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후조시(腐女子)’는 한국말로 옮기면 ‘썩은 여자’로 해석된다. 원래 남성 동성애를 그린 만화나 소설, 즉 야오이(やおい)와 BL(Boy’s Love)을 즐겨 읽는 여성들이 자조의 의미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지금은 만화와 소설에 푹 빠진 2, 30대 여성 오타쿠(otaku)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일본의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타쿠는 ‘마니아(Mania)’의 일본식 표현이다. 야오이와 BL을 보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드는 자연스러운 취미활동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기성세대의 눈에는 오타쿠가 비정상으로 보인다. 오타구의 성적 환상은 평범하지 않아서 오타쿠는 변태이거나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편견이 생긴다. 그래도 취미와 관련된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 오타쿠를 이해하는 시선이 부쩍 많아졌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몰입할 때 고립한다. 반대로 은둔형 외톨이는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집 안에만 지낸다. 그동안 오타쿠는 방구석에 처박혀 하나에만 몰두하는 은둔형 외톨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덕후’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양지로 나왔지만, 여전히 ‘오타쿠 문화’의 확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남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라마, 야오이 등 비현실 속 등장인물의 연애담에 푹 빠져 현실에서의 연애와 결혼을 등한시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은 이미 인구절벽으로 치닫고 있고, 결혼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덕후 문화’가 확산될수록 젊은 비혼 인구는 증가하게 될까?

 

 

 

 

 

 

 

 

 

 

 

 

 

 

 

 

* 우에노 치즈코, 미나시타 기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동녘, 2017년)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는 덕후 문화의 영향이 비혼(非婚)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녀라면 누구나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고 나면 한 번쯤은 멋진 왕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소녀들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꿈을 꾼다고 해서 실제로 왕자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소녀들은 성장하면서 현실과 상상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는 사실, 이젠 다들 안다. 대신 ‘왕자님’은 TV 드라마에 있고 하이틴 로맨스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야오이 · BL 문화를 잘 모르거나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야오이와 BL을 보는 소녀들이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과 거리가 먼 착각이자 편견이다.

 

미나시타는 동성애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는 기혼 여성이고, 이성애자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알고 지냈고, 지금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여사친’은 야오이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녀 역시 작년에 결혼했다. 야오이와 BL를 좋아하는 여성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야오이 · BL 문화가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에노는 후조시가 동성애 커플을 좋아하는 이유를 ‘남장한 이성애 커플’에 대한 환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므로 여성은 야오이와 BL를 보면서 느꼈던 사춘기 시절의 성적 환상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끗이 지우는 일과 같다.

 

반면 일부 남성은 포르노 영상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섹스의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포르노 배우가 등장하는 야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여성은 포르노 배우처럼 저렇게 해야 한다는 환상과 강박관념을 갖는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도 현실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래도 이성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이 기억나게 되고, 그것을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음경이 커야 섹스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사랑하는 여자의 동의 없이 항문 성교를 시도하는 등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서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2017년)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남자들은 비현실적 드라마에 푹 빠진 여성이 현실 구분 못하는 ‘김치녀’, ‘된장녀’가 될 수 있다고 악의적으로 왜곡한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 원인의 오류’에 가까운 여성 차별이며 여성이 향유하는 하위문화마저 무시하고 있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야오이 · BL 문화를 비정상으로 보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 또한 잘못된 원인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오류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비혼 문제의 원인을 덕후 문화의 확산으로 보는 전문가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야오이와 BL를 보는 여성들을 심각하게 바라볼 것이고, 여기에 팔을 걷은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야오이와 BL을 불태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거로 믿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야오이와 BL를 보는 것도 문화를 향유하는 일이라는 점을 떳떳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오이 · BL 문화를 누리는 여성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비정상인’과 결혼을 기피하는 ‘이기적이며 까다로운 여성’으로 동시에 낙인찍힌다. 나는 야오이와 BL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야요이 · BL 문화가 사회 망조의 조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테르(Voltaire)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오이 · BL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 취향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이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 딴지 걸기

 

“옛날엔 2PM의 <죽어도 못 보내>가 참 좋았는데, 이제 이런 노래를 들으면 안전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왜 죽어도 못 보내는 거냐?” (《대한민국 넷페미史》 90쪽)

 

→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른 가수는 ‘2A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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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토낑 2017-04-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혼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었네요. 저는 완전 의외에요. 제주변에도 비혼선언하신분들 꽤나 있으시지만 저런 이유로는 전혀 없으셔서요 ㅎㅎ

cyrus 2017-04-09 08:03   좋아요 0 | URL
야오이를 본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될 리가 없고, 결혼을 기피한다고 원인으로 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2017-04-1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4 21:24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며칠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매일 글을 올리면 보는 분들 입장에서는 지겨울 수도 있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7-04-15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화책을 보거나 전자오락을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었죠.ㅎㅎ 20년이 지나고 나니 왜 우리나라에선 Nintendo를 못 만드냐던 인간이 나왔구요.ㅎㅎㅎㅎㅎ 사실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들이 용납되긴 해요.. 학자들이야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내놓는 걸로 밥먹는 사람들이구요..ㅎㅎㅎ

cyrus 2017-04-15 19:52   좋아요 0 | URL
게임과 만화책을 성적 향상에 방해되는 악의 축으로 설정되다보니 지금도 그런 속설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