁이 끝났다고. 그러자 나훔은 레비의 삶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결정적인 대답을 한다. “전쟁은 늘 있는 거야.”(78쪽)

 

전쟁에서의 승리는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나훔의 말처럼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과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전쟁에 의한 환영과 전쟁 중이다. 8개월에 걸친 여정 끝에 드디어 레비는 토리노 자택에 돌아온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전쟁의 환영과의 싸움이 종전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자택에서 잠든 그는 공포로 가득 찬 꿈을 꾸었던 것이다.

 

“저녁이면(한순간 공포가 스치고) 나의 체중 아래 부드럽게 눌리는 넓고 깨끗한 침대를 되찾았다. 간간이, 때로는 자주 때로는 드물게, 공포로 가득한 꿈이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328쪽)

 

그래서 레비는 두 번째 책의 제목을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고 지은 것이다. 전쟁에 살아남아도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전쟁에 긴장과 불안에 떨면서 그 잔인한 운명을 맞아야 한다. 전쟁의 상처를 내면으로 체화한 채 다음 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쳐 왜곡되고 불편한 감정이 이어진다.

 

전쟁에 승자와 패자는 구분의 무의미하다. 심리적 상처가 단지 '전쟁의 패자'에게만 유독 드러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장애와 정신적 외상은 이후 전쟁에 살아남은 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잠재적 질병이다. 우리의 정신구조는 어떠한 상흔을 입었는지에 대한 되돌아봄 없이 오직 경제개발과 풍요라는 '외피'만 가꾸고 돌보면서 달려왔다. 우리가 전쟁과 폭력에 질문을 던지고 지속적인 되물음을 해야 하는 것은 전쟁이 가져오는 깊은 상실감을 정확히 직시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레비는 심리적 상처를 문학을 통해 성찰하고 전쟁의 상처에 대한 자각이 만들어내지 않으면 펑화가 없음을 경계한다. 전쟁에 살아남은 자들이 고통의 환영과의 전쟁을 이겨내 평화를 유지하려면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레비의 성찰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면서도 아무 일 없다듯이 불감증을 느끼고 있는 우리가 되돌아보는 기회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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