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점을 이용하다 보면 가끔 사고 싶은 책을 못 사는 상황이 생긴다. 서점을 방문하기 전에 미리 읽고 싶은 책을 ‘찜’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다른 손님이 그 책을 선점하면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도 간발의 차이로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한 책들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이케가미 슌이치(池上俊一)《여성에게 문화는 있었는가》(사계절, 1999)는 ‘놓쳐 버린 책’ 중 한 권이다.

 

 

 

 

 

 

 

 

 

 

 

 

 

 

 

 

 

 

 

* [절판] 이케가미 슌이치 《여성에게 문화는 있었는가》(사계절, 1999)

* [품절] 이케가미 슈운이치 《마녀와 성녀》(창해, 2005)

 

 

 

책의 원제는 ‘마녀와 성녀(魔女と聖女)’다. 1999년에 첫 번역본이 나오고, 2005년 다른 출판사가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았다. 두 번째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를 그대로 썼다. 일본인 저자명이 ‘슌이치’로 표기되지 않아서 ‘슈운이치’로 검색해야 《마녀와 성녀》가 검색 결과에 나온다. 그런데 두 책 모두 현재 구할 수 없다.

 

마녀와 성녀. 여성을 바라보고 평가할 때 사용되는 이 두 가지 개념은 상반되지만, 서로를 이어주면서 옥죄는 ‘연결고리’가 있다. 그 ‘연결고리’가 바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이다. 이 책은 ‘선과 악’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에 희생당한 여성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저자는 중세에서 시작된 여성 혐오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고 있다. ‘마녀사냥’은 악마가 행하는 마법의 집회와 이단 밀교가 존재한다는 믿음 아래 산발적으로 유럽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악마가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은 사람들은 무고한 여성을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에 부쳤다. 마녀사냥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성 대부분은 약초에 관한 지식을 가졌거나 중매쟁이(뚜쟁이) 노릇을 하는 소외 계층(아웃사이더)이었다.

 

 

마녀로 치부되던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빈궁한 아웃사이더들이었다. 도시인은 적고 대부분이 농촌의 가난한 여성이었다. 그녀들은 밑바닥 사람들과 사귀었다. 사람들은 비밀의 힘, 예언의 힘을 지닌 그녀를 의지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병든 가축을 내맡기고, 주문을 걸게 하고, 사랑에 필요한 도움을 받았다. 그녀들은 약초에 대한 지식을 지니고 있고, 산파술에 정통하고, 독극물 조합법을 알고 있으며, 연애를 돕거나 혹은 방해할 수 있는 약물 조합법을 알고 있었다. [1]

 

 

마녀를 대하는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의 시선은 문학 작품에 묘사된 뚜쟁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라 셀레스티나(La Celestina)는 탐욕스럽고 고약한 뚜쟁이 노파를 상징하는 전설상의 인물이다. 그녀는 스페인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로 평가받는 페르난도 데 로하스(Fernando de Rojas)의 작품에 등장한다.

 

 

 

 

 

 

 

 

 

 

 

 

 

 

 

 

 

 

* 페르난도 데 로하스 《라 셀레스티나》(을유문화사, 2010)

*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이 비예가스 《케베도 시선》(지만지, 2015)

 

 

 

셀레스티나는 남녀 주인공의 애정을 방해하는 주술을 사용한다. 로하스의 《라 셀레스티나》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프란시스 데 케베도(Francisco de Quevedo)와 같은 스페인 황금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케베도는 『셀레스티나에게 부쳐』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 차가운 대지에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안은 자가 잠들어 있다.

그 노파에 대한 찬사는

수많은 펜으로도 모자라리라.

 

그녀는 별을 즐기기 위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싫어했지.

그건 자기가 더럽힐 수 없는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2]

 

 

 

 

이 시에 나오는 ‘펜(pluma, 스페인어)’은 작가들이 쓰는 펜(pen)과 깃털이라는 두 가지 의미(새의 깃털로 만든 펜)를 담고 있다. ‘노파에 대한 찬사’는 뚜쟁이들이 받는 형벌로 해석한다. 형벌 집행인들은 벌거벗은 뚜쟁이의 온몸에 기름과 꿀을 바른다. 그런 다음에 뚜쟁이를 깃털이 잔뜩 깔린 땅바닥에 뒹굴게 한다. 깃털이 달라붙은 뚜쟁이는 사람들이 보는 광장 한가운데에 세워 둔다. 죄인에게 굴욕감을 주는 형벌로 보이겠지만, 사실은 죄인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는 잔인한 형벌이다. 몸에 달라붙은 수많은 깃털이 전신의 피부를 찌르기 때문이다. 뚜쟁이가 받는 형벌은 유럽 전역을 휩쓴 ‘마녀사냥’ 재판 유행에 탄생한 고문 방식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이 있는 반면에 종교에 헌신하는 여성은 ‘성녀’로 추앙받았다. 수녀가 종교적인 환시인 신비체험을 경험하면 ‘신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문제점은 수녀의 신비스러운 체험을 두고도 교회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마녀냐, 성녀냐’로 갈라지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봉건 시대에 궁정 문학이 유행하자 ‘마리아 숭배’ 사상이 나타났다. 기사들은 아름다운 귀부인을 ‘마리아’로 비유하여 그녀를 보호하는 일이 자신들의 명예로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극단적인 여성 숭배는 여성의 삶을 해방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녀사냥 재판이 사라졌어도 여성의 삶을 옥죄는 여성 혐오는 여전했다.

 

이케가미 슌이치의 책의 분량은 얇은 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중세사회의 이중 모순적 여성관, 마녀와 성녀의 탄생 배경 속에 작용한 여성 혐오의 주요 장면들을 빠짐없이 잘 정리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중세 여성의 삶과 문화를 알 수 있다. 절판된 책에 잘못된 점을 지적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그래도 혹시 모를 재출간을 위해서 고쳐야 할 부분을 짚어본다.

 

《마녀와 성녀》 프롤로그 8쪽에 보면 ‘남색마’를 ‘incubus(인큐버스)’라고 표기했다. 여기서 말하는 ‘남색마’를 마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인큐버스는 남성의 모습을 한 몽마(夢魔)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므로 '마녀=인큐버스'라는 관계 성립이 맞지 않다. 인큐버스는 잠자는 여성의 꿈에 침범하여 성적으로 유혹하는 악마이다. 남성의 성욕을 부추기는 몽마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succubus(서큐버스)’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 남성을 유혹하는 마녀를 ‘서큐버스’라고 부르는 게 맞다.

 

 

 

 

 

 

 

 

 

 

 

 

 

 

 

 

 

 

* 장 미셸 살망 《사탄과 약혼한 마녀》(시공사, 1995)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르네상스, 2004)

* 양태자 《중세의 잔혹사 마녀사냥》(이랑, 2015)

 

 

 

 

 

 

 

 

 

 

 

 

 

 

 

 

* 거다 러너 《역사 속의 페미니스트》(평민사, 2007)

* 안체 슈룹, 파투 그림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숨쉬는책공장, 2016)

 

 

 

 

슌이치의 책은 절판되었어도 역사 속 마녀와 성녀, 마녀 사냥의 근원을 추적한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마녀 사냥은 여성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여성들이 선택한 것은 수녀가 되어 독신으로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러나 수녀들의 안식처인 교회 역시 ‘여성을 위한 유토피아’가 되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힌 남성 성직자들은 수녀들만 사는 교회가 ‘이단 종파를 가르치는 장소’인지 감시했고, 적극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수녀들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의 종교 권력 체제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신의 목소리를 높인 수녀들의 삶을 조명한 책으로 거다 러너(Gerda Lerner)《역사 속의 페미니스트》(평민사, 2007),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숨쉬는책공장, 2016)의 ‘중세의 페미니즘’ 편 등이 있다.

 

 

 

 

 

 

 

 

 

 

 

 

 

 

 

 

 

 

 

 

 

 

 

 

 

 

 

 

 

 

 

 

* 아일린 파워 《중세의 여인들》(즐거운상상, 2010)

*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연암서가, 2012)

* [품절] 크리스틴 드 피장 《여성들의 도시》(아카넷, 2012)

* [축약본] 크리스틴 드 피장 《숙녀들의 도시》(지만지, 2011)

 

 

 

 

역사학자 아일린 파워(Eileen Power)의 저서는 중세 여성의 경제 활동을 복원한 역사서의 고전이다. 극단적 여성 숭배를 드러난 중세 궁정 문학을 알고 싶으면 중세 문화를 집대성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중세의 가을》을 참고하면 된다. 슌이치의 책 마지막 부분에 중세 시대의 여성 혐오 담론에 맞서 '펜'을 무기 삼아 정면으로 반박한 크리스틴 드 피장(Christine de Pizan)의 업적이 나온다. 아쉽게도 그녀가 쓴 《여성들의 도시》 완역본은 ‘품절’이다.

 

 

 

 

[1] 《마녀와 성녀》 19쪽

[2]  안영옥 역, 《케베도 시선》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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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1-16 11:46   좋아요 0 | URL
음식의 역사에 대한 책에서 본 건데요, 여자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는 행위가 불경죄에 해당되었다고 합니다. 그 죄가 통용되던 시대는 기억나지 않지만, 먹는 행위마저 혐오로 덮어씌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무섭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1-1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때론 인연이 아닌 책들도 있는 것 같네요...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cyrus 2018-01-16 11:4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오랫동안 간절히 원하던 책을 우연히 만나는 순간이 짜릿한 게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헌책방이나 알라딘 서점에 자주 들락거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