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국주의와 남성성 - 19세기 영국의 젠더 형성 ㅣ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573
박형지.설혜심 지음 / 아카넷 / 2016년 1월
평점 :

여왕, EPL(English Premier League, 영국의 프로축구 1부 리그), 신사‥…. 영국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영국은 신사(gentleman)의 나라다. 예절과 신의를 갖춘 교양 있는 남성을 칭하는 젠틀맨은 영국 사회의 중심체인 ‘젠트리(gentry)’라는 중산층에서 유래됐다. 19세기 이전 영국의 중간계층 남성들은 어릴 때부터 신사의 덕목을 흠모하도록 교육받았다. 신사의 덕목은, 점잖고 예의 바를 것, 자존심을 지킬 것, 과묵할 것,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을 것 등의 행동규율을 요구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영국 사회 곳곳에 그 분위기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렇듯 영국 신사는 바람직한 남성상으로 통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남성성》을 읽으면, 영국 신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질 것이다. 《제국주의와 남성성》은 영국 남성들의 성 정체성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논의되고, 재구성됐는가를 살핀 책이다.
이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신사는 제국주의와 가부장제가 만나서 생긴 산물이다. 영국 남성들은 육체적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신사가 되고 싶었다. 영국 신사를 보면 강인한 이미지가 뚜렷이 떠오른다. 이 말은 곧 신사의 이미지가 상당히 굳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와 박형지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는 풍부한 역사와 문화 지식을 바탕으로 영국 신사의 정적인 남성상을 분석한다. 제국주의가 전성을 구가하던 19세기 중반에 영국 남성들은 식민지 지배자로서 강인한 면모를 발산했다. 이 무렵 그들이 사용한 젠더 전략(gender strategy)이 ‘신사가 되는 것’이었다. 신사는 식민지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전략으로도 사용되었다. 강인하고, 냉철하고, 여성을 보호할 줄 아는 영국 신사는 대영 제국을 수호하는 영웅과 동일시했다.
영국 남성들이 신사 역할을 마음껏 수행(performance)할 수 있는 최적의 무대가 인도였다. 세포이 항쟁(Sepoy Mutiny)은 영국과 인도 양국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1857년 영국에 고용된 인도인 용병이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인도를 동인도회사를 통한 간접 통치에서 직할령으로 바꿨다.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 여성이 인도인들에게 성폭행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영국군은 더욱 잔혹한 보복 살육을 자행했다. 애국심이 투철한 영국 남성들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적을 용감하게 무찌르는 든든한 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영국 남성의 눈에는 영국 여성은 연약해서 보호받아야 하는 ‘집안의 천사’였다. 영국 남성들이 제국의 위상과 권위적인 엘리트 이미지를 유지하려면 강인한 남성성을 연출해야 했다.
제국주의와 가부장제의 만남이 차별적 위계질서를 허용하는 인종주의를 만들었다. 영국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식민통치하기 위해 “서양은 남성적이고 동양(인도)은 여성적이기 때문에 여성인 인도가 남성인 영국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민족차별 정책을 폈다. 영국인들은 균형 잡힌 백인 남성의 신체를 ‘완벽한 민족’에 부합하는 기본 조건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이분법적 기준에 따르면 기형에 가까운 비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민족은 열등하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신사들은 철저한 백인 우월의식에 젖은 오만한 인종주의자였다.
《제국주의와 남성성》은 19세기 영국 신사의 남성성 형성에 영향을 끼친 제국주의와 가부장제의 상관관계를 밝힌다. 19세기 영국 신사는 위선적이다. 영국 남성들은 ‘신사’가 되고 싶었고, 여성과 피지배층으로부터 우월적 지위를 인정받음으로써 가부장적 권위가 실추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신사의 덕목은 남성의 삶을 억압하는 도덕적 굴레였다. 절제와 도덕을 강조하는 신사의 덕목이 고정된 남성성을 만들게 했고, 이를 수행하는 영국 남성은 남성성이라는 사회적 무게를 견뎌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남성은 식민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성적 욕구를 해소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은 남성의 권력을 확인하는 수단이 되었다. “남성은 강하고 만능이어야 하며 절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허위의 남성성을 우리는 역설적으로 ‘신사의 덕목’이라는 이름으로 배웠다. 이쯤에서 우리는 ‘신사’의 의미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신사’는 절제된 ‘마초(macho)’에 가깝다. 신사와 마초는 종이 한 장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