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독서에 대한 인상 깊은 명언을 남겨놓았다.
“맛보아야 할 책과 삼켜야 할 책이 있다.
가끔은 잘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도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서 방법은 다양하다. 살짝 맛만 볼 책이 있고 씹으면서 음미할 책이 있으며 삼켜서 소화해야 할 책이 있다. 학술서적을 읽는 자세와 소설이나 시를 읽는 모습과 만화책을 보는 태도가 무조건 같을 수는 없다. 베이컨은 책을 ‘음식’에, 독서를 ‘먹는 행위’에 비유했다. 베이컨뿐만 아니라 애서가들은 ‘책을 먹는 것’을 독서, 책 사랑하기에 대한 은유와 상징으로 본다. 인간은 종종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은유’, ‘비유’를 뜻하는 메타포(metaphor)는 겉으로 드러난 문장에 진짜 의미를 숨기는 수사법이다. 독자들의 마음에 와 닿게 이야기를 전하려면 무언가에 빗대는 은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은유는 양날의 검이다. 글쓴이의 참신한 관점을 드러낼 더없는 기회지만, 독자가 주어진 은유에 숨겨진 의미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생과 독서를 주제로 한 《은유가 된 독자》는 은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독서는 왜 고독한 ‘여행’일까? 애서가는 왜 바깥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여정’을 즐기는 것일까? 왜 책을 많이 읽으면 ‘책벌레’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 것일까? 작은따옴표를 붙인 단어 모두 독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란 너무나 어렵다. 그 떠남 대신에 여행을 통해 얻은 생각을 담은 책 한 권만으로도 여행을 다녀 온 듯한 느낌을 얻을 때가 있다. 《은유가 된 독자》는 독자에게 이러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연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똑똑한 여행 가이드 알베르토 망구엘(Alberto Manguel)와 함께 하는 동안 독자는 외롭지 않다.
책 속에 ‘독자’들이 살고 있다. 단테(Dante)는 자신이 창조한 또 다른 세계, 즉 《신곡》이라는 텍스트 위를 걷는 ‘여행자’다. 세상의 경험을 압축한 책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이다. 책을 읽는 것은 세상을 여행하는 일과 같다. 햄릿(Hamlet)을 ‘상아탑’에 갇혀 고뇌하는 인물이다. 원래 상아탑은 독서에 몰입하고 싶은 독자들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아탑의 의미는 달라진다. 오늘날의 상아탑에는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 안락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지식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돈 키호테(Don Quixote)와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책을 사랑하는 ‘책 바보’이자 걸신들린 ‘책벌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환경, 문화, 시간 속에서 살아왔지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똑같다. 그들의 열정 속에서 독서 세계가 풍부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망구엘은 ‘여행’, ‘상아탑’, ‘책벌레’, 이 세 가지 은유를 사용해가면서 독서와 글쓰기의 가치를 들려준다.
책은 지식 전달이 아닌 삶의 지혜를 보는 안목을 키워 주는 소임을 충실히 한다. 삶 자체가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읽고 해석해야 할 것들의 연속체다. 사람들의 눈빛, 표정, 몸짓을 읽듯이 책의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독서가 언제나 완결된 읽기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해도 세계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이 갈수록 세계는 더욱 불확실하고 모호해진다. 세계의 복잡성은 세계를 책 안에 모두 담아내는 일을 애초에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정보의 범위가 압축되어 있어서 정말로 필요한 정보를 금방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이 지배한 이 시대에 느린 여행의 매력을 아는 독서 여행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망구엘은 전자책이 천천히 여행하는 독서를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천천히, 깊게, 철저히 읽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망구엘이 지향하는 독서는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중간에 다시 덮고, 그리고 다시 펴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는 경험이다. 따라서 독서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한정 자유로운 여행이다. 애서가를 매혹시키는 것은 책이다. 애서가는 멈추지 않고, ‘세상’이라는 책을 향한 관심을 넓힌다. 애서가는 아직 걷고 있는 여행의 끝이, 목표점이 어디인지 찾지 못했어도 ‘책’ 자체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