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

 

 

 

지금으로부터 십이 년 전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0교시가 있었다. 1교시 시작 전에 자습했다. 나는 그 시간에 문학 문제집을 펴서 읽었다. 공부했다는 소리가 아니다. 예습을 빙자한 시간 흘러 보내기에 가까웠다. 문학 문제집에 있는 현대 시나 한시를 읽었다. 그러니까 미리 문제를 풀지 않고 문제집 지문만 들여다본 것이다. 밑줄 치기와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만난 시가 참 좋았다. 문학 소년의 가슴을 살짝궁 두드리게 한 시가 여럿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송수권 시인의 ‘산문에 기대어’였다. 산 위에 날아가는 기러기 때를 죽은 누이의 눈썹으로 치환하는 시적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을 접하는 학생들은 탁월한 시적 표현이 주는 찰나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눈썹’의 의미를 암기한다. 왜 기러기 때가 누이의 눈썹으로 변하는지 알지 못한다. 시를 읽어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선생님이 시의 의미를 칠판에 적어줘야 제대로 이해한다. 그리고 칠판에 적힌 내용을 공책에 따라 적으면서 머릿속에 주입한다. 시를 느끼면서 읽는 것과 시를 억지로 해석하면서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말이 너무 길어졌다. 학창 시절 내가 좋아했던 시를 만든 시인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비록 시인의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지만, ‘산문에 기대어’ 이 시 한 편은 내 가슴속에 감동의 무늬로 남아 있다. 시인은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누이를 만났으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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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4-05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수권 시인의 시는 제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들었습니다. 송 시인이 쓴 몊 편의 시는 알고 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달걀부인 2016-04-05 1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뉴스에서 보고 알았습니다. 수능 일세대라. 스능언어영역 풀면서 공부했었던 시네요. 저역시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6-04-06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6-04-06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돌아가셨군요.ㅠ 오래전 시인이 우리동네 평생교육원에 강의하러 오셔서 뵈었는데...