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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 - 셰익스피어 희곡을 두고 벌어진 200년간의 논쟁과 추적 ㅣ 걸작 논픽션 10
제임스 샤피로 지음, 신예경 옮김 / 글항아리 / 2016년 3월
평점 :
“내 유골을 건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 이 돌을 그대로 두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니 / 선한 친구여, 내 이렇게 부탁하니 / 이곳에 묻힌 흙을 파내지 마시게.”
살벌한 느낌이 드는 묘비명이다. 묘비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꺼림칙하다. 묘지 주인은 생전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무덤이 파헤치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이 묘비명의 주인공은 바로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다. 한때 그는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최고의 인물이었다. 대영제국의 황금기를 누렸던 영국인들은 광활한 인도 땅과 셰익스피어의 능력을 맞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옛날에는 유명인의 유골에 신비하고 영험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밤마다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들이 극성을 부렸다. 다행히 셰익스피어의 유골을 건드린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무덤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허구의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희곡 37편과 소네트 150여 편. 셰익스피어가 남긴 작품의 수다. 52세에 세상을 떠난 한 사람의 작가가 썼다고 보기엔 실로 엄청난 양이다. 일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의 개수를 세어보면 약 2만 개가 넘는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건 그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대학 문턱을 밟지 않은 시골뜨기였다. 그의 천재적인 어휘력은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 된다. 지금도 그의 생애에 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셰익스피어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18세기부터 제기돼 왔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주제다. 실제 작가를 두고서도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 에드워드 드 비어(옥스퍼드 백작) 등의 다양한 설이 넘쳐나 문학계의 대표적 음모론으로도 꼽혀왔다. 그 뒤 논란은 논란을 낳았다. 심지어 셰익스피어가 실존인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유골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의 정체를 밝혀내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원작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거나 반대로 이를 부정하는 증거를 하나라도 찾으려고 했다. 여기에 너무 집착한 새뮤얼 아일랜드라는 수집가는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들어간 각종 서류와 문서를 위조했다. 델리아 베이컨은 죽을 때까지 셰익스피어 연구에 매달려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와 동일 인물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녀가 작가 겸 전문 강연자로 명성을 얻었음에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셰익스피어에게 다 바쳤다. 말년의 델리아는 셰익스피어 연구로 마지막 인생 역전을 꿈꾸었다. 비록 성과가 미미했으나 그녀의 뒤를 이어 마크 트웨인, 헬렌 켈러 등이 베이컨 원작자 설을 신봉했다.
음모론에 관심이 많은 독자는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이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짧지만 않은 논쟁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유쾌하지가 않다. 셰익스피어 논쟁에 뛰어든 사람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가졌다기보다는 죽은 위인을 이용하여 세간의 관심을 얻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주장에 허점이 많다. 셰익스피어 전문가도 예외가 아니다. 에드워드 멀론은 셰익스피의 삶과 그의 작품을 하나로 융합해서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증명하려고 했다. 말이야 그럴듯하게 보이는 증명이지 사실은 자의적으로 끼워 맞춘 추정에 가깝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의 저자이자 모험 안내자인 제임스 샤피로는 셰익스피어 원작자 논쟁의 주요 주장들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한다.
사람들은 증명되지 않은 실재의 빈자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상상력을 채워 넣어야 안심된다.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현 시대의 모습에 맞춰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재구성한다. 모두가 셰익스피어의 사람들이 된다.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는 겉은 16세기 풍 복장을 하였지만, 속은 근대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박제가 된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의 사람들은 근대의 박제품이 된 ‘셰익스피어’에 둘러 모여서 지금까지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쓸데없이 싸우고 있다. 박제품에 너무 집착할수록 셰익스피어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박제화된다. 이들은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 하위 호환으로 여긴다. 작품을 읽음으로써 그 속에 작가의 생애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착각의 해석은 셰익스피어를 당혹스럽게 한다.
뜻하지 않게도 셰익스피어를 함부로 건드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위조 사실이 적발되어 크게 망신을 당했고, 델리아는 셰익스피어 연구에 몰두하다가 정신병 질환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가족은 셰익스피어를 가짜라고 여기는 그녀의 주장을 정신병으로 인한 헛소리로 생각했다. 근거 없는 추정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려는 호사가들은 고인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은 단순히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가 아니다. 음모론의 함정에 빠져버린 무지한 인류의 역사다. 호사가들 때문에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셰익스피어를 위해서 묘비명을 새롭게 바꿔야 하지 싶다.
“셰익스피어를 함부로 건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 그를 그대로 두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니 / 착한 독자여, 내 이렇게 부탁하니 / 이곳에 묻힌 나를 파내지 마시게.”
※ 딴죽걸기
* 12쪽에 델리아 베이컨의 사망연도가 생략되었다.
* "그곳을 조사하라는 조언를 받았다." (44쪽)
* 랠프 월도 엘리슨 (449쪽, ‘랠프 월도 에머슨’으로 고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