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한번 잘못 들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잘못된 길을 계속 가려고 고집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올바로 갈 수 있도록 다른 동행자가 꾸짖어야 한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 비판과 충고를 해주는 게 진정한 도리다. 하물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뜨고 진 사조나 이념도 ‘맹목적 다수의 흐름’에 빠져들면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그녀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제목이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바댕테르는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을 계승하여 여성해방운동(MLF)에 뛰어든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학자다. 그녀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인식하여 남성을 가해자로 매도한다. 이러한 전략은 남녀 간의 갈등·대립을 조장하여 양성평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댕테르는 급진적 여성 운동이 남녀 분리주의의 함정에 빠진 상태이며 심각하리만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여성 계층과 남성 계층이라는 대립된 층으로 일반화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이원적인 카테고리는 위험하다. 하나의 성을 하나로 묶어서 비난하는 것도 성차별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남성/여성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은, 우리가 제거했다고 주장하는 '성의 위계'를 새로이 등장시킨다. 게다가, 우리의 투쟁 대상인 '권력 계급'에 '윤리적 차원의 위계'까지 적용시킨다. 즉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은 '악'이고, 박해받는 여성은 '선'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희생자들에게 '선한 계급'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짐에 따라, 계급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강화된다. (《잘못된 길》 70~72쪽)
2005년에 정희진은 《잘못된 길》 서평에서 바댕테르에 크게 실망했다고 썼다. 이어서 바탱테르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아직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바탱테르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남성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바탱테르는 ‘여성은 남성의 피해자’로 보는 인식을 비판했다. 여성 스스로 희생자로 자처하는 상황에 집착하면 남성의 폭력적 본성을 고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탱테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잘못된 길》에서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자. 바탱테르는 강간 피해 여성을 조사한 통계자료의 허점을 밝히면서 ‘강간’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적 폭력이 모두 '강간'이 아니다. 으슥한 주차장에서 칼을 들고 위협하는 23세의 남자에 의한 '강간'과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는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강간 후의 트로마(글쓴이 주-이 책의 역자는 ‘트라우마’를 ‘트로마’라고 썼다)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로마는 엄격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분간하기도 어려운 강간의 통계 수치를 부풀리는가? '폭력적인 남성과 피해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잘못된 길》 50쪽)
정말 위험한 발언이다. 강간 후의 트라우마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라우마는 다르지 않다. 아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유형 모두 성폭력이며 성범죄다.
성폭력 방식이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슴만튀(가슴 만지고 도망치기)’,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치기)’ 등 기습 성추행도 있다. 치고 도망치는 식이지만, ‘본의 아니게 당한’ 피해 여성이 받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다른 유형의 성폭행에 비해 절대 작지 않다. 이후 피해자들은 밤길을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에 휩싸여 심리 상담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강제추행은 친고죄 규정이 폐지돼 피해자의 고소의사 없이도 10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다.
바댕테르의 주장이 상당히 파격적이어도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제기한 ‘뜨거운 감자’들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페미니즘’과 ‘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바댕테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과 여성학자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 규제까지도 비판한다. 두 사람은 “포르노는 강간에 이용된다. 강간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흥분을 일으켜 성범죄를 저지르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反) 포르노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83년 포르노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법 초안을 마련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주 토요일 한겨레 칼럼에서 정희진은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이 ‘과소평가된 고전’이라고 했다. (관련 칼럼: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년 5월 27일) 캐서린 매키넌은 성차별의 한 형태로 성희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포르노 규제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서 보수적인 공화당과 손잡기도 했다.
포르노 규제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여성의 신비》의 저자 알려진 베티 프리단, 《성의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렛 등은 과도한 검열 규제가 표현의 자유와 성적 자유에 제약을 준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캐서린 매키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자신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소수파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알고 보면 페미니즘의 세계는 광대하면서도 복잡하다. 그 속에는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급진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사상을 지닌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에 차이점이 있어도 그들이 같이 내는 목소리는 똑같다. 남녀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념에 대한 맹목적 믿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념 내 대립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이 불편하더라도 차이를 포용할 줄 아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 논의가 점점 살아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가야 할 길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뻗어 가고 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길을 가고 싶은가? 선택은 자유다. 안심해도 된다. 잘못된 길에 가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 관련 자료 (링크)
* 정희진의 《잘못된 길》 서평 (한국일보, 2005년 9월 30일)
* 정희진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