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인 로라가 인형처럼 길드는 삶을 거부한 지 1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년이면 《인형의 집》 초연 140주년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로라의 딸들은 태어난 가정에서, 결혼한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넓게는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을 차별하는 인습이 남아 있다.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 역시 뿌리 깊게 남아 있기도 하다. 따라서 제도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하였지만, 여전히 남성보다 불평등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 구조는 남성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문학 작품 속 여성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희생양이 되어 온갖 수난과 역경을 그대로 감내하는 순종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결국, 가부장제에 순종하는 여성이 끝내 도달하게 되는 최종 목적지는 가정이다. 남성 작가들이 작품에서 그려낸 여성은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에 눈을 감고 있거나 남성 중심적 사고가 반영된 남성 작가의 분신으로 묘사된다.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비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문단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남성 작가들의 견고한 가부장적 인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현남 오빠에게》(다산책방, 2017)에 수록된 7편의 단편 소설은 모두 ‘페미니즘’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나 소설 속 페미니즘은 한 가지 색이 아닌 각각 다른 빛깔을 띠고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조남주『현남 오빠에게』‘오빠가 여자의 삶을 알아?’라는 물음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주인공이 남자친구인 ‘강현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주인공은 현남의 청혼을 거절한다. 현남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그녀가 청혼을 거절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나와 있다. 편지에 남긴 여주인공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여성 독자의 가슴을 먹먹해지게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여성들이라면 한 번쯤 겪어본 익숙한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현남은 보호자 위치에 서서 여주인공을 대했고, 그러한 상황이 익숙해질수록 여주인공이 자기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 그런 와중에 현남은 그녀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 채 청혼한다. 조남주는 일상 속에 뿌리 깊은 여성 문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든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는 일부 남성 독자는 소설 속 남자 인물의 이름에 딴죽을 건다. 그들은 ‘현남’이 우리나라 남성을 비난하는 은어인 ‘한남’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공식 석상에서 그런 의도로 제목을 정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 소설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작가의 말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정 편향’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나 단어를 바라볼 때 논리적 · 분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신념과 편견으로 판단해버린다.

 

최은영『당신의 평화』는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만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굴레가 얼마나 강력하게 여성들의 자아를 옥죄는가를 포착해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여자로서의 삶’을 억누르면서 살아가는 엄마 정순의 순종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란다. 유진은 가부장제에 순종하는 여성을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로 미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난 너희 어머니,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해.” 그가 말했다.

“평생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갈등도 없었고, 아버지 내조도 잘하셨고, 자식들 똑바르게 잘 키워냈고.”

“현명하다는 게 뭐지.” 유진이 물었다.

“가족을 위해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희생하는 거. 나 좋게 봐.”

“엄만 행복하지 않았어.”

[중략]

 

그가 말했던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란 무슨 의미였을까. 참고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그가 ‘현명함’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유진은 거부감을 느꼈다.  (『당신의 평화』 50~51쪽)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는 가족의 공동체적 평화를 유지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자기희생을 도덕적 이상으로 간주했다. 가부장제 속 여성의 정체성에는 자아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 자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여성의 자아는 희미해진다. 따라서 여성은 자기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게 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사회경제적 지위를 얻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김이설『경년(更年)』은 문학 작품에서 좀처럼 다루지 않은 ‘자식을 둔 중년 여성의 고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자기 아들이 또래 여학생들과 문란한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들의 행동에 고민한 주인공은 남편과 상의해보지만, 남편은 ‘아들에 먼저 접근한 여자아이들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두둔한다. 우리 사회에는 남편의 시선으로 청소년 연애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청소년의 성관계를 ‘일탈’로 보고, 그 일탈을 부추기는 원인 제공자로 여학생을 지목한다.

 

최정화『모든 것을 제자리에』는 앞서 소개된 단편들과 달리 상당히 난해하다. 이 작품에 나오는 여주인공 ‘율’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맞춰 강박적인 자기 검열을 하는 여성의 모습을 상징한다. 도덕적 엄숙주의를 강조하는 사회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여성의 행동을 평가한다. 남성이 인정하는 도덕적 잣대는 여성 차별, 여성 혐오를 변호하는 배경이 된다. 손보미『이방인』여성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누아르 분위기의 소설이다. 작가의 변에 따르면 소설 설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제한을 두는 바람에 소설을 어렵게 썼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이야기의 개연성이 매끄럽지 않다. 나는 구병모『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이 『현남 오빠에게』 못지않은 문제작이라고 생각한다. 표제작에 대한 독자들의 지대한 관심이 높아서 그런 것일까. 구병모의 소설이 크게 주목받지 않은 듯하다. 인류가 만들어 낸 축제가 늘 즐겁고 유쾌한 건 아니다. 전쟁 승리에 도취한 전근대적 국가의 남성들은 여성을 '전리품'으로 취급했고, 향략적인 축제를 즐기기 위해 자신들을이 약탈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이용했다. 심지어 약탈한 여성을 잔혹하게 죽이는 비인륜적인 축제도 있었다. 작가는 그런 '남성들만 누리는 축제'의 의미를 전복시켜 독자들, 특히 남성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김성중『화성의 아이』‘SF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작품에 출산은 고귀한 생명의 탄생을 이끌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묘사된다. 그러나 ‘출산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 소설의 결론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출산이 ‘아내 또는 엄마가 되기 위한 여성성’을 수행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작가들은 단편소설을 통해 페미니즘과 소원한 일상 속의 다양한 여성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성 독자들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작품 속 여성들과 같은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앞으로 이런 페미니즘 소설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에 주목하는 페미니즘 비평도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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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15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편 모두 스펙트럼이 달라서 읽을 만했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스타일의 작품이 또 나왔으면 좋겠네요.

cyrus 2018-03-16 16:10   좋아요 0 | URL
네, 페미니즘 소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고 말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페미니즘 정착을 위해서라면 저는 기꺼이 돈을 지불할 수 있습니다.

아다모 2018-03-15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해주신 글들을 읽어보니 이 작품 꼭 읽어보고 싶네요!^^

cyrus 2018-03-16 16:12   좋아요 0 | URL
읽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단편이 있고, 여러 번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단편도 있어요. 소설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저 스스로 의심했을 정도였어요. 그래서 이 책을 두 번 이상 읽었어요. ^^;;

2018-03-15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3-16 16:16   좋아요 1 | URL
저는 어렸을 때 드라마에 여직원이 커피 타는 모습을 보고 저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대중매체에 묘사된 성차별을 접하게 되면 그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해요. 오히려 편견으로 남게 되죠. 편견을 제거하려면 일상 속 성차별이 무엇이 있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그동안 너무나 쉽게 당연하게 여긴 일상 속 성차별, 성희롱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어요.

2018-04-22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