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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프 - 술의 과학 ㅣ 사소한 이야기
아담 로저스 지음, 강석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5년 12월
평점 :
절판
적당한 긴장해소와 사교에 술만큼 효과 있는 매개체도 없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술은 마시는 자체가 즐거움일 수 있고, 사교에 더없는 명약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술이 사람을 마시는 지경까지 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모임 자리에서 술을 잘 마시고,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야 제대로 놀 줄 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생이었을 때 선후배, 동기들과 술을 마시면 항상 ‘술 게임’을 했다. 이때가 정말 무서운 시간이다. 단체 게임에 약한 사람은 벌주(폭탄주)를 마셔야 한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게임 구호를 들으면서 벌주를 마시면, 사약 받는 기분이 든다.
대학생들의 술 모임에 술 게임이 없으면 허전하다.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 술 마시는 분위기를 지루하게 생각한다. 술 게임을 해야 흥겨운 분위기가 한층 달아오른다. 이 분위기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주량이 대단하다는 칭찬을 듣는다. 그의 주변에는 술 동무들이 많다. 당사자로서는 술을 잘 마시는 일이 은근히 자랑거리였다. 이처럼 술을 계속 마셔도 취하지 않고 멀쩡한 사람이 있지만, 누구는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다.
얼굴이 쉽게 빨개진다고 해서 술을 못 마신다고 자책하지 말자. 정상적인 신체 반응이다. 주량을 억지로 높이려다가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술이 약하다.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하는 ‘ALDH1’, ‘ALDH2’가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에 따라서 주량이 결정된다. 동양인 대다수는 ALDH2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숙취는 두통, 얼굴 화끈거림, 발열, 어지럼증 등 술을 마시고 느끼는 여러 가지 불편한 증상이다. 이러한 음주 후 숙취는 아세트알데히드 같은 중간대사 물질이 몸 밖으로 배출되지 않고 오랫동안 체내에 남아서 몸의 신경계를 교란하기 때문이다. 동양인들은 서양인에 비해 이러한 물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적어 숙취 해소에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 못 마시는 체질을 인정하지 않다. 주량을 비교하면서까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술의 과학’을 제대로 알고 술을 마신다면, 이렇게 무식하게 술을 마시는 사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프루프(Proof)는 술의 알코올 농도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영국 선원들은 럼을 즐겨 마셨다. 럼은 엄청 독한 술이다. 선원들은 럼의 알코올 함량을 측정하기 위해 화약을 섞은 럼에 불을 붙였다. 맛이 좋은 럼의 상태를 증명(Proof)하는 방법이다. 이 지구상에 효모가 없었으면, ‘퐁’ 하고 터지면서 흘러나오는 맥주 거품이 나오지 않았다. 효모는 인류의 오랜 친구이자 원수다. 효모가 발효하면 술이 만들어진다. 인류는 1만여 년 전부터 효모라는 미생물을 이용해서 포도당을 알코올로 변환시키는 남다른 기술을 습득했다. 애주가라면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효모의 존재에 감사해야 한다. 효모 균류가 없으면 술을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좋은 효모 균류로 만든 술은 맛이 좋다. 세계적인 맥주 양조업체들은 효모 균주를 샘플 형식으로 별도로 영구 보관한다. 지금도 양조업체들은 효모 시류를 수집하여 맛 좋은 맥주를 만드는 방법을 찾으려고 연구한다. 이처럼 우리가 마시는 맥주병 하나에도 첨단 과학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노르웨이령 북극해, 북극에서 단 800㎞ 떨어진 곳에 있는 스발바르 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는 ‘노아의 방주’가 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에는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식물 종자 샘플이 밀봉 상태로 보관돼 있다. 기후변화나 핵전쟁, 소행성 충돌 같은 전 지구적 재앙으로부터 식물 다양성을 지키는 게 목표다. 그래서 ‘최후의 날 저장고’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지구 종말을 대비해 맥주 효모 샘플이 보관된 저장고를 만드는 것이다. 맥주 만드는 기계가 파괴되어도 맥주 만드는 법을 생존한 인류에게 전수할 수 있다. 효모 저장고의 이름은 ‘노아의 음주’다. 노아는 방주를 제조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불명예스러운 일화도 전해진다. 노아는 성경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취객이다. 그는 자신이 재배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상태로 잠들었다. 과연 노아는 어떻게 숙취를 해소했을까? 숙취 해소는 모든 애주가가 당면하는 공통된 문제다. 숙취의 원인과 이를 해소하는 방법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인간은 제 손으로 만든 술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