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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ㅣ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평점 :
예술가들은 사물을 볼 때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사물도 달리 표현되고 또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것을 보면 예술가들의 시각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들의 미술작품을 본다는 것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예술가가 고민하고 호흡한 모든 상념과 숨결을 느끼는 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초발심을 유지하며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속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의문들과 궁금증이 인다. 이는 작품에 문외한이란 말이고 모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토로이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창비, 2011)에 나오는 구절이다. 미술작품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누구나 똑같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작품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가까이 봐도 제대로 본 것은 없다. 유홍준의 《안목》(눌와, 2017)은 미술작품을 볼 때 필요한 ‘안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내용 면에서는 저자의 전작 《국보순례》(눌와, 2011)와 《명작순례》(눌와, 2013)와 짝을 이룬다. 전작이 우리 미술과 한국 미학의 정수를 끄집어냈다면, 이 책은 안목이 어디서 유래했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을 보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책이 주목되는 것은 학문의 틀 속에 빠져 자칫 ‘전문가의 안목’을 소개하는 것을 피하고, 보통사람들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한 점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안목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 보인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목을 받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뛰어난 미술작품을 지혜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가치를 알아주는 것. 그것이 미술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오늘날에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추사체를 개성이 넘치는 글씨라고 말한다. 추사체는 추사가 9년간 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에 완성됐다. 글 쓰는 일에만 전념했을 만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추사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당대 사람들은 추사체를 괴이한 글씨체로 봤다. 추사는 자신의 개성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에 하소연을 드러냈다. 그래도 추사의 진가를 알아보는 당대 안목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보는 사람의 안목에 따라 작품과의 교감도 달라진다. 먼저 장점을 찾는 관심이 필요하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스승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화가다. 그는 인품이 너그러워서 제자의 작품을 평할 때 제자의 장점을 강조했다. 추사는 표암과 반대로 제자의 작품을 혹독하게 평했다. 그는 작품을 올바로 보려면 ‘금강안(金剛眼)’과 ‘혹리수(酷吏手)’, 즉 부릅뜬 눈과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목》 19쪽)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렇지만 안목은 예술만큼 길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작품이 언젠가는 사상 최고의 명작이 될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안목은 예술보다 더 길 수도 있겠다.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안목을 양분으로 삼아 미술작품을 마음껏 즐기는 일은 독자들의 몫이다. 미술작품 속에 녹아든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은 미술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