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미술 -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지음, 박상미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그리스 신화에 예술을 관장하는 9명의 여신이 나온다. 그녀들의 이름은 무사이(Mousai). 문학, 음악, 역사 등에 능하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다. 뮤즈(Muse)는 무사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미술관(Museum)은 본래 무사이가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사이 중에 미술에 능숙한 여신이 없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여성은 미술의 세계에 동참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미술학교에 입학하는 여성이 드물었고,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다고 해도 누드화를 그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남성들은 누드화 그리는 여성이 정숙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정작 그들은 여성 누드화를 마음껏 그렸고 누드화 감상을 즐겼다. 그렇다 보니 미술사에 여성은 없었다. 남성 미술은 미술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높이 인정받았지만, 여성 미술은 낮게 평가받았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사의 어느 지점에서든 많은 여성 미술가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르네상스에 활동한 소포니스바 안귀솔라(Sofonisba Anguissola)는 성공한 여성 화가였다. 그녀는 스페인 왕비에게 그림을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n)은 초상화 분야에 독보적인 경지에 오른 화가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 단체인 로열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Arts)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유명한 여성이다.

 

 

 

 

 

    

 

진정한 여성 미술 태동은 70년대부터다. 여성 미술가들이 모여 젠더구조와 여성 문제를 의식해 단체 활동을 한 것을 시작으로 페미니즘 미술사가 조명받았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페미니즘 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979년 그녀가 제작한 디너파티(The Dinner Party)는 페미니즘 미술사, 아니 현재를 포함한 미술사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거대한 삼각형 식탁 위에 클리토리스 모양의 서른아홉 개의 접시가 놓여 있다. 이 만찬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페니스를 과시하는 남성은 디너파티의 초대 제외 대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 디너파티가 단지 외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관객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들까지 시카고를 비난했다. 하지만 시카고는 미술을 통해 여성의 몸에 대한 편견, 남성 중심의 사고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남성 미술사가 에드워드 루시-스미스(Edward Lucie-Smith)와 함께 남성 중심 미술사가 잊거나 외면하고 있던 여성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을 발굴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훌륭한 작업성과는 여성과 미술(아트북스, 2006)이라는 책으로 정리되었다.

 

이 책의 100자평에 따르면 책 내용이 오래된 것’(정확히 표현하면 오래전 글’)이라서 요즘 시대와 안 맞는다고 했다. 원서는 1998년에 발표되었고, 12년이 지나서야 번역본이 나왔다(현재 이 책은 절판되었다). 100자평 작성자는 이 책에 크게 실망했는지 별점 두 개를 부여했다. 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페미니즘 미술은 오래됐고,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절대로 그렇지 않다. 페미니즘 미술은 7, 80년대에 반짝 유행한 철 지난 예술사조가 아니다. 페미니즘 미술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의 페미니즘 미술가들은 여성 문제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퀴어(Queer) 문제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표현을 시도한다. 흑인 페미니즘 미술, 레즈비언 미술은 페미니즘 미술 2세대에 속한다. 국내에선 페미니즘 미술 2세대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적다. 고맙게도 시카고와 루시-스미스는 신세대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활동도 충실하게 소개했다.

 

책 본문 전체를 루시-스미스가 집필했고, 본문 옆에 있는 곁다리 글모두 시카고가 썼다. 시카고의 글이 부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녀의 곁다리를 무시해선 안 된다. 사실 이 책에서 곁다리가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카고는 남성 미술가 또는 남성 미술 비평가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페미니즘 미술의 가치를 재차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카고는 피부색, 민족에 관계없이 미술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많아져야 여성을 부당하게 재현하는 남성 중심의 미술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의 주장에 불편한 형님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페미니즘 미술은 단지 여성만을 위한 미술이 아니다. 남자를 포함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미술’이라고 생각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표현을 보자마자 눈치를 챈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표현의 원본은 벨 훅스(Bell hooks)의 저서 제목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문학동네, 2017)이다. 시카고는 여성과 미술서문에서 벨 훅스가 제안한 대항적 시선(oppositional gaze)’이라는 개념을 빌려 미술 현장에 팽배해 있는 남성 중심 문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남녀, 성 소수자 모두 표현의 자유를 누리려는 미술적 사회운동이다. 남성 · 이성애 중심의 미술은 여성 · 성 소수자들의 창작 기회를 제한한다. 특히 성 소수자 예술가는 여성 예술가보다 많이 대접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시카고와 루시-스미스의 글쓰기는 공통으로 여성 미술에 주목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가끔 서로를 밀당(밀고 당기는)’한다. 루시-스미스는 여성만이 여성 미술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표방하는 방식이 페미니즘 미술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시카고는 루시-스미스도 남성 미술비평가처럼 여성 미술을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낼 수 있다면서 디스한다. 두 사람 말이 옳다. 우리나라에 나혜석, 천경자 같은 독보적인 여성 예술가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협동 정신으로 무장한 단체 행동주의 성격의 페미니즘 미술이 주목받지 않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에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 같은 행동하는 페미니즘 미술 단체가 나올 수 있을까? 남성 고유의 시각을 넘어서는 여성 예술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녀들의 도전을 남성 혐오로 격하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나라 페미니즘도 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대안적 이해의 틀로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된다면 미술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이 넓혀질 수 있다. 페미니즘 미술의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다.

 

 

 

 

 

 

Trivia

 

 

 

  

 

* 시카고는 서문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역사학자 거다 러너(Gerda Lerner)의 저서 <역사는 왜 중요한가> 문장을 인용했다. 아마도 이 책은 1997년에 나온 <Why History Matters>일 것이다. 그런데 번역본에는 이 책이 ‘1977에 발표했다고 잘못 소개했다. 역자는 원서명을 역사는 왜 중요한가라고 옮겼는데, 책 주제의 특성상 역사는 왜 문제인가로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이 책은 왜 여성사인가?(푸른역사, 2006)로 번역되었다.

 

 

* 40쪽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70쪽 밀레의 이삭줍기도판이 원본과 다른 좌우 반전형태로 나왔다. 미술 관련 분야 책을 주로 만드는 출판사답지 않은 실수이다.

 

 

* 98쪽 영국 출신의 예술가 수 코우(Sue Coe)의 출생연도를 ‘1651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고치면 ‘1951이다.

 

 

 

 

 

* 146쪽에 이브 엔슬러(Eve Ensler)<보지 되찾기>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한 문장이 있다. <보지 되찾기>는 여성 성기에 관한 이야기를 과감하게 풀어낸 연극 작품이며 원제는 <The Vagina Monologues>, ‘버자이너 모놀로그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2-05 15: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06 13:11   좋아요 1 | URL
전쟁이 끝나고 남성들이 제대하고 직업장으로 돌아왔을 때 여성은 다시 집에 머무르게 됩니다. 전시에 동원된 여성의 노동력은 애국심으로 포장되었어요. 그래서 여성의 노동력이 남성 노동력만큼 인정받지 못했어요.

sprenown 2017-12-05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쭈~욱 밀고 가세요. 재능을 버리지 마시고, 길게 보세요! 훌륭합니다.^^.

cyrus 2017-12-06 13:13   좋아요 1 | URL
항상 저를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부담스럽습니다. 좋은 소리만 들으면서 성장하는 것보다 가끔은 쓴소리도 듣고, 부족한 점을 채우면서 성장하고 싶습니다. ^^

2017-12-05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6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6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2-0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뭘 알아야 쓴소리를 하지요. 그냥 아마추어 입장에서 cyrus님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 글솜씨에 그저 감탄할 뿐이지요.^^..

cyrus 2017-12-06 13:56   좋아요 1 | URL
무조건 많이 알고 있어야 비판할 자격이 있는 걸까요? 저도 아마추어예요. 전문가들이 확인한 지식을 이용하고 편집해요. 이 과정에서 지식을 잘못 사용할 수 있고, 엉뚱한 내용이 전달될 수 있어요. 비판하기의 시작은 의문과 호기심이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거나 미심 쩍으면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