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회화로 우키요에가 있다. 17세기 일본 에도 시대에 나타난 회화 양식으로 통속적 정서를 담았으며, 감각적이고 장식성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세기 말 유럽에 번진 자포니즘 열풍의 선봉에 섰던 것도 우키요에였다. 고흐와 모네, 드가 등의 인상파 화가들은 우키요에의 강렬한 색채, 과감한 시선 처리에 완전히 매료됐다.

 

 

 

             

 

모네는 방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수집광이었다. 말년에 그는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집을 짓고 연못에 일본식 다리가 놓인 정원을 가꾸었다. 이러한 연관성에 의미를 부여해서인지 지베르니를 일본식 정원혹은 일본풍 정원으로 잘못 소개하는 책이나 칼럼니스트, 기자가 많다.

 

 

 

 

 

 

 

 

 

 

 

 

 

 

 

 

 

 

작은 침실에서 북적이는 사람들의 소음을 등 뒤로 한 채 내려다본 바깥 정원 풍경은 온통 푸른색과 흰색, 붉은색 등의 갖가지 색들이 뒤엉켜 강렬한 빛을 발하여 5월의 따사로운 햇볕에 더욱 발랄하게 느껴졌다. 정원으로 나와 청보라색 라벤더와 연분홍색 튤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예쁜 꽃밭 사이를 이리저리 거닐며 지하통로를 통과하니, 모네의 명작 '수련'이 탄생된 일본풍 정원과 연못이 나타난다.

(서유럽 자동차 여행중에서)

    

 

지베르니에는 모네와 친분이 있는 화가와 미술상들이 방문했는데, 그중에 다다마라 하야시라는 일본 출신의 미술상도 있었다. 다다마라 하야시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 알려줄 정보가 한 개도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모네에게 우키요에를 공급한 인물로 추정된다. 하야시는 수련이 있는 물의 정원이 일본식 정원을 모방했다고 주장했는데, 모네는 그의 주장을 부정했다. 아치형 다리는 일본의 양식을 따랐지만, 모네가 직접 고르고 심은 꽃들 중에 일본에서 가져온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지베르니 토착종이거나 유럽에 자라는 것들이다. 모네가 정말로 일본식 정원을 만들 계획이었으면 일본에 직접 들여온 식물 위주로 심었어야 했다. 하야시는 지베르니 정원을 방문했음에도 정원에 대한 모네의 생각과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야시처럼 국가의 문화를 과도하게 부각해서 미화하는 태도를 국뽕’(국수주의를 뜻하는 은어)이라고 한다. 모네가 일본 문화에 애착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지베르니 정원을 일본식 정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다.

 

 

 

                 

 

 

모네는 정원이 딸린 작업실을 만들고, 정원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남겼지만, 정원에서 예술미를 발견한 최초의 화가는 아니다. 모네 이전 혹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은 파리 근교에 있는 시골에 살면서 풍경화를 그렸다. 특히 파리에서 북서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는 화가들의 근거지였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데, 오베르 쉬르 우아즈가 거리상으로 파리와 가깝다. 모네의 정원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폴 세잔과 카미유 피사로도 오베르에서 작업했는데,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가 된 네덜란드 출신 화가도 조용한 오베르에 정착했다. 그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다.

 

 

 

 

 

 

 

 

 

 

 

 

 

 

 

    

 

정신병원에 퇴원한 빈센트는 자신의 주치의 폴 가셰 박사의 집에 딸린 정원과 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의 정원을 그렸다. 빈센트가 오베르에 머물던 최후의 시기에 그려진 까마귀가 남긴 밀밭이 걸작으로 알려졌지만,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정원 그림도 훌륭하다. 빈센트는 십 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동안 개인 정원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병원 생활을 하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때, 모네는 지베르니의 정원 속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두 화가의 행보가 대조적이다. 그렇지만 빈센트도 정원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의 정원을 잊지 않았다. 영국에 살았을 때 정원 조경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고흐는 정원 속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림을 그릴 때 큰 행복감을 느꼈다. 고흐와 모네 두 사람 모두 생각하기 싫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마주했다. 고흐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모네는 가족들의 죽음에 실의에 빠졌고, 두 눈이 백내장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마음을 크게 다친 두 사람은 정원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찾았으며 위로를 얻었다.

 

만약에 빈센트가 지베르니에 정착했다면, 아니면 반대로 모네가 오베르에 정원이 딸린 작업실을 세웠다면 과연 두 사람은 역사적인 조우가 이루어졌을까? 주관적인 상상력을 덧붙이자면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지 못했을 것 같다.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빈센트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정원을 찾는 손님이 부쩍 늘어나자 모네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다. 아무래도 서로 친해지기가 무척 힘들었을 듯하다.

 

 

 

그림 이미지는 위키아트(http://www.wikiart.org/)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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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07-2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리에 갔을 적에 다들 지베르니 타령을
하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군요.

아마 차가 없으면 고생 엄청할 것 같은
예감입니다만.

cyrus 2016-07-21 17:33   좋아요 0 | URL
정원의 일본식 다리 때문인지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