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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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녁 여덟시 ‘뉴스룸’을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감하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도 밥벌이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속고 속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불신, 상생(相生)할 수 없는 경쟁, 극에 달한 지도층의 부패……. 문제는 이 세상의 틀에 들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1956년인가. 그해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책이 나왔다.아웃사이더는 세계와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반세계적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콜린 윌슨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에 아웃사이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태주. 그는 사회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게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남과 같지 않으려 노력해서 얻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그게 도리어 더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었다. (《스파링》 18쪽)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에서 일찍이 세상에 환멸을 배운 주인공 장태주는 현실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거나 못 본 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퇴행이고 나쁜 선택이다. 시련이 많았던 소년기를 지나 오염된 어른들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사내의 통과의례라고 하기엔 너무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세계에 냉소와 환멸을 표하는 성숙한 아웃사이더는 성장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존재이다.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는 ‘참을 수 없는 저항’을 분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 설정이 성장소설에서 봤을 법한 클리셰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지적할 만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소설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 즉 자기 연민에 빠진 주인공을 연민하게 하는 최면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자가 장태주를 연민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건 달리 말해, 인사이더(insider)에 속한 독자들이 정말 반역의 삶을 선택한 장태수를 옹호할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태주는 세상과 잘 타협하지 못하는 비주류 삐딱이 그 자체다. 웬만한 인간은 모두 펀치를 날리며 읊조리듯 씹어대는 그의 독백에는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모순된 이중성에 눈감은 인사이더에 대한 혐오감이 담겨 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 단어는 가면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일종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즈음에 이미 깨달았고, 살아오는 내내 그 가면을 어떤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줄곧 봐왔다. 그것은 실로 역겨운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다. (63쪽)

 

인사이더는 어느 정도는 사회와 개인적 가치관의 불일치 그리고 되풀이되는 사회 악습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점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아웃사이더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고 한다. 장태수는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스파링》을 읽은 독자들이 불쾌한 세상에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장태주에 열광하고, 그를 응원하는 반응에 그친다면 ‘무임승차’하기를 서슴지 않는 방관자에 남을 뿐이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뻔뻔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 장태주는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이를 복싱 용어로 적용한다면, 목숨 거는 것에 두려워 피하기만 하는 아웃복서(Out boxer)다. 담임은 장태주에게 복싱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정면승부를 펼치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파이터는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정면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아웃사이더와 비슷하다.

 

두 번째 질문은, 주인공에 향한 연민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결말에 대한 의문이다. 혹시 이 허접한 서평을 보고 있을 작가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1]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장태주의 질문을 들은 나 역시 소설 속 기자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2] 《스파링》은 시종 건조한 장태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그를 통해 독자의 감정적 혼란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독하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자신을 괴물로 설정하는 세상에 향한 장태주의 질문은 ‘날 좀 제대로 봐 줘’ 식의 유아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태주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설정은 뜬금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다. 작가가 ‘사랑의 구원’이라는 결론에 기대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저항을 비웃으면서 가장 앞장서서 난타하고 있는 인사이더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곧 누군가를 희생제의 제물로 삼으면서 본심은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이 모호한 위치의 ‘사랑’은 최면제가 되어 독자의 반성을 마비시킨다.

 

장태주는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미래조차 불투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장태주의 무력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무력함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장태주의 결말은 투정만 부리다가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이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스파링》은 성장소설이라 할 수 없다. 장태주만의 사랑이 있고,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찾기는 쉽지 않다. 없는 세계(Utopia)이기에 또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수많은 장태주가 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의 선택을 확인할 여유도 주지 않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는 슬퍼하고만 있다. 과연 이들은 장태주처럼 거대한 세상에 멱살을 부여잡고, 거부하는 몸짓을 할 수 있을까.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1] 드라마 ‘시크릿 가든’ 대사

 

[2]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묻듯, 서로 얼굴을 돌아보면 눈치를 살폈다. (《스파링》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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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1-2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알던 분이 쓴 책이라 서점에서 읽기에
도전했지요. 딱 101쪽 읽고 나서 고만 읽었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구요.
아직 도서관에 안 들어온 모양이네요.

책 읽으면서 리뷰 제목도 정해 놓았었는데 다
잊어 버렸네요. 인간은 참 망각의 동물인가 봅니다.

cyrus 2017-01-25 10:48   좋아요 1 | URL
작가분이 네이버에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한 번 그 분의 블로그를 봤는데 역시 일반 독자서평과 다른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알라딘에서만 활동하니까 네이버에 서평을 쓰는 좋은 독자들의 존재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에 예스24 블로그를 만들면서도 느꼈지만, 제가 그동안 알라딘 램프 안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책을 좋아하고, 좋은 서평을 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