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월 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김상숙 지음 / 돌베개 / 2016년 9월
평점 :
“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0월 항쟁》 70쪽)
1946년 10월 1일 노동자를 비롯한 빈민들이 대구부청(현재 대구시청) 인근에 모여들었다. 빈민들은 오랫동안 굶주렸다. 광복 직후, 대구에 정착한 미군정은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기에 바빴다. 최악의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빈민들은 미군정에 향한 불만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대구 10·1 폭동’으로 알려진 ‘대구 10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오후에 들어서자 시위 군중은 4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치하던 경찰이 끝내 발포했다. 격렬한 대치 속에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과 파업 노동자들은 다음날에도 대구부청과 대구역 광장으로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이 또 한 번 총을 쐈다. 경찰의 위협에 희생된 민간인은 스무 명 이상이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몇 시간 만에 시위가 진압되었다. 그러니 민중 항쟁은 경북으로 번져 멈추지 않았다.
우파는 대구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지었다. 이 사건은 폭동의 요소와 항쟁의 요소가 때와 곳에 따라 혼재되어 있어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빈민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 등 계층을 초월한 민중이 참여한 이 이틀 동안의 시위는 ‘지역 민중 운동’이다. 즉 지도부 없이 민중이 능동적으로 전개한 대중 운동이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한 국정교과서에는 대구 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처럼 소개했다. 이는 민중 항쟁의 의의를 무시하고, 왜곡했다. 대구 항쟁은 소련은 물론, 광복 직후 당시 대구에 조직 활동을 펼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개입이 없었다. 현재로썬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이 대구 항쟁을 지도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 운동의 주체를 좌파적 시각으로만 바라본 탓에 대구 항쟁의 진상을 규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총탄에 맞아 숨진 일부 희생자의 이름이 잊혔다. 언급하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뒤이은 한국전쟁과 군사정부 시절, 그들의 후손은 조상의 죽음을 하소연하지 못했다. 해방공간부터 진행된 반공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극단주의의 갈등이 민중 운동의 흔적을 제거한 이유이다. 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무고한 많은 민간인이 군경이나 인민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지만, 반공주의에 의한 트라우마 때문에 누구도 감히 학살의 얘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대구 항쟁, 경북 일대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 그리고 1948년 여순 사건 등을 진압하고 수립된 남한 정부는 반공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까지 반공은 군정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대구에 극단주의 반공주의가 내면화돼 좌익 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사마저 완전히 잊혔다. 196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구를 ‘보수의 성지’로 생각한다. 요즘 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최악이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지도자가 태어난 지역’, 그리고 그 지도자를 뽑아주고, 열렬히 그 지도자를 찬양하는 ‘꼴통’ 시민들이 사는 지역. 다른 지역 사람들은 늘 ‘1번’으로 향하는 대구 민심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미군정이 대구를 완전히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등 좌익 세력의 정당 조직이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좌우세력이 함께 건국 운동 준비를 시도한 적이 있었고, 공동으로 정치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대구에 짧게나마 이념적 갈등을 넘어선 대중정치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절없이 흘러간 과거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미군정과 친일 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대구가 좌우 세력이 공존하여 민중을 위한 정치문화가 본격적으로 싹 틔우기 시작한 지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유럽의 정치무대처럼 대구에 자유롭게 활동하는 진보세력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구,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뿌리는 영광스럽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썩었다! 불행하게도 대구와 대한민국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지배해왔다. 1946년 10월 이후부터 민심의 맥박과 함께 움직였던 대구의 시계는 멈춰진 상태다. 이 시계가 원상 복구하려면 친일 세력으로 인해 썩어버린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뜨겁게 숨 쉬었던 대구의 그 시간, 1946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