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월요일(2월 19일)에 진행된 레드스타킹 《젠더 무법자》 두 번째 시간 공식 후기입니다. 작성자는 채령님입니다. 이 날, 저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출처는 레드스타킹 공식 트위터, 공식 인스타그램입니다.
* https://www.instagram.com/feminism_talk/
이번 모임에서는 <젠더 무법자> 4, 5, 6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자는 앞선 장들에서 남성-여성, 이성애-동성애 이분법이 무수한 젠더와 정체성을 지우는 폭력적 체제를 지탱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는데요, 이번 장부터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가며(ex.컬트) 젠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려 한 것 같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을 제시하고 하나를 고르기를 강요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최선의 선택을 이끌어 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법적 젠더 체제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구부정한 자세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이분법적 젠더 체제에서 가려지고 오도되고 지워진, 제대로 호명조차 할 수 없는 젠더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시스젠더 헤테로 섹슈얼 여성’인 제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특권을 누리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치열히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 저는 퀴어-트랜스젠더들과 연대를 쌓고 함께 남근중심 가부장제를 타파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이었습니다만, 타자와 나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부재한 채 막연히 평화주의적 연대를 부르짖은 것 같아 대단히 부끄럽고 죄스러웠습니다. 더 많이 읽고, 만나고, 공부해야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모임에 모인 토론자들은 모두 페미니스트이지만 그동안 비교적 LGBT이론(특히 트랜스젠더에 대한)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였고, 적지 않은 영역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데 마침 새로 모임에 참여하신 분께서 주변에서 보고 들은 퀴어-트랜스젠더 지인들의 사례를 들려주셔서 이해가 풍성해졌습니다.
트랜지션(transition, 성별을 바꾸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적 차별이 없다면 트랜지션을 하지 않게 될까?” 그리고 “의료지원이 충분히 된다면 트랜지션을 더 많이 하게 될까?”라는 질문들이 나왔는데, (새로 오신 분께서) 그건 지극히 개인의 감정과 판단에 따르는 문제이기에 굉장히 어렵다고 답해주셨습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자신이 가진 남성의 신체적 특질(페니스)이나 여성의 특질(부드러운 유방)을 사랑하면서도 수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자신의 정체성에 방해가 되는 신체를 혐오하여 수술을 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으며, 패싱이 자연스러운 경우 굳이 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구체적인 성소수자 지원 정책에 대한 논의도 있었고, 수술 이후에 과거의 자신을 지워내는 외로운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정서적인 공감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과거를 잊은 채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며 사회적 인식이 변화되어 이들이 과거의 자신을 언제까지라도 온전히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추었습니다. 또 하나 새로웠던 이야기는 퀴어-트렌스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도 종종 가시적이고 폭력적인 배제가 일어난다는 사실(ex.티부를 기피하는 것)입니다. 사적인 견해입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의 젠더 해방 운동이 모든 집단을 하나의 깃발 아래에 모아내거나 젠더 정체성 하나에 의지해 혐오에 대한 처방을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습니다.
4장이 대한 토론이 마무리될 때 즈음 “여러분은 본인의 성별에 대해 의심을 가져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워낙 지배적인 남성-여성(혹은 양 극을 전제한 양성) 젠더 체제 속에 살아온 탓인지 의구심을 가지는 것 자체가 힘들기는 합니다만, 과거는 물로 현재도 여전히 본인의 성별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시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제 경우에는 몸이나 성적지향 보다는 ‘젠더 역할’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네가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다”는 말, ‘남성을 위한 축복들’을 듣고 자랐습니다. 게다가 옷이나 장난감을 구매할 때에도 제가 원하는 것을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자아이의 것으로 여겨지는 자동차와 로봇, 푸른색의 옷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하며 가슴이 봉긋해지고 월경이 시작되고, 설거지통에 충분히 키가 닿는 나이가 되자 이전에 전유하던 것들을 더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의 무수한 가능성이 쓰레기통에 처박힌 것 같은 비참함을 느꼈지만 우습게도 교복‘스커트’를 입으면 되바라진/선머슴 같은 여자애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처음 접했을 때에, 스커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내 어린 시절의 (소위 말하는) ‘남성적인’ 가능성들을 기꺼이 쟁취하려는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얻는 것 같은 안도를 느꼈습니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퍼포먼스, 그것을 수행하는 역할을 설명할 언어가 남성적, 혹은 여성적이라는 두 가지 밖에 없다는 사실은 너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닐까요.
논의의 장이 바뀌어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기 시작했을 때 몹시 흥분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S/M플레이에 대한 섹스판타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토론자분들이 S/M플레이에 대해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가난하고 어린 여성’의 지위에서 경험해온 평범한 이성애적 성관계 경험은 제게 굉장히 폭력적이고 통제불가능한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명확한 합의가 전제된 ‘놀이’로서의 S/M플레이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분들께서 우려되는 지점을 설명해주셔서 금방 S/M플레이에 대한 조심스런 시각에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남성중심 젠더위계가 이토록 절대적인 상황에서 남성이 S의 역할을 여성이 M의 역할을 할 때에 룰을 무시하고 자행되는 폭력-강간에 대한 에어백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합의된’ 관계 내의 모든 폭력에 법적으로 관대한 국가에서라면 즐거워야 할 놀이는 너무 쉽게 공포의 장으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SM은 플레이어들이 놀이를 ‘젠더 초월자’로서 향유하도록 하며, 규정된 젠더 역할과 정상적 섹슈얼리티를 비웃을 힘을 가집니다. ‘이분법적 젠더체제를 깨어 부술’ 강력한 샤먼(shaman: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역할을 맡은 자, 무당)는 인 것입니다.
두서도 없이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도 없이 길어지니 제가 너무 피곤해서 급하게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레드스타킹 책모임에서는 대단한 이야기/질문/반성들이 오고갔습니다. 창조적인 공간에 함께 할 수 있어서 몹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