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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 ㅣ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4
리처드 D. 앨틱 지음, 이미애 옮김 / 아카넷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왓슨,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다단한 존재 아닌가.”
- 셜록 홈즈 -
세상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의식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변화에 적응해 가는 사람들의 의식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방어적인가를 우리는 동시에 경험한다. 새것과 옛것 사이에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상황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로운 현실은 이미 다가와 있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낡은 부대를 버리지 못한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의 역사를 살펴보면 새 시대의 희망을 감지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알 수 있다. 자본과 노동력에 바탕을 둔 산업혁명이 도래하면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그 변화의 충격을 피부로 느꼈다. 소용돌이치는 문명의 변화 가운데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과제들이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그런데 그것에 응전할 사람들은 소극적이었다. 새 포도주는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담을 새 부대가 많지 않았다. 옛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총체적 변화의 상황을 위기의 상황으로 파악한다. 빅토리아 시대는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하는 가치 혼란의 시대였다.
리처드 D. 앨틱(Richard D. Altick)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과 사상》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총체적 변화의 상황을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바람을 일으키며 산업화, 도시화의 선봉을 달렸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과 상공업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됐고, 부유한 중산층들은 상류층의 삶을 동경했다. 이때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누구나 어려움에 부닥칠 때 떠올리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경구는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의 《자조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에게 자수성가를 이룰 수 있는 꿈과 용기를 심어줬다. 하류 계층에 속한 노동자들은 이 책을 읽고 스마일스처럼 되기로 결심했다. 그들도 계층이 세습되는 구시대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장밋빛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이 두드러질수록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위기의식을 느낀다. 영국 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은 복음주의자들은 신앙생활에 최우선 가치를 둔다. 그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해석했고 결혼과 가족제도를 중시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욕구를 규제했다. 각기 다른 이유 때문이긴 해도 ‘도덕성 결여’는 복음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도 똑같이 경멸한 사회악이었다. 공리주의자들은 인간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며, 좋은 삶의 판단 여부는 그 기준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결과를 불러오는 행위를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다. 복음주의자들은 천국에 가서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근면과 금욕을 강조했다. 엄격한 복음주의자들은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도박성 오락을 금지했고, 아이와 여성이 보는 책에 외설적으로 느껴지는 구절이 있으면 검열 · 삭제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를 양분했던 두 세력은 부분적으로 호흡이 척척 맞는 사이였다. 복음주의자와 공리주의자 들은 개인의 자조(自助)를 강조하면서 도덕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부대를 고집하는 기득권층의 극심한 텃세로 인해 새 시대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신선한 새 포도주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다. ‘노오력의 배신’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기득권층에 향한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 마음속에 뿌리박힌 ‘상대방에 대한 존중심’과 감정 표현을 절제해야 하는 ‘과묵한 성격’ 때문에 계급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품위 유지’를 강조하는 사회는 여성의 삶을 제약했다. 신사들은 여성에게 생산적인 활동을 요구하지 않았고, 여성이 스스로 경제권을 획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간단하게 정의 내리기 쉽지 않다. 그 시대 사람들의 면보가 보수적이긴 해도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들’로 규정할 수 없다. 새 포도주를 오래된 부대에 담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과감히 오래된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마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빅토리아 시대에 옛것과 새것이 공존했다. 낡은 부대든 새 부대든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부대에 담은 새 포도주의 맛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생동하는 시대 속에서 변화의 흐름에 맞게 적절히 처신했다. 그들은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다. 이 책의 역자는 빅토리아 시대를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했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본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말이 맞았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참으로 복잡다단한 존재들이었다.
※ 홈즈가 했던 말은 《셜록 홈즈의 회상록》(백영미 역, 황금가지)에 수록된 단편 『증권 거래소』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