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력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가
김대식.다니엘 바이스 지음, 박영록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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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지능, 사물 인터넷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에 기초한 4차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그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꿀 것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 사회 변화의 흐름을 피부로 느낀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류 삶의 기본조건들, 즉 의식주는 변하거나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기본조건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충족시키는 수단 혹은 방법이 변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회변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제 정보통신기술의 힘은 단순히 세상을 바꾸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세상이 변화하는 방식마저 바꿔놓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수 세기 전의 산업혁명처럼 그 누구도 도도한 흐름을 돌리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과연 내가, 우리가, 우리 사회가 이 거대한 흐름을 감지하고 있느냐는 사실이다.

 

뇌과학자 김대식다니엘 바이스(Daniel Weihs) 이스라엘 과학기술부 수석 과학관의 대담집 《창조력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는가》(중앙북스, 2017)는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책 제목에 두 사람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와 있다. 창조력이다. 창조란 창의적 아이디어를 잘 육성하여 발전시키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변화와 혁신은 이러한 창조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창조’의 의미를 자유롭게 말하면서도, ‘창조력’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창조력은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발휘하지 못하면 구태의연한 지식에만 의존하여 현재에 안주한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면 창조력은 생기지 않는다. 사소한 문제점이라도 불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지 생각한다.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여기서부터 창조력이 샘솟는다. 자신의 삶이 불완전하다고 느꼈을 때 창조적인 삶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명심하면서 기존의 지식을 이용해 아이디어를 만들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지식을 보충해서 약간 더 나은 아이디어를 만드는 것은 ‘가짜 창조력’이다. 모방은 창조력 향상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기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 기존의 지식 또는 아이디어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잡탕’을 내놓고 있다. 표절 시비가 불거질 경우 오히려 이를 홍보 전략으로 활용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해 모방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에 익숙해지면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능력을 상실하고, 단물이 빠진 구시대적 발상만 찾게 된다. 창조적인 삶의 핵심은 사고의 유연성이다. 창조는 수많은 실패로부터 나오는 만큼 이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는 무조건 원칙만 따르도록 강요하지 말고 틀을 깨는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 잘 짜인 조직이나 일사불란한 체제보다는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되면,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와 이스라엘의 사회적 분위기의 분명한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어렸을 때부터 탈무드 교육을 통해 제 생각을 발언할 수 있는 훈련을 한다. 훈련법은 타인의 생각과 직접 부딪혀 논쟁하는 것이다. 몸으로 하는 공부인 셈이다. 이스라엘 군대는 무조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군인을 양산하지 않는다. 군대 규율을 따르면서도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줄 아는 능숙한 군인을 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아직도 지식을 응용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독창성을 마모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규격화돼 있고 천편일률적이다. 똑같은 교과서에 의한 성적 위주 교육은 창조력을 발달시키는 사고나 행동을 억압한다. 조직 문화도 경직되어 있다. 상관의 의견에 순순히 따라야 하는 통제된 분위기로 인해 개인 발언은 물론 비판할 기회마저 없다.

 

503번 정부가 창조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고, ‘창조경제’만 여러 번 외쳐댔으니 공허한 구호로 남게 되는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도 웃긴 점은 ‘창조경제’를 위한 준비를 소홀히 한 채 ‘새마을운동’ 세계화 작업에 매진했다.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에 새마을운동이 웬 말이냐. 우리나라 발전이 시급한데, 다른 개발도상국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죽은 권력’에서 나온 국가 정책을 사골곰탕 우려먹듯이 애용했다. 이거야말로 ‘가짜 창조력’을 내세운 정부가 예산을 어떻게 낭비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책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높은 평점을 줄 수 없다. 비교적 진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내가 볼 때 책에서 신선했던 내용은 이스라엘의 창업 문화와 군대 문화) 두 사람은 앞에서 언급했던 대담 내용 일부를 다른 표현으로 바꿔 반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밀도 있는 대담을 나누기 위한 ‘진짜 창조력’이 필요해 보인다. 책 편집 방식이 불만스럽다. 두 사람이 말하는 중요한 내용, 즉 ‘미래에 필요한 창조력의 의미’를 알려주는 문장만 진한 검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중요 문장만 속독하는 것은 효율적으로 독서 시간을 쓸 수 있는 장점이 된다. 중요 문장만 보면 책의 핵심 내용을 거의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하게 표시된 문장만 골라 읽는다고 해서 없던 창조력이 생기겠나? 창조력을 안 생기게 하는 근본적인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독자가 파악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책을 편집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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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8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8 15:42   좋아요 0 | URL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부의 관심이 헛구호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 정부가 산업 발전을 위한 기틀을 잘 마련한다면, 여당이든 야당이든 다음 정부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장기적인 준비와 노력을 할 수 있을 겁니다.

qualia 2017-08-28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스라엘은 어렸을 때부터 탈무드 교육을 통해 제 생각을 발언할 수 있는 훈련을 한다. 훈련법은 타인의 생각과 직접 부딪혀 논쟁하는 것이다. 몸으로 하는 공부인 셈이다. [···]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은 아직도 지식을 응용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독창성을 마모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규격화돼 있고 천편일률적이다. 똑같은 교과서에 의한 성적 위주 교육은 창조력을 발달시키는 사고나 행동을 억압한다. 조직 문화도 경직되어 있다. 상관의 의견에 순순히 따라야 하는 통제된 분위기로 인해 개인 발언은 물론 비판할 기회마저 없다.

→ 이스라엘과 한국에 관한 자료를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오는군요.

Israel

Area
• Total
20,770-22,072 km^2 (149th)

Population
• 2017 estimate 8,731,540 (98th)

-----------------------------------

South Korea

Area
• Total 100,210 km^2 [107th]

Population
• 2017 estimate 51,446,201 (27th)

위 자료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땅덩어리 크기가 한국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하고 인구는 한국의 5분의 1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국토는 우리나라 경상북도의 19,030km^2보다 약간 더 클 뿐이고 인구는 1천만 안팎에 이르는 서울시보다도 적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런 국토/인구 약소국이 (세계를 좌지우지한다고까진 할 수 없어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근데 미국 정계뿐만 아니라 경제계·과학계를 쥐고 흔드는 막후 실력자들이 이스라엘계·유태계 미국인들이라는 사실을 볼 때 어쩌면 세계를 좌지우지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학 분야에서나 경제 분야에서나 국제 정치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막강한 듯합니다. 세계 최고 기업들인 애플,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IBM 등등이 이스라엘 벤처 기업들을 거액에 인수했다는 소식이 자주자주 들려옵니다. 반면 한국 벤처 기업 인수 소식은 거의 없다시피 하죠. 창의적 기업의 활성도를 나타내는 지표라 할 수 있는 혁신적 벤처 기업은 한국에선 거의 멸종 상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은 삼성이나 LG, 현대, SK하이닉스 같은 경직된 대기업밖에 내세울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런 이스라엘의 힘과 그걸 뒷받침하는 이스라엘 국민의 창의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이 바로 제가 위에 인용한 cyrus 님의 글 중 《타인의 생각과 직접 부딪혀 논쟁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요인도 있겠지만 저는 저것이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근본적 차이는 바로 저 차이라고 봅니다. 요컨대 한국에선 《타인의 생각과 직접 부딪혀 논쟁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나 조직적 차원에서나 지역적·국가적 차원에서나 타인과의 논쟁을 직간접으로 금기시하고 경원시합니다. 민족심리적 차원에서나 시대조류적 차원에서나 사회풍조적 차원에서나 타인과의 논쟁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기질·성향·분위기·문화가 너무 우세합니다. 해서 한국인들 각자가 거의 모두 저것을 실천하려 하지 않습니다. 회피하고 기피하고 억제하고 심지어 부정적으로 보고 죄악시하기까지 합니다. 근본적·급진적 시각에서 비판하건대 끼리끼리 근친상간적 상호 친목질·자뻑질만 무한반복한다는 것입니다. 또 정반대 형태의 상호 비난질·왕따질·싸움질만 무한반복한다는 것입니다(백년하청 21세기 초 백주대낮에까지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는 호영남 지역감정 대립과 남북한 극한대결이 그 대표적 사례인 것입니다). 물론 무골호인이 넘치는 우리 한국인끼리 정을 나누고 우애를 돈독히 다지는 친목 문화가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좋은 점들은 차고 넘치니까 이 자리에선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왜 우리 한국에선 《타인의 생각과 직접 부딪혀 논쟁하는》 논쟁 문화가 자리잡지 못하는 것일까요? 윗글에서 cyrus 님께서 지적했듯이, 왜 우리 한국인들은 《규격화돼 있고 천편일률적》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려)는 것일까요? 왜 그렇게 남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데 소극적인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 일부가 cyrus 님께서 윗글에서 비판한 사항들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cyrus 님의 비판적 시각에 너무나 크게 동의하는 나머지 이 댓글을 쓰게 됐습니다. 많은 분들이 cyrus 님의 비판적 핵심을 간파했으면 합니다.

cyrus 2017-08-29 13:56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에 비판을 ‘비난‘과 동일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 단어의 의미를 따져 보면 별 차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비난‘은 논거가 부족하고, ‘가짜 뉴스‘를 동원하면서 인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예의가 없고,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비난은 상대방의 결점만 파고 드는 행위입니다. 비판은 결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의견을 제시하는 행위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친목 문화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을 지적하는 태도를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친한 사람일수록 좋은 점만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