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생(dessin), 드로잉(drawing), 그리고 소묘. 이 세 가지 용어는 모두 같은 뜻이다. 화가의 성향과 관계없이 소묘는 창작하면서 기본적으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이다. 즉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사전 준비 단계라 할 수 있다.
* 조르조 바사리 《이태리 르네상스의 미술가 평전》 (한명출판사, 2000)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소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회화, 조각, 건축 이 세 가지 분야의 공통분모로 소묘를 꼽았으며, 소묘에 예술가의 감정 등 본질적인 것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바사리의 표현에 따르면 소묘라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자매’가 회화와 조각이다. 그런데 어째서 소묘가 ‘아버지’일까?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바사리는 회화와 조각의 ‘아름다움’을 여성으로 비유했다. 그의 말 속에는 여성을 배제한 ‘남성 중심 미술’이라는 편협성이 깔렸다. 애초에 여성을 ‘(능동적) 창작자’가 아닌 ‘(수동적) 창작 소재’로 설정하고 있다. 남성 중심 미술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성은 그림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고, 여성 화가들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남성 중심 미술에 대한 비판은 다음에 다뤄 보기로 하고, 본 주제로 들어가도록 하자. 흔히 소묘를 연습용 그림 정도로 생각하기 쉬운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소묘를 ‘아버지’라고 비유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화가 지망생은 소묘의 가치를 알아본 바사리의 말을 반드시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미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학생들에게 소묘 훈련을 시킨다. 소묘를 그리는 일은 ‘그림(출품작)’이라는 실전을 위한 연습이다.
* 피에르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아르노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시공아트, 2012)
거장들은 소묘 그리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소묘에서 그림 한 점이 탄생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소묘는 창작의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는 연구 대상이며 완성된 작품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다. 대충 그린 듯한 소묘도 컬렉터들이 노려볼만한 수집품이며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기도 한다.
* 《세계 거장 드로잉 컨셉북 : 고야, 달리》 (CK북스, 2014)
* 《세계 거장 드로잉 컨셉북 : 와토, 호퍼》 (CK북스, 2014)
* 《세계 거장 드로잉 컨셉북 : 렘브란트》 (CK북스, 2014)
소묘에 대한 관심이 적은 편인지 국내에서는 화가의 소묘집이 잘 나오지 않는다. 소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용 책은 많다. 요즘 나오고 있는 ‘드로잉북’은 일반 독자가 소묘를 해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스케치북이다. 소묘를 ‘볼 수 있는’ 책이 그리 많지 않다. 2014년에 ‘세계 거장의 드로잉 컨셉북’이라는 이름을 단 소묘집 세 권이 출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와토, 호퍼》, 《고야, 달리》, 《렘브란트》로 구성되었다.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이다. 정말 특이한 조합이다. 귀족풍 느낌이 물씬 드는 화려하고 섬세한 로코코(rococo) 양식과 무심하면서도 서늘한 호퍼의 화풍에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고야, 달리》는 꽤 괜찮은 조합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같은 스페인 출신 인데다가 개성 넘치는 그로테스크(grotesque)를 구현한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 《고야, 영혼의 거울》 (다빈치, 2011)
* 함순용 《상처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 (함박누리, 2017)
필자가 고야와 달리에 관심이 많아서 공공도서관에 소장된 《고야, 달리》를 볼 수 있었다. 도판이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시원시원한 판형이다. 도판에 대한 세부 설명은 없다. 마음 편하게 소묘를 감상하면 좋겠지만, 그래도 화가가 소묘를 통해 무얼 나타내려고 했는지 이해하려면 화가의 삶을 소개한 관련 도서를 참고해야 한다. 특히 《고야, 달리》에 고야의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Los Caprichos)』에 포함된 작품의 소묘 몇 점이 수록되어 있어서 먼저 이 판화집의 제작 배경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고야의 판화를 확인할 수 있는 책으로는 《고야, 영혼의 거울》(다빈치, 2011), 《상처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함박누리, 2017) 등이 있다. 참고로, 《상처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는 『로스 카프리초스』에 수록된 모든 판화 작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고야, 영혼의 거울》 같은 경우, 판화집 일부만 소개되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상처입은 지성, 그로테스크 고야》의 도판 상태다. 적지 않은 작품을 보통 판형의 책 한 권에 모두 담으려는 바람에 도판의 선명함이 사라졌다. 한 점도 누락하지 않고, 스케치북만한 판형으로 만들어진 『로스 카프리초스』 완전판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야, 달리》에 소묘 감상을 방해하는 몇 개의 오식이 보인다. 4쪽 ‘카프리코스’는 ‘카프리초스’의 오식이다. 50쪽에 ‘앙다르시아의 개’가 나오는데, 정확하게 고치면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이다. <안달루시아의 개>는 달리와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이 공동 제작한 전위영화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달리의 친구로 알려진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를 ‘페테리코 카르시아 로사’라고 표현하는 건 문제 있다.
내가 아는 로사는 절대로 남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