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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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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들어 누구나 역사를 이야기하는 세상이다. 정치가들은 역사에 물어보라거나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인들은 역사를 알아야 교양이 있어 보인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해 분노하고, 또 우리 ‘역사’를 너무 모르는 현실에 대해 개탄하기도 한다. 대통령은 역사 과목을 필수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 과정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언급되는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한 논란 가운데 정작 ‘역사’가 무엇이며, 왜 ‘역사’를 이야기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은 아직 부족해 보인다.

 

에드워드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단순한 역사학에 대한 이론서가 아닌 저자 자신의 역사관을 명확하게 밝힌 책이다. 카는 기존 랑케 중심의 실증사학을 비판하면서 남겨진 사실은 과거에 해당하나, 이를 발굴하여 연구하고 서술하는 역사학자는 현재의 존재이기에 그 해석과 평가의 기존은 현재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즉 현재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과거를 살펴보고, 이러한 과거와의 대화를 통해 미래에 대한 교훈을 찾아내기 위함이 역사의 존재이유라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역사가’ 없이는 역사로 탄생될 수 없으며, 역사가 또한 과거 없이 역사를 쓸 수가 없다. 결국 역사는 역사학자와 과거 사실 간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재생산되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즉 그가 이야기하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를 쓴 역사학자를 이해하여야 한다고 카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역사가는 신(神)이 아니다. 역사가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관’ 역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정치, 사회적 경제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사 가운데 카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카는 ‘사회와 개인’ 부분에서 “우리는 자신의 시대보다 훨씬 앞서 갔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대에 의해서만 그 위대함이 인정되었던 위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위인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이었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서 사회적인 존재로서 참여한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하였던 그 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적인 개인들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 사이의 대화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역사의 기능은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역사의 과학성’ 부분에서 그는 근대학문이 자연과학의 발달에 영향을 받았기에 역사학에서도 과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가 과거 남겨진 특수한 개별사실들과 일반적인 사실들 간의 관계성을 파악하고자 하기에 ‘과학’이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역사학에서 연구의 대상을 ‘원인’에 관한 것이라 하였다.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부분을 보면, 모든 사실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개인적 원인 및 장기적 원인과 단기적 원인 등 다양하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역사학자는 역사적 중요성이란 측면에서 다양한 원인 중 궁극적인 원인을 규명하고, 다른 원인들 간의 선택과 배열의 결정을 해석을 통해 행한다고 하였다. 이를 행하는 것이 역사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거와 미래를 동일한 시간대의 일부이며, 과거에 대한 관심과 미래에 대한 관심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역사학자는 ‘왜’라는 질문에 그칠 것이 아니라 ‘어디로?’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어디로 역사가 전개될 것인가를 다룬 부분이 ‘진보로서의 역사’이다. ‘진보로서의 역사’ 부분에서 그는 역사는 신학처럼 종말을 강조하거나 현실 밖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획득된 자산의 전승과 연결된 미래의 진보를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그는 역사의 흐름에 퇴보의 시기도 있을 것이고, 또 ‘진보’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강력한 신념으로서 ‘진보’를 설정하고 있다. 나아가 이는 역사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이며,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표현을 진전시켜,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역사의 본질은 운동이며, 곧 ‘진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즉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사회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역사가의 임무라고 제시하고 있다.

 

물론 카의 역사인식이 현재의 상황으로 보면 여러 문제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책이 출간된 1960년대 초반보다 현실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 불투명하며, 빈부격차나 종교, 혹은 이념간의 갈등도 더 심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의 역사인식이 효용성을 갖는 것은 이러한 진보과정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의 실천적 역사관에서 제시하고 있는 ‘진보’의 개념에 오늘의 위기상황을 접목시켜 이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하는 역사관의 생산을 위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대안을 위해 다양한 시각과 방법으로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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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2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학 때 리포트 때문에 대충 읽고 말았던 책이군요.
언젠가 한번은 제대로 다시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시루스님께서 잘 정리해주신 덕분에 다시 안 읽어도 될 것 같은데요. ^^

'실천적 역사관', '역사에 대한 통찰' 이런 것들이 꼭 필요한 시기죠!
뉴라이트나 딴나라당 애들이 대학 때 이 책만 제대로 읽었어도 나라 꼴이 이 모양은 아닐텐데요.

cyrus 2013-07-26 22:22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 내용이 어려워서 읽다가 포기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도 은빛님처럼 리포트 때문에 읽었다면 정말 마음 속으로 짜증날 정도로 혐오감이 들 수 있는 책이었을 겁니다. ㅎㅎㅎ 그래도 완독하니까 왜 이 책이 대학생 필독 도서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우리 삶이 춤이 된다면 - 일상을 깨우는 바로 그 순간의 기록들
조던 매터 지음, 이선혜.김은주 옮김 / 시공아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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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려면 먼저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야 한다. 춤에서의 공간 개념이란 한 마디로 단순하게 설명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일차적으로는 공간의 한 지점 안에서 신체 모든 부분들이 어떤 각도로 조화를 이루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시간성과도 연관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똑같은 포즈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느리게 회전하는 움직임의 경우에 어떤 각도로 보이게 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지를 인식하고 그런 다음에 회전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객석의 관객이 보았을 때 가장 아름다운 각도에 시간을 보다 많이 배려하는 것, 말하자면 지극히 단순한 한 동작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선택한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더 많이 깨어 있어야만 더 많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깊이 인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에 의한 조화의 결과는 비단 춤만 있는 건 아니다. 사진은 언제 어디서든 조화의 느낌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과거처럼 특정 부류만 비밀스럽게 향유하는 게 아니라 셔터를 누를 힘만 있으면 누구나 사진을 만들고 소비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와 마찬가지로 사진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거친 욕’이 되기도, ‘아름다운 시어(詩語)’가 되기도 한다. 사진 한 장은 ‘이미지’로 기능하기보다 의미를 주고받는 ‘언어’로 작동한다. 이미지를 넘어 의도를 담지(擔持)한 기호인 것이다.



“인간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셔터를 눌렀다.” 故 최민식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렇게 요약한다. 그는 인생의 반세기동안 인간을 찍었다. 인간은 최민식 사진의 영원한 주제였고 의미가 함축된 하나의 언어로 봤다. 지금까지 펴낸 12권의 작품집 제목이 모두 ‘인간’이었다. 반면 조던 매터는 삶이 거기에 있기에 셔터를 눌렀다. 그가 포착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활동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표정이며 인간의 그늘이고 인간의 현재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삶이라는 하나의 결합체로 사진을 통해 구성된다.



삶은 늘 반복의 연속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간다.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어느 날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고 그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쩌면 쉽게 지나쳤기 때문에 소중한 줄 몰랐던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무용수들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지상에 묶여 있는 인간이 중력의 법칙에서 해방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파인더에 담아낸다. 도시 곳곳에서 이들은 마음껏 춤의 본능을 발산한다. 무용수들의 애크로바틱한 동작은 트램펄린이나 와이어를 이용하지 않았다. 무용수들의 포즈 역시 디지털 보정을 거치지 않았다. 맞다. 여기에 뽀샵질은 없다. 사진은 오직 무용수들의 100% 리얼한 동작에 의존했다. 조던 매터는 무용수가 점프해 허공에 떠 있는 장면을 담기 위해 셔터 속도를 1/320로 맞추고, 각각 점프마다 단 한 컷의 사진만 촬영했다. 무용수들의 결정적인 순간을 예측해서 한 번에 승부를 걸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들과 같이 움직이고자 몸이 들썩거린다. 그렇게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보는 이의 심장을 바운스(Bounce)하게 만드는 생(生)춤이다.



우리가 이들의 몸짓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몸이라는 언어가 그만큼 생동감과 소통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꿈과 사랑, 일, 인생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감정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전해진다. 그들이 높은 점프를 하고 고난도의 포즈를 취해서가 아니라, 진정성 있는 연기가 더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야구 선수로 활동하다가 사진가의 삶을 살게 된 조던 매터의 진솔한 이야기가 만나면서 오랜 순간의 여운을 느끼게 해 준다.



우리가 세상을 감지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제한적인 것은 아닐까. 우리는 가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놓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차원을 맛보기도 한다. 사실 영상 매체야 말로 확대된 시간과 공간을 가장 쉽게 보여주는 과학적 산물이지만. 사진이라는 것이 기계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인간의 정서와 감정과 감동을 불어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진의 기적이다. 이것은 마치 시인이 무생물인 언어에 호흡을 넣어 생명의 말을 만들 듯이 조던 매터는 무생물인 카메라에 호흡을 불어넣어 일상적인 삶을 새롭게 잉태하고 있다.



무용수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더 많이 깨어 있을수록 더욱 풍부한 춤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듯이 더 많이 깨어 있는 관객일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보다 둔감한 관객이라면 시공 에너지의 섬세한 부분들의 아름다움을 상대적으로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조던 매터의 사진을 보는 우리 독자 또한 그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고 있는 공간이나 스쳐 지나는 시간에 대한 감지력이 지금보다 더욱 예민해지게 된다면 우리는 현재와는 또 다른 차원의 삶을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좀 더 깊이 시간과 공간을 확대해서 감지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놓쳐 버리는 ‘찰나’라는 시간 속에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너무나 평범하고 미미하다고 여겼던 일상적인 것들이 값지고 위대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세상과 화해하고 삶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된다. 우리가 스쳐 지났던 모든 것, 우리가 지금 스쳐 지나가려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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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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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 제대로 알고 있을까?

 

<레 미제라블>은 우리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집필 당시 제목은 ‘레 미제레(Les Miseres, 비참함)’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 군상들을 세세히 그려낸 대서사시다. 노도와 같은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은 휩쓸려갔지만 ‘인간애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상이 작품을 관통한다. 대선의 열기가 남아 있는 불씨가 사라지지 않을 무렵에 동명 원작의 뮤지컬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2012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에게 표를 준 시민들에게 일종의 ‘힐링 무비’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이 영화가 2012년의 대선에서 야권을 지지했던 48%의 유권자들이 느낀 상실과 좌절감에 위안이 되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에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점철되어 있다. 사회의 진보에는 수많은 퇴행과 반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지금 이 현실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상처는 충분히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가사와 합창의 장엄한 감동으로의 어우러진다. 이러한 시각이 나름의 근거를 연상케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힐링'이란 말 그대로 몸이나 마음의 상처를 회복 또는 치유한다는 말이다. 즉 '힐링'은 이미 상처와 아픔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상처와 아픔의 원인과 정도, 위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 현실적 구성은 온데간데없고 치유된 상태, 회복된 상태, 건강한 정상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한 용어는 '힐링'이 아니라 '환상'이다. 환상은 보이는 현실에 눈을 감아 버리고 가상의 실재에 주체를 옮겨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환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작동한다. 이러한 환상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반성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안다고 볼 수 없다. 역사적 사건 속에 피어난 로맨스에 치우친 뮤지컬 영화만으로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진의와 교훈을 되짚어 보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레 미제라블>은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이전 격랑의 시기를 주요 무대로 한다.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장기간의 격변으로 이루어진 사건의 스케일을 생각한다면 영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그려진 그 ‘프랑스 혁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당찮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담론을 우리 사회나 개인의 사회적 삶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나 이론적 검토를 통해서 형성되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언어들은 방송과 상업적 광고를 통해서 제시되고 유통이 되며 이것이 마치 시대의 정신이나 사회문화적 담론이나 되는 양 재생산될 뿐이다.

 

혁명에 의한 반동과 좌절을 상징하는 장면이 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화의 결말, 즉 이미 알고 있는 혁명의 결과만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학창 시절 프랑스 혁명을 공부하게 되면 세부적인 과정보다는 혁명의 결과 및 의미만 달달 외워서 기억하듯이.

 

 

 

 ♣ 사회가 곯고 있는 사이에 피어난 혁명의 작은 불씨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28쪽)

 

 

 

'태양왕' 루이 14세의 무리한 대외 전쟁으로 프랑스의 경제는 상승세가 꺾였다. 루이 15세는 영국과 전쟁을 하다 북미와 인도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면서 경제 문제는 회복 불능으로 치달았다. 사실 이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으킬 조짐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경제 불능 속에서도 소수의 귀족은 재산을 불렸고, 상당수 가난한 평민들은 굶주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미 조금씩 불만의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기름을 부었던 결정적 시기가 바로 루이 16세 시절이다. 루이 16세 때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영국에 북미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던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전심전력으로 원조했다. 재무대신 네케르는 이대로 가면 프랑스는 파산한다고 경고하였으나 그는 되레 해임되었다.

 

그러나 네케르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의 말대로 국고가 비어버리고 만 것이다.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여기서 ‘삼부회’는 일본 말을 그대로 빌려 쓴 말이라 우리나라 말로 순화한다면 ‘전국 신분회’로 쓰는 것이 낫다. 전국 신분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중들은 왕이 전국 신분회를 통해 자신들의 고초를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건다. 하지만 국왕은 대놓고 제3신분을 차별했다. 복장은 물론이고 개별적으로 국왕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국 신분회는 민중들의 고초를 다독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이 모두 같은 수인데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평민 출신 재무 장관 네케르는 제3신분 의원 수를 두 배로 늘릴 것을 요청한다. 왕은 제3신분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기 위해 그 요청을 들어준다. 그러나 부회별 투표 방식을 머릿수 투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전국 신분회가 심의하는 것으로 넘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죄드폼의 맹세』1791년

 

 

결국 제3신분은 ‘국민의회’를 선언한다. 놀란 귀족들이 회의장을 폐쇄하자 죄드폼(Jeu de Paume)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죄드폼이란 테니스의 일종으로 그 놀이를 할 수 있는 실내 체육관이다.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몰려나와 테니스 코트에 집결한 격앙된 표정의 사람들.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댕긴 죄드폼에서의 서약은 당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붓을 타고 1791년 화폭으로 옮겨왔다. 혁명, 그때 그 순간의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루이 16세는 독일과 스위스 용병을 파리에 배치하면서 국민의회를 압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 민중들은 분노한다. 독일 용병과의 충돌을 계기로 시민들은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바스티유로 향한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 끝에 바스티유는 함락된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발표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여전히 ‘프랑스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에서 플랑드르 연대가 혁명의 상징인 삼색모장을 짓밟자 파리의 부녀자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한다. 국왕이 파리 부녀자들의 포로가 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1막을 내린다.

 

 

 

 ♣ 왕의 광장에서 혁명 광장으로

 

 

 

 

 

 

'화합의 광장'이라 이름붙인 콩코드르 광장. 1753년에서 1763년에 걸쳐 건축된 이 광장은 당시 ‘루이 15세 광장’이라 이름이 붙여졌지만 국왕 루이 16세의 폭압에 시달리던 프랑스 전 민중이 들고 일어났던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혁명광장'이라고 불려졌다. 루이 15세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목을 자르는 단두대가 그 자리에 설치됐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의 목을 프랑스 민중들은 잘라버렸다. 몸뚱어리와 '모가지'를 이등분으로 분리 즉사시킨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를 쳐든 프랑스 민중들은 '프랑스 만세'를 불렀다. 프랑스 민중 개개인의 존엄성과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루이 16세의 목을 자른 민중들의 역사행위는 신분제의 철폐와 프랑스 국가공화정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몇 해 전인 1789년 7월 14일 정치범이 수용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그 날은 혁명 기념일이 되었고 이 날이 바로 프랑스 국경일이다.

 

프랑스 민중들의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가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다가 국경 근처에서 발각되어 시민군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된다. 프랑스인들은 자국민들을 외면하고 적국의 나라로 피신하려던 사람을 자기들의 입헌군주든 절대군주로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루이 16세의 모가지는 단두대에 베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egime)'을 지키려는 특권계층의 기득권에 대한 '향수병' 때문이었다. 구체제 특권층의 기득권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한 조세개혁의 실패는 국가 재정난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결정적 씨앗을 제공했다. 특권층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 폐지, 귀족과 평민의 공평한 과세 등을 담은 '인권선언'을 채택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혁명의 불길을 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던 국왕 루이 16세와 구체제의 사수를 위해 기를 썼던 대부분의 특권층은 결국 단두대 올라 목이 잘렸다. 공포정치의 시대가 지나고 나폴레옹 정권이 수립되면서 혁명은 끝났다.

 

어느 시대나 '개혁'을 두려워하는 계층은 있기 마련이다. 보수층이라고 일컬어지는 반 개혁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체제나 다름없는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기득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말로는 '몰락'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래서 역사가는 역사의 결과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 구체제의 모든 면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에 큰 변혁을 일으킨 전체 모든 과정을 본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구체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낳은 구체제를 이해해야 한다.’(36쪽)

 

 

 

 ♣ 너란 '혁명'을 알고 싶어 Hello~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대, 찰스 디킨스는 이 시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으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희망의 봄인 동시에 절망의 겨울이었다.”

 

한쪽으로만 치닫는 극단은 혁명기나 혼란기에도 통용됐다. 몽테유파가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 세력을 단두대로 보낸 것도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구체제 특권계층을 벌벌 떨게 하던 혁명의 '공포'는 프랑스 내부와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변질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공포 정치와 독재, 살육이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흑백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혁명의 진원지에서도 존재했다. 하나의 색으로만 상대방의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시대착오적 발상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의 로맨스 뒤에는 기억하기 싫은 어둠의 이면이 가려져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폄하할 정도로 먼 나라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극단과 광기의 이면에 의한 역사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어리석음의 시대, 최악의 시대를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역사를 보고 싶다면 낭만적인 혁명의 로맨스와 결별해야 된다.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의의 승리나, 역사의 발전과 같은 판에 박은 당위가 아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하나 하나의 삶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정의나 혁명의 승리의 수준을 뛰어넘는 인간의 평생을 다하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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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의 재발견 - 1년 내내 계획만 세우는 당신을 위한 심리학 강의
피어스 스틸 지음, 구계원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 자신감 없는 거북은 달리기 경주에 승리할 수 있었을까?

 

 

서로 제가 더 날래다고 거북과 토끼가 다투었다. 둘은 헤어지기 전에 날짜와 장소를 정해놓았다. 토끼는 타고난 속력을 믿고는 서둘러 출발하지 않고 길가에 누워 잠을 잤다. 거북은 제가 느리다는 것을 알고는 쉬지 않고 뛰었다. 그리하여 거북은 자고 있던 토끼를 앞지르고 경주에서 이겨 상을 탔다. (352. 토끼와 거북이, 천병희 역 《이솝 우화》 도서출판 숲, 378쪽)

 

 

이솝 우화 중에 ‘토끼와 거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빠른 토끼와 느린 거북이 사이에서 달리기 경주에서 드러난 결과를 가지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승리한다는 교훈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180도 바꿔서 바꿔보겠다. 거북은 자신이 토끼보다 걸음이 느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느린 걸음을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경주에 임하기 전부터 거북의 마음은 심란하다. ‘내가 토끼보다 걸음이 느린데 과연 내일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를 이길 수 있을까?’ 거북은 마음속으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토끼보다 빠르다고 우겼던 패기는 온데간데없다. 점점 자신감은 떨어지고 있다.

 

자신감이 부족해서 벌써부터 목이 움츠려진 거북은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 나는 거북이 토끼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제 뜀걸음에 오만한 토끼가 여유를 부린다고 해도 거북은 이기지 못할 것이다. 단지 거북이 느리다고 해서 토끼의 우승을 점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느린 걸음에 자신감이 위축되어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부터 거북은 이미 패배한 거나 다름없다. 경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토끼에게 기권을 선언했을지도 모른다.

 

 

 

 ♣ 늑장의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유형

 

우화의 정본에 등장하는 토끼는 거북과의 경주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쉬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간 거북에게 패하고 만다. 내용을 완전히 비틀어서 새롭게 구상한 우화에 나오는 거북은 자신이 토끼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마자 경기를 포기하거나 패하게 된다.

 

감정의 상태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패배하게 된 토끼와 거북. 이들은 눈앞에 있는 계획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결심했으나 포기하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시험에서 목표 점수 이상 받기, 일주일에 담배 두 갑을 피던 흡연 습관을 버리고 금연하기, 옷에 삐져나오기 일부 직전인 물렁물렁한 뱃살을 빼기 위해 일주일에 두, 세 번 운동하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계획과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대다수는 계획의 목표치를 이루지 못한 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 시작할 땐 좋다. 계획했던대로 실행해나간다. 그러자 게으름의 신이 우리 옆에서 강림하사 유혹의 손짓을 한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미룬다. 꼭 해야 되는데 하기가 싫어진다. 공부해야 되는데 머릿속에는 공식 대신 컴퓨터 게임 화면이 아른거린다. 이틀 동안 담배를 입에 물지 않았을 뿐인데 입이 텁텁하고 몸의 기운이 빠진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운동을 하니까 힘든 마당에 야식으로 시켜 먹었던 치킨과 피자가 먹고 싶어진다. 젠장, 목표는 개나 줘버리고 원래 일상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작심삼일이다.

 

준비한 계획을 포기하게 되면 늑장 부린 자신의 나태함을 ‘멘탈 부족’이라는 근거를 대면서 자책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면서 작심삼일로 인해 마음의 쓰레기통으로 폐기처분된 계획의 횟수를 어림잡으면 상당히 많다. 앞으로 남은 인생의 반을 생각해본다면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될 계획들은 더 있을 것이다. 슬픈 결과가 나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고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늑장 부리는 태도다.

 

미국의 심리학자 피어스 스틸은《결심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늑장 부리는 사람의 세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충동에 쉽게 휘둘리면 십중팔구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졸음을 이지기 못해 경주 도중에 잠드는 토끼처럼 말이다. 그러나 충동적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멘탈’이 나쁘다고 크게 자책할 필요는 없다. 계획의 구체성 정도에 따라서 이에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목표는 구체적으로 세우는 반면 장기간 실행해야 할 미래의 목표는 추상적으로 세우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장기적 목표를 구체적인 내용인 아닌 추상적으로 세운다면 늑장 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목표에 대한 흥미와 몰입도도 떨어지게 된다. 우리 주변에 유혹하는 것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꾸준히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일에 싫증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특히 즐겁지 않은 일수록 늑장 부리기 쉽다. 리포트 준비 기간을 두 달 잡아 부여하더라도 제출 마감 기한을 남겨두고 끝내기란 의외로 어렵다. 성실하고 근면한 성격의 학생이라면 미리 리포트 작성을 준비하고 작성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리포트 쓰는 걸 즐겁게 여기겠는가. 제출 마감 기간까지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면 슬슬 늑장의 기운이 올라온다. 리포트를 빨리 준비하고 작성하면 좋겠지만 막상 쓰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늑장 부리기 쉬운 유형으로는 앞에서 소개한 자신감을 상실한 거북이 있다. 목표에 대한 기대치가 낮고 의욕이 없으면 목표 수립을 위한 도전하기가 힘들어진다. 이러한 비관적인 심리 상태가 지속된다면 스스로 포기한다. 더 이상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된다. 이러한 자아 인식을 ‘자기 이행적 예언’이라고 한다. 스스로 실패라고 예상하면 목표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게 되며 당연히 성과 달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 우리 마음 속 내부의 적, 늑장

 

생각지 못한 내부의 적이 일을 그르칠 때가 있다. 우리 삶에 있어서 한 번씩은 꼭 망쳐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유도하는 적이 바로 ‘늑장’이다. ‘늑장’을 연구했다는 저자도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내부의 적을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미루기 대장’이라고 부르겠는가. 백전백승 지피지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심리학자는 또다시 내부의 적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뇌과학과 동물행동학, 진화생물학 등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늑장의 본질적 원인에 대해 조사했다.

 

늑장연구를 통해 그 원인과 행태를 파악하여 늑장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면할 수 있는 ‘늑장 완전 공략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이 매뉴얼을 제시함으로써 실천 가능한 늑장 탈출의 전략을 조언하고 있다. 다만 내부의 적을 완전히 소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앞에서 늑장의 요인으로 꼽은 ‘충동성’은 매 순간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성향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늑장 부리기는 유전자처럼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전쟁에 참전하는 병사의 사기다. 사기가 제대로 충전되지 않으면 애초에 전쟁에 이길 기대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늑장이라는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상황에 임하는 태도와 인식이 중요하다. 늑장이 더 기세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을 흩뜨려지게 만들고 늑장의 세력을 더욱 확장시키게 만드는 외부적인 원인 또한 잘 살펴봐야 한다.

 

혹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공략 매뉴얼을 보고도 당장 실천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거나 여전히 매뉴얼에 신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애써 실행하지 않기를 바란다.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 일을 하다간 늑장만 더 키우는 꼴이 되니까. 늑장과의 싸움은 결국 정신력, 즉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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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어제 성적석차가 공개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타 대학 성적 공지가 늦어지는 바람에 성적석차가 7월 17일 이후로 공개되기로 했다.

오늘 석차 공개하는 날인지 정확하게 아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또 석차 공개 날을 알고 있는 학생들 중에서 공지가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수업학적팀은 사소하지만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 제대로 공지한 적이 없다. 심지어 불가피한 사유로 인해 날짜가 연기된 점도 역시 공지하지 않았다. '학사공지'라는 공지 관련 게시판이 떡 하니 있는데도 말이다.

수업학적팀은 미리 방학 전에 석차를 공개할 수 있는 충분한 예상 기간을 공지했어야 한다. 수많은 재학생들의 성적이 모두 확인하고 난 뒤에 석차를 계산하는 기간을 충분히 고려하면 정확한 일수는 아니더라도 예상 기간을 계산할 수 있다. 그러면 학생들이 오매불망 그 날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 Scene #2

지금까지 4년째 학교생활을 하면서 수업학적팀이 성적석차 공개하는 날을 공지한 적을 본 적이 없다. 공지를 하지 않으니까 일부 학생들은 '묻고 답하기' 게시판(일종의 Q&A)에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올린다. 학생이 석차 공개 날짜를 물어보면 수업학적팀 이름으로 답글이 올려진다. '묻고 답하기' 게시판답게 충실한 문답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한 주에 이와 같은 질문을 하는 학생이 두, 세 명 정도 있다. 수업학적팀이 일일이 똑같은 답변을 달아주는 건 시간 관리 측면에서는 불필요한 낭비다. 차라리 질문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답글을 다는 것보다는 미리 공지문 하나 올려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효율적인 업무 진행이다.

방학 업무는 정규 학기 일정보다 한가하다. 방학 기간이 되면 학생들의 학교 게시판 접속 및 확인 빈도는 학기 일정 때보다 줄어드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가하다고 해서 학생들에게 중요한 정보사항을 알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학교 게시판을 수시로 접속 확인하는 일부 학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불만이 폭주하면 사과문과 함께 늦게서야 공지한다. 사과문으로 빙자한 늑장 공지가 따로 없다.

수업학적팀의 침묵 공지 또는 늑장 공지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정규 학기 때도 아무런 공지 없이 학사 일정이 진행되는 바람에 학생들 사이에 불만스러운 잡음이 많았다. 일정이 많고 업무상 가장 바쁜 정규 학기임을 고려한다면 행정상 실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가로운 방학 기간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이건 실수가 아니라 실착(失錯)이다.


* Scene #3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지나가는 행인들은 그 건물을 관리를 포기한 건물로 판단하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까지 모조리 깨뜨리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그 건물에서는 절도나 강도 같은 강력범죄가 일어날 확률도 높아진다. 즉, 깨진 유리창과 같은 일의 작은 부분이 도시가 무법천지로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공지사항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학생들이 겪는 한 번의 불쾌한 경험, 한 명의 불친절한 행정직원, 학교의 사소한 실착은 결국 업무 진행에 방해되며 학교 이미지만 나빠진다. 졸업생은 모교를 불만족스러운 행정 업무 서비스로 운영되는 학교로 기억될 수도 있다.

지금 대학교는 미래의 교육 전략이나 원대한 비전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대학 내부를 갉아먹고 있는 사소하고도 치명적인 것, 즉 깨친 유리창들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제때 공지를 못해서 학생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이를 방치해둔다면 이게 진정한 '학생이 행복한 대학교'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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