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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말 없는 시
유병용 지음 / 사진예술사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화가였다. 애초에 사진과 미술은 한 몸이었다. 카메라로 실물과 똑같은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화가들은 손에 쥔 붓을 내려놓았다. 심심해진 화가들은 과감한 시도를 했다. 이후 사실적 묘사를 포기하는 현대미술이 등장했다. 아울러 기록의 도구로만 머물 것 같았던 사진도 점차 예술적 표현을 시도했다.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설치 사진, 회화적 사진, 연출 사진, 합성사진 등은 사진 매체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미래에 이미지를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 문맹자’라고 했다. 예전에는 글씨로 정보가 전달되었다면, 미래에는 정보전달의 도구가 사진과 같은 시각 이미지로 점점 바뀐다는 의미다. 벤야민의 예언은 정확했다.
미술과 문학은 전통적으로 유대가 깊다. 상대 장르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교유(交遊)도 많았다. 그러나 사진과 문학의 관계의 끈은 느슨한 편이다. 유병용의 《사진, 말 없는 시》는 사진과 문학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상징적인 사진집이다. 많은 사람은 시를 통해 삶의 영양분을 얻는다.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때, 시 한 구절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 장의 사진도 그 어떤 이야기보다 울림을 주기도 한다. 따라서 사진과 시의 만남은 깊은 감동과 진한 여운을 배가시키는 ‘행복한 결합’이다.

사진을 너무 쉽게 찍으면 감동이 떨어진다. 사진작가는 대상물에서 감동해야 사진 속에 특별한 메시지가 형상화된다. 사진의 빛의 예술이다. 사진작가는 빛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른다. 빛은 시간이므로 사진은 시간과 싸우며 획득되는 장르다. 사진작가는 빛과 시간이 합일되는 지점에서 셔터를 누른다. 유병용의 사진에는 빛과 시간이 빚어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상에 대한 정성 없이는 그 찰나의 흔적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 유병용은 일상 곳곳에서 수많은 눈길과 손길, 발자국이 닿은 사물 및 장소를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사진 속 일상의 오브제들은 삶의 매 순간들이 지나칠 수 없는 운명임을 보여준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업을 ‘생활사진’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에 잡힌 한순간 한 공간도 운명적인 인연이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평범하다. 그러나 사진에서 선뜻 눈을 떼지 못하고 사진에 덧붙여 둔 글에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평범한 일상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병용의 사진은 ‘무언 시(無言 詩)’다. 무언 시.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단어다. 그렇지만 그의 사진에는 분명 ‘말 없는 시’가 있다. ‘말이 있는 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다. ‘말 있는 시’는 읽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같은 시를 보아도 읽을 때의 감정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 ‘시를 해석하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시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느낌을 억누른다. 이들은 시에 들어있는 ‘말’의 보편적인 해석에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말 없는 시’는 ‘공부할 때 보는 시’가 아니다. 그래서 사진집에 있는 시는 순수문학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무언 시는 작가가 원하는 해석으로 감상할 필요가 없다. 무언 시는 읽는 독자 스스로 마음에 깊은 감동이 되어야 가치가 있다. 무언 시에는 예술성을 부여받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가 생활하면서 쓰는 평범한 말이 있다. 무언 시는 사진과 만나면 ‘죽은 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시’가 된다.
사진과 시의 만남은 우리 독자들의 시각적 환경을 풍요롭게 한다. 사진은 독자의 눈을 정화해주고, 시는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사진, 말 없는 시》는 보고 즐기면 된다. 좋은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유병용의 사진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진솔하게 담아 우리 가까이에 끌어다 주고 있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에 이끌려 읽다 보면 때론 지루해 뛰쳐나가고 싶을 때도 있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였던지 새삼스레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