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 공부 -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
김수행 지음 / 돌베개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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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기,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걸리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채만식의 소설 「치숙」에서 ‘사회주의인지 막걸리인지’라는 표현이 있다. 사회주의 즉 마르크시즘의 막걸리의 막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착안한 말이다. 이 표현에 화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심리가 간결한 표현 속에 담겨 있다. 이야기의 화자는 어린 조카로 되어 있다. 주인공 ‘나’는 보통학교 4학년밖에 못 다녔지만, 일본인 가게 주인의 눈에 들어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일본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아저씨에게 오촌 조카는 조곤조곤 따지고 든다.

 

 

“아저씨! 경제라 껏은 돈 모아서 부자되라는 거 아니요? 그런데 사회주의라 껏은 모아둔 부자 사람의 돈을 뺏아 쓰는 거 아니요?”

 

 

조카는 사회주의를 부자의 재물을 빼앗는 불한당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한심한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대학교에서 5년 동안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도 돈 한 번 제대로 벌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빠진 아저씨를 조롱한다. 조카는 경제가 돈 모으는 활동이니까 경제학은 돈 모으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삼촌이 경제학을 잘못 공부했다고 돌직구를 날린다. 하지만 아저씨는 오히려 조카가 세상 물정, 즉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다.

 

 

 

 Scene #2  “여러분, 부자 흉내 내세요!”

 

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토론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고 생산력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자일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한때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라는 광고카피가

최고의 덕담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2014년 대한민국. 이곳에서 지금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돈만을 좇는 속된 삶이 아니라도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십 여 년 전에 모 카드회사의 광고 문구 “여러분, 부자 되세요.”는 최고의 덕담이 됐다. 그렇다고 모두 부자일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소수다. 나머진 부자가 되고 싶어서 부자 흉내를 냈다. 그런데 부자 흉내의 결과가 심각하다. 펀드니 연금이니 뭐니 투자를 해봤지만 남은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빚뿐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청년실업이 단기적인 사회문제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용불안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들이 가정을 꾸리면 청년실업이 ‘가족의 위기’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다. 경기침체로 청년들이 일자리를 잃고 삶의 목표를 상실한다.

 

자본주의 선진국에서 소득수준의 급속한 향상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행복은 제자리걸음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한계에 이른 데다가 돈으로 사기 어려운 행복의 주된 원천은 자본주의 시장의 힘으로 잠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Scene #3  호황이면 소비 열기, 불황이면 자본론 공부 바람이 부는 법  

 

국경을 넘어 퍼부어지는 자본의 융단폭격. 온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휘몰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와 직장은 물론 우리 안방에까지 침투해 있다. 삶을 초토화하는 그 기세는 마치 대지를 휩쓰는 메뚜기 떼의 공격 같다. 자본은 자꾸 부자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와 서민은 대량해고·비정규직·실업 등으로 빈곤과 불안의 깊은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대공황에 버금갈만한 2008년 뉴욕 월 스트리트가 발 금융파탄으로 야기된 세계 불황이 장기화하고 있어 어느 나라든 저소득층의 생활은 더 피폐해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제 상황 속에서 금융자본주의가 상위 1%의 이익에만 충실하다는 비판적 시각이 재확산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反 월 스트리트 시위’의 영향으로 현 지배체제를 바꿔야 한다는 인식이 한층 높아졌다. 자본주의의 가장 뜨거운 감자인 ‘부의 분배’ 문제도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글항아리, 2014년)을 통해서 경제적 불평등을 배태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를 따졌다. 피케티 하나를 두고 세계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 오랫동안 사회학 교과서 활자 속에 갇혀 있던 공산주의, 아니 마르크스의 유령도 돌아왔다. 마르크스의 부상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인류의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들고만 다녀도 구속감이었던 ‘빨갱이 경제학’의 교과서 『자본론』에 대한 공부 열기도 살아나고 있다. 자고로 호황이면 소비 열기가, 불황이면 공부 바람이 부는 법. 불황 효과일까? 하지만 IMF 위기 때와 비교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IMF 위기는 아시아만 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제도 자체에 의문을 갖게 한다. IMF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면 지금의 위기는 ‘공포’ 수준이다. 사람들은 이제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근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마르크스’라고 하면 금세 떠오르는 것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자는 도식이다. 붉은 깃발 아래 낫과 망치가 먼저 떠오르다 보니 일단 거부감부터 생기는 것이 사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거론하는 데는 여전히 용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아무리 법적으로는 사상의 자유가 보장됐다고 해도 오해나 왜곡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사상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분단과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깊이 남아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합리적인 설명조차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반(反)사회주의적 감정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 ‘빨갱이’에서 ‘종북’으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으로 한번 낙인이 찍히면 더 이상 이성적인 논의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Scene #4 자본가들은 부유해지는데 노동자들은 왜 가난한가?

 

사회의 부와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자본가들은 더 부유해지는데 왜 우리는 더 가난한가?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수많은 노동자는 이런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노동자들이 그 원인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기계였다. 기계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노동과정이 주로 노동자들도 숙련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숙련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노동자들은 높은 보수와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기계의 도입은 비숙련공은 물론 심지어는 여성과 어린이들도 솜씨 좋은 숙련공처럼 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숙련공들의 보수는 곤두박질쳐 비숙련공이나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의 자본가적 사용이 자신들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상품인 노동력의 수요자는 자본가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본질상 이윤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므로 노동자는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 기계가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된다면 노동시간을 줄이고 노동 강도를 낮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계가 자본가를 위하여 사용되면 노동시간은 더 늘어나면서 노동자들의 분배 몫은 반대로 더 줄어들 뿐이다. 이것이 『자본론』의 한 축이다. 단, 노동자 스스로 생산수단을 확보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일하는 만큼 이윤은 그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이윤에 집착하면서 또 다른 노동자를 채용하기 때문에 ‘이윤과 착취’라는 악순환의 고리는 계속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다. 마르크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중요시했다. 사회주의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자유’, ‘개인’, ‘연합’이다. 노동자가 해방의 주체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인가. 자본주의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론 공부』에서 김수행 교수는 마르크스가 꿈꾼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치유하려는 고민 끝에 사회적 자각을 통해 도달하는 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탈린 독재정치 시대의 구소련이나 마오쩌둥의 중국, 카스트로의 쿠바,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의 모델이 아니라고 말한다.

 

 

 

 Scene #5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면 갈등을 줄일 수 있을까?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자유주의자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한, 마르크스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원론으로 찾지 못한 답을 『자본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만, 『자본론』이 대학 강의실에서 주류경제학에 밀려 외면받지 않으려면 단순히 학문적 유행에 쫓는 목적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최적의 대안이 나올 수 있도록 마르크스를 바라보는 비판적 입장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일단 마르크스 경제학의 우선 과제, 어떤 식으로 대안을 마련하느냐 하는 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만약에 이 세상이 노동자 중심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 이루어진다면 계급이 사라지고 갈등이 최소화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과연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이 즐겁게 자신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을까? 이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이윤을 올리기 위한 사적 이익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 어찌하든지 탐욕을 감추면서 자기의 유익을 도모해보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개인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 전체의 이익도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제는 너무 쉽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공장 굴뚝에서 매연을 마구 뿜어낸다면 어떻게 사회 전체의 이익이 올라가겠습니까? (김수행  『자본론 공부』 중에서, 187쪽)

 

마르크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이익도 올라간다고 생각한 애덤 스미스의 명제에 윤리적 가정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한 윤리적 가정의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해서 이 사회에 탐욕과 갈등이 사라진다고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고, 탐욕을 조절할 수 있는 ‘위로부터의 규제’도 필요하다.

 


 Scene #6  마르크스와 막걸리의 공통점

 

채만식의 소설 『치숙』의 ‘나’는 마르크스를 막걸리라고 희화화했다. 부자의 돈을 빼앗는 사회주의를 우습게 비꼰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막걸리다. 우리가 즐겨 마시고, 몸에 좋은 막걸리. 마르크스와 막걸리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 2014년)의 저자이자 빵집 ‘다루마리’을 운영하는 와타나베 이타루는 사람들은 경제가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살찌게 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윤만 늘면 된다고 생각한다. 살이 쪄서 비대해진 경제는 균형을 되찾는 자정작용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품붕괴다. 썩고 순환하지 않으면 자연은, 인간은 유지될 수 없다. 그는 『자본론』 공부를 통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이것을 ‘부패하는 경제’라 명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패는 그가 빵집을 경영하면서 연구해 온 '효모', '누룩' 등 '균(菌)'의 순기능이다. 와타나베는 이스트, 설탕, 버터, 우유, 계란을 전혀 넣지 않고, 천연효모와 천연누룩균으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균들은 원래 부패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물질마저도 음식으로 바꿔버리는 효능이 있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도 누룩을 효모로 발효시켜 만드는 원리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한국의 술이다. 와타나베가 시골빵집에서 『자본론』를 구웠다면, 우리는 막걸리를 통해 『자본론』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가 제조되는 과정에 마르크스의 생각이 발효되어 작동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막걸리가 부침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막걸리는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체 술 소비량의 70%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소주, 맥주, 양주에 밀려 한동안 외면받았다. 그러다가 최근 암의 발생이나 증식을 억제하는 항암물질이 들어있는 건강주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마르크스의 책들은 1980년대 금서 중의 금서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책 가운데 당당히 1위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최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막걸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 마신다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로 인해 거의 고장 나버린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독일어 초판 1000부 매진에 4년이나 걸릴 정도로 매우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자본론』은 인류 문명사를 바꾸어 놓은 저작임엔 분명하다. 더욱이 불평등 문제가 주목받음으로써 또다시 ‘가난’과 ‘노동’의 불일치가 가시화되는 작금에 『자본론』의 유효성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우리 체제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자본론』 읽기는 필수적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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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 1959-2014, 55년의 기록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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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일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일이다. 역사책을 읽을 것 같으면 기쁨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곳이 또한 즐거운 곳이다. (장조 『유몽영』중에서, 정민 『마음을 비우는 지혜』에서 인용, 181쪽)

 

 

오늘의 정치는 내일의 역사가 되고,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정치를 지배한다. 요즘에는 이 말을 특히 실감한다. 내일의 역사를 자기편으로 서술하기 위한 정치싸움은 진행 중이다. 한쪽에선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60년 만에 세계 11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라고 외친다. 나아가 이런 대한민국이 어찌 반쪽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대한민국 그 자체를 무(無)에서 창조한 기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을 고착화하며 태어난 대한민국이 태생적으로 정통성을 갖추지 못한 국가이며, 38선 혹은 휴전선으로 갈라진 그 나머지 반쪽인 북한과 '민족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어떠한 경제적 성공도 완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개의 마주할 수 없는 극단적 시각이 엄존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양극단 사이에는 회색지대와도 같은 무수한 시각이 존재한다.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한 이런 시각은 비단 건국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 곳곳에서 충돌한다. ‘분단’의 시각에 선 쪽에서는 김구를 추앙하는 데 비해, ‘건국’을 중시하는 쪽에서는 이승만을 ‘국부’로 간주한다. 전자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절대악의 축’이지만, 후자에겐 ‘허리띠를 졸라매며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산업화를 이룬 위대한 지도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이런 극단적인 대립은 급기야 대한민국 그 자체의 정통성 시비를 불러 일으켜, 그것을 부정하는 쪽에서는 대한민국사를 ‘뒤틀린 역사’로 간주하면서,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이승만 정부가 친일인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친일파 청산으로 대표되는 과거사 청산 운동이 거세게 분 것도 이런 대한민국 건국관이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독사신론』에서 “정신이 없는 역사는 정신없는 민족을 낳으며, 정신없는 국가를 만들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오,”라고 하여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고교 역사교과서 파동은 다수의 국민에게 심각한 우려의 눈길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문제의 본질은 현재 역사학계의 편향적이고, 왜곡적인 역사시각을 감히 나서서 자정할 능력이 없다는 점에 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역사기술을 통해 왜곡집필의 심각성이 드러났다고 할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이런 유관순을 고교역사교과서에서 의도적으로 ‘실종’된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은 기가 막힌 역사학계의 수치다.

 

더욱이 문제투성이 역사교과서를 고등학생들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가 안 생길 수가 없다. 청소년 역사의식을 혼돈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 역사 교육은 미래를 이끌어 나갈 학생들에게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청소년들이 배우는 교과서 내용에서 단어나 문구를 가지고 역사학계에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다투는 일이 벌어졌는지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 가운데서도 현대사는 가장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킨다.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와 달리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 또는 수혜자 등이 생존해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정치에 참여했던 이가 펴낸 현대사라면 논쟁은 더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유시민은 『나의 한국현대사』 프롤로그에서 역사는 본질적으로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역사 서술에서 핵심인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은 주관적 기록이 된다. 한마디로 책은 굵직한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을 나열했다기보다 그 속에 이와 관련된 저자의 일상 체험이 곳곳에 녹아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문제투성이 역사교과서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 비록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지만, 그 속에 오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취해낸 국민들의 뜨거운 열정과 기쁨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저자는 심리학자인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이론을 통해 한국현대사 55년을 분석한다. 욕구단계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적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욕망이다. 인간은 욕망이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하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것이다. 생리적인 욕구 단계부터 출발하여 존경에 대한 욕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에까지 갈망하게 된다. 인간이 의식주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이 욕구가 충족되면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게 되며 내적인 성장을 실현하려고 한다.

 

하지만 욕망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왔다. 단군 이래 이렇게 잘 산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로 인해 부정적인 폐해도 적지 않았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건,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사건,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사고,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2010년 천안함 사건, 그리고 최근의 세월호 참사까지. 물질적 욕망의 질주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될 최악의 역사를 만들어 낸다. 여전히 많은 시민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 정의를 외면하면서 생기는 불편함을 외면하고 털어내려고 한다.

 

자랑스러운 것만을 드러내려는 쪽, 부끄러운 것을 기억하려는 쪽, 어느 쪽이든 대한민국을 역사라는 ‘집단기억’에 기초한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는 역사관에는 차이가 없다. 현대의 역사 이론들이 합창하는 것처럼, 역사서술은 근본적으로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행위이다. 이는 동일한 사료를 근거로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고 취합하여 서술하느냐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극명할 수 있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해석이든 너의 해석이든 어느 것도 ‘객관적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성찰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유시민은 대한민국 현대사를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으로 읽는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두 세력을 거의 50대 50으로 인정해왔고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 모두 우리의 과거이며 따라서 둘 중 하나만을 인정하는 자세는 온전한 역사인식·현실인식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논쟁이 뜨거운 지금, 서로 다른 경험과 이해관계, 인생관을 가졌다 해도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그 간극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한 이유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문제였다.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실관계에 대한 집착보다는 조정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서로 상반된 역사관에 비방만 할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대화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는 지혜로운 정치의 산물이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덕목으로 꼽히는 ‘공감’, 정치적으로는 세대별 전쟁 수준까지 갈라진 상황에 대해 싸우지 말고 현실 직시부터 해야 한다. 모든 역사엔 빛과 어둠이 있다.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를 기쁘게 하는 최고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우리를 분노케하는 가슴 아픈 비극의 역사도 공존한다. 연구자와 학습자는 모두 역사 해석의 독단을 경계하고 끊임없는 소통과 교류를 역사 이해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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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문/교양 출판그룹 반비입니다. ^^


이번에 반비에서 책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안 샌섬의 신간, 『페이퍼 엘레지』가 출간되었습니다.

누구보다 종이와 책에 애정이 있다고 자부하시는 분이라면

이번 서평단 활동으로 종이사의 한 획을 그어주시기 바랍니다.


***

 



 

『페이퍼 엘레지』

감탄과 애도로 쓴 종이의 문화사

책이 사라지는 시대, 

연약한 종이의 질긴 내구성을 탐구하다!  


 

이 책에서는 아주 장황한 방식으로 종이의 죽음이라는 말이 과장되었음을 보일 참이다. 종이를 잔뜩 머금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종이에 작별을 고한다고 함은 어느 날 글쓰기를 익혔다는 이유로 말하기를 멈춘다는 말과 비슷하다.” 

 

이 책에서 나는 종이가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비애감과 옛날 종이를 그리워하는 향수의 존재를 인지한다. 예전 종이의 두께감과 묵직함, 젊음의 이상이 담긴 너덜너덜해진 포스터들. 우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이런 종잇조각이 점점 낡고 희귀해진다는 것. 한편 무엇보다도 종이의 역설, 종이의 쓰임에 내포된 아이러니, 이중적 의미, 가치, 광활한 범위와 규모를 다룰 참이다.

 

-본문 중에서 



 

***

▶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4년 9월 22일(월)부터 9월 28일(일)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4년 9월 29일 월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10월 6일(월)부터 10월15일(수)까지 10일간입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0일간 예스24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 후, 『페이퍼 엘레지』 서평단 발표 포스팅에 예스24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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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25년 간 『사이언틱 아메리칸』지의 수학 칼럼 편집 및 퍼즐 제작자로 활동하고, 루이스 캐럴 연구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는 앨리스 2부작(『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은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라고 말했다. 일관성 없는 줄거리와 갑작스런 전환 때문에 독서 의욕을 잃게까지 할 수 있다. 더구나 작가의 해학과 역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 또한 필요하다.

 

 

 

 

 

 

 

 

 

 

 

 

 

 

그래서 마틴 가드너는 1960년 ‘주석 달린 앨리스’를 처음 냈고, 1990년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냈다가 2000년 결정판 ‘앨리스’를 출간했다. 이 결정판은 북폴리오에서 번역돼 나왔다. 꼼꼼한 주석뿐만 아니라 존 테니얼의 원본 삽화와 근래에 발견된 그의 연필 스케치 그리고 존 테니얼의 반대로 『거울 나라의 앨리스』 첫 번째 판본에 실렸다가 삭제된 ‘가발을 쓴 말벌’이 수록되어 있다. 마틴 가드너의 『앨리스』 결정판은 앨리스 마니아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었으나 현재 절판되었다.

 

 

 

 

 

 

 

 

 

 

 

 

 

 

 

마틴 가드너는 20대가 돼서야 앨리스 2부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후, 『사이언틱 아메리칸』에 수학 퍼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역시 수학 퍼즐이나 마술을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루이스 캐럴에게 정신적인 친밀감을 느꼈다. ‘좀 더 주석 달린 앨리스’를 발간한 지 6년 뒤에 가드너는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이 아닌 ‘수학 레크레이션 전문가’ 루이스 캐럴를 소개하는 책을 쓰게 된다. 책 제목은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

: Lewis Carroll’s Mathematical Recreations, Games, Puzzles, and Word Plays 』. 우리말로 직역하면 ‘손수건 속의 우주’이다.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 실린 삽화, 마인 헤어가 뮤리엘 양에게 안과 밖이 없는 손수건을 만드는 방법을 보이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특이하고 재미난 놀이나 게임을 알려주는 캐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삽화는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27쪽에 인용함) 

 

 

‘손수건 속의 우주’는 루이스 캐럴의 또 다른 작품 『실비와 브루노』의 속편 『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에서 나오는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손수건을 의미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마인 헤어라는 교수가 뫼비우스의 띠를 설명하면서 이와 유사한 3차원 단면을 만들었는데 ‘포추나터스의 지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으로 전 우주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루이스 캐럴은 앨리스 2부작뿐만 아니라 『실비와 브루노』『실비와 브루노, 결말 짓다』『스나크 사냥』 같은 소설을 남겼다. 이 세 작품은 앨리스 2부작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 덜 알려져 있지만, 수수께끼 시, 언어유희, 수학 퍼즐 등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걸작이다. 생전 캐럴은 『실비와 브루노』가 자신의 역작이라고 생각했으며 지금도 앨리스 2부작과 마찬가지로 캐럴 연구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텍스트이다.

 

 

 

 

 

 

 

 

 

 

 

 

 

 

 

 

마틴 가드너의 『The Universe in a Handkerchief』는 캐럴이 쓴 소설, 편지, 각종 팸플릿에 찾아낸 각종 수학 퍼즐, 수수께끼, 마술 등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한다. 단순히 캐럴의 삶을 조명했다기보다는 그동안 앨리스에 가려진 캐럴의 수학적 재능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국내에 번역된 책의 제목이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푸른미디어, 2000년, 절판)이다. 국내에 출간 당시, 책 제목을 원제 그대로 옮겨 썼다면, 이 책이 루이스 캐럴에 관한 내용을 다룬 건지 독자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실비와 브루노』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니까. 『실비와 브루노』는 속편과 함께 2011년에 페이퍼하우스에서 최초로 출간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캐럴의 소설이기에 출간 소수의 캐럴 마니아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으나 어느새 이 책도 품절되었다.

 

 

 

 

 

 

마틴 가드너의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그동안 캐럴의 전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흥미롭운 내용이 가득하다. 수학 퍼즐뿐만 아니라 그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든 단순한 오락에서 암호와 농담이 들어 있는 수수께끼 시와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앨리스를 즐겨 읽은 독자라면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에필로그에 나오는 시에 캐럴이 암호를 숨겨 놓은 사실을 알 것이다. 각 행의 첫 번째 글자들을 모으면 캐럴이 좋아했고, 앨리스의 실제 모델인 소녀의 이름이 된다. 캐럴은 이와 유사한 형태의 시를 자주 쓰곤 했다. 그리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미친 모자쟁이가 내는 수수께끼는 답이 없는 걸로 유명하다. “까마귀와 책상이 같은 점이 무엇일까?”

 

 

 

 

 

캐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내성적인 성격에다가 말더듬이였다. 그러나 그는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능력은 있었다. 손수건과 냅킨으로 다양한 물체를 접을 수 있는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만든 종이 딱총 접는 법은 종이접기를 꽤 해본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단순한 접기 방식이다. 나는 초등학생 때 캐럴이 만든 방법처럼 종이 딱총을 접어본 적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 단순한 종이 접는 법을 캐럴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랍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수학 퍼즐리스트의 양대 산맥인 샘 로이드(1841~1911)와 헨리 듀드니(1857~1930)를 꼽으며 그들의 계보를 이은 사람이 마틴 가드너이다. 그러나 세 사람 이전에 캐럴은 이미 자신만의 수학 퍼즐을 만들고 있었다. 퍼즐리스트로서의 업적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가 만든(혹은 오래전에 알려진 문제를 그가 문서로 언급한) 문제들 중에 최근에 TV나 영화를 통해 알려져서 유명해진 것이 있다. 정답은 글 제일 밑에 있다.

 

양치기가 양, 늑대, 양배추와 함께 강을 건너야 한다. 양과 늑대를 남겨두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양과 양배추를 남겨두면 양이 양배추를 먹는다. 전부 다 무사히 가지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캐럴의 문제는 양치기, 여우, 거위, 옥수수 자루가 등장한다. 무한도전 스피드 특집에서 엘리베이터 문제로 나왔으며 그 이전인 2007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 ‘페르마의 밀실’에 먼저 나왔다.

 

 

 

 

 

캐럴은 20대 초반에 미로도 만들었다. 도대체 캐럴의 재능은 어디까지인가? 이 책에 수록된 캐럴의 미로는 상당히 복잡하다. 단 한 사람의 머리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결정판 『앨리스』에 비해 분량은 얇지만, 난이도 높은 캐럴의 수학 퍼즐과 문제들을 수학을 어려워하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 역자의 노력이 돋보인다. 캐럴에 대한 관심과 전문 연구가 부족한 시기에, 그것도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보다 먼저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국내 캐럴 마니아라면 읽을 가치가 높은 책이다. 만화, 영화, 축약본 등 숱한 앨리스 텍스트 때문에 제대로 읽지 않고도 다 안다고 착각하는 독자들에게 진짜 앨리스, 아니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을 즐겁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앨리스와 캐럴을 다시 만나는 길을 이제 찾기 힘들어졌다. 마틴 가드너의 결정판 『앨리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그리고 『실비와 브루노』까지 서점에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

 

 

 

 

 

 

 

 

 

 

 

 

 

 

 

 

 

그나마 캐럴 마니아에게 유일한 위안이 된다면 캐럴의 『스나크 사냥』(이북코리아, 2013년)은 전자북으로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참에『스나크 사냥』도 단행본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  양치기, 양, 늑대, 양배추 문제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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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턱없이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기실 나 남 할 것 없이 몸보다는 마음이 더 분주한 세상이올시다.”  (김용준, 「매화」 중에서, 『마음을 비우는 지혜』 303쪽)

 

 

『근원 수필』를 쓴 김용준 선생은 황폐한 일제 강점기에 이렇게 매화에 대해서 이토록 발랄하고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화의 적막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면 가난한 살림도 운치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선생의 친구는 한가롭게 매화 구경을 하는 선생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바쁜 세상에 꽃구경을 하는 선생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선생은 매화를 바라보는 여유가 없는, ‘냉회(冷灰) 같이 식어버린 우리네 마음’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선생이 살았던 조선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기만 하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이다지도 바빠졌는가’를 조소하게 된다.

 

옛날 선비들은 자연을 벗 삼아 욕심을 버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공부하는 것이 여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풍족한 속세의 기억을 잊지 못해 시골로 낙향하고 싶은 마음을 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도시에서 점점 꽃과 나무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꽃과 나무가 있었던 자리에는 어느새 콘크리트로 된 길바닥 위에 회색빛 건물들이 우뚝 서 있다. 이런 곳에서 살수록 우리는 자신만의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나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루만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것도 어려워졌다. 왠지 자기 혼자 세상에서 뒤처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제는 독서마저도 하기 힘든 분주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책 읽을 수 있는 자신만의 시간이 없을 뿐이다. 24시간 중에 나 혼자 여유로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빠른 삶의 속도에 이끌리지 않고, 잠시 혼잡한 일상을 제쳐둘 수 있는 지혜를 잊어버린 채 사는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봐야 한다.

 

 

 

 

 

 

 

 

 

 

 

 

 

 

 

 

 

정민 교수의 『마음을 비우는 지혜』(솔출판사, 1997년, 절판)는 삶의 근심을 잊고, 생활 속에서 소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싶은 독자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우리 식의 짧은 격언에 해당되는 ‘청언(淸言)을 한문 원문과 함께 우리말로 옮겼다. 이 책은 정민 교수가 최초로 펴낸 문장 모음집이다. 이 책을 펴내기 전에 정민 교수는 『한시 미학 산책』(초판: 솔출판사, 1996년/개정판: 휴머니스트, 2010년)으로 대중들에게 한시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이미 1993년에 정민 교수는 한시와 평설을 함께 엮은 『꽃 피자 어데선가 바람이 불어와』(교학사, 1993년, 절판)의 공동저자로 참여했지만 정민 교수 개인의 평설을 곁들인 형식으로 쓴 첫 번째 문장 모음집은 『마음을 비우는 지혜』이다.

 

 

 

 

 

 

책에 수록된 청언소품들은 중국의 명말청조 시기 때 나온 홍자성의 『채근담』, 여곤의 『신음어』, 장조의 『유몽영』 등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특히 『유몽영』은 『생활의 발견』을 쓴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이 최고의 찬사를 보낸 책이다. 『유몽영』은 1997년에 '자유문고 동양학총서' 34번째 시리즈로 번역되었고, 2001년에 정민 교수가  『유몽영』의 속편  『속유몽영』을 포함한 내용을  『내가 사랑하는 삶』(태학사, 2001년)이라는 제목으로 국역해서 소개했으나 절판되었다.

 

 

 

 

 

 

 

 

 

 

 

 

 

 

 

정제되고 간결한 글이지만 격조 있고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어 옷깃을 여미고 곱씹게 만든다. 때론 그윽한 수묵담채화를 떠올리는 영상이 문장 속에 농축돼 있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정취, 세심한 관찰력에서 현현하는 인생의 참 뜻,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 독서 취미에 이르기까지 주제와 소재의 폭은 실로 다양하다.

 

바쁘게 사는 우리들을 부럽게 만드는 몇 대목만 읽어보자.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을 그냥 눈으로 바라보기가 아깝다. 흥취를 돋우는 맛 좋은 술이 있어야 한다.

 

누각 위에서 산 구경하기, 성 머리에서 눈 구경하기, 등불 앞에서 달 구경하기, 배 위에서 노을 구경하기, 달빛 아래 미인 바라보기, 이 모두 특별한 운치가 있는 정경들이다. (『유몽영』에서 인용, 54쪽)

 

옛 선비들이 할 일이 없어서 한가한 것이 아니다. 김용준 선생이 할 일이 없어서 매화 구경을 하는 것이라고 선생의 친구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한가로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속세로 인해 피폐해진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 단지 놀기 위해서 한가한 생활을 원한다면 그건 소인의 한가로움이다. 

 

사람이 한가함보다 즐거운 일은 없다는 말은 아예 할 일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하면 책을 읽을 수가 있고, 명승을 찾아 노닐 수도 있으며, 유익한 벗과 사귀기도 하고,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책을 저술할 수도 있다. 천하의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큰 것이 있으랴. (『유몽영』에서 인용, 98쪽)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는 스무 살 전후는 시간을 아껴 공부해야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1년 유급을 해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옛날 어르신들도 젊은 시절에 학문 연마하기 위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젊은이는 세상일 때문에 책 읽기를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마땅히 책을 읽어 세상일에 통달해야 한다. (『암서유사』에서 인용, 182쪽)

 

그러나 독서만이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세상 견문을 넓히지 않고 책으로 배우기만 해서는 글을 쓸 수 없고, 좁은 식견을 가진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만다. 한창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기에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독서에 의존하면 정작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한가로운 대화를 나누면 구설을 멀리할 수가 있다. 한가로이 독서하면서 적막함을 달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늙어 할 일 없는 사람에겐 으뜸가는 보약이지만 젊은이가 이를 배우려 하면 잘못이다. (『자술』에서 인용, 182쪽)

 

정민 교수의 『마음을 비우는 지혜』는 내면의 삶은 더 황폐해진 시대에 등불이 되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비록 그 등불은 켜지지 않은 상태이지만(현재 책은 절판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어두운 삶의 근심을 밝게 해주는 생명력이 문장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선인의 지혜를 찾는다면 이 등불은 언제든지 켜지게 될 것이다. 선인들의 관심사가 지금 우리 고민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잘 들여다보면 현실의 이야기가 옛 사람들 이야기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다. 『마음을 비우는 지혜』라는 등불을 켠다면 시대를 초월하는 사람들 내면 풍경의 보편성, 그리고 지금 사람들에게도 와 닿는 옛사람들의 생각을 훤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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