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평점 :

‘회계’는 ‘수학’ 다음으로 머리 아프게 하는 학문이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 연구자, 인문계열 학생이라면 회계 앞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마련이다. 재무제표, 복식부기, 대차평균의 원리, 기업회계기준, 원가회계. 회계를 공부하면 알아야 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오죽하면 회계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도 회계가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신용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사회 기반인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계감사 시스템이 개발됐다. 적정한 회계처리와 엄정한 회계감사는 자본주의 경제를 든든히 세우는 시스템이며 필수 절차다. 회계를 잘 모르더라도 ‘분식회계’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분식회계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온다. 1999년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분식회계가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회계의 불투명성이었다. 2000년 미국 7위의 매출액을 자랑하던 엔론(Enron)은 분식회계를 통해서 순익을 부풀리다가 끝내 회계부정 사실이 적발되어 순식간에 파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컵 솔은 어둠의 경제를 밝힌 회계의 찬란한 역사를 주목한다. 경영학과 출신이나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를 읽어보시라. 누구도 회계를 외면하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 속 회계는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다. 만약 회계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바벨탑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회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까지도 채권·채무나 재산관리를 위해 기록해두는 단식부기에 머물렀다.

복잡한 상거래를 한눈에 파악하게 하는 복식부기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루카 파치올리다. 그는 복식부기를 확산시키며 주식회사 출범과 근대적 자본의 축적을 이끌었다. 사실 파치올리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다빈치의 친구였다. 유유상종이다. 복식 부기의 가장 큰 긍정적 효과로는 상인 계급에 대한 공신력을 크게 높였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투명하고 정확한 원칙은 회계 정보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렸다. 회계 정보 작성 과정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의 효율성도 제고됐다.
그러나 회계가 재평가받기 전까지만 해도 파치올리는 ‘잊힌 천재’였다. 파치올리 이외에도 회계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으나 시대는 그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회계 업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곱지만 않았다. 회계 업무 종사자들은 늘 항상 죄책감을 느끼면서 회계 장부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계사의 수호신 성 마태오는 재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돈 만지는 일이 세속적인 죄라고 주장했다. 회계사들은 수호신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업무를 중대하고 신성한 일로 여겼지만, 도덕주의자들은 돈 거래하는 회계사들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파치올리의 회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회계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왕도(王道)를 찾지 못했다. 그는 회계 공부의 어려움에 절망하여 ‘회포자(회계를 포기하는 자)’가 되었다. 결국, 회계업무를 다른 행정가들에게 맡겼다. 왕실 회계원들은 스페인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펠리페 2세에게 알리지만, 왕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왕실 자금을 비밀리에 횡령하던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의 부정이 왕실 회계원들에 의해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스페인 왕실은 행정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회계원 양성을 소홀히 했다. 회계에 무지한 스페인 왕과 고위 관리들의 어리석은 컬래버레이션은 정부의 재정 문제를 악화시켰고, 스페인이 쇠퇴하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회계가 태어났다. 회계는 정직과 성실을 가장 중시하는 학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기틀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회계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책 뒤편에 한국의 전통 회계 방식에 관한 부록이 있다. 파치올리보다 200년 이상 앞서 고려 개성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썼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개성상인의 후손이 소장한 19세기 회계장부 14권은 2014년에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되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조상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왜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됐는지 아쉬움이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나라의 회계 관련 법제도 등을 선진화해 왔고, 특히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하여 회계 선진화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회계에 대한 기본 인식을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하려면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 회계를 회계사들만 관리하는 특별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회계도 엄연히 말하면 돈 관리하는 일 중 하나인데도 우리는 여러 은행 금리가 어떤지 비교하거나 재테크 전략만에 관심을 쏟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국가의 경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회계는 바로 그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회계 업무의 조건에 정직과 도덕적 책임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분식회계 같은 어둠의 경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밝혀야 할 회계도 가끔 어두워질 때가 있다. 부정회계에 눈 감은 회계사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의 모습만 보일 뿐 호혜적 인간의 향기는 느낄 수 없다. 이럴 때 정직한 회계와 회계사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신의 시대가 아닌 지금, 성 마태오를 불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