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베르 씨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랑베르 씨》(열린책들, 1999)장 자크 상뻬(Jean Jacques Sempe)의 초기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상뻬의 첫 번째 그림책인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다(Rien n’est simple, 국내 미출간)이 1962년에 발표되었고, 《랑베르 씨》는 1965년에 발표된 네 번째 그림책이다. 《랑베르 씨》는 상뻬의 대표작 《얼굴 빨개지는 아이》(별천지, 2009)보다 넉 달 늦게 국내에 출간되었다.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1969년에 발표된 그림책인데, 우리나라에선 이 책이 큰 인기를 얻었다. 이렇다 보니 《랑베르 씨》를 주목한 독자의 리뷰가 많지 않다.

 

 

 

 

 

 

랑베르 씨는 그림책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주인공인데도 말이 거의 없다. 그림의 절반이 ‘피가르 식당’에서 수다를 떠는 단골손님들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단골손님들은 매일 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 1936년 프랑스 좌파 정권이 수립한 인민전선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는 손님들이 있고, 다른 쪽 식탁에서는 1950년대에 활약한 축구선수들과 당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축구팀들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이 앉아 있다. 랑베르 씨는 항상 자신과 함께 식탁에 앉은 동료들의 대화를 경청한다. 랑베르 씨도 식당을 자주 찾는 단골손님이지만, 존재감이 없다. 가끔 랑베르가 제시간 늦게 식당에 도착하면 단골손님들이 그의 안부를 묻곤 한다. 그러나 손님들은 랑베르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손님들의 관심 대상은 랑베르가 아니라 ‘정치’와 ‘축구’였다. 랑베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손님들은 정치와 축구에 대해 말하느라 바쁘다.

 

어느 날부터 랑베르는 플로랑스라는 여성과 사귀게 된다. 랑베르의 연애 사실을 알아차린 손님들은 다시금 조용한 사내에 주목한다. 동료들은 플로랑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고, 식당에 온 랑베르에게 다가가서 그녀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재촉한다. 평소에 랑베르를 알고 지낸 동료들은 축구 얘기를 접어두고, 자신들이 연애하면서 만났던 여자들을 주제로 대화한다. 재미있게도 연애하는 랑베르가 주변 사람들의 대화 주제를 바꿔놓은 것이다. 확실히 단골손님들은 ‘연애꾼’ 랑베르에 주목했고, 그가 식당에 나타날 때마다 반갑게 맞아준다. 그러나 랑베르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한다. 랑베르의 결별 소식을 들은 동료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예전처럼 축구 얘기를 한다. 그렇게 랑베르는 자연스럽게 ‘존재감 없는 평범한 사내’로 돌아온다.

 

알라딘에 공개된 《랑베르 씨》의 책 소개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진부한 일상에 새콤한 양념처럼 곁들여진 랑베르의 에피소드. 여기에 그의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짭잘하게[1] 가미된 감칠맛 나는 이야기.

 

 

상뻬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소한 풍경과 얼굴들에 집중한다. 《랑베르 씨》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 미세한 변화를 느끼는 그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게 해준다. 그렇지만 나는 ‘식당 동료들의 은근한 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들의 우정은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분류하는 남성 간의 연대, 즉 ‘호모소셜(Homosocial)’에서 이루어지는 ‘쉰내 나는 우정’이다. 남성들은 호모소셜 속에서 여성들은 품평과 희롱의 대상으로 소비한다. 호모소셜은 ‘내(남성)가 너를 남자로 인정한다’는 남성 사이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존재감 없던 랑베르가 연애하기 시작하자 동료들은 그를 ‘남자’로 인정하고, 그(의 연애)에 호기심을 느낀다.

 

자, 지금부터 나오는 말이 당신의 분노를 유발하고, 당신의 뒷목을 잡게 만들 수 있으니 주의하길 바란다.‘시대착오적인 언어들’식당 손님들이 사적으로 나눈 대화체, 남성우월주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뻬의 문장에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들은 딸 단속 잘 하라고!”, “여자들은 그저 처신만 잘하면 돼!” (75쪽)

 

 

“난 항상, 여자들은 정복해야 한다는 걸 원칙으로 삼았지.” (83쪽)

 

 

랑베르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가 우리의 우정으로 기운을 되찾고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남자들 사이의 우정은 중요하니까. 게다가 우정, 그것밖에는 없다. 인생의 온갖 크나큰 골칫거리는 여자들로부터 비롯한다는 건 누구나 뻔한 얘기다. (90쪽, 상뻬)

 

 

축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이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단결심을 필요로 한다(여자들은 그 단결심이란 걸 이해하지 못한다). 축구란 늘 함께 모여 경기를 벌이는 걸 좋아하는 열한 명의 친구들이다. (100쪽, 상뻬)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수준 떨어지는 발언들이다. 이 절판된 책이 재출간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상뻬는 여성이 축구가 필요로 하는 단결심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썼는데, 지금까지 프랑스 여자축구가 거둔 뛰어난 성적을 생각하면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 프랑스 여자축구 대표 팀 최고 성적

 

2008년 FIFA 칠레 U-20 여자 월드컵 4위

2011년 FIFA 독일 여자 월드컵 4위

2012년 FIFA 아제르바이잔 U-17 여자 월드컵 우승

2014년 FIFA 캐나다 U-20 여자 월드컵 3위

 

 

 

 

올해 8월 5일부터 한 달간 프랑스에서 FIFA U-20 여자 월드컵이 치러진다. 내년에 있는 FIFA 여자 월드컵의 개최국도 프랑스다. 상뻬 할아버지는 지금도 정정(亭亭)하신데 조국에서 치러지는 여자축구 경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경기를 보고 나서 본인의 펜에서 나온 시대착오적인 언어를 정정(訂正)했으면 좋겠다.

 

상뻬 할아버지, 정정(亭亭/訂正)하세요!

 

 

 

 

 

[1] ‘짭잘하게’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짭짤하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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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01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사람들 중에서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외국의 옛) 철학자도 있어서 놀랐던 적이 있지요. 그 시대 문화의 영향 탓일까요? 어째서 글은 훌륭하게 쓰면서 여성 비하를 하는 (우리나라) 작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요즘 미투 운동을 보면서, 인간은 알 수가 없도다, 그랬네요.

cyrus 2018-03-02 08:01   좋아요 1 | URL
시대가 변하면 인물, 문화에 대한 평가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여성 차별, 여성 비하와 연관된 발언 및 행위들에 문제 삼아야 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